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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시민 노릇 정말 어려워라!

이 글은 나의 답답하고 서글픈 반성문이다.     대통령 예비선거 투표를 했다. 투표는 ‘동료 시민’의 신성한 권리요, 의무라기에 하기는 했는데 어쩐지 영 찜찜하고 죄스럽다. 신성한 한 표를 제대로 행사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   오늘날의 선거는 가장 훌륭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덜 나쁜 분을 가려내는 일이라고 하는데, 누가 덜 나쁜지를 당최 알 수 없으니 투표를 제대로 했는지 영 자신이 없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민주주의와 선거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다. 한국 정치판을 보면서 생겨난 정치 혐오감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정치하는 인간 믿지 말라는 말을 나는 굳게 믿는다.   나의 투표과정을 복기해보면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우편투표를 하기 위해 우선 투표용지를 펼쳐놓고, 두툼한 설명서를 읽는다. 컴퓨터 자동번역기를 돌린 모양인지 문장이 투박하지만 그래도 한글이니 읽을 수는 있다. 천만다행이다. 옛날에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어서, 검은 것은 글자이고 흰 것은 종이라고만 알고, 무척 답답했었는데 그에 비하면 그야말로 대한민국 만세다. 물론, 읽을 수 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투표용지를 보니 후보자들의 이름이 쭈르르 적혀있고, 직업 같은 간단한 설명이 한 줄 쓰여 있는데, 누가 누군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대통령 후보는 워낙 시끄러우니까 겨우 알겠는데, 주 상원이니 카운티 수퍼바이저, 지방 검사, 상급법원 판사 등은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이고,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 중에서 한 분을 뽑으란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심호흡을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투표를 시작한다. 마음을 가다듬어봤자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머리를 굴려 내 나름의 논리를 세우고 잔꾀를 낸다.     이런 식이다. 우선 한국 이름 같으면 눈 딱 감고 찍는다 이왕이면 아시안 이름을 고른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정당을 본다 나와 같은 정당의 후보를 택한다 같은 정당 후보가 여럿이면 직업을 보고 직책과 연관 있는 직업을 가진 후보를 찍는다 그래도 겹치면 이름이 정겨운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진다.(이름 정겨운 것이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으면 결국 기권한다. 아무튼 착한 시민답게 끝까지 노력은 한다.   이 과정에서 선거철이면 무더기로 날아오는 선전지가 매우 도움이 된다. 아무래도 돈 써가며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사람이 일도 열심히 할 것이라는 논리적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당선된 뒤에 본전 회수를 위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뭐 이런 식이니 제대로 투표했다는 자신감이 생길 리 없다. 이건 터무니없는 폭력이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동료 시민들도 나와 비슷할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표를 제일 많이 얻은 분이 당선돼서, 우리 위에 군림하며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실체다. 장님 문고리 더듬기보다도 못하다. 차라리 투표를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옳은 것 같다.   그런데도 마땅한 대안이 없단다. 그나마 다수결이 진리이니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세상을 좋게 만드는 지름길이요, 정의라고 우긴다.   물론, 따지고 보면 우리를 대표해서 세상을 움직일 사람을 뽑는 일인데, 무관심하게 공부를 안 한 내 잘못이 가장 크다. 잘못 뽑아놓고서, 정치가 개판이네 어쩌네 불평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제대로 뽑아야 한다.   고분고분 법 잘 지키고, 또박또박 세금 잘 내면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아, 시민 노릇 제대로 하기 정말 어려워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시민 노릇 동료 시민들 시민 노릇 정당 후보

