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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죄

성경에 관해 질문이 많은 성도를 만났다. 이번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문제와 함께 오늘날 세상을 개탄하며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이렇게 악한 죄가 가득한 게 말이 되느냐며 짐짓 한탄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정말 걱정이 되느냐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왜 그러냐고 그가 눈으로 물었다. 우리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해서 세상이 이렇게 당신이 염려하는 죄로 가득 찼다고 대답했다.   초대 교회는 아무 힘이 없었다. 권력도 없었고 부도 없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부흥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있었다.   우리 어릴 때도 그랬다. 아주 오래전 시골 어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자기 아이들이 예배당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도 가서 좋은 소리 듣고 오라고 했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도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쁜 말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예수 믿는 것들이 더 나쁘다는 소리가 일상의 평가가 되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주신 마지막 명령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전도이고 선교다. 그런데 그 선교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하지 않는다. 선교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말씀대로 잘 사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자신들과 다를 때, 그것이 매력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존중하고 궁금해할 터인데, 우리의 삶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삶을 궁금해할 일도, 존중할 일도 없고 나아가 복음을 들을 내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살아낸,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힘없지만 담대한 삶은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큰 힘이었는데, 우리는 넉넉한 부와 부족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도, 행복하지도 당당하지도 않다.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교회의 탐욕을 지적당하고, 교인들의 행태가 비웃음당하고, 복음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 당한다.   그 모든 일이 성도가 잘 못 산 탓이다. 내 삶이 예수 안에서 반듯하고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를 무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들이 탐욕을 이루려 부패하고 타락하고, 문란하기에 그들이 믿는 복음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잘못되어가고, 세상에 죄가 번성한다고 한탄하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성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왜 전도가 안 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선교는 강요와 회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한다. 읽고 감동할 수 있는 편지인지, 아무 가치도 없이 비웃음당하고 구겨져서 버려지는 편지인지는 성도의 삶에 달려 있다.   교회에 은과 금은 가득 쌓였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일으키는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랜 시대에,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나는 나에게 묻는다. 성경은, 그리고 세상마저도 오히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 죄를 묻고 있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예수 그리스도 초대 교회 오래전 시골

