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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폭동 32년 정치권 침묵…배스 시장 27단어 성명서

LA폭동 32주년을 맞아 정치권이 침묵 또는 망각을 이어가고 있다. 1992년 경관들의 로드니 킹 폭행과 두순자 총격 살해 사건〈본지 4월29일자 A-1면〉으로 사우스 LA에서 촉발된 LA폭동으로 한인 청년 1명을 포함해 60여 명이 사망했으며,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재산상 피해를 남긴 초대형 인재였다.   하지만 올해도 지난해처럼 이를 기억하고 되새겨 재발 방지에 나서야할 정치권은 대부분 입을 닫은 하루였다.   당시 청년으로 사태를 목도했던 존 이 시의원(12지구)은 26일 성명을 통해 “4.29는 우리 모두가 LA 시민이자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했다”며 “특히 한인 사회에는 앞으로도 고통과 아픔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 의원은 동시에 “어떤 이유에서도 이와 같은 폭력과 증오는 앞으로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시민의 대표로 한인사회의 대표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캐런 배스 LA시장은 29일 오전 “당시의 아픔을 발판 삼아 더 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영문 27 단어의 짧은 메시지를 냈다. 백악관과 가주.카운티 정부에서는 폭동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폭동 메시지 폭동 메시지 la폭동 32주년 정부 카운티

2024-04-29

그는 살인자였나, 피해자였나…4.29 도화선 된 두순자 사건

  배심원단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당시 15세·사진)에게 총을 쏜 한인 여성에게 유죄를 평결했다.    하지만 흑인사회는 분노했다. 형량의 가벼움 때문이다. 계획되지 않은 살인 사건이었으니 ‘2급 살인’은 적절했지만 흑인사회의 광기는 LA를 집어삼켰다.   32년 전 오늘(1992년 4월29일) 발생한 LA폭동의 도화선이 된 두순자씨 사건이다.   본지는 LA폭동 32주년을 맞아 당시 가주 제2항소법원 5지부의 판결문을 들여다봤다. 폭동 발생 9일 전(1992년 4월21일)에 나온 판결문이다.    판결문에는 판사의 법리적 해석은 물론 당시 이민자의 처절했던 삶에 대한 항변 등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판결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건의 본질을 되짚었다.   LA카운티 검사들은 원심판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즉각 항소했다.   두순자씨는 원심에서 징역 10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항소는 집행 유예를 결정한 원심법원이 재량권을 남용했다는 게 골자다.   한인사회는 물론 전국의 주류 언론들이 주목하는 사건이었다. 항소 법원은 모든 과정을 다시 세세하게 살펴야 했다. 그러려면 원점부터 사건을 훑어야 했다.   두씨는 1976년에 도미했다. 공교롭게도 숨진 라타샤 할린스도 그해에 태어났다. 두씨는 봉제공장에서, 남편(빌리 두)은 수리공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첫발을 뗐다.   부부는 10년간 밤낮없이 일해 종잣돈을 모았다. 샌퍼낸도밸리의 리커스토어를 사고 판 뒤 소거스 지역에서 새 리커를 차렸다. 사건이 발생했던 두번째 가게인 사우스LA의 ‘엠파이어 리커’를 매입한 건 1989년의 일이다. 지인들은 두씨 부부에게 ‘위험한 지역(bad area)’이라며 매입을 뜯어말렸다.    아들(조셉 두)은 법원에서 당시 부모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전쟁터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 같았다.”   리커 주변은 마약상부터 갱단원들까지 늘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가게에서 부모를 돕던 아들조차 강도에게 폭행을 당했다. 갱단의 협박은 다반사였다. 너무 무서워서 2주간 가게를 닫은 적도 있다. 두씨 가족은 심지어 갱단을 만나 사정을 봐달라 부탁할 생각까지 했다.    두씨는 보호관찰관에게 “훗날 깨달았지만 그건 순진한(naive) 생각이었다”고 털어놨다.   1991년 3월 16일이었다. 갱단 위협에 시달리던 아들을 소거스 지역 가게에서 일하게 하고 대신 두씨가 엠파이어 리커로 나왔다. 남편은 전날 늦게까지 일한 탓에 잠시 차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라타샤가 가게로 들어왔다. 두씨는 라타샤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가방에 넣는 모습을 목격했다. 물론 돈을 내기 전이다. 평소에도 절도 사건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두씨는 라타샤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두씨는 법정에서 “주스 값을 지불하려 했다면 손에 돈을 쥐고 있어야 했는데 없어서 의심했다”고 증언했다.   라타샤는 곧 계산대로 향했다. 이 부분에서 또 다른 증인은 “그 당시 두씨가 라타샤에게 주스를 훔치려 한다며 ‘나쁜 X’이라고 욕설을 내뱉었다”고 증언했다.   두씨는 주스값을 내라고 했다. 그러자 라타샤는 “어떤 오렌지 주스요?”라고 답했다. 순간 두씨는 절도범이라고 확신했다. 라타샤의 옷을 끌어당기고 가방에 있던 오렌지 주스를 꺼내려 했다.   감정이 격해졌다. 라타샤가 먼저 주먹으로 두씨의 얼굴을 두 차례 가격했다. 두씨는 쓰러졌고, 가방 안에 있던 오렌지 주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씨는 “순간 한 번만 더 맞으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러면서 라타샤는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증언했다.   두씨는 헐레벌떡 일어나 의자를 집어 라타샤에게 던졌지만 가격하지는 못했다. 곧바로 계산대에 숨겨뒀던 권총(38구경)을 꺼내 뒤돌아 나가던 라타샤를 쐈다. 총격을 가한 자리와 라타샤 간의 거리는 불과 3피트였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라타샤는 즉사했다. 손에는 ‘2달러’가 있었다.   검찰은 계획된 의도적 범행이라 판단, 두씨를 1급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반면 두씨의 변호인은 사전에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며 기각을 요청했다.   판사는 이를 받아들였고 배심원단은 두씨 사건을 2급 살인 혐의 기준에서 유죄라고 봤다. 집행유예 판결의 맥락이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2급 살인이라도 집행 유예 판결은 형법 1203조에 따라 재판부의 오판이라고 주장했다. 이 법은 정의 등에 부합하는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총기 사용 범죄에는 집행 유예를 허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항소 법원은 세 가지 근거를 통해 검찰 주장을 반박했다.    먼저 항소 법원은 “형법 1203조는 스스로 무장 하고 범행을 저지른 경우에 적용되는 법”이라고 했다. 두씨의 총기 소지를 범죄가 아닌 방어용 목적이라고 본 셈이다.   두 번째는 두씨에게 유사 범죄 또는 폭력 전과가 없다는 점과 도발, 협박 등이 심한 환경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봤다. 즉, 계획된 범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징역은 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한 것인데 보호관찰관 보고서에 근거해 두씨가 사회에 위협을 가하거나 추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작다고 봤다. 따라서 원심의 집행 유예 결정은 양형 지침(법원 규칙 410)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항소 법원은 판결문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하지만 원심 재판부가 자의적이거나 이성의 범위를 벗어난 판결을 내렸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두순자 사건의 법정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역사적 분기점이 된 사건의 판단 기준은 ‘팩트’에 있지 않다.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도 누적된 분노였고, 폭동이 발발한 이유 역시 누적된 분노였다. 달랐던 건 사건을 바라본 사람과 시각이었다.    두순자씨는 살인자였지만 그 역시 피해자였다.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 LA폭동 1992년 라타샤 할린스 두순자 엠파이어 리커 로스앤젤레스 LA 장열 미주중앙일보 항소 법원

