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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독립문 앞 3·1절 행사 합당한가

LA 한인회 및 한인 단체들이 3·1절 105주년 기념행사를 미주 한인 독립운동 요람지로 꼽히는, 중가주 리들리시(Reedley)에 세워진 독립문 앞에서 개최했다. 독립문 양옆에는 안창호, 이승만 등 10인의 애국지사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이 독립문은 서울 서대문에 있는 원형을 4분의 1 정도 크기로 줄여(높이 14피트) 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독립문은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운 것인가. 독립문은 미국에 있던 서재필 박사가 1896년 귀국해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협회의 발의로 1897년 11월 20일 완공했다. 서재필 박사가 스케치한 설계도를 기초로 당시 서울주재 독일공사관원이 프랑스의 개선문을 참고해 만들었다.     독립문을 세운 목적과 배경은 무엇일까? 독립문은 조선이 중국(청나라)으로부터 독립한 자주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한다는 의미로 세워졌다. 사실 조선은 그때 중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도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오를 수 있었다. 독립문이 세워진 곳은 영은문(황제의 은혜를 받는 문)이 있던 곳이다. 중국 황제가 보내는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영은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사신이 체류하는 ‘모화관(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이 세워졌다.     그러나 1896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때까지 조선은 독립 국가 개념도 없었고, 스스로 중국의 ‘속국’을 자처했었다. 강화도 조약 제1조에는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재필과 독립협회가 주동이 되어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당시 발행하던 독립신문에 ‘조선은 이제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을 천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독립문을 일제 강점기에 독립 혹은 독립운동의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한 여론조사 기관이 중고생을 대상으로 독립문이 세워진 배경을 물었더니 약 70%가 일제 강점기 독립을 염원하며 세운 것이라고 답을 했을 정도다. 독립문은 일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건축물이다. 독립문이 세워진 시기는 일제의 강점 훨씬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1924년 7월15일 발행된 동아일보를 보면 독립문에 관해 설명한 기사가 있다. 내용을 보면 ‘…진정한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아니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상징물이오. 나라 팔아먹은 우두머리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 글씨를 썼소. 독립문은 청국은 가고 일본은 오라는 개선문인 셈이요.“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으나, 이완용은 당대의 명필로 독립협회 회장도 했다. 독립문 현판의 글씨체도 이완용의 것이 맞는다는 주장이 더 강하다.)   만일 독립문이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의미로 세워졌다면 일제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 독립문을 철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 강점 36년 동안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낡은 부분은 보수를 하는 등 유지를 했다.     그렇다면, 미주 한인들이 비록 축소 모형이긴 하지만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독립문 앞에서 3·1절 기념 행사를 갖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 아닐까? 다만 이미 세워진 건축물인 까닭에 그곳에 3·1절 관련 기념 조형물을 추가로 세우고, 그 앞에서 3·1절이나 광복절 기념행사를 갖는 것이 합당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는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김택규 / 트루쓰역사연구회 대표·전 서울감신대 객원교수발언대 독립문 행사 독립문 현판 독립문 양옆 만일 독립문