2024-10-10

자칭 ‘하나님의 아들’의 드러난 민낯

  ━   원문은  LA타임스 9월24일자 ‘He told followers he was the son of God. She helped get him arrested on sex trafficking charges’ 제목의 기사입니다.     1999년 새해 전야, 필리핀 다바오시 한 건물. 알린 스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날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재림할 것이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도 곧 예수가 내려와 자신들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톤과 함께 있던 이들은 일명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Kingdom of Jesus Christ)’ 교회 소속 신도들이다. 스톤을 포함한 신도들은 이 종교단체의 영적 리더이자 ‘하나님이 임명한 아들’ 또는 ‘우주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아폴로 퀴볼로이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라왔다. 1991년 10대 시절부터 이 교회를 다녀온 스톤은 퀴볼로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이날 구름은 없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세상도 종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날 현장에서 돌아가던 안개를 만드는 기계 두 대가 과열로 터졌고 하늘에서는 퀴볼로이가 구름이 아닌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는 신도들에게 종말이 가까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말은 가깝기만 했을 뿐 오지는 않았다.   스톤은 “그 순간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라고 회상했다. 이날 일은 스톤에게 전환점이 됐다. 결국 교회를 떠나 미네소타로 이주해 퀴볼로이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는 필리핀 상원에 퀴볼로이가 저지른 범죄를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연방수사국(FBI)과도 퀴볼로이의 수사에 대해 인터뷰했다.   지난 8일, 퀴볼로이는 다바오시의 한 건물에서 2주간 대치하다 필리핀 당국에 체포됐다. 이 건물은 1999년 퀴볼로이가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 스톤과 신도들에게 세상이 종말할 것이라고 말했던 같은 장소다.   그는 인신매매와 아동 성폭행과 학대 등 여러 범죄 혐의로 캘리포니아주와 필리핀에서 기소됐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모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퀴볼로이를 대변하는 이스라엘리토 라 토레온 변호사는 “소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고 완전히 거짓이다. 한 조각의 진실도 없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토레온은 LA타임스의 추가 답변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지난 2020년 1월29일 조용한 새벽 시간, 10여명의 FBI 요원들이 LA인근 밴나이스에 있는 작은 교회를 급습했다. 퀴볼로이 추종자들이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교회였다.   연방 검찰은 이날 현장에서 체포한 퀴볼로이 추종자들을 대규모 이민 사기와 인신매매 혐의로 기소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이 종교단체는 필리핀에서 이민 온 노동자들에게 거리에서 기부금을 구걸하도록 강요했다. 이 단체 지도자들은 모인 기부금으로 필리핀의 아동들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퀴볼로이와 다른 지도자들의 호화스러운 삶을 유지하는데 쓰였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연방 검찰은 피해자들이 일일 모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당했다고 기소장에 명시했다.   피고인들은 신도들에게 위장 결혼을 강요했으며 미국 시민권을 얻은 뒤 미국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계속 모금할 수 있도록 하는 이민 사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됐다.   예수 그리스도 왕국 LA지부는 1990년대에 밴나이스에 세워졌다. 퀴볼로이는 매년 한두 차례 이곳을 방문해 설교를 하곤 했다.   퀴볼로이가 필리핀에서 체포되었을 때 LA지부 추종자들은 필리핀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교인은 11살 때부터 교회를 위해 기부금을 구걸하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그는 “식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타주로 출장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면서 “학교가 끝나면 교회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잠 자고, 일어나서는 학교에 가서 모금하고. 주말에도 모금 활동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 차량을 운전하다 사고를 냈는데, 교회측에서는 악마가 들었다면서 악마를 쫓아내기 위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1살 되던 지난 2019년 교회에서 한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가 구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쫓겨났을 때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현실’을 보기 시작했고, 퀴볼로이도 그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단체 지도자들에 대한 검찰 기소는 당초 강제 노동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 1년이 지난 후 이 집단 내에서 훨씬 더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2021년 11월 캘리포니아 중부지부 연방 검찰은 퀴볼로이를 ‘글로벌 성매매’ 음모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했다.   퀴볼로이와 그의 최측근들은 성가대원들과 그룹 리더의 조수로 일하는 12~25세 사이의 어린 소녀와 여성들을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모집했다. 이들은 퀴볼로이의 방을 청소하고 식사를 제공하고 마사지를 해주었다고 연방검찰은 주장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이 소녀들은 ‘야간 근무’를 해야 했는데, 이를 거부할 경우 ‘신체적, 언어적 학대와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위협 아래 퀴볼로이와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   소녀들은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악마가 안에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다른 남자들과 대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야간 근무에 대해서는 언급 조차 금지됐다.   기소장에 따르면 성매매 음모 혐의의 일부 행위는 가주에서 저질러졌다. 퀴볼로이는 FBI의 최고 수배자 명단에 올라있다.   퀴볼로이의 모친은 1950년 퀴볼로이가 태어날 때 구름 위에 앉아 있는 하나님을 보았다 주장하고 있다. 또 퀴볼로이는 출생 당시 신이 어머니에게 “이 아이가 내 아들이다”라고도 말했다고 주장한다. 9남매 중 막내인 퀴볼로이는 다바오시 외곽 타마용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교회에 따르면 그는 14살 때 세상의 종말을 보는 꿈을 꾸면서 처음으로 영적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설교자가 된 그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퀴볼로이에 따르면 신은 그에게 “내가 너를 쓰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85년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시작하면서 ‘전임 기적의 일꾼’을 모집하여 기부금을 모아 단체에 전달했다.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 중 하나는 퀴볼로이의 생활 방식이 극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퀴볼로이는 개인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다녔고 칼라바사스 등 미국에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그의 노동자 신도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장신구를 팔았다.   퀴볼로이는 필리핀에서 양극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필리핀에 400만 명, 해외에 200만 명 이상의 추종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2016년부터 2022년까지 필리핀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이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30년 이상 측근이자 친구였다.   리사 혼티베로스 상원의원은 “퀴볼로이는 권력을 축적하고 필리핀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들, 특히 두테르테 일가와 팔꿈치를 비비면서 여성과 아동을 조직적으로 학대했다”며 그에 대한 범죄 의혹을 제기했다. 혼티베로스는 올해 퀴볼로이에 대한 상원 조사를 이끌었다.   퀴볼로이의 체포로 필리핀 정치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가문인 두테르테 가문과 마르코스 가문 사이의 균열이 드러나기도 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는 현재 부통령이고, 전 독재자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대통령이다.   마르코스는 퀴볼로이의 체포에 찬성한 반면 사라 두테르테는 퀴볼로이가 두테르테 가문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사법 당국이 표적 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퀴볼로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자란 스톤은 10대에 이 단체의 목사가 됐다. 스톤은 성폭행을 당하진 않았지만 스톤은 왕국의 남성 회원들과 어울리다 문제가 되어 퀴볼로이에게 직접 여러차례 ‘처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한 번은 퀴볼로이가 날 몽둥이로 60번이나 때렸다”면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저를 때리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1999년 종말론으로 회의를 품은 그녀는 미국인 남성과 결혼했고, 그와 함께 미네소타로 이주했다.     8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던 스톤은 다시 학업을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종교단체에 들어갔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심리학, 신학,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끔찍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이 퀴볼로이를 무너뜨리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직 교인들이 그녀를 찾아와 단체 안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스톤은 FBI에 이야기들을 전했다. 또한 그녀는 필리핀 입법부에 퀴볼로이와 그의 교회에 대한 의혹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며 혼티베로스 의원에게도 연락했다.   혼티베로스 의원은 “퀴볼로이는 자신의 사악한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거대한 사기꾼으로 드러났다”면서 “수개월 동안 숨어다니며 법치를 조롱하던 거짓 선지자가 마침내 세상에서 퇴출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노아 골드버그 기자미국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필리핀 상원 필리핀 당국