2024-04-28

[차세대 리더를 만나다] 살아보니 LA폭동은 나의 현실이었다

유명 갤러리인 뉴욕 하시모토 컨템포러리에는 현재 ‘사이구(Saigu)’라는 제목의 그림이 내걸렸다. 시카고 지역 한인 2세 화가인 데이비드 허(31)씨의 작품이다. 세로 36인치, 가로 24인치 작품으로 휴대용 게임기 화면 속에 총을 들고 사업체를 지키는 한인들의 모습이 캔버스에 담겨있다. 그 옆에는 허씨가 ‘사이구’와 같은 사이즈로 그린 ‘로드니(Rodney)’라는 제목의 그림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허씨는 시카고예술대학 미술 석사(MFA) 출신이다. 그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요즘 현대 미술계에서 신예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허 작가에게 그가 걷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물었다.   -왜 ‘사이구’를 그리게 됐나.   “내 생일도 ‘1992년 4월 29일’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축하와 함께 나와 같은 한인들에게는 비극적인 날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때만 해도 ‘사이구’는 나에게 하나의 역사였을 뿐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미국 사회에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 인종주의, 계급주의 등이 얼마나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려낸 역사적 탐구의 작품이 바로 ‘사이구’다.”   -인종 문제의 뿌리를 알게 된 계기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었다. 이는 ‘사이구’를 촉발한 로드니 킹 사건과 겹쳐진다. 나에게 ‘사이구’는 더는 역사가 아닌 내가 사는 현실이었다. 31년의 시차가 있지만, 상황과 촉매제는 같다.”   -정체성이 작품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나는 세 가지 맛을 조합한 ‘나폴리탄 아이스크림’과 같다. 나의 부모님은 1980년대에 텍사스로 온 이민자였다. 이후 조지아에서 나를 낳았다. 나는 집에서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배웠고, 학교에서는 남부 특유의 문화와 신념 등을 익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시카고로 터전을 옮겼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게다가 시카고는 근면한 노동자, 상인 등을 빗댄 ‘큰 어깨(Big Shoulder)의 도시’로 불린다. 시카고는 그동안 이민자로서 열심히 살아온 부모님의 인생 여정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다. 나는 이러한 다양한 배경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90년대생 예술가로서 작품의 공감 요소는.   “사회학에서는 최근 ‘제3 문화 아이들(Third Culture Kids)’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줄여서 ‘TCK’라고 하는데 이들은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부모 세대 문화를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고 동시에 주류 문화에 속하게끔 권유받지만, 그곳에서도 ‘다른 것’으로 분류된다. TCK는 이 때문에 표류하게 되고 일종의 ‘불분명한 지역’에 놓이게 된다. 나 역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제3의 문화’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고 탐구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세대가 TCK를 목격하고 있고, 이는 앞으로 나의 작품 활동 속에서도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왜 미술을 하게 됐나.   “대부분의 이민자처럼 우리 부모님도 내가 예술가가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법이나 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길 원했다. 때문에 미술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도 고등학교 진학 후였다. 이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기까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작업을 통해 도전하는 것을 즐긴다. 의도적으로라도 창의적으로 살아가길 열망한다. 물론 전업 예술가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때론 ‘가면 증후군’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계속 꿈을 꾸고 이러한 의식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게 나의 열망이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차세대 리더를 만나다 la폭동 인종차별 시카고예술대학 미술 작품 활동 시카고 지역