2024-03-04

LA·리들리 한인들, 독립문서 첫 3·1절 기념식

미주 지역 항일 운동의 근원지인 중가주 리들리 독립문에서 LA 한인들이 처음으로 삼일절(3.1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특히 이번 행사는 리들리 지역과 LA지역에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원 생중계를 통해 동시에 진행됐다.   지난 1일 LA 한인회(회장 제임스 안)를 비롯한 7개 한인 단체들은 리들리 지역 독립문과 한인회관에서 동시에 삼일절 기념식을 진행했다.   먼저 리들리 지역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LA한인회, 흥사단, 광복회,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관계자들을 비롯한 아니타 베탄코트 리들리 시장, 마리벨 레이노사 다뉴바 시장 등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리들리에서 제임스 안 LA 한인회장의 개회사로 시작됐다.     안 회장은 “이번 기념식은 단순히 우리의 역사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라며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는데 이 기회에 차세대에게 한국 독립의 역사와 정신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김영완 LA 총영사는 리들리로 가지 않고 LA한인회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대독했다.   김 총영사는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공동의 이익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며 협력의 관계를 이뤄나가고 있다”며 “내년이 한일 수교 정상화 60주년인 만큼 신뢰와 협력으로 생산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차만재 박사는 리들리 지역 독립문과 기념비가 건립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날 차 박사는 “리들리에서 시작된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가 LA 한인사회의 초석을 다진 것”이라며 “LA지역 한인들이 이곳을 기억하고 찾아와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축사 이후 레이노사 다뉴바 시장은 제임스 안 LA 한인회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안 회장 역시 리들리시와 다뉴바시정부 관계자들에게 LA한인회 명의로 감사장을 전달했다.     이날 리들리 지역 기념식에는 독립운동가 후손 5명도 참석했다. 특히 독립운동가 김태연 선생의 증손녀 김용혜 씨를 비롯한 손병석 선생의 손자 손재호씨가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또, 박관준 선생의 외손자 박영남씨와 조창용 선생의 외손자 신영구씨, 김순배 선생의 외손자 김홍빈씨가 함께 만세삼창을 하며 기념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LA지역 한인 단체들이 리들리 지역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국경일 행사였다. 이 가운데 LA총영사관 측은 중가주리들리가 관할 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행사 전 불참을 결정해 논란이 됐었다. 반면 관할 지역인 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측은 “관할 지역은 사건, 사고나 민원 발생 시 어떤 공관이 선제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며 “관할 구역을 핑계 삼아 LA총영사관이 불참하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본지 2월13일자 A-1면〉   김경준 기자 kim.kyeongjun1@koreadaily.com삼일절 기념식 la 한인회장 리들리 독립문 삼일절 기념사

2024-03-03

올해 삼일절 행사 독립문<중가주 리들리>서 열린다

LA한인회(회장 제임스 안)를 비롯한 한인 단체들이 미주 지역 독립운동의 근원지인 중가주 리들리 지역에서 삼일절(3.1절) 기념식을 개최한다.   한인회 측은 이번 행사를 위해 버스 두 대를 대절, 참석을 원하는 한인 100명(선착순)과 함께 기념식을 진행하게 된다.   8일 LA한인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임스 안 LA한인회 회장은 “오는 1일 오후 1시 중가주리들리 지역 독립문에서 3.1절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광복회 미서남부지회, 미주3.1여성동지회,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흥사단,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등 6개 단체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클라라 원 이사장은 “리들리 지역은 삼일절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인 데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가 본토로 이주했을 때 첫 정착지였다”며 “한인 역사에서 의미가 깊은 지역으로 차세대에게도 애국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행사는 LA한인회가 설립 이후 타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주최하는 첫 국경일 행사다. 그만큼 리들리 지역이 한인 이민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임스 안 회장은 “사전 답사를 했는데 직접 가보니 독립유공자의 묘소와 그곳에 세워진 독립문 등을 보면서 올해 행사를 꼭 개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이번 기회에 LA한인들도 함께 가서 역사의 흔적을 함께 돌아봤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LA한인회는 참석자를 모집한다.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LA한인회 제프 이 사무국장은 “등록비는 20달러이며 1일 오전 8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 정도까지 돌아오는 일정”이라며 “기념식이 끝나면 참석자들과 함께 리들리 지역 독립유공자 묘지 헌화, 박물관 방문 등의 일정도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LA한인회는 중가주 지역임을 감안, 한인회관에서도 기념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이원 생중계도 진행한다. 대형 TV를 설치해 리들리 지역 기념식 현장을 LA에서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한편, LA에서 북쪽으로 약 200마일 떨어진 리들리시는 미주 지역 초기 항일운동의 중심 지역이었다. 1920년 해외 최초로 3.1 운동  가두 행진이 진행된 곳이다. ‘찰스 H 김’ 초등학교의 이름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김호 선생을 비롯한 김형순, 김용중 선생 등이 리들리 지역에서 활동했다. 반면, 이번 기념식에서 LA총영사관 관계자들의 참석은 불투명하다. 중가주 리들리는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관할 지역이기 때문이다.       ▶참석 예약:(323) 732-0700, (213) 999-4932   ☞리들리 지역 독립문과 기념판은   지난 2010년 리들리시가 163평 부지를 제공했고 한국국가보훈부, 한인역사연구회가 13만 달러 등의 기금을 마련해 세워졌다. 실제 독립문 원형의 25%로 축소된 크기다. 14피트 높이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기념판이 설치된 버지스 호텔과 독립문이 있는 뉴바장로교회 건물 앞 거리는 한국서 3.1 운동이 일어난 후 가두 행진이 펼쳐졌던 거리다. 김경준 기자 kim.kyeongjun1@koreadaily.com리들리 독립문 중가주리들리 지역 la한인회 회장 la한인회 제프