2024-09-25

세례를 받지 아니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

    세례요한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는 요한의 세례를 거부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누가복음 7장30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례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서 구원자가 도래할 것, 회개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버리다’는 ‘아데테오(ἀθετέω)’로,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계획은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 믿지 않는 것은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됨은 구약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待望)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교회와 성경과 가까이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내가 깨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깨어 있어야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깨어 있어야 들려지고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은 그들이 누리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생으로, 지도자로 추앙받는 그 위치가 마치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 그들의 위치는 권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섬기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생각함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수단, 자신들을 나타내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말씀의 의미보다는 그 말씀을 빙자해서 말씀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순결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성전에서 돈을 주고 받으면서 이익을 취하고,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께 예배 드려지는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권력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잡히시고, 고난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에 외식도 하지 않고, TV, 인터넷도 금해야 하며, 즐거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며, 얼굴을 어둡게 하고 다닙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행동이 또 다른 나의 의로움과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면서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묵상입니다. 나의 나 됨은 권력도, 물질도, 명예도 아닙니다. 뭔가 의로워 보이는 행동도 아닙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됨이 나의 수고가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은’임을 잊어 버립니다. 나의 나 됨이 권력, 명예, 물질이라면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한순간 잠깐 잊어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왜곡하고, 신앙도 왜곡된 신앙으로 살면서 그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바로 깨달아 아는 삶으로 주님의 은혜, 그리스도 예수를 바로 알고, 믿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바리새인 세례 율법 교사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2024-03-29

[열린광장] ‘빈 무덤’, 예수 부활의 현장

이제 부활절이다. ‘부활’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쳐부수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대 사건이다. 바로 기적 그 자체다. 인류 역사에서 이같은 기적이 일어난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예수 부활은 그래서 단 하나, 유일무이한 패러다임인 인류 역사의 정점이 될 수밖에 없는 최대의 대사건이다. 그래서일까? 2000년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워낙 그 사건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인지 ‘증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오죽했으면 3년간을 함께 생활했던 당시 그분의 제자 토마스마저도 직접 눈으로 그분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어렵사리 스승의 부활을 믿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거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나 단순하기에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증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 이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다. 무덤을 보면서 아무도 그 안에 묻혀 있는 사람의 주검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덤 자체가 바로 죽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서 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황한 과학적 증거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분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한마디로 나와 있다.   그 까닭에  ‘빈 무덤’은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의 해방이기에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시무시한 죽음의 원인인 질병과 사고, 재난,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공포마저도 우리를 가두어 놓지 못한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데살로니까 전서5:16)”라고 일깨워 주시고 있는 것 아닐까.   모두 행복한 부활절 보내세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열린광장 무덤 예수 예수 부활 예수 그리스도 무덤 자체

2024-03-28

‘그리스도의 군사들’ 피고인 7명 ‘무죄’ 주장

지난해 9월 조지아주 귀넷 카운티에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들(Soldiers of Christ)’이라고 칭하며 집단적으로 한국인 조세희(33)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혐의를 받고 있는 한인 피고인 7명 중 2명이 17일 법정에 출석해 무죄를 주장했다.     귀넷 카운티 검찰은 지난해 11월 말 이들 피고인을 중범죄 살인, 불법 감금, 시신 은닉, 증거변조, ‘리코(RICO)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온 피해자 조씨를 굶기고 구타하는 등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두 사람을 포함, 조씨 살인사건 용의자는 모두 7명으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라는 조직을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준호(26)와 동생 이준현(22),이준영(15), 삼형제의 어머니 이미희(54), 한국에서 방문한 이들의 사촌 이가원(26), 이준호의 약혼녀로 알려진 이현지(25), 이준호의 고교 동창으로 알려진 에릭 현(26)이다.   17일 귀넷 수피리어 법원에서 타멜라 앳킨스 판사의 주재로 열린 기소인부절차 신문에는 이준영(15)군과 어머니 이미희(54)씨만 출두했다. 기소인부절차란 피고인에게 기소 사유를 알려주고, 피고인은 자신이 유죄 또는 무죄라고 답변하는 짧은 절차다. 검찰은 이날 피고인에게 기소장, 체포영장, 증인 77명의 리스트를 전달했다.           이날 법정에 출석한 두 피고인 모두 무죄라고 주장했으며, 법정 출석 기피를 신청한 나머지 피고인 다섯명도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당초 이날 오전 9시 30분에 예정된 심리는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시작됐다. 이날 먼저 출두한 이미희씨는 손목에 수갑을 차고 등장했다.   이씨가 입장하고 퇴장하기까지 3분여가 채 안걸린 짧은 절차였다. 이후 이준영씨가 수갑 없이 입장했으며, 마찬가지로 ‘무죄’라는 답변으로 짧게 끝났다. 두 피고인 모두 한국어 통역사가 함께 했다.   이미희씨가 법정을 나설 때 방청석에서 남편 이지용씨와 이야기를 건네려 했으나 법정 관리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았다. 이씨는 또 아들 이준영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피고인 이준현의 변호를 맡은 제이슨 박 변호사는 “(이씨가) 뉘우치지 않아서 법정에 출석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조지아에서 살인죄의 법정 최소형이 종신형이기 때문에 일단 무죄를 주장한 것”이라며 현재 피고인 관련 자료를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 살인사건 관련 7명의 피고인이 모두 기소인부절차를 마침에 따라 앞으로 본격적인 재판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윤지아 기자애틀랜타 그리스도 수피리어법원서 기소인부절차 기소인부절차 신문 전원 무죄