2023-05-16

[중앙시론] 상처와 교훈을 동시에 준 ‘4·29 LA폭동’

지난해 4월은 사이구(4·29) 폭동 30주년으로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다. CNN, LA타임스, NPR, AFN 등을 비롯해 한인 언론들, 그리고 한국 언론과도 인터뷰를 했다. 특히 CNN은 2시간짜리 사이구 30주년 특집 다큐를 제작했는데 1시간은 한인 사회를 집중 조명했다. 폭동 이후 3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한인 사회 모습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만큼 한인 사회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과거 한·흑 갈등에 질문의 초점을 맞췄던 것과 달리 작년에는 한인 사회의 변화와 위상에 대한 궁금증이 주를 이뤘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가 급증하면서 아시안 아메리칸, 특히 한인 사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UCLA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는 사이구 폭동 30주년을 맞이해 한인 기자들의 시각으로 본 특집 편저 책을 준비했는데 필자에게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논문을 써 달라는 부탁이 와 몇 번의 수정 작업을 한 후 최근 출판이 되었다. 이 책의 앞뒷면은 퓰리처상을 2번이나 수상한 강형원 전 LA타임스 기자의 사진으로 꾸몄다. 폭동 당시 한인들이 합심해 한인 상가의 불을 끄는 모습이다.  당시 한인 타운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하지만 소방차와 경찰이 출동하지 않아 한인들 스스로 화재 진압에 나서야 했다. 이 사진은 당시 한인 사회의 피해에 대한 관계 기관의  무관심과 방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논문을 통해 사이구는 흑·백의 문제를 넘어 한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교훈을 던져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는 31주년이라 별다른 행사가 없었다.  그런데  31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이구를 역사적으로 되새기며 차세대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이 너무 슬프다. 사이구 폭동은 미주 한인 사회 100년사에서 가장 큰 상처와 교훈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가 기억하며, 차세대들에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될 공간이 없는 것이다.   한미박물관은 1990년대 이후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 LA시로부터 한인타운 6가와 버몬트의 시 소유 주차장 부지를 1년 1달러의 임대료로 50년간 장기임대를 받았다. 한미박물관 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이어 본격적인 기금 모금이 시작되었고 한인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호응을 얻은 듯했으나 설계가 4번이나 바뀌는 등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이는 커뮤니티 사업으로 진행되며 성공적인 기금 모금 활동 등을 통해 완공한 일미박물관, 아르메니아박물관과 대조된다.     일미박물관은 일본계 커뮤니티, 정치권, 일본의 다국적 기업이 합심해서 이루어낸 훌륭한 역사적 업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00대대 출신으로 일본계 미국인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던 고 김영옥 대령도 일미박물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고, 그는 한미박물관 설립 사업 초기 배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안 박물관은 사업 시작 7년 만에 문을 열어 한인 사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성공적인 기금 모금과 정치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밑바탕이 됐다.     한미박물관이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사이구 관련 각종 행사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사는 물론 폭동 관련 전시물과 강연,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한인 사회가 경험한 아픔을 차세대와 타 커뮤니티와 공유하고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차세대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사이구 폭동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차세대들에 올바로 알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미박물관은 일부 이사들이 아니라 한인 사회가 주인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기금 모금 등에 차세대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된다. 필자는 한미박물관등의 건립과 운영은 차세대들이 주도하고, 1세대들은 기금 모금과 정부 등의 매칭 펀드 확보에 주력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이구 폭동 31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제 우리의 숙원인 미주한인사 정립 및 보존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역사를 모르면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배처럼 정처 없이 표류하게 된다. 상처와 교훈을 동시에 던져준 사이구의 역사적 의미를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확립해야 한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은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역사의식에서 출발하고 가능하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la폭동 상처 한인 사회 사이구 폭동 한인 언론들