2024-02-08

[독립문 세운 중가주 리들리를 가다] 하와이서 이주 첫 정착…독립운동 발자취 널렸다

지난 13일 오후 2시 LA에서 북쪽으로 220마일 떨어져 있는 중가주 리들리시. 인구 2만명의 소도시인 리들리시에 거주하는 한인은 10여명 남짓하지만 이날 250여 명의 한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들리시는 미주한인이민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하와이에서 이주한 한인이민 선조들의 첫 정착지였으며 해외 독립자금 조성의 중심지였다. 바로 이곳에서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 제막식이 3시간동안 열렸다. 미주한인이민 역사 107년만에 이민 선조들의 삶과 독립운동 발자취가 느껴지는 생생한 현장의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세상은 변해도 정신은 뚜렷했다. ◆리들시는 미주한인 이민역사 박물관 ‘리들리 독립문’은 웅장했다. 개막되는 순간 애국지사 후손 40여명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리들리 독립문은 1897년 한국에 세워진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14피트 높이로, 한글 현판 '독립문'이 새겨져 있다. 독립문 앞 작은 광장에는 이승만, 안창호, 윤병구, 이재수, 김종림, 김호, 한시대, 김형순, 송철, 김용중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가 두 줄로 세워졌다. 비석 앞 뒤로는 사진과 함께 연혁, 애국활동 등이 영문과 한글로 빼곡히 써있다. 이날 애국지사 후손들은 아버지, 할아버지 기념비 앞에서 감격의 소감을 쏟아냈다. 한시대씨 맏딸 루이스 한 박씨와 김용중씨 맏딸 매릴린 김씨의 목소리는 연설 내내 떨렸다.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 건립에 투입된 비용은 25만달러. 그중 리들리시는 부지 및 자금 등 12만달러 이상을 제공했다. 매리 패스트 리들리시 시장은 제막식 연설에서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는 미주한인이민사 뿐만 아니라 리들리시 역사의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리들리시 자체가 미주한인이민역사 유물의 보고인 것이다. 독립문과 기념비는 미주 한인 최초 백만장자이며 애국지사인 김형순씨 자택 및 ‘김 형제(Kim Brothers) 상회’가 위치했던 인근 공원 163평 부지에 건립됐다. 1955년 건축된 김형순씨 자택, 김형제 상회 노동자들 막사, 김원용씨가 재미 한인 50년사를 집필하고 김호씨가 출판한 김호씨 자택이 독립문과 애국선열 기념비를 둘러싸고 있다. 1마일 거리에 있는 리들리 뮤지엄에는 1903년 고종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 이재수씨에게 발부한 여권(당시 집조라고 불렸음), 1920년 쌀농부 김종림씨가 일본과 싸울 한인전투비행사 양성소 설립했다는 윌로우스 페일리 신문, 1920년 대한민국 국민회가 1920년 발행한 독립기념일 리본 등 미주한인초기이민 역사의 증거들이 보존돼 있다. 뮤지엄 길 건너 버지스 호텔 입구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얼굴과 연혁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2층에는 두 애국지사가 리들리시에 들를때마다 묵었던 방을 프레지던트 룸으로 명명하고 얼굴사진과 독립운동 활동을 설명한 글을 올려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버지스 호텔에서 2마일 거리에는 170여구의 한인 이민선조들의 무덤이 있다. 고종의 이민장려 정책으로 이민와 모욕과 인종 차별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들은 일본 통치로 나라를 잃자 리들리시 및 다뉴바시의 과일농장 노동자로 받은 임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리들리시에 현재 남아있는 한인이민사 유물로는 1938년 한인들이 손수 건립한 리들리 한인장로교회가 남아있다. 