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칼럼] 내가 겪었던 9·11의 악몽
올해로 14년이 지났지만 기억은 이리도 또렷한지. 전대미문의 9.11 테러, 그 즈음 저는 한국의 기자로서 LA다저스 박찬호 선수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원정경기를 취재하러 미국에 장기 출장을 와 있었습니다. 9월 9일 앤하이저 부시 스타디움에서 2회에 소나기로 2시간 여를 쉬었다가 속개된 경기에서 박찬호는 상대팀 짐 에드먼즈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합니다. 좋은 성적이어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텐데, 그렇질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 초기여서 필름을 병행하느라 모텔 화장실에서 현상한 필름으로 전송하면서 그날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하루를 빈둥거리다 이튿날, 그러니까 11일 아침 7시께 공항에 도착,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카메라 백, 600.300mm 망원렌즈, 필름 스캐너, 컴퓨터, 현상약품 키트, 항온계, 필름 한바구니, 옷가방 등 짐꾸러미가 모두 6개였지만 큰 어려움 없이 탑승을 했습니다. 많은 짐을 부리느라 지쳐서 아침으로 나온 오렌지 주스와 머핀을 먹고 잠시 졸았습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갑자기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잠결에서도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눈을 번쩍 떴습니다. "국가 비상사태로 우리 비행기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공항에 착륙해야 한다. 전 미국의 하늘은 '록 다운(Lock Down)'이다. 집이 가까우면 렌터카를 이용하고, 멀거나 외국승객은 호텔로 가서 다음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얘기할 수 없다…." 비행기는 술렁이는 승객들을 태운 채 급선회하여 캔자스시티 공항에 내렸습니다. 공항은 이미 거대한 공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브리지를 지나 라운지로 들어서니 모두들 TV 모니터에 눈이 꽂혀 있었습니다. 까치발로 바라 보니 세상에, 세계인 모두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벌써, 여기저기서 절규에 가까운 비명과 흐느낌이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전화박스와 렌터카 창구에는 긴 줄을 이뤘고, 조그만 시골 공항은 북새통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치고는 너무도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엔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호흡이 가팔라집니다. 저는 항공사가 태워다준 호텔에서 그로부터 4일간 비행금지 조치로 인해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전 미국 영공에는 전투기 이외는 어떤 비행기도 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향하던 모든 국제선 비행기는 미국 이외의 가까운 외국 공항으로 목적지를 바꾸거나 출발지로 돌아갔던 것이죠. 아침마다 호텔 로비로 항공사 직원들이 찾아와 자기 승객들에게 식사권을 배급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제일 침착하고, 성의껏 승객들을 챙겼던 항공사가 바로 그 피해 항공사이던 UA여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생필품은 호텔이 준비해 준 밴을 타고 타운 편의점에서 마련하곤 했습니다. 이후 재개된 항공편은 그 많은 짐들로 인해 악몽 그 자체였습니다. 신발에 허리띠까지 벗어야 했던 터에 크고 작은 박스들은 저를 테러리스트로 분류하기에 딱 맞았습니다. 좌석을 배정 받고도 탑승을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뉴욕 맨해튼에 들렀습니다. 그날의 상흔은 모두의 마음 속에 남긴 채 사라진 쌍둥이 무역센터 자리엔 '원월드 트레이드센터'가 다시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후 수많은 '복수혈전'이 치러졌지만, 세상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이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세상은 그리스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를 닮아가는 걸까요? 자기 꼬리를 남의 것으로 알고 깨무는데 아픔을 느낄수록 더 힘껏 자기 꼬리를 깨문다는 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