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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아이유와 이지은

한국어 교재를 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교재에 등장하는 이름이 저자의 자녀이거나 친구의 이름인 경우도 있습니다. 교재의 이름은 일반적이고, 발음하기 쉬운 게 좋습니다. 그런데 교재에 등장하는 외국인 이름을 부를 때는 좀 더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교재에 등장하는 ‘마이클’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마이클아!’는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이름일까요, 성일까요? 교재에 서양인은 성과 이름이 다 안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인은 성과 이름이 같이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기준이 뭘까요?   이름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 또는 사용이 있습니다. 보통은 성과 이름을 포함한 전체를 이름이라고 합니다. 저의 경우는 조현용이 이름이지요. 그런데 금방 이야기한 것처럼 성을 제외한 부분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현용입니다’와 같이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어는 이름에 관한 질문부터 어렵습니다. 성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겁니다.   한국어는 다른 말과 달리 부모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립니다.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이름을 이야기할 경우에는 무슨 자, 무슨 자와 같이 표현합니다. 제 이름을 예로 들자면 ‘현 자, 용 자를 쓰십니다’와 같이 이름을 설명합니다. 한자 이름을 쓰는 주변의 나라에는 이러한 금기는 없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예전에는 이름 자체를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처럼 느껴진 것 같습니다. 이름은 부모만 부르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자식이 크고 나면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름 대신 다양한 호칭이 만들어집니다. 예전에는 ‘호’나 ‘자’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따서 ‘무슨 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경우라면 별명이나 아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서로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있습니다. 부르라고 만든 이름을 거의 아무도 부르지 않는 특이한 문화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름에 대한 문화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름에 관한 현상은 연예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더 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명은 드러내지 않고, 예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만 바꾸는 경우도 있고, 성만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모두 바꾸거나, 이름만 새로 만들어서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종 성이 무언지 혼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와 같은 성인 줄 알았던 사람이 나와 성이 다르고, 나와 성이 다른 사람이 알고 보면 같은 성이기도 합니다. 가수 나훈아는 나 씨가 아니고, 남진은 남 씨가 아닙니다. 서태지도 서 씨가 아닙니다. 성을 찾아보시면 재미있는 결과를 발견할 겁니다. 저는 종종 조용필이 조 씨라는 점이 왠지 다행스럽습니다. 훌륭한 대중음악가죠.   한편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성 자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히 케이팝 가수의 경우는 성을 쓰는 경우가 드물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BTS나 블랙핑크, 레드벨벳는 열렬한 팬이 아니라면 성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가수들이 성을 쓰지 않는 것은 기억하고 부르기 좋다는 측면과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합쳐진 것이라고 봅니다. 성을 물어보는 퀴즈를 내면 얼마나 맞힐까요? 저는 세종학당재단 홍보대사였던 레드벨벳의 ‘강슬기’는 맞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수가 연기할 때는 본명을 쓰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가수인 자신과 배우인 자신을 구분하고 싶은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그런 시도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가수 ‘비’가 배우 ‘정지훈’으로, 가수 ‘아이유’가 배우 ‘이지은’으로 활동하면서인 것 같습니다. 이제 이런 현상은 하나의 규칙처럼 되고 있습니다. 수지는 배수지로, 윤아는 임윤아로, 민호는 최민호로 활동합니다. 한국의 문화를 이해할 때 이름을 잘 살펴보는 재미도 솔솔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아이유 이지은 성과 이름 외국인 이름 한자 이름

2024-09-08

[우리말 바루기] ‘귀걸이’ ‘코걸이’ ‘목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됨을 이르는 말로, 한자 성어로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 쓰기도 한다.   그런데 ‘귀걸이’는 ‘귀고리’로 써야 하는 게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듯하다. 예전에 표준어 규정이 바뀌기 전엔 ‘귀고리’가 바른 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걸이’와 ‘귀고리’가 둘 다 널리 쓰여 모두