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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스쳐 간 옷깃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아는 여자를 만났다. 아는 여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글자 그대로 아는 여자일 수도 모르는 여자일 수도 있는 그런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미팅이라는 교제의 시간에 파트너가 되었던 여자였다. 그때는 별다른 사연도 느낌도 없이 그 시간이 끝나고 남남이 되었던 사이이니 그냥 한번 얼굴 마주한 사람인데 우연히 만난 그 시간에 다시 인사하니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괜찮은 거 있지.” 그렇게 교제가 시작되어 결국은 결혼까지 하고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만나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스쳐 간 행인이 된다.  
 
스치고 지나갈 사람이 장미의 가시로 남았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무심히 지나 보낸 기억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같은 길에 들어서서 인사를 한다. 누구신가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면 낯선 얼굴이지만 낯익은 얼굴로 다가온다. 어느 시간 속 어느 장소에서 같이 있었던 그림이 찾아낸 번호표처럼 깜짝 떠오른다. “아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 “이제 기억나세요” 다시 시작하는 대화로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기분 좋게 동행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지내는 지금의 사회생활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이쪽의 옅은 관심만큼 저쪽의 관심 또한 약할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담은 시선으로 보면 좋은 관계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 아까운 경우가 많은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약간 슬픈 현실이다.
 
동그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세모난 사람, 네모난 사람, 마름모꼴 사람 등 다른 모양의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므로 그들과의 만남도 의미 없는 물리적 접촉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어렵게 참아낸 뒤 만나게 된 동그란 사람은 그 손가락 끝의 작은 부딪힘도 큰 불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람 없을까”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무리 작게 보는 사람이라도 가장 크게 보이는 '이런 사람' 이기 때문에 그 만남은 우주에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무한한 공간 우주 속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로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이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닐 때 신기한 만남의 의미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적을 행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멈추어 선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함께 가는데 한두 사람이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대었을까요.” 제자들의 무심한 대답에 “아니다. 그런 무의미한 접촉이 아니고 누가 나의 옷깃을 깊은 믿음을 실어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나와 고백한다. 오랜 병마에 고생하던 그가 예수의 명성을 듣고 살짝 예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고 감히 손을 대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는 말했다. “너의 그 믿음으로 너는 병을 치유하고 네 삶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 시간 많은 사람이 예수와 몸이 닿았고 스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우주의 기적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의미 때문에 또 오랜 격리 상태 후에 해방감에서도 많은 인위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은밀히 이루어지던 남녀 만남의 기회조차 방송에 공개적으로 개방하여 보여주는 것도 있을 만큼 옛날 말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그저 딱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어떤 모양으로 지나쳐가던 그 옷깃은 역시 크게 귀중할 수 있는 까닭에 눈을 크게 깨끗이 뜨고 지혜를 담은 시선으로 찾아다니던 자기의 옷깃에 기적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가치를 갖게 되었다.

안성남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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