2024-01-17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열린광장] 성탄일(日) 과 성탄지(地)

달력의 마지막 달 12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온다.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지만 사람들은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고 들썩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이지만 예수가 태어난 날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도 다윗 임금 때는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5마일  떨어져 있는 요르단에 속해 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보다는 탄생일인지 확실치 않은 12월 25일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의 중요성은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 베들레헴 너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우리 임금 주 우리 모두 절하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베들레헴에 나셨네.” “그 한 별이 베들레헴 향하여 바로 오더니,  아기 예수 누우신 집 그 위에 오자 멈췄네.”  “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에 나신 주”   여기서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빵(식량)의 집’, 아랍어로는 ‘고기(육류)의 집’ 이란 뜻인데 이런 곳에서  영혼의 양식인 예수가 탄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조용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예루살렘이 속한 이스라엘은 지금 전쟁터가 되어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기리는 12월 25일은 A. D. 336년의 로마 달력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때 처음 예수의 성탄일로 경축한 날이다. 다만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헤롯 대왕 때에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12월 25일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두 사람이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과 미국의 적십자사를 창설한 클라라 발톤이다. 이들을 기억하면 예수의 탄생일이 좀 더 뜻깊은 명절이 될 성싶다.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에 린컨숴에서 태어났다.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고 연금술을 연구하고 나중에 신학과 성서 연대기를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뉴턴은 로열 소사이어티의 총장이 되었고 앤 여왕으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727년 숨진 뉴턴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미국적십자사를 세운 발톤은 많은 사람으로 부터 ‘전장(戰場)의 천사’ 란 애칭으로 불릴 만큼 많은 부상병과 환자를 돌본 여성이다.  그녀는 1821년 12월 25일에 태어났다. 발톤은 미국도 전쟁 희생자 보호를 위한 ‘제네바 협약’을 비준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미국도 1882년 이를 비준했다. 그녀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The Red Cross’가  가장 유명하다.          성탄절이 다가오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지속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라디오나 TV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슬픈 성탄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수가 탄생한 날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맞이하면서….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성탄일 성탄지 탄생지인 베들레헴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캐럴

2023-12-14

인물로 보는 신약성경:동방박사

 마태복음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태복음 2장1절. ‘헤롯 왕 때’입니다. 헤롯 왕 때의 유대 땅이라는 것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상태라는 것은 그렇게 편안한 때가 아닙니다. 헤롯 왕은 B.C 40년에서 B.C 4년경까지 약 35년 동안 유대를 다스립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없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이 시간을 ‘가능성이 없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의 경험입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의 시대를 지낼 때에도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헤롯 왕 때’라는 의미는 한 편으로는 ‘바벨론의 포로시대를 기억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에서 해방이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의 길을 걷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에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먼저 목격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동방박사입니다.여기에서 동방박사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당시 점성술이 발달한 바벨론, 페르시아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에 박사라는 것은 ‘마고스’로 박사, 마술가, 요술가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 탄생을 목격한 사람이 그 많은 유대인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의 그 중에서도 별을 보며 점을 치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는 곳이 바벨론이건, 페르시아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탄생’을 알고 자신들의 나라를 떠나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곳까지 왔다는 것입니다.그들이 온 이유는 이렇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 2장2절. ‘경배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경배하다’는 ‘프로스퀴네오’로 ‘예배하다, 절하다, 꿇어 엎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오다는 ‘에르코마이’로 ‘돌아오다, 돌아가다’의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는 나라, 그리고 그 나라가 섬기는 신으로부터 돌이켜서 메시야,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동방의 나라로부터 유대 땅까지는 약 1000마일의 거리입니다.ㅡ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많은 날들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를 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에 예언된 유대 땅에 나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보고, 자신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돌이켜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12월이면 성탄절로 모든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그런데 왜 열광합니까?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라, 이날은 구약에 예언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이 날을 기뻐하는 것은 동방박사처럼 그에게 ‘돌이켜 경배하기 위함’입니다. 동방박사의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태복음 2장3절. 여기에 ‘소동하다’는 ‘타랏소’로 ‘뒤흔들다, 혼란케  하다’의 뜻입니다. 헤롯 왕이 소동한 것은 자신의 권력이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은 이제 헤롯 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유대인들이 탄압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정작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담대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이번 성탄절에는 그 의미를 바로 알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우리의 경배를 올려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신약성경 동방박사 구원자이신 예수님 메시야 그리스도 유대 베들레헴