2023-05-01

'두순자 사건' 통역관 책 펴냈다

30여년 전 '두순자 사건'의 통역관으로 활동한 폴 이(한국명 이호재·60·사진)씨가 4·29 LA폭동 관련 책을 발간한다.   통·번역 경력 40여년인 이씨는 올해 4·29폭동 30주년을 맞아 집필한 영문책 'L.A. Riot 4-29-92: Prayers of The Forgotten(4·29폭동:잊혀진 자들의 기도)'을 낸다.   영문으로 집필된 이 책은 한인들의 시각에서 본 1992년 LA폭동과 그 당시 피해를 기록하고 폭동의 도화선이 된 인종 문제도 파헤친다.   이씨는 "역사적인 입장이나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감정 없이 4·29폭동을 기술한 책들은 많지만 한인 피해자들의 시각을 담은 영문 책은 거의 없다"며 "매년 4·29폭동이 회자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 한인들이 겪은 폭동의 피해를 주류사회에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했다"고 계기를 전했다.   책에는 LA폭동의 씨앗이 된 1991년 두순자 사건의 통역을 맡았던 당시 상황도 담겼다. 한인 1호 공인 법정 통역관이었던 이씨는 부담감을 못 이겨 포기한 동료 통역관을 뒤로하고 단독으로 이 사건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사회와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압박감이 심했다"며 "특히 두순자씨가 살해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을 통역할 땐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기 위해 초긴장 상태였다"고 전했다.   두순자 재판을 계기로 형사법원 사건을 맡기 시작한 이씨는 로드니 킹 연방 법원 재판에서도 한인 증인 통역관을 맡았고, 4·29폭동 피해자들의 스몰 클레임 통역을 맡았다.   1996년에는 당시 통역관으로 보고들은 법정 일화를 담은 책 '나, 샤-워한 김치는 싫습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씨는 "나도 4·29폭동 피해자다. 당시 한인타운에 거주했지만, 난리 통에 포모나 지역 부모님댁으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을 갔다"고 전했다.     또 그는 "길거리는 화재로 다 탔고 흑인들은 한인들이 보이면 물건을 던지고 때렸다"며 "아직도 그때의 악몽을 꾼다. 여전히 그들의 절규가 생생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씨는 "4·29폭동은 백인과 흑인들의 갈등 속 한인들의 등이 터진 사건"이라며 "인종차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제2의, 제3의 LA 폭동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씨의 저서는 2~3개월 안에 전자책(e-book) 형태로 발간될 예정이며 온라인 서점들을 통해 살 수 있다. 장수아 기자통역관 la폭동 통역관 la폭동 la폭동 관련 동료 통역관

2022-09-08

[프리즘] LA폭동 30주년을 생각한다

1965년 8월 11~16일 사우스LA의 남쪽 끝자락 와츠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이 음주운전으로 의심되는 흑인 운전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시위로 34명이 사망하고 건물 600여 채가 약탈과 방화로 파괴됐다. 당시 피해자는 상당수 유대계였고 재산 피해가 현재 가치로 3억22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 원인으로 흑인과 유대계의 인종갈등이 지목되지 않았다.     약 30년 뒤인 1992년 4월 29일~5월 4일 LA폭동이 발생했다. 경찰은 추격전 끝에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60회 이상 구타했지만 4명 모두 무죄 평결을 받았다. 무죄 소식과 함께 사우스센트럴에서 시작된 폭동은 한인타운까지 확산하며 한인 업소만 2300여 곳이 불타거나 약탈을 당했고 초기부터 원인으로 한흑 인종갈등이 규정됐다.     두 폭동 모두 근본적인 원인은 흑인을 향한 경제·사회·사법의 구조적 소외나 차별의 누적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와츠폭동의 근본 원인으로 수십년간 누적된 차별을 지목한다. 1940~1965년 주로 남부 출신이 이주해 오면서 LA카운티 흑인 인구는 7만5000명에서 65만 명으로 급증했지만 이중 60%가 정부 보조를 받을 정도로 소외됐다. 당시 LA경찰국(LAPD) 윌리엄 파커 국장은 시위대를 “동물원의 원숭이”라고 불러 폭동에 기름을 부었다.   LA폭동의 근본 원인도 흑인(혹은 라티노를 포함한)의 경제적, 사회적 소외다. 여기에 LAPD의 ‘망치작전’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LAPD는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갱단을 소탕하는 망치작전을 펼쳤는데 지역적으로는 사우스센트럴과 이스트LA에 집중됐다. 망치작전은 사실상 1990년까지 계속돼 5만 명 이상이 체포됐지만 대부분 기소도 되지 않았다. 이 기간 젊은 흑인 남녀의 체포 건수는 와츠폭동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로드니 킹 과잉진압 경찰 무죄 평결은 오랜 기간 누적된 경찰에 대한 불신을 폭발시켰다.   폭발은 작은 불꽃이 퉁겨질 때 일어난다. 하지만 오랜 기간 누출돼 방을 가득 채운 가스를 탓하지 않고 작은 불꽃 하나를 탓한 것, 그것이 LA폭동 당시의 시각이었다.   1990년대. 인구가 급증한 한인은 다른 소수계와 접촉면이 늘어났다. 갈등 가능성도 당연히 높아졌을 것이다. 급증한 한인 업소 중에 흑인 고객과 갈등이나 충돌을 빚은 곳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고객이 자발적으로 지켜준 한인 업소도 적지 않다. 한인이라서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폭동의 휘발성이 높은 상황에 한인이 있었다.   지난달 29일은 LA폭동 30돌이다. 30돌 행사가 한인 커뮤니티의 역량과 소망을 모두 담은 입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럴만하다는 수긍도 간다. 그동안 쌓아온 정치력과 경제적 성장, 네트워크가 작동한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한인타운은 이미 경제적으로 여러 인종이 이익을 공유하고 있어 폭동을 방치해도 되는 수준을 넘어섰다.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매력적인 지역으로 변모했다.     폭동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이 세워지지 않은 점은 더 아쉽지만 박물관 추진의 모멘텀이 약해진 것 또한 현실이다. 어쩌면 소프트파워로도 충분히 참극을 막을 역량이 된다고 안도했을까. 폭동을 기억하는 2세 위주의 할리우드 한인들이 30돌 행사를 여는 것을 보며 우리의 기억이 결국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 폭동을 봤던 한인 배우 존 조가 폭동을 소재로 출간한 소설 ‘트러블메이커’도 개인이 세우는 저마다의 박물관일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서, 비난을 받더라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한인회가 나섰더라면 박물관이 지어졌을까 딴생각을 한다.   그래도 두 가지는 성난 얼굴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는 LAPD가 마치 흑인의 분노가 소진될 때를 기다리듯 폭동을 방치하다 끝내 관할지역을 포기하고 경계선 끝에 가 베벌리힐스를 지킨 것. 또 하나는 주류 언론이 폭동 초기부터 로드니 킹이 구타당하는 장면과 거의 폭동 1년 전에 일어난, 한인 업주가 흑인 10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을 계속 언급해 피해자 흑인-가해자 한인 이미지를 연결했다는 점이다. 안유회 / 사회부장·국장프리즘 la폭동 생각 la폭동 당시 한인 업소 폭동 모두