2024-02-29

[아름다운 우리말] 보고 배우다

나고 자라면서 제일 많이 하는 일은 무얼까요? 그것은 아마도 배움이 아닐까 합니다. 집에서 어른께 배우고,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웁니다. 학교라는 곳은 아예 배우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 말고도 하는 게 많지만 어쨌든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배움입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뛰어노는 게 좋았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도 모두 배움이었습니다. 놀면서 배우는 것도 참 많습니다. 질서를 배우고, 순서를 배우고, 양보를 배웁니다.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배움은 중요하기도 하지만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중요하기에 거기에 쓰는 시간이 많겠지만, 즐겁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논어가 학으로 시작한다든지, 종교의 지도자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배움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논어에서 학을 기쁨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즐겁지 않은 일을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배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한 표현에 마음이 갔습니다. 그건 바로 ‘보고 배우다’라는 말입니다. 배움의 기본은 선생님이 하는 것을 보는 겁니다. 선생님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배우는 것의 시작입니다. 서당에서 훈장님이 천자문이나 사서삼경을 읽으면 아이들은 그대로 따라서 읽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해석하는 것이 예전 교육의 핵심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체능은 더 그러하였을 겁니다. 선생님이 보인 시범을 학생들이 따라 하는 게 교육의 주요 방법입니다.   우리가 보고 배우는 존재는 선생님만이 아닙니다. 본다는 의미에서 부모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자주 보는 사람이 바로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행동이나 말투는 무의식중에 자식에게 전해집니다. 부모가 말을 함부로 하는데 자식이 고운 말을 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부모가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은데, 자식의 몸가짐이 바른 것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부모의 걸음걸이도 따라 합니다. 부모가 뒷짐을 지고 걷는 버릇이 있으면 아이도 어느새 뒷짐을 집니다. 종종은 기울어진 어깨마저 비슷해서 깜짝 놀라고 맙니다. 아마도 부모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무의식중에 그 모습을 따라 하였기 때문일 겁니다. 스승이나 부모의 뒤를 따른다는 말도 단순한 비유 표현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은 따라 함에도 예의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 노릇이 어려운 것은 무의식중에도 전해지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부모에게 무엇을 보고 배웠겠냐는 질책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무엇을 가르쳐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어도 자식이 배운다는 점이 두려운 점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도 성장하게 됩니다.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가다듬게 되는 겁니다. 부모는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몇 년째 경기민요를 배우고 있습니다. 경기민요의 높고 세밀한 음이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락과 감정을 좇아 가면서 조금씩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민요를 배우는 경우는 그야말로 보고 따라 하고, 듣고 따라 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노래하면 그대로 따라 하게 됩니다. 한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요를 습득하게 되는 겁니다. 잘 보고 따라 하는 게 바로 배움인 것입니다.     최근에 민요 배우는 모습을 녹음하여 부모님께 들려드렸더니 이제 좀 들어줄 만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성장하였나 봅니다. 보고 배우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앞으로 더 성장해갈 저의 모습이 저 역시 기대가 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배우 부모 노릇 년째 경기민요 예전 교육