2023-12-01

[열린광장] 이름에 담긴 의미

1910년 대한제국과 일본의 병합조약으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게 되었고 이후 우리는 호적의 성을 바꿔야 하는 고통까지 겪었다. 나도 호적에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변씨(卞氏)라는 성 대신 일본인이 만들어 준 도쿠야마(德山)라는 일본식 성으로 기재가 됐었다. 이 치욕스러운 일이 일제 치하에 겪었던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미국에 와서 첫 직장을 얻었는데 당시 루스라는 이름의 부사장이 내게 베드로라는 이름의 명찰을 만들어 주었다.  루스는 회사 내에서는 동료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고 내가 베드로를 닮은 데가 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백인인 루스는 직장 상사였지만 내가 미국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분이었다.     사실 당시 나도 미국식인 직장 동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은 알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당황한 적도 많았다. 차라리 내가 부르기 쉽게 그들의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1978년에 시민권을 취득하며 미국 이름을 ‘베드로’로 했다. 당시 아내는 ‘바버라’, 딸은 ‘버지니아’, 아들은 ‘로이’ 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는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개명이었다. 아버님이 지어준 이름을 바꾼다는 죄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새 이름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당시 나는 ‘베드로’ 라는 성경의 인물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그 후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벽기도를 다니는데 어느 집 앞을 지날 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하자 말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답한 부분이 생각났다. 나는 매일, 어디에서,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모른다고,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자녀 이름을 지을 때 이름처럼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름을 잘 지었다고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삶을 살 때 그 이름이 존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좁게는 가정에서, 넓게는 사회와 국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 좋은 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신 분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들처럼 살 수는 없다. 다만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귀한 일을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직자의 입장에서도 훗날 내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욕되지 않게 사는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변성수 / 교도소·사역 목사열린광장 이름 의미 자녀 이름 예수 그리스도 식인 직장

2023-11-13

목회칼럼 / 신약의 인물탐구 - 빚진 자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구절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빚진 자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에 ‘빚 주는 사람’은 ‘다네이스테스’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 채권자’입니다.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분에 의해서 돈을 빌려주게 된 사람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화폐 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로마에서 중요하게 통용되는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흔히 1데나리온을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당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그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일당이 현대의 일당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의 일당으로 환산을 한다면 $1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의 일당은 밥 세 끼를 겨우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으로 한다면 $30도 안 되는 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500데나리온은 그런 노동자가 500일을 꼬박 일해서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리고 50데나리온은 50일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채무자가 모두 ‘갚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갚을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포디도미’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다, 포기하다, 지불하다’의 뜻입니다. 즉, 갚을 여유가 없다는 표현과 함께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윳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채권자는 이들에 대해서 채무를 면제해 줍니다. 성경에는 ‘탕감해 주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리조마이’인데, ‘거저주다, 은혜를 베풀다, 용서해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해서 모두 대신 지불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당연하게 더 많이 빚진 자가 더 고마워하고, 더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 시몬의 대답입니다. 물론 우리도 시몬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500과 50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시몬의 대답을 정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빚진 자’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능력이 없는 사람일까요?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그 마저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빚진 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을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는 얼마의 돈이 있을까요? 반면에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 얼마가 남아 있을까요?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요? 아주 많은 죄를 지은 사람, 아주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사람이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함을 받은 후에 덜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기준을 하나님은 매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죄가 더 심각합니까? 아니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죄가 심각합니까? 그 대가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더 심각하고, 덜 심각한 것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심각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각한 죄만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죄가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좀 한 것과 사람을 죽인 것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졌는가? 아니면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진 자’임을 바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갚지 못할 심각한 빚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탕감을 받게 되었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건, 교회에 실망을 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해서 스스로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은 좀 낮은 등급, 누구는 높은 등급의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A등급이상의 심각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2월 성탄절. 우리의 이 심각한 상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로 알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인물탐구 예수 그리스도 화폐 개혁 당시 노동자