2022-05-01

[이 아침에] 살아남은 자의 증언

“그런데 나라를 왜 빼앗겼어요?”   우리 반 해찬이가 유창하지 않은 한글 실력으로 당당하게 물었다. 잠시 나는 당황했다. 근본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3·1절이 다가오면 태극기를 흔드는 조선 사람에게 총을 쏘고 무자비한 고문을 했던 일본인들의 만행과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본인들의 탄압에 대해 설명해왔던 나였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강조하며 지금의 한국의 발전은 타인종에 비해 성실하고 우수한 창의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던 나에게 해찬이가 사실을 털어 놓으란다.   왜 나라를 빼앗겼냐고? 그러게 말이다. 일본의 침략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던 관리들의 권력욕이다. 영국과 미국 등 강대국을 움직이며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과의 조약 체결 뒤에는 그것을 협조한 썩은 관리들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세계의 판을 읽도록 왕을 보필해야 하는 관리들이 백성이야 어떻게 살든 말든 자기들의 권력만 차지하면 그뿐이라는 이기심이 36년이라는 치욕의 시간을 만들었고 일본의 수탈을 피해 굶주린 백성들이 만주로, 하와이로 멕시코로 조선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5년 전이다. 나는 LA폭동 25주기를 위한 다큐멘터리 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자금은 KBS공용미디어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유건식 사장(당시 KBS아메리카 사장)의 추진으로 다큐를 제작하게 되어 나는 작가로 일을 하게 됐다. 감독들과 함께 일정을 짜고 폭동 당시의 증언을 듣기 위해 관계자들을 섭외하고 인터뷰를 진행해서 ‘끝나지 않은 6일, 4·29’라는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그때까지 다큐멘터리 현지 촬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자긍심을 갖고 참여했다. 처음에는 계약 조건에 없었는데 자막을 영어로 넣어야 한단다. 그걸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일이지만 바쁘다는 딸을 꼬드겨 간신히 영어로 된 자막을 완성하게 된 그때의 고생이 새삼스럽다. ‘다시는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는 딸의 엄포에 그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 꽤나 흘렸다. 애초에 작정했던 일정보다 영상 편집이 늦어지고 감독은 자기 일은 제쳐 놓고 밤샘 작업으로 4·29에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열정을 쏟았다. 5년 전의 일이다.   LA폭동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 사이에서 애꿎게 한인들이 피해를 당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앞으로 흑인들이 백인에 대한 자신들의 불만이 생길 때마다 한인들에게 화풀이할 거라는 예측도 가능한 일이다.   뿌리교육을 강조하는 한글교육이기에 3·1운동 등 한국역사에 대해 학생들에게 설명하지만 이민 자녀들에게 먼저 알려야 할 일은 LA폭동이다. 백인과 흑인들 사이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한인들의 위치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래도 안전하지 않다. 폭동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은 증언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해찬이처럼 물어야 한다. 흑인과의 관계 개선에 뒷짐을 지고 있는 백인사회가 LA폭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권소희 / 소설가이 아침에 증언 다큐멘터리 작업 자의 증언 la폭동 25주기