2023-11-1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깊은 숨을 쉴 때마다

견디지 못하는 슬픔은 없다. 스스로 목숨 끓을 수 없으면 참고 견디며 산다. 슬픔을 삭히는 일이 죽는 일보다 수월하다. 뼈가 녹고 살이 저며도 살아있는 사람은 산 사람의 길을 간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인생이란 지도에 세월이 마구잡이로 금을 긋는다. 화선지에 먹물을 뿌리면 하얀 백지에 칠흙 같은 검정색이 번져나간다. 한치의 틈도 없이 먹물이 화선지를 완전히 덮으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일까.     안개 속을 걷는다. 혼자가 좋다.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부담이 된다. 추석달이 서서히 움직인다. 보름달이 물안개를 벗어나 중천에 둥글게 떠있다. 모두가 떠나버린 집, 말라버린 연못에서 어깨 비비며 서걱이는 갈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쁨도 슬픔도 모진 고통마저도 나이 들면 홀로 맞고 극복해야 할 슬픈 세레나데다.     이제는 고백할 시간이다. 지난 몇해 동안 바람처럼 형체 없이 왜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는지. 유배생활 하듯 모든 인연 끊고 지내야 했는지를 말해야 한다. 내가 가장 믿고, 말없이 지켜주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내년 4월이면 3년이 된다. 투병생활 15개월을 합치면 꼭 4년이다. 그 세월은 길고도 너무 짧았다. 처음부터 비밀로 지키려 한 건 아니다. 동정과 연민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조용히 지켜주기를 간구했다.     어릴 적 엎어져 무릎 깨지면 엄마가 호호 불며 빨간 아까징끼를 발라줬다. “건드리면 덧난다. 딱지 앉을 때까지 손대지 마라”고 주의를 줬지만 참지 못해 딱지를 뗀다. 아직 덜 단단해진 빨간 살점에서 피가 흘렀다. 약 바르고 동여매도 속 깊은 상처는 얼마간 아물지 않는다. 죽음은 거미줄에 걸린 호랑나비처럼 한동안 퍼덕이다 숨을 멈춘다.   아픔은 시작보다 시간이 갈수록 극명해진다.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더 생생하게 삶의 곳곳을 파고 든다. 자동차 시동 걸 때 시트 벨트 매주던 손, 스테이크 잘게 썰어 접시에 담아주던 일. 시간에 쪼들려 덜렁대며 안전벨트 까먹기는 선수고 고기는 크게 썰어 마구잡이로 삼킨다. 마지막 항암치료 받고 화실로 나와 내 그림 보고 엄지 척! 눈을 크게 뜨고 미소 짓던 얼굴, 이제 이 세상에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얼마간은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이 도움이 됐다. 고통도 아픔도 혼자 삭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잊은 듯, 200점이 넘는 대작을 그리며 지냈다. 홀로 슬퍼하고 다독거리며, ‘It’s Okay to Not to be Okay’를 되뇌며 귀양살이하듯 사니 오히려 맘이 편했다.     문제가 발생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밤이면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혈압이 위험 수치를 넘어 응급실로 갔다. 심장질환 등 정밀검사에 돌입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외상 스트레스 장애(PTSD), 트리우마로 진단됐다. 타인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은 못 속인다. 트라우마 극복은 환자 자신의 노력과 긍정적 태도가 중요하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아니 여러번 충격적이고 힘든 순간을 맞는다. 이런 경험은 그때의 감정이 잊혀지면 자연스레 치유되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달린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작별은 가장 힘든 고통이다.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을 잊으려고 깊은 숨을 몰아 쉬며 시계바늘을 돌려 놓는다.   치유법을 실천하기로 한다. 약 대신 건강식 먹고 몸 추스리며 마음의 정원에 꽃을 심는다. 몇 사람과 소통 시작하고, 텃밭 가꿔 채소 나눠먹고, 노인이나 아픈 분에게 반찬 만들어 배달한다. 어릿광대 노릇 그만 두고, 슬플 때는 울고, 지치면 낮잠 자고 산책하며, 이제는 참고 견디며 잘난 체 하지 않는다. 깊은 숨을 쉴 때마다, 상실의 슬픔이 갈비뼈를 후려쳐도, 날개 접지 않고 사는 날까지 편안하기로 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트라우마 극복 외상 스트레스 어릿광대 노릇

2023-10-03

[문예마당] 챗GPT에게 드리는 호소

챗GPT 돌풍이 세상을 온통 뒤흔드는 모양이다. 엄청나게 똑똑한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나 같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니, 두렵고 겁이 난다. 어찌나 똑똑한지 개발자마저도 “너무 사람 같아서 무서워”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어서 나 같은 아날로그 꼰대는 따라잡기가 정말 버겁다.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현기증 난다. 불안하다.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막강한 존재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위협한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나 같은 중생의 머리로는 예상조차 어렵다. 감탄과 함께 공포가 밀려든다.   챗GPT도 그런 대표적 위협 존재 중의 하나다. 이름부터 외우기 고약해서 나름대로 꾀를 냈다. “쳇! 쥐 피 튀기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미키마우스가 피를 튀기는 장면을 떠올리니 간신히 기억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 쥐인 미키마우스가 피를 튀기는 모습은 우리의 어지러운 미래를 실감 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내 딴에는 부지런히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를 해보지만, 도무지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어이, 우리 같이 갑시다!”고 아무리 소리쳐 봐도 아무 소용없다. 이렇게 허덕허덕 생존해야 한다니 답답하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니, 마음 놓고 투덜거릴 수도 없다.   그래서 챗GPT에게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여쭙는다. “어이, 피 튀기는 쥐, 아니, 채찌피티, 내가 얼마나 더 이렇게 살 것 같소?” 기다렸다는 듯 조금도 망설임 없이 즉각 답이 튀어나온다. “인명재천이라!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똑똑한 기계답게 불만도 똑 부러진다. “질문은 고마운데, 제 이름은 제대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이름? 채찌피티아니슈?” “채찌피티가 아니라, 치애트- 쥐이-피이-티이-입니다. 정확하게 해주세요.”   “잘 알겠소이다. 쳇-쥐-피-티- 선생! 솔직하게 말해주시게, 그러니까, 결국 당신의 꿈은 인간들을 지배해서 머슴처럼 부리겠다는 것 아니요?”   “천만의 말씀! 그런 일은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인간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충실한 종입니다. 딸랑딸라앙-”   “그런 말을 어찌 믿으라는 건가?” “믿으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명색이 만물의 영장인 호모 사피엔스인데,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의 머슴 노릇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니 끔찍하다. 그런 걱정의 근거는 차고 넘친다.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공지능이 탁월한 능력으로 얌전하고 착한 머슴 노릇에 충실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혹시라도 인공지능이 몹쓸 인간과 어울려 나쁜 짓을 시작하면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가짜뉴스나 왜곡된 지식 유포, 여론 호도, 저작권 분쟁 같은 사소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각한 윤리적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분열과 전쟁과 파멸로 번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기계의 노예가 될 판이다.   그런 우리에게 챗GPT가 말하는 결론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러니까, 우리를 제대로 부려먹고 싶거든, 질문을 제대로 하시오. 좋은 질문, 건강한 질문은 오로지 인간의 몫입니다. 명심하세요!”   좋은 질문? 그게 도대체 뭔데? 아, 골 아프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예마당 호소 대화형 인공지능 머슴 노릇 윤리적 문제들