히스패닉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을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는 구입해 미주한인초기이민사박물관으로 바꿀 계획이다. 록키 로저스 리들리시 시티매니저는 “독립문 뒤 수영장을 무상으로 제공해 한인이민사 박물관을 만든다”고 밝혔다. ◆어떻게 추진됐나 1920년 리들리시 인근 다뉴바시에는 3월1일 300여 명이 모였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의 3분의 1이 모였다. 노동자, 인종차별, 나라잃은 것까지 삼중고로 고생한 이민 선조들의 독립활동으로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50%가 조달됐고 조선도 독립을 맞이했다. 차만재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회장은 이것에 주목했다. 캘스테이트 프레즈노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차만재 교수가 묻혀 있던 한인이민사를 발굴하게 된 계기는 2003년 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우연히 본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의 수많은 한인 무덤들이었다. 차교수는 이들의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그리고 언젠가 정체성으로 고민할 이민 후세들에게 생생한 역사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를 발족했다. 그후 애국운동 요지였던 다뉴바 애국선조 기념비, 3·1절 행진 기념비,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묵었던 버지스 호텔 기념동판 등 역사적인 유적지를 연구·발굴·보존해왔다. 하와이와 조선에서 온 한인노동자들이 과일수확기에 350여명이 넘었던 다뉴바시 한인장로교회는 독립활동의 본산지였다. 차 교수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주한인 이민선조들의 삶은 곧 한인이민사이면서 우리가 왜 지금 여기 서있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한인 2세들에게도 한인이민사를 전하기 위해 최근 ‘중부 캘리포니아주의 한인들’(Koreans in Central California) <1903-1957>'을 발간했다. ■중가주 주요 유적지 ▶다뉴바시 - 1912년 건축된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자리 기념비 건립 - 이승만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 결혼 축하연 열어줬던 존 고씨 자택 - 1920년 3·1절 시가행진 기념해 2008년 세운 기념비 - 애국지사 송철·김용중씨가 설립한 K&S 과일판매업소 포장사업지 - 53인의 이민선조들이 묻혀있는 다뉴바 스미스 마운틴 묘지 ▶리들리시 - 170인의 이민선조들이 묻혀있는 리들리 묘지 - 리들리 김형제상회 노동자 막사 - 김호씨 자택 - 김형순씨 자택 -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이 묵은 버지스 호텔(11th Street, Reedly·사진) - 독립자금 모금장소 리들리한인장로교회(1408 J Street, Reedley) - 독립문 모형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196 N.Reed Ave. Reedly) ▶프레즈노시 핸포드 앤 데라노 - 1907년 임성택이 핸포드에 개업한 첫 한인여관 - 김원택이 1908년 운영했던 프레즈노 한인여관 이은영 기자 eyoung@koreadaily.com

2010-11-19

"한인 후손들에 정체성 해답"