2022-04-29

오늘 LA폭동 30주년 행사 다양

미주 한인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4·29 LA폭동이 30주년을 맞는 오늘(29일), LA 곳곳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이어진다.     〈표 참조〉   LA한인타운 잔디광장에서는 오늘 오후 4시부터 ‘LA폭동, 사이구(SAIGI) 평화기원 커뮤니티 기념행사’가 열린다. 한인·아시안·흑인 사회 대표 단체들이 공동 주최한 이 날 행사는 한인 등 아시안과 흑인 뮤지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공연을 펼치며 행사 후에는 모든 참석자가 함께 도심 행진에 나선다.     LA총영사관은 한국기업협회(KIT)와 손을 잡고 오후 5시부터 야외 부스에서 방역제품, 화장품, 식품 등 한국 기업 제품 무료 배포한다.     이에 앞서 오전 11시에는 흑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잉글우드시에서 ‘화합과 치유’를 주제로 한인 운영 리커스토어 건물 외벽에 설치된 벽화 제막식이 진행된다. 벽화를 추진한 한인민주당협회(KADC)와 이를 지원한 홀리 미첼 LA카운티 수퍼바이저가 참석한다.     같은 날 LA한국문화원은 오후 7시부터 3층 아리홀에서 ‘플래시포인트 4·29’ 콘서트를 개최한다.   히트곡 ‘쉬즈 곤’(She’s Gone)을 부른 록밴드 스틸하트의 보컬 밀젠코마티예비치,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의 색소폰 연주자로 오래 활동한 프랭크 폰테인, 라틴재즈계 최고의 베이시스트 에드워드 레스토 등이 무대에 오른다.     LA 한국문화원은  아울러 지난 22일부터 2층 아트갤러리에서 한·흑 특별 교류전시 ‘피닉스 프로젝트’를 열고 있다.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와 흑인 예술가 단체 ‘블랙 아티스트 인 LA’ 소속 작가 60명이 참여해, 한 달 동안 유화, 드로잉, 사진,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30일에는 폭동의 시발점이 된 첫 방화 피해업소 자리에서 한·흑 연합행사가 진행된다.   행사를 주최하는 4·29폭동재발방지위원회(대표 존 김)는 이날 오전 11시 사우스LA 지역 1350 웨스트 플로렌스 애비뉴 76주유소 주차장에서 LA시 정치인과 올림픽, 77가 등 4개 경찰서와, LA총영사관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한·흑 화합 및 LA폭동 재발방지를 기원하는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미연합회(KAC)와 미주한인위원회(CKA) 공동 주관으로 ’4·29 LA폭동 30주년 기념 차세대 리더십 콘퍼런스‘가 LA한인타운 라인호텔에서 청소년 대상으로 열린다.     이밖에 오는 5월 1일에는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인 모임인 ’할리우드 한인 리더그룹(Korean Americans Leaders in Hollywood)‘이 ’LA폭동 30주년-LA스토리사이구‘ 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LA한인타운 인터크루(3330 Wilshire Blvd, LA)에서 오후 4시 30분 레드카펫을 시작으로,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 하원의원, 김성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김영완 LA총영사, 영화배우 존 조와 윌 윤 리가 기조연설자로 나서 LA폭동의 역사와 현재, 한인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 오는 5월 13일 오후 6시에는 LA폭동의 아픔을 문학으로 풀어낸 ’흉터 위에 핀 꽃‘ 문집 발간식이 LA한국문화원에서 진행된다. LA총영사관은 오는 9월 UCLA와 함께 ’한미관계 콘퍼런스: 4·29 3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장수아 기자la폭동 행사 la폭동 사이구 la한인타운 잔디광장 미주 한인

2022-04-28

할리우드서 활약 한인들도 LA폭동 행사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한인 모임이 4·29 LA폭동을 되새기는 특별행사를 연다. 주최 측은 할리우드 영향력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한인사회가 겪은 폭동 피해와 아픔을 알릴 계획이다.   ‘할리우드 한인 리더그룹(Korean Americans Leaders in Hollywood)’은 5월 1일 오후 5시 LA한인타운 인터크루(3330 Wilshire Blvd, LA)에서 ‘LA폭동 30주년-LA스토리 사이구’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 정치인, 영화배우 등 130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주최 측은 “1992년 4월 29일 시작된 폭동은 LA에 큰 충격을 줬고 특히 한인사회에는 잊을 수 없는 아픔과 피해를 남겼다”며 “사이구(SAI-I-GU)라는 말에는 한인사회가 당시 비극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겼다. 아메리칸드림이 한순간에 무너진 한인사회 아픔을 되짚고 치유하고자 행사를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행사는 5월 1일 오후 4시30분 레드카펫을 시작으로 초청연사 5명이 4·29 LA폭동을 기억하는 기조연설에 나선다. 기조연설자인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 하원의원, 김성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김영완 LA총영사, 영화배우 존 조와 윌 윤 리는 폭동의 역사와 현재, 한인사회 미래를 이야기할 예정이다. 기조연설이 끝난 뒤에는 한인 코미디언 6명이 무대에 올라 특별공연도 선보인다.     특히 주최 측은 LA폭동이 남긴 한인사회 트라우마에 집중할 예정이다. 폭동으로 가족 단위로 운영하던 한인 업소 2000곳 이상이 약탈과 방화로 피해를 봤다. 한인사회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치유하지 못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KALH 스테이시 유씨는 “LA폭동이 한인사회에 어떤 아픔이었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며 “존 조 배우는 당시 LA에서 폭동을 직접 겪었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시애틀에서 폭동을 접하고 훗날 연방의원이 됐다. 각자의 시점으로 우리 생각을 나누고 과거 기억과 치유 방법,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KALH는 지난 2019년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활동 중인 한인 60여 명이 뭉쳐 발족했다. 회원 상당수가 영화와 연예계 고위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LA폭동 30주년-LA스토리 사이구 행사 참석 희망자는 웹사이트(www.eventbrite.com/e/la-stories-sa-i-gu-event-tickets-269302981467)로 예약하면 된다. 김형재 기자할리우드 la폭동 할리우드 한인 한인사회 트라우마 한인사회가 당시