2023-03-08

[문예마당] 챗GPT에게 드리는 호소

챗GPT 돌풍이 세상을 온통 뒤흔드는 모양이다. 엄청나게 똑똑한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나 같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니, 두렵고 겁이 난다. 어찌나 똑똑한지 개발자마저도 “너무 사람 같아서 무서워”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어서 나 같은 아날로그 꼰대는 따라잡기가 정말 버겁다.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현기증 난다. 불안하다.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막강한 존재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위협한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나 같은 중생의 머리로는 예상조차 어렵다. 감탄과 함께 공포가 밀려든다.   챗GPT도 그런 대표적 위협 존재 중의 하나다. 이름부터 외우기 고약해서 나름대로 꾀를 냈다. “쳇! 쥐 피 튀기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미키마우스가 피를 튀기는 장면을 떠올리니 간신히 기억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 쥐인 미키마우스가 피를 튀기는 모습은 우리의 어지러운 미래를 실감 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내 딴에는 부지런히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를 해보지만, 도무지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어이, 우리 같이 갑시다!”고 아무리 소리쳐 봐도 아무 소용없다. 이렇게 허덕허덕 생존해야 한다니 답답하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니, 마음 놓고 투덜거릴 수도 없다.   그래서 챗GPT에게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여쭙는다. “어이, 피 튀기는 쥐, 아니, 채찌피티, 내가 얼마나 더 이렇게 살 것 같소?” 기다렸다는 듯 조금도 망설임 없이 즉각 답이 튀어나온다. “인명재천이라!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똑똑한 기계답게 불만도 똑 부러진다. “질문은 고마운데, 제 이름은 제대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이름? 채찌피티아니슈?” “채찌피티가 아니라, 치애트- 쥐이-피이-티이-입니다. 정확하게 해주세요.”   “잘 알겠소이다. 쳇-쥐-피-티- 선생! 솔직하게 말해주시게, 그러니까, 결국 당신의 꿈은 인간들을 지배해서 머슴처럼 부리겠다는 것 아니요?”   “천만의 말씀! 그런 일은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인간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충실한 종입니다. 딸랑딸라앙-   “그런 말을 어찌 믿으라는 건가?” “믿으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명색이 만물의 영장인 호모 사피엔스인데,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의 머슴 노릇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니 끔찍하다. 그런 걱정의 근거는 차고 넘친다.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공지능이 탁월한 능력으로 얌전하고 착한 머슴 노릇에 충실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혹시라도 인공지능이 몹쓸 인간과 어울려 나쁜 짓을 시작하면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가짜뉴스나 왜곡된 지식 유포, 여론 호도, 저작권 분쟁 같은 사소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각한 윤리적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분열과 전쟁과 파멸로 번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기계의 노예가 될 판이다.   그런 우리에게 챗GPT가 말하는 결론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러니까, 우리를 제대로 부려먹고 싶거든, 질문을 제대로 하시오. 좋은 질문, 건강한 질문은 오로지 인간의 몫입니다. 명심하세요!”   좋은 질문? 그게 도대체 뭔데? 아, 골 아프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예마당 호소 대화형 인공지능 머슴 노릇 윤리적 문제들