2022-12-23

[문화산책] 그리스도의 사랑 담은 미술

성탄절이면 떠오르는 그림들이 있다.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 권순철의 ‘예수님 얼굴’, 김병종의 ‘바보예수’ 등이다. 우리 시대 한국의 종교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은 작가의 종교관과 예술관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 작가가 서양의 문화와 정신을 어떻게 받아들여 예술작품으로 표현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말해준다. 작품에 담긴 사연이나 시대정신을 알고, 감상하면 숙연해지는 부분도 많다.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박해, 그리스도의 공생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등 예수의 일대기를 한국의 전통 풍속화로 재해석하여 파노라마처럼 화폭에 담아낸 역작이다. 예수의 삶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하여, 갓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를 비롯해 조선시대 복색을 한 인물과 초가, 기와집 등 전통 가옥 등이 풍속화를 연상시킨다. ‘예수의 생애’ 연작은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과감한 시각, 기독교의 한국화라는 관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종교와 미술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 회화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 중에 탄생한 성화(聖畵)로 전쟁과 종교 그림이라는 대비에서 오는 상징성이 큰 울림을 준다. 운보는 한국전쟁 중인 52∼53년 아내 박내현의 친정이 있는 군산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이 ‘예수의 생애’ 29점을 1년 반 만에 완성했다. 나이 40세 때였다. 그 3년 뒤, 부활 그림을 추가해 30점으로 완성했다. 피난시절의 가난과 엄혹한 환경에서, 화구도 구하기 힘든 여건에서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성화를 그리는데 온 힘을 쏟았다고 고백했다.   “온 국민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시기에 예수의 행적을 그려보는 것도 계기가 될 것 같아 성화를 그리는 것으로 암울한 시기를 이겨 나갔다.”   서양화가 권순철의 ‘예수 얼굴’ 연작은 두터운 질감과 거칠고 강렬한 필치의 대작들이다. 가로 3m가 넘는 500호의 대형 캔버스를 예수 얼굴 하나로 가득 채운 작품은 성화로 소문이 나면서 교계와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작가의 작품세계가 더욱 조명되기도 했다. 권순철 화백이 예수 얼굴 연작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2012년에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같은 시기,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는 큰 슬픔을 겪었다. 권순철은 전시장 한쪽에 아내의 빈소를 조촐하게 마련했다. 아내에게 전시회를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권순철은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깊은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찾아온 예수의 십자가 얼굴은 사랑과 위로가 되어 영혼을 되찾았다고, “예수의 얼굴 속에서 사랑을 확인했다”고 그는 말한다. “예수님의 표정에서 한국인 넋을 읽어냈다”고 말하기도 한다. 권순철이 그린 예수의 얼굴은 인자함이 아니라 대속의 고통과 고뇌, 비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권순철 화백은 말한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고 목수 일을 하며 밑바닥 삶을 사셨지요. 그 말구유 정신을 배워야 해요.”   한국화가 김병종의 ‘바보예수’ 연작은 작품 제목으로 인해 1980년대 기독교계에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과 협박을 받았고, 동양화단에서는 먹으로 예수를 그렸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럽의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재평가되었다. 어쩌면 ‘바보’ 같은 희생이 담긴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이 85세 때 그린 자화상 아래쪽에는 ‘바보야’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김병종의 ‘바보예수’ 연작도 같은 믿음을 담고 있다.   성탄절을 맞아 이런 그림을 보면서, 나의 신앙을 되돌아본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그리스도 사랑 공생애 그리스도 예수님 얼굴 예수 얼굴

2022-12-22

[삶의 뜨락에서] 스쳐 간 옷깃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아는 여자를 만났다. 아는 여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글자 그대로 아는 여자일 수도 모르는 여자일 수도 있는 그런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미팅이라는 교제의 시간에 파트너가 되었던 여자였다. 그때는 별다른 사연도 느낌도 없이 그 시간이 끝나고 남남이 되었던 사이이니 그냥 한번 얼굴 마주한 사람인데 우연히 만난 그 시간에 다시 인사하니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괜찮은 거 있지.” 그렇게 교제가 시작되어 결국은 결혼까지 하고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만나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스쳐 간 행인이 된다.     스치고 지나갈 사람이 장미의 가시로 남았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무심히 지나 보낸 기억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같은 길에 들어서서 인사를 한다. 누구신가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면 낯선 얼굴이지만 낯익은 얼굴로 다가온다. 어느 시간 속 어느 장소에서 같이 있었던 그림이 찾아낸 번호표처럼 깜짝 떠오른다. “아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 “이제 기억나세요” 다시 시작하는 대화로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기분 좋게 동행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지내는 지금의 사회생활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이쪽의 옅은 관심만큼 저쪽의 관심 또한 약할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담은 시선으로 보면 좋은 관계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 아까운 경우가 많은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약간 슬픈 현실이다.   동그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세모난 사람, 네모난 사람, 마름모꼴 사람 등 다른 모양의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므로 그들과의 만남도 의미 없는 물리적 접촉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어렵게 참아낸 뒤 만나게 된 동그란 사람은 그 손가락 끝의 작은 부딪힘도 큰 불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람 없을까”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무리 작게 보는 사람이라도 가장 크게 보이는 '이런 사람' 이기 때문에 그 만남은 우주에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무한한 공간 우주 속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로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이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닐 때 신기한 만남의 의미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적을 행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멈추어 선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함께 가는데 한두 사람이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대었을까요.” 제자들의 무심한 대답에 “아니다. 그런 무의미한 접촉이 아니고 누가 나의 옷깃을 깊은 믿음을 실어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나와 고백한다. 오랜 병마에 고생하던 그가 예수의 명성을 듣고 살짝 예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고 감히 손을 대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는 말했다. “너의 그 믿음으로 너는 병을 치유하고 네 삶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 시간 많은 사람이 예수와 몸이 닿았고 스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우주의 기적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의미 때문에 또 오랜 격리 상태 후에 해방감에서도 많은 인위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은밀히 이루어지던 남녀 만남의 기회조차 방송에 공개적으로 개방하여 보여주는 것도 있을 만큼 옛날 말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그저 딱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어떤 모양으로 지나쳐가던 그 옷깃은 역시 크게 귀중할 수 있는 까닭에 눈을 크게 깨끗이 뜨고 지혜를 담은 시선으로 찾아다니던 자기의 옷깃에 기적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가치를 갖게 되었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옷깃 예수 그리스도 공간 우주 의미 때문