2022-04-26

LA폭동 아픔 되새기고 '인종 화합' 다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오렌지샌디에이고협의회(이하 평통, 회장 김동수)는 지난 23일 부에나파크의 더 소스 몰 1층 야외 공연장에서 4·29 LA 폭동 30주년 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평통 측은 30년 전 한인들이 겪은 아픔을 되새기고 다시는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는 한편, 타인종과 화합해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취지로 이 행사를 기획했다.   평통, OC한인회, OC한인상공회의소, OC코윈 공동 주관, 미주도산기념사업회와 인랜드한인회 후원으로 열린 행사는 총 4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 기념식(사회 김도현)에선 이영희 평통 수석부회장이 개회를 알렸다. 이어 미셸 박 스틸 연방하원의원 축사, 심상은 OC기독교교회협의회장의 기도, 김동수 평통 회장 환영사, 김영완 LA총영사, 권석대 OC한인회장, 노상일 OC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의 축사, 소프라노 장주은씨의 축가, 아리랑 합창단(단장 김경자, 지휘 노혜숙)의 합창이 이어졌다.   2부(사회 김남희)에선 영 김 연방하원의원이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염원’이란 주제로 연설했다. 찰스 김 데이브 민 가주상원의원 보좌관은 ‘멀티 커뮤니티 이해와 화합’을 주제로 한 민 의원 연설문을 대독했다. 이어 최석호, 섀런 쿼크-실바 가주 하원의원이 ‘승화하여 화합하는 남가주 커뮤니티’, 써니 박 부에나파크 시장이 ‘화합하여 번영하는 평화로운 오렌지카운티’란 주제로 각각 연설했다.   김동수 회장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우리의 꿈’이란 주제로, 고 홍명기 전 미주도산기념사업회 총회장의 차녀 크리스틴 홍씨는 ‘밝은 미래사회를 꿈꿨던 아버지 홍명기’란 주제로 연설했다.   4·29 30주년을 주제로 미리 진행된 글짓기와 사생대회 시상식도 열렸다.   3부(사회 김정필·김민아) 시간엔 딜리버러스 앙상블(지휘 최은애)의 오케스트라 연주, 우크라이나 평화 염원을 주제로 작품을 전시한 최아숙 화가의 작품 설명, 할렐루야 태권도 시범단과 흑인 가수 모시 라이즈, 극단 시선의 뮤지컬 도산 하이라이트 공연이 이어졌다.   4부(사회 윤선영)에선 호프 글로벌 봉사재단이 ‘우리는 하나, 갓 블레스 아메리카’란 주제의 K-팝 댄스 공연으로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김동수 평통 회장은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세에게 교육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인종 화합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문화도 알릴 수 있었기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임상환 기자la폭동 행사

2022-04-25

“백악관·연방정부에도 피해 알리고 지원 요청”