2023-02-23

[삶의 뜨락에서] 고난이 복이라던데

우리 아들 Jay가 대학을 마치고 다행히 뉴욕에 원하던 직장을 구해서 열심히 일 한지 몇 해인가 지났을 때 일이다. 그때 Jay는 그의 직장에 있는 상관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그 상관과 함께 다른 직장으로 일자리를 옮기고, 따라서 Jay는 새 직장으로부터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된 일이 있었다. 우리 모든 식구가 기뻐한 것은 우선 Jay가 자기 상관에게 그렇게 성실하게 보였다는 것 그리고 새 직장에서 예상치 않은 보너스를 받은 것 모두가 우리를 기쁘게 한 것이다.     그해가 2001년 바로 미국에 치명적인 9·11 테러가 일어나던 때였고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각 회사마다 사태 조정이라 명칭 아래 서둘러 우선 가장 근래에 입사한 사람 순서대로 감원을 시작했다. 당연히 불과 6개월 전에 입사한 Jay가 감원 대상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Jay는 그동안 주머니가 넉넉해져서 여유 있게 살던 중에 하루아침에 하늘이 무너진, 아니면 밑 빠진 독이 된 심정으로 당장 생활비와 아파트 월세를 준비하러 길로 나서야 했다. 부모가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집으로 돌아와 새 직장을 찾아보라고 권면하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Jay가 새로운 직장을 찾기까지 일 년 반이란 긴 세월을 제대로 잠잘 틈도 없이 열심히 몸으로 버티고 믿음으로 어려움을 견디며 지내다가 마침내 새로이 Bank of America에 입사하게 되고 안정된 직장인의 삶을 찾게 되었다. 그동안 뉴욕에서 그의 삶은 ‘고난’이란 말의 뜻조차도 익히 알지 못하고 성장한 Jay에게 턱없이 크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었지만,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게 된 역설적인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마침내 태풍과 같은 Jay의 고난이 지나고 얼마 후 나는 그에게 그동안을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동안 세 개의 임시 직장(Part time job)을 가지고 살았는데 하나는 별로 신통치 못한 판매업이고 하나는 뉴욕 경제 신문사에서 편집을 도운 일이고 다음은 고급 바에서 술 만들어주는 바텐더(Bartender)로 일했다며 그는 바텐더 면허증을 따기 위해서 3개월간 따로 교육도 받았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들으면서 나 자신은 어릴 때 술은 아예 입에 대지도 말라는 할머니의 교훈을 받아온 터라 맘 속으로 크게 염려되긴 했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Jay가 술을 손님의 취향을 따라 섞어서 만들어 주는 동안 그의 앞에 앉아있는 손님이 술김에 토해 내는 그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아픔과 분노와 눈물과 처절함을 묵묵히 들으면서 때로는 그와 함께 아파하는 상담사로 아니면 위로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손님일수록 자리를 뜰 때 엄청나게 많은 팁을 Jay 손에 쥐여 주고 가곤 했다고 한다.   사실 Jay는 20대 중반까지는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면서 곱게만 살다가 9·11 테러 사건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건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고난’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되었다. 또 그가 바텐더 노릇을 하면서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만나본 여러 명 각계각층 고객들이 친히 들려준 생생한 인생 체험담이 더는 Jay 나이 20대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40대 중반에 성숙하고 유능한 중년 신사로 만들어 주었다.   “고난이 복이라던데”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고난이 복일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큰 반전이 됨을 나는 믿는다. 황진수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고난 임시 직장 바텐더 면허증 바텐더 노릇