2022-11-18

[삶의 뜨락에서] 스쳐 간 옷깃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아는 여자를 만났다. 아는 여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글자 그대로 아는 여자일 수도 모르는 여자일 수도 있는 그런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미팅이라는 교제의 시간에 파트너가 되었던 여자였다. 그때는 별다른 사연도 느낌도 없이 그 시간이 끝나고 남남이 되었던 사이이니 그냥 한번 얼굴 마주한 사람인데 우연히 만난 그 시간에 다시 인사하니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괜찮은 거 있지.” 그렇게 교제가 시작되어 결국은 결혼까지 하고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만나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스쳐 간 행인이 된다.     스치고 지나갈 사람이 장미의 가시로 남았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무심히 지나 보낸 기억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같은 길에 들어서서 인사를 한다. 누구신가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면 낯선 얼굴이지만 낯익은 얼굴로 다가온다. 어느 시간 속 어느 장소에서 같이 있었던 그림이 찾아낸 번호표처럼 깜짝 떠오른다. “아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 “이제 기억나세요” 다시 시작하는 대화로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기분 좋게 동행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지내는 지금의 사회생활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이쪽의 옅은 관심만큼 저쪽의 관심 또한 약할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담은 시선으로 보면 좋은 관계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아까운 경우가 많은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약간 슬픈 현실이다.   동그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세모난 사람, 네모난 사람, 마름모꼴 사람 등 다른 모양의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므로 그들과의 만남도 의미 없는 물리적 접촉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어렵게 참아낸 뒤 만나게 된 동그란 사람은 그 손가락 끝의 작은 부딪힘도 큰 불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람 없을까”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무리 작게 보는 사람이라도 가장 크게 보이는 “이런 사람” 이기 때문에 그 만남은 우주에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무한한 공간 우주 속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로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이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닐 때 신기한 만남의 의미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적을 행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멈추어 선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함께 가는데 한두 사람이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대었을까요.” 제자들의 무심한 대답에 “아니다. 그런 무의미한 접촉이 아니고 누가 나의 옷깃을 깊은 믿음을 실어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나와 고백한다. 오랜 병마에 고생하던 그가 예수의 명성을 듣고 살짝 예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고 감히 손을 대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는 말했다. “너의 그 믿음으로 너는 병을 치유받고 네 삶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 시간많은 사람이 예수와 몸이 닿았고 스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우주의 기적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결국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의미 때문에 또 오랜 격리 상태 후에 해방감에서도 많은 인위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은밀히 이루어지던 남녀 만남의 기회조차 방송에 공개적으로 개방하여 보여주는 것도 있을 만큼 옛날 말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그저 딱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어떤 모양으로 지나쳐가던 그 옷깃은 역시 크게 귀중할 수 있는 까닭에 눈을 크게 깨끗이 뜨고 지혜를 담은 시선으로 찾아다니던 자기의 옷깃에 기적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가치를 갖게 되었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옷깃 예수 그리스도 의미 때문 공간 우주