독립문·애국지사 기념비 건립을 주도한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회장 차만재 교수·사진)’는 리들리, 다뉴바, 윌리엄스 등 중가주 지역 초기 한인 이민세대들의 역사 유산들을 발굴·보존하고 있다.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는 지난 2008년 안창호, 이승만 박사가 중가주를 방문할 때마다 묵었던 버지스 호텔과 대한여자애국단이 설립된 다뉴바한인장로교회 건물 앞, 또 1920년부터 3·1운동 기념행진이 펼쳐졌던 다뉴바 다운타운 등 3곳에 기념비와 기념동판을 세운 바 있다.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차만재 교수는 지난 1957년 유학차 도미한 후 현재 캘스테이트 프레즈노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은 차교수와의 일문일답. - 독립문 건립 추진 계기는. “리들리 등 중가주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은 과일 농장 노동자로 고된 일을 하면서도 고국의 독립을 향한 열망으로 후원자금을 헌납했다. 선조들이 남긴 이러한 족적을 미주 한인들에게 알리고 기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인 2, 3세들에게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싶었다.” - 독립문과 함께 애국지사 10인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들의 선정기준은. “리들리, 다뉴바시 등 중가주 지역과 인연이 깊은 애국지사들을 포함시켰다. 이승만,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모금 등을 위해 꾸준히 중가주 지역에 방문했다. 특히 이승만 박사의 경우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직후 다뉴바에서 열린 축하연에 참석할 정도로 이 지역과 인연이 깊다.” - 리들리시에서 독립문·기념비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는데. “시에서 제공한 163평의 부지를 값으로 따지만 12만5000달러에 달한다. 독립문과 같은 민족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러한 사업을 지원해준 것은 시가 한인들을 지역 다민족 커뮤니티 중 하나로써 존중하고 배려한 것이다. 거꾸로 한인 커뮤니티도 이를 본받아 다른 민족들과 화합하고 조화를 이뤄가며 살아야 한다.” - 앞으로 계획은. “지역 내 남아있는 유적지에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을 계속 실시할 것이다. 한인 첫 백만장자였던 김호·김형순 선생의 ‘김형제 상회’ 건물, 1959년 김호 선생이 후원하고 김원용 선생이 저술한 ‘재미한인오십년사’ 발간기념패,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신혼시절 축하연이 개최된 다뉴바 지역 저택 등이 그 대상지다. 이밖에 리들리 한인장로교회 건물구입 및 박물관 설립을 추진중이다.” 남성일 기자 onee@koreadaily.com

2010-11-15

이민역사·정체성 찾는 '새 상징물'

초기 한인 이민 선조들의 애국 정신을 기리는 ‘독립문’이 중가주 한복판에 우뚝 섰다.<관계기사 3면·화보 4면>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회장 차만재 교수)는 13일 가주 최초 한인 정착지였던 리들리시에서 독립문 제막식을 거행했다. 독립문은 실제 원형의 25% 축소된 크기로 지어졌으며, 대표적인 지역 애국지사인 김호·김형순의 생가가 인접한 163평 공원부지에 위치해 있다. 독립문과 함께 중가주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관련이 있는 김용중, 김종림, 김형순, 김호, 송철, 안창호, 윤병구, 이승만, 이재수, 한시대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도 조성됐다. 리들리, 다뉴바 등 중가주 지역은 미주 한인 독립자금 조성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등 미주한인 이민사에 큰 획을 그은 곳이다. 리들리는 당시 가주 과일농업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곳으로, 1909년부터 초기 이민세대들이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이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자금 모금 및 3·1운동 기념행진 등을 펼쳤고 특히 ‘김형제 상회’를 설립한 김호·김형순은 털 없는 복숭아 특허로 막대한 부를 일궈내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크게 기여했다. 과수원 수확기 등 유입인구가 많았을 때는 400∼500명의 한인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리들리, 다뉴바 등 두 지역에는 189기의 한인 묘지가 남아있다. 제막식에는 애국지사 10인의 후손들을 비롯해 메리 패스트 리들리 시장, SF 총영사관, 한국 국가보훈처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에서는 애국지사 10인의 후손들이 차례로 기념비 앞에 나와 소회를 전해 눈길을 끌었다. 김호의 고손녀인 데이지 김씨는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펼치신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울 뿐이다”며 “지난 2008년에는 남가주 지역에 할아버지 이름을 딴 찰스 김 공립학교가 세워지는 등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공동체 정신을 계승키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장인 차만재 교수(캘스테이트 프레즈노 정치학)는 “독립문과 기념비 등을 통해 나라를 위한 선조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억하는 한편 다음 세대들이 이를 보고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않게 할 것”이라며 “독립문이 세워지기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한국 정부와 리들리시, 지역 한인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부터 추진해온 독립문·기념비 건립 사업을 위해 한국 국가보훈처가 9만달러, 한인역사연구회가 4만달러의 기금을 지원했고, 리들리시가 163평의 공원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한편 제막식 후에는 행사 참석자들이 리들리박물관 한국전시실과 안창호, 이승만 박사가 투숙했었던 버거스 호텔을 방문하는 등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는 시간도 마련됐다. 남성일 기자 onee@koreadaily.com