LA폭동 당시 한인들을 돕기 위해  급박하게 구성됐던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던 하기환한남체인 회장은 “(LA폭동은)미주 한인 이민 역사에서 최대 수난이자 비극”이라고 정의 내렸다. 하 회장으로부터 ‘너무나 억울했던 기억’들을 들어봤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계기는.     “폭동 발생 다음날(4월30일) LA총영사관에서 단체장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나는 LA상공회의소 회장 당선인 신분이었지만 한국을 방문 중이던 회장 대신 참석하게 됐다. 당시 한인회는 법정 싸움에 휘말리면서 2명의 한인회장이 대립하는 혼란한 상황이라 총영사관 측과 위원회 관계자들은 논의 끝에 차기 상의회장인 나를 대책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상황은.   “한인타운에 시위대와 갱들이 진입한 것은 폭동 2일째인 30일이었다.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이 벌어졌다.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는 ‘한인타운 한인 업주들은  빨리 업소 문을 닫고 귀가하라’는 내용이 계속 흘러나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방송국을 찾아가 '우리 비즈니스는 우리가 지켜야지 무슨 말이냐'며 항의했다. 그랬더니 직접 방송에 출연하라고 해서 '각자 비즈니스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나도 권총을 챙겨 올림픽 길에 있는 한남체인으로 가서 쌀, 자동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장한 직원들과 함께 건물 옥상에 올라가 대비했다. 마침 인근 리커스토어 업주 중에 사냥 동호인들이 있어 각자 집에 있는 총이란 총은 다 가지고 나왔다. 그러던 중 버몬트 쪽에서 수백 명이 나타나 전자제품 업소 매장을 약탈하고 방화까지 했다. 정오부터 2시간 정도 위협용 공포를 수없이 쐈다. 덕분에 시위대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도주했다. 그런데 총격 도중 샷건 오발로 경비원 한 명이 쓰러졌고 오후 5시가 돼서야 소방차가 왔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시신을 수습하던 소방관은 폭도 수백 명이 무장하고 공격에 나설 거라며 대피를 권하기도 했지만 계속 대치하며 밤을 샜다. 덕분에 올림픽길 한인 업소들의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시위대는 8가 길에 있던 대형 미국마켓으로 몰려가 약탈을 시작했다. 당시 소방관들의 출동이 지연되는 바람에 전소된 업소들도 많았다.   또 한인들을 돕기 위해 나섰던 한인 청년이 폭도로 오인 돼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당시 피트 윌슨 주지사는 자동소총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는 이유로 주방위군을 하루 늦게 투입하는 등 한인타운 보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비상대책위원회의 역할은.   “5월 1일 주 방위군이 4000명으로 증원된 후 혼란한 상황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대책위에서는 2일(토) 한인타운에서 대규모 평화행진을 함으로써 폭동을 끝내자는 안건이 논의됐다. 안전문제로 반대가 심했지만 나는 한미연합회(KAC) 창립자인 정동수 변호사와 함께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그날 한인 수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주 방위군의 호위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상 폭동 종료라는 의미가 있었다. 피해자들 지원과 관련해 자연재해 피해 복구를 지원하는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폭동은 인재라 지원 대상이 안 된다고 했지만, 강력히 지원을 요청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한인타운을 방문하면서 FEMA, SBA(연방중소기업청) 등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이 신속히 진행됐다. 대통령 방문 전 백악관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와 한인 피해 상황, 방문지역, 예상 질문 등에 대한 안내와 조언을 해줬다. 한인회계사협회에서는 피해를 많이 본 스왓밉 업주들을 위해 SBA 융자지원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1년 6개월까지 모기지 지원도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연방 차원의 지원만 있었을 뿐 주정부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성금 모금과 배포는 어떻게 진행됐나.   “각지에서 성금이 들어오기 시작해 기금 창구를 대책위로 일원화하자고 제안해 성사됐다. 급한 대로 피해자 500명에게 500달러씩 나눠주겠다고 발표했으나 2300여명이 넘는 피해자들의 항의가 거세 전원 배포로 전환했다. 결국 피해자 한명당 3000달러 가까이 지급된 것으로 기억한다. 수령 한인들은 주로 리커스토어, 스왑밋 업주들이었으나 일부는 피해 사실을 허위로 신고해 받아간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 성금과 관련해 분란이 일자 언론들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추가 지원을 받을 기회를 놓친 꼴이 됐다. 실제로 당시 김종필 총리, 김대중 야당 대표도 찾아와 지원 의사를 타진했으나 성금 관련 분란으로 철회 또는 축소됐다. 대책위는 나중에 성금관리위원회로 변경돼 남은 기금을 관리했는데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성금을 놓고 자체 분란이 일어난 점, 피해 규모 상관없이 동일 액수가 배포된 점 등은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다. 신뢰를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금전 관련해 투명성이 필요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한인 커뮤니티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민 1세대들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무장해 맞선 것은 미국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많은 희생과 경제적 타격 후 정말 어렵게 회복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미국이란 사회에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 같은 참사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만의 나라가 아니다.”   글·동영상=박낙희 기자429특집 하기환 LA폭동 한남체인 429폭동 NAKI 박낙희

2022-04-18

한인 배우 존 조 LA폭동 소설 출간

한인 배우 존 조(50·사진)가 1992년 LA폭동을 주제로 한 청소년용 소설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를 출간했다.   27일 LA타임스에 따르면 존 조는 캐나다 한인 작가 세라 석과 함께 이 책을 썼고, 다음 달 22일 공식 출간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 12살 한인 중학생 조던 박의 시각에서 LA폭동이 한인 사회에 미친 영향과 의미, 인종 갈등의 문제 등을 풀어냈다.   한인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긴 LA폭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뤘지만, 주인공이 한층 더 성숙해지는 이야기를 담은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존 조는 2020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따른 인종차별 항의 시위와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범죄 급증이 소설을 펴낸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펜을 든 그가 처음 떠올린 이미지는 30년 전 폭도들로부터 가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던 한인들이었다.   당시 UC버클리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한인타운 상가 건물 옥상에서 총기 무장을 하고 경계를 서는 한인들의 모습이 한인에 대한 더 많은 반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소설은 주류 가게를 지키던 아버지에게 총을 전달하기 위해 길을 나선 주인공의 여정을 따르면서 인종 갈등과 무의미한 폭력, 이민자 가족의 정체성 문제 등을 성찰한다.   존 조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로서 살아갈 때 항상 경계하라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들었지만, 자신의 아이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피를 흘렸고 이제 이곳은 우리의 터전’이라는 말과도 같다”고 밝혔다.   존 조는 영화 ‘아메리칸 파이’, ‘해롤드와 쿠마’, ‘스타 트렉’ 등에 출연했고,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카우보이 비밥’에선 주인공을 맡았다.la폭동 한인 la폭동 소설 한인 배우 한인타운 상가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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