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깊은 숨을 쉴 때마다
안개 속을 걷는다. 혼자가 좋다.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부담이 된다. 추석달이 서서히 움직인다. 보름달이 물안개를 벗어나 중천에 둥글게 떠있다. 모두가 떠나버린 집, 말라버린 연못에서 어깨 비비며 서걱이는 갈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쁨도 슬픔도 모진 고통마저도 나이 들면 홀로 맞고 극복해야 할 슬픈 세레나데다.
이제는 고백할 시간이다. 지난 몇해 동안 바람처럼 형체 없이 왜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는지. 유배생활 하듯 모든 인연 끊고 지내야 했는지를 말해야 한다. 내가 가장 믿고, 말없이 지켜주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내년 4월이면 3년이 된다. 투병생활 15개월을 합치면 꼭 4년이다. 그 세월은 길고도 너무 짧았다. 처음부터 비밀로 지키려 한 건 아니다. 동정과 연민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조용히 지켜주기를 간구했다.
어릴 적 엎어져 무릎 깨지면 엄마가 호호 불며 빨간 아까징끼를 발라줬다. “건드리면 덧난다. 딱지 앉을 때까지 손대지 마라”고 주의를 줬지만 참지 못해 딱지를 뗀다. 아직 덜 단단해진 빨간 살점에서 피가 흘렀다. 약 바르고 동여매도 속 깊은 상처는 얼마간 아물지 않는다. 죽음은 거미줄에 걸린 호랑나비처럼 한동안 퍼덕이다 숨을 멈춘다.
아픔은 시작보다 시간이 갈수록 극명해진다.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더 생생하게 삶의 곳곳을 파고 든다. 자동차 시동 걸 때 시트 벨트 매주던 손, 스테이크 잘게 썰어 접시에 담아주던 일. 시간에 쪼들려 덜렁대며 안전벨트 까먹기는 선수고 고기는 크게 썰어 마구잡이로 삼킨다. 마지막 항암치료 받고 화실로 나와 내 그림 보고 엄지 척! 눈을 크게 뜨고 미소 짓던 얼굴, 이제 이 세상에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얼마간은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이 도움이 됐다. 고통도 아픔도 혼자 삭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잊은 듯, 200점이 넘는 대작을 그리며 지냈다. 홀로 슬퍼하고 다독거리며, ‘It’s Okay to Not to be Okay’를 되뇌며 귀양살이하듯 사니 오히려 맘이 편했다.
문제가 발생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밤이면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혈압이 위험 수치를 넘어 응급실로 갔다. 심장질환 등 정밀검사에 돌입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외상 스트레스 장애(PTSD), 트리우마로 진단됐다. 타인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은 못 속인다. 트라우마 극복은 환자 자신의 노력과 긍정적 태도가 중요하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아니 여러번 충격적이고 힘든 순간을 맞는다. 이런 경험은 그때의 감정이 잊혀지면 자연스레 치유되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달린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작별은 가장 힘든 고통이다.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을 잊으려고 깊은 숨을 몰아 쉬며 시계바늘을 돌려 놓는다.
치유법을 실천하기로 한다. 약 대신 건강식 먹고 몸 추스리며 마음의 정원에 꽃을 심는다. 몇 사람과 소통 시작하고, 텃밭 가꿔 채소 나눠먹고, 노인이나 아픈 분에게 반찬 만들어 배달한다. 어릿광대 노릇 그만 두고, 슬플 때는 울고, 지치면 낮잠 자고 산책하며, 이제는 참고 견디며 잘난 체 하지 않는다. 깊은 숨을 쉴 때마다, 상실의 슬픔이 갈비뼈를 후려쳐도, 날개 접지 않고 사는 날까지 편안하기로 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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