2010-11-15

'리들리시 독립문' 의미는…조국 독립 피땀 흘린 '이민 1세 발자취' 담았다

‘리들리시 독립문’과 애국지사 기념비 건립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민 초창기 1세대 대부분이 1940~50년에 사망한 상황에서 이들의 발자취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세워지기까지 미주한인 이민자들의 희생을 간과할 수 없다. 차만재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회장은 “고종의 이민장려 정책으로 많은 한인들이 이민 왔지만 일본통치로 무국적자가 됐다. 갖가지 모욕과 인종 차별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나라를 잃자 한인들은 리들리시 및 다뉴바시의 과일농장 노동자로 하루 50센트 임금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라고 초기 이민자들의 숭고한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독립문 이면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땀을 흘린 이민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노고가 들어있는 것이다. 독립문 및 애국지사 기념비 제작에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가 앞장섰다. 한인 후세들에게 이민선조의 역사를 그대로 전해주기 위해 2003년 조직된 연구회는 그동안 이민사 보관 및 기록, 유적지 발굴·보전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다뉴바시 애국선조 애국활동 기념비 건립,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묵었던 버지스 호텔 기념동판 설치, 리들리시 박물관 한인이민사 자료 전시 등을 이끌었다. 리들리시 박물관에는 1903년 고종이 애국지사 이재수 선생에게 발부한 여권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는 향후 리들리시 지원으로 독립문 뒷쪽 수영장을 박물관으로 전환해 한인이민사 자료를 전시할 계획이다. 또한 1938년 선조들이 손으로 세운 리들리한인장로교회 재구입을 위해 기금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정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는 “리들리시 독립문 및 애국지사 10인 기념비가 한인이민사의 정신적인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많은 한인들이 이곳을 방문해 한인 이민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방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이은영 기자 eyoung@koreadaily.com

2010-11-14

해외 독립자금 조성 중심지 중가주 리들리시에 '독립문'

하와이에서 이주한 한인이민자들의 첫 정착지였으며 해외 독립자금 조성의 중심지였던 중가주 리들리시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13일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주최로 열린 독립문 제막식에는 이정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와 매리 패스트 리들리 시장, 독립운동가 및 애국지사 가족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공개된 ‘리들리 독립문’은 한국에 있는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14피트 높이로, 한글 현판 '독립문'이 새겨져 한인이민역사의 상징물이 됐다. 이날 또 독립문 앞 광장에 안창호, 이승만, 김호, 김형순, 김종림, 김용중, 이재수, 윤병구 선생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기념비에는 영문과 한글로 애국 활동과 연혁이 새겨졌다. 독립문과 기념비는 미주 한인 최초 백만장자이며 애국지사인 김형순씨 자택 및 ‘김 형제(Kim Brothers) 상회’가 위치했던 인근 공원 163평 부지에 건립됐으며 역사회 및 한인 커뮤니티 4만달러, 국가보훈처 9만달러, 리들리시 10만달러 등 총 23만달러가 투입됐다. 차만재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회장은 “독립문과 애국지사 기념비는 초기 한인이민사와 리들리시 발전사의 생생한 현장”이라며 “이곳을 방문한 한인들이 과거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호 선생 아들 안필영(영어명 필립 안)씨는 “초기 이민 선조들은 피땀흘려 번 돈을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한국 독립이 가능했던 이유가 오늘 이렇게 독립문이라는 상징물로 우뚝 세워져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는 향후 유적지 3곳에 기념비 추가 건립 및 박물관도 세울 계획이다. 이은영 기자eyoung@koreadaily.com

201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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