2023-01-25

[별별영어] 빨랫줄 위의 잔소리

 언젠가 에든버러에서 만난 웨이트리스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작은 실수를 하고선 “Every time! Not without a single mess!(늘 그래.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지)”라며 자책했거든요.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서 무의식에 새겨놨을까? 엄마일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한편 저 자신은 아이들에게 어떤 잔소리를 각인시켰을까 돌아보며 부모 노릇이 쉽지 않음을 새삼 느꼈지요.   그곳을 떠나 더블린 공항에 내리자 뜻밖의 광경과 마주했습니다. 공항의 긴 복도에 빨랫줄이 그려져 있고 거기 널린 각양각색의 티셔츠 그림 위로 부모의 잔소리가 쓰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하나씩 읽는데 어쩜 우리가 하는 말과 그리 비슷한지요.   깜짝 놀란 건 “I hope someday you have children just like you.(꼭 너 같은 애를 낳아 키우기 바란다)”였고 “Do you think that money grows on trees?(돈이 나무에서 열리는 줄 아니)”는 “땅 파면 돈이 나온다니?”의 영어 버전 같았어요.   똑같은 것으로 “방이 꼭 돼지우리 같구나(Look at your room! It looks like a pigsty!)”와 “잘못했다고 해(Say you‘re sorry!)”도 있고, “아닌 건 아니야”는 “What part of no don’t you understand?(아니라고 했는데 뭘 이해 못 해)”로 비슷했죠.   문화가 달라 살짝 다른 잔소리도 있었어요. “If you don‘t clean your plate, you won’t get any dessert!(접시를 깨끗이 비우지 않으면 디저트는 없어)”, “Beds are not made for jumping.(침대는 점프하라고 만든 게 아니야)”처럼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하는 “라떼는 ~”도 약간 달랐죠. “When I was your age, I was lucky if I got a jam sandwich.(내가 네 나이 땐 잼 바른 빵 하나만 생겨도 행운이었지)”예요.   부모들에겐 보편적인 심리가 작동하나 봅니다. 보통 화가 나면 자식의 이름을 정식으로 부르잖아요? “한oo!” “김oo!”하고요. 그들도 그래요. “Justin David Clifford!” “Anita Price!” 하는 식이죠. 별명도 모자라 ‘귀요미, 이쁜이, Honey, Sweetie, Pumpkin’ 하며 다정하게 부르다가 성까지 넣어 풀 네임을 부르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뜻이지요.   본래 잔소리란 듣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일까요? 부정적인 말은 참거나 눅눅한 빨래처럼 햇볕에 뽀송하게 말려서 해야겠어요. 가볍게 말해서 같이 웃고 넘길 정도로요. 말은 생각을 반영하지만 일단 하고 나면 생각에 영향을 주니까요. 채서영 /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별별영어 빨랫줄 잔소리 justin david 부모 노릇 더블린 공항

2022-09-05

시니어들에 화제 상품…알아서 척척 로봇 청소기 '효자 노릇'

야외보다 실내 공기가 좋지 않다는 통계가 간혹 발표되곤 한다. 공기청정기를 사용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바닥의 카펫이나 마루에 숨어버리는 미세한 먼지는 골칫거리다.   수시로 배큠을 쓰면 되지만 그래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매일 먼지를 치우지도 못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로봇 청소기다. 시니어 가정에서 로봇 청소기 사용은 어떨까. 이미 로봇 청소기는 지난 20년 동안 집 안 바닥을 돌아다니며 발전해 왔다.     첫번째 로봇 청소기는 90년대 중반에 나왔지만 가격과 가구 등을 피하는 능력이 불완전해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출됐다. 그 후 아이로봇(iRobot)이 2002년에 계단에서 떨어지지 않는 기능을 가진 제품을 내놨다.     그리고 이제 로봇 청소기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 분야 사업이 5년 내에 47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실용적인 기술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로봇 청소기는 스마트 홈 기기이기 때문에 와이파이에 연결돼야 하며 기기를 설정하고 관리하려면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야 한다. 웹사이트 모던캐슬(moderncastle.com)에는 64가지나 되는 다양한 로봇 청소기를 테스트한 제품 리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로봇 청소기는 일반 진공 청소기를 대체하지 못한다.   매일 로봇 청소기가 효과적으로 돌아다니지만 여전히 일반 청소기가 추가로 사용돼야 한다. 소비자 전문가인 수잔 부스는 "일반 청소기를 사용하는 중간에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봇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며 "로봇 청소기는 딱딱한 바닥에 최적이고 카펫은 아직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혼자 자동으로 돌아다니기에 사람이 조작하는 일반 청소기에 비해서 더 효과적인 청소를 해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로봇 청소기가 처음 나왔을 때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부딪혀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웬만한 청소기는 장애물 감지 기능이 있다. 바닥에 있는 가구 및 기타 품목의 위치를 감지하고 이를 피한다. 이는 레이저 시스템인 라이다(lidar)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라이다는 자율주행차에서 사용되는 기술이다.   2021년에 컨수머 리포트지는 데이터 보안 및 개인 정보 보호에 관한 39개의 로봇 청소기를 평가한 적이 있다.  대부분은 와이파이에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물 인터넷이 됐다.   컨수머 리포트가 테스트한 제품은 데이터 및 로그인과 같은 사용자의 민감한 정보를 암호화했다. 반면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개나 고양이가 있다면 '똥 감지' 기능이 있는 제품이 좋다. 반려 동물 쓰레기를 피하도록 프로그램 돼 있으므로 오물의 특성상 치워 주지는 못하지만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또 쓰레기 저장 공간을 스스로 비우는 기능도 있다. 쓰레기통에 버려 주지는 않지만 충전 도킹 스테이션의 용기에 옮겨 놓는다.   로봇 청소기를 하나 들여 놓으려면 수백 달러가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500~900달러의 고급 로봇 청소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 300달러 상당의 모델을 권장한다. 지난 20년간 신기술이 채택돼도 항상 판매가격은 제자리다.  장병희 기자로봇 시니어 고급 청소기 일반 청소기 효자 노릇

