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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누나는 여전히 맑은 눈동자와
엄한 입매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핀 검버섯도 아름답네요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는
겨울 눈처럼 백발이 되었습니다”
 
누나를 만나러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차창 너머 짙은 푸른 하늘이 하얀 뭉게구름을 몰고 빨리도 지나갑니다. 겨울이 문턱을 넘어오려다가 주춤해 버린, 늦은 가을날 오후였지요. 누나는 3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 뵈러 온 것이었어요. 투병 중이었던 매부를 돌보느라 그간 누나는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매부는 올해 봄에 소천했습니다.  
 


45년 전, 그러니까 내가 13살 때, 미네소타주에 있는 어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던 누나는 지금껏 미국에 살고 있어요. 국군의 날이나 현충일에 매년 아버지를 만나러 한국을 다녀가곤 했지요. 아버지 묫자리는 현충원에 있습니다. 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묘소는 빈 무덤이라고 누나가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누나는 매년 현충원을 방문하려 귀국하곤 합니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단정하게 새겨져 있는 돌비석만이 아버지가 한때 이 세상에 계셨다는 것을 말해 줄 뿐입니다. 아버지의 영은 두 딸과 내가 입양되기 전까지 외아들이었던 형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난 적이 없는 당신의 막내아들인 나를 쳐다보시면서, ‘잘 왔다’ 하시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엄마도, 형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전사하셨을 때, 누나는 세 살이었다고 합니다. 스물 몇 살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되어 가장의 임무를 도맡게 된 엄마는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대요. 살림이 옹색한 가운데에도 틈을 내어 보육원에서 봉사하시곤 했대요. 봉사하시던 보육원에서 엄마와 나는 만난 것이랍니다. 나는 겨우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던 나이였다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15년 정도가 지난 후였다고 해요.  
 
나는 전사하신 아버지의 가정으로 입양되어 아버지의 성씨를 받았어요. 나는 유복자가 아니고, 유복 입양아이예요. 나를 업어 데리고 갔던 엄마… 퀴퀴한 땀내가 배인 엄마의 적삼, 그 가슴에 안겨 잠들곤 했던 나는, 지금도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엄마의 냄새는 끝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었어요.  
 
누나는 절에서 민박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올해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절에는 제명을 채우고 간, 얼굴에 주름을 달고 살 수 있었던 이들의 흔적이 있어서, 누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했습니다.  
 
넓고 넓은 현충원 뜰의 침묵이 무겁게 누나를 누르고, 즐비하게 줄지어 서 있는 새하얀 화강암 비석들이 누나의 뼛속까지 시리게 한다고 했습니다. 돌 비석에 새겨져 있는 이름 석 자는 젊음을 하늘에 토해내고, 돌 비석의 가슴은 그들의 신음을 끌어안고 있다 했어요. 젊은 그들, 돌 비석 주인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나를 만나기로 한 대웅전 앞에 누나는 없었어요. 대웅전의 어둠과 정적에 익숙해지고 나니, 부처님상에서 떨어져 있는 한구석에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누나가 보였어요. 누나는 불교 신자들이 하는 참선을 하는 것 같았어요. 누나의 종교로 말하자면 묵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누나, 부처님한테 기도한 거야? 하느님한테 혼나려고?”
 
“하느님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아. 어디서나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거든.”
 
왜소했던 누나는 50여년 전 나를 업어 길러주던 때보다 더 작아 보였어요. 나를 등에 태웠던 좁았던 어깨는 더 좁아졌고요. 어떤 때는 나를 등에 업고 수강하러 가던 누나입니다. 맑은 눈과 진실한 입매를 가졌던 누나. 내가 6척의 청년기를 지나, 흰머리가 성성하게 된 지금, 누나는 여전히 맑은 눈동자와 엄한 입매를 하고 있습니다. 누나의 얼굴에 핀 검버섯도 아름답네요.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카락이 새까만 기와지붕에 녹지 않고 덮여 있는 겨울 눈처럼 백발이 되어있네요.
 
가난한 살림, 엄마가 가장이 된 집에, 나를 데리고 오셔서 입적시키셨던 엄마는 배짱이 컸거나 바보 같은 신념으로 사셨던가 봐요. ‘하느님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게 한다’라는 것이 엄마의 인생 철학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만나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성(姓)을 주셨고 아버지의 이름은 엄마만큼이나 나에게 튼튼한 성채가 되었어요. 두 누나와 형은 자주 편찮으셨던 엄마 대신 나를 돌보아 주었어요.
 
“누나, 누나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업고 왜 산에 갔어?”
 
“그랬지. 산에 가곤 했지.”
 
“누나, 학교는 빼 먹고 간 것이었어?”
 
“응. 당연히….”
 
“누나, 낙제를 어떻게 면했어?”
 
“겨우, 겨우. 그래서 너를 업고 학교 간 적도 여러 번 있었지.”
 
“강의시간에 등에 업혀 들어온 나하고, 누나를 보고, 누나 친구들이나 교수님이 뭐라 하지 않았어?”
 
누나는 이어서 내가 모르던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엄마가 아파 누워계셔서 나를 돌보실 수 없는 날에 비까지 오면, 누나는 나를 업고 학교 가는 대신, 산에 지렁이를 잡으러 갔다고 말입니다.  
 
“그랬구나. 그런데, 누나, 왜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어?”
 
“비가 적당히 오면, 지렁이들이 땅에서 기어 나와. 엄마한테 고깃국을 끓여드려야 하는데 고기 살 돈이 없었거든. 지렁이에는 단백질이 많다고 해서.”
 
“누나, 그럼 우리가 먹던 국이 지렁이 국이었어?”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밤 꿈속에서, 지렁이가 소고기로 변하는 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월화(류 모니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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