2022-11-14

[시조가 있는 아침] 벽오동(碧梧桐) 심은 뜻은

  ━   벽오동(碧梧桐) 심은 뜻은     무명씨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인가 기다려도 아니온다   무심한 일편(一片) 명월(明月)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 병와가곡집   봉황(鳳凰)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봉황은 상서로운 길조(吉鳥)다. 대통령 휘장으로도 쓰인다. 성인군자가 나타날 때만 오동나무 동산에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푸른 오동나무를 심은 뜻은 봉황새가 와서 깃들기를 바라는 것이었는데, 부덕한 내가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무심한 한 조각 밝은 달만 빈 나뭇가지에 걸렸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시조의 작자는 어지러운 현실을 구원해 줄 성인군자가 출현해 주기를 고대하며 준비하고 있지만, 성현은 아니 오고 한 조각 무심한 달빛만 비치고 있으니 그것은 당초에 부질없는 꿈이었던가? 혼탁한 이 시대, 지금도 이러한 심경으로 어지러운 현실을 탄식하며 진정한 지도자를 기다리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시가(詩歌) 박씨본(朴氏本)에는 이세보(李世輔)가 지은 유사한 작품이 전한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 올까 하였더니   봉황은 아니 오고 오작(烏鵲)만 날아든다   동자야 오작 날려라 봉황 오게   기다리는 봉황은 아니 오고 까마귀와 까치만 날아든다니, 지금 우리의 현실에는 이 노래가 오히려 더 어울릴 듯하지 않은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더욱 우리의 가슴을 치는 노래라고 하겠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벽오동 오동나무 동산 예수 그리스도 대통령 휘장

2022-10-13

[삶과 믿음] 예수의 선포 3 -하나님 나라

지난 칼럼에는 ‘예수 자신’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살펴보았다. 이번 칼럼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많은 신앙인은 하나님 나라를 죽으면 들어가는 천국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the Kingdom of Haven)’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회개하라’는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3:2),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고 기록한다. 그 외에서 수많은 유사한 사건에서 마태복음은 천국,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라고 기록하기 때문에, 천국은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한 단면은 죽고 나서 가게 되는 천국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마7:21) 말씀하셨는데, 한국어 성경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천국에 있다”고 전한다. ‘들어간다’는 의미의 동사와 전치사(eis)와 ‘…에 있다’를 의미하는 전치사(en)가 뚜렷이 대구를 이룬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데(마 3:2; 4;17; 10:7), 이는 하나님이 예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실체라는 것을 예수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 장소적 의미를 넘어서 더 깊고 풍부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예수 스스로 증거하고 있으며(눅4:43),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눅  8:1),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냈다(눅 9:2). 예수의 사명 핵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세상에 널리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예측 가능한 나라와 예측 불가능한 나라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측 가능한 나라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종말과 관련된 나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세우는 나라에 관한 것인데 제자들도 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다. 제자들은 또한 하나님 나라에 누가 들어갈 것인가, 누가 들어가지 못할 것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자신들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버린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린 늘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충만하다.     예수께서도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마16:16-19), 악한 자는 쫓아버리고 선한 자들만이 속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나라를 선포했다(막4:1-20; 마12:28). 하나님 나라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나라며(마7:21-24), 의인들이 해와 같이 빛나는 나라고(마13:43), 눈이 범죄하면 눈을 뽑아버리고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은 나라다(막9:47).     그런데 예수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도 선포했다. 예측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음 칼럼에서 다루겠다.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삶과 믿음 하나님 예수 하나님 나라 나라 그리스도 예수로 우리

2022-04-28

[등불 아래서] 바른 것은 아름답다

 'orthodox'는 정통을 말한다.     옳다 혹은 바르다는 'ortho'와 견해를 의미하는 'doxa'의 합성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옳은 견해나 믿음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절대적 진리보다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보는 시대에서 정통이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단어일 것이다.   과거에 정통은 경건 믿음 헌신과 함께 어울렸지만 지금은 독단 관습 권위 기득권 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옳은 길이라는 말이 틀린 길을 전제하고 있으니 정통은 태생이 좀 교만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정통에 대한 거부감은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라는 말이나 태도가 큰 몫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것만은 아니다. 옳고 틀린 길 역시 존재한다. 비록 어떤 분의 말처럼 그 길을 투표로 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정의를 공동체가 만들어가든 개인에게 모두 맡기든지 옳은 길을 결정해야 한다.     신앙이란 옳은 길을 정해놓고 가자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옳은 길을 결정하는 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다양하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각자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정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정통일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가 가진 확신이 아니라 질문이다. 내가 정통인가 내 견해는 완전하고 안전한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통이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믿음은 내가 정통이라는 자랑이 아니라 나는 정통이 아니라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참된 정통은 내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나를 부인한다. 내가 옳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 믿음은 내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할수록 교만한 나를 알아가며 기도에 힘쓸수록 연약한 자신을 발견한다. 끊임없이 내가 '사이비'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이 '정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라".   이때 바른 믿음은 아름다운 향기를 뿜는다. 치아를 바르게 하는 일은 치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정통이신 예수님이 사신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로소 우리는 신앙을 지니지 않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 되는 것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정통이신 예수님 경건 믿음 예수 그리스도

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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