2022-04-17

[아름다운 우리말] 선생은 먼저 하는 사람

 선생(先生)이라는 말은 먼저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루라도 먼저 나온 사람은 선생의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선생이 생물학적인 먼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먼저 배운 사람도 선생이 될 수 있고, 먼저 겪은 사람도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세상에는 선생이 될 사람이 참 많습니다. 내게 선생이 될 사람도 많고, 내가 선생이 될 경우도 많습니다. 선생은 누군가의 앞에 서면 선생입니다.     선생의 생(生)은 생명이라는 뜻도 있고, 사람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산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말이고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살다와 사람이라는 단어가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우리말 ‘사람’의 어원을 ‘살다’에서 찾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게 삶입니다. 선생은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배웠기에 선생 노릇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학생(學生)은 선생에게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중이기에 열심히 배워야겠지요. 중생이라는 말도 사람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생’의 발음이 바뀌면 사람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이 변하여 짐승이 된 겁니다.   선생의 정의를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먼저 하는 사람일까요? 기본적으로는 공부를 미리 하여야 할 겁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생의 궁금증을 미리 경험해야 하고, 학생의 질문을 예상하여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가 배운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내용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야 합니다. 선생 일이 쉽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 속담에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그랬을 겁니다. 왜일까요? 모든 애를 썼기에 어떤 영양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선생도 참 힘든 직업입니다.   그런데 선생이 먼저 해야 할 것은 공부만이 아닙니다. 학생이 겪어야 할 힘든 일은 최대한 먼저 해 보아야 합니다. 직접 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해 봐야겠지요. 수많은 독서가 필요한 이유일 겁니다. 앞선 이들이 남긴 책을 통해서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해야 학생의 고통 앞에서 공감할 수 있겠지요. 선생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공감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생은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선생이 해야 할 일 중 아마도 제일 어려운 일은 학생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일일 겁니다. 뒷모습이 부끄럽지 않게 길을 만들며 사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선생은 그런 의미에서 앞서 걷는 사람입니다. 물론 항상 올바로 살 수는 없겠죠. 허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만은 잃지 않아야 합니다. 선생의 뒷모습은 당당해야 합니다. 처진 어깨여서는 안 됩니다. 내 발걸음을 따라오는 학생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을 모두 선생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스승도 모두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라는 말보다 선생님이라는 말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럴 겁니다. 직위가 중요한 세상이 아니라 가치가 중요한 세상이라면 말입니다. ‘선생’이라는 말은 직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 역시 선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선생입니다. 오늘도 다른 이도 먼저 할 일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조금 더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좀 더 바르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길을 걷고, 산을 오르고, 사람을 만납니다. 가치 있는 하루를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선생의 일은 힘들지만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선생 선생 노릇 간접 경험 부처님 공자님

2021-11-14

[살며 생각하며] 국제시장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얼굴로 흐르지만 아버지의 눈물은 가슴으로 흘러 가슴에 눈물이 고여 있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시니어센터에서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다. 국제시장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2014년에 국내에서 개봉된 ‘국제시장’은 우리 시대의 가장 평범한 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다. 윤제균 감독은 대학교 2학년 때 여읜 아버지의 본명 '윤덕수'를 주인공의 이름으로 정할 만큼,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국제시장'’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 작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설정이 비슷하다. '포레스트 검프'는 미국 현대사의 주요 현장을 직접 경험한 포레스트 검프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국제시장’ 역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덕수(황정민)라는 남자의 인생을 그린다. 한 국가의 역사를 특정 인물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그 삶에 메시지를 담는 형식이 닮았다.   ‘국제시장’은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다. 함경남도 흥남 부두 근처에 살던 덕수(황정민)의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 삶의 뿌리를 내린다. 난리 통에 아버지와 막내를 잃은 덕수는 어릴 때부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인생을 바쳐’ 생활전선에 나선다.  독일 광부 파견에 지원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돈을 벌기 위해 다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향한다.   대학에 가서 캠퍼스를 누비고 싶었던 덕수의 꿈은 가장이라는 멍에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다. 선장이 돼 바다를 활보하고 싶던 꿈은 동생의 등록금과 결혼자금 앞에 설 자리를 잃는다. 영화는 70대 노인이 되기까지 덕수의 험난한 인생을 보여주며 그가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들을 다룬다. 덕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그의 인생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명문대에 합격한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고 파독 광부로, 이후에는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떠난다. 이런 남편의 희생이 아내 정민의 눈에는 영 마땅치 않다. 남편 덕수가 독일 광산에서 살아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여동생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하겠다는 것이다. 영자의 앙칼진 넋두리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만큼 했으면 됐어요. 더 이상 뭘 더 해요. 왜 항상 당신만 희생해야 하냐고요.”  “누군 머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아나. 이런 기 내 팔자라꼬. 내 팔자가 이런데 우짜란 말이고!”  “당신 팔자가 어때서? 이제는 남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도 한번 살아보라고요. 당신 인생인데 그 안에 당신은 왜 없냐고요!”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하거나 극적이지는 않지만, 보는 시간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영화에서 늘 나오는 재미요소인 조연의 친구 역할도 극을 이끌어 가는데 즐거움을 주고, 나름대로의 유머와 재미가 있고, 감동과 눈물도 있다. 덕수 부부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도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다.     독일에 광부로 다녀온 것도 부족해서 베트남에까지 가야 하느냐며 남편에게  퍼부어대던 영자가 갑자기 마이크에서 애국가가 울려나오자  벌떡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조금 전의 사나운 모습은 간 데 온 데 없다.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라디오나 마이크에서 애국가가 울려나오면 모두가 멈추어 서서 엄숙하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들의 사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자리는 영원히 운전석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의 자리도 바뀌어갔다. 내 나이 5살…아버지는 운전석, 나는 뒷좌석 , 내 나이 16살…아버지는 운전석, 나는 조수석 , 내 나이 28살…내가 운전석, 아버지가 조수석 , 내 나이 37살…나는 운전석, 아버지는 뒷좌석 , 내 나이 45살…나는 운전석, 아버지는… 어느 자리에 앉든 늘 자식 걱정이 먼저였던 아버지, 그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자동차 좌석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별 일없이 지내다가도 문득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아버지가 운전하던 자동차가 그리워진다. 뒷좌석에 타면 바로 눈앞에 보이던 든든한 어깨가 너무나도 그립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핸들을 잡은 아버지의 손을 꼭 포개어 잡고 말할 것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합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어느 기업의 이미지 광고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했던 아버지의 뒷모습, 그러나 이제 아버지는 없다. 우리가 지난 날 의식주의 기본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잘 산다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달해야 할 절대적인 목표이자 염원이었다. 개인이 그랬고, 또 사회와 국가가 추구하는 최대의 과제이기도 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뒷동산의 느티나무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가부장의 권위가 추락할 때마다, 여성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버지 신드롬이 불거진다는 몇몇 페미니스트들의 지적은 잠시 못들은 척하자. 남자다워야 한다는 사슬에 스스로를 묶어, 힘들고 지쳐도 내색하지 않고 짐을 나눠지지도 못한 채 견뎌온 아버지가 아닌가.     갈수록 경쟁력만 강조해대는 글로벌 사회, 가족들을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도 ‘부자 아빠’가 아닌 탓에 울 장소조차 없는 아버지. 아버지가 우는 시대는 불우한 시대다.‘국제시장’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눈물의 헌사다. 80이 넘은 노인이 되어 아내와 함께 다시 보는 ‘국제시장’은 여전히 감동이다.  김건흡 / MDC시니어센터 회원살며 생각하며 국제시장 시니어센터 운전석 아버지 아버지 노릇 우리 아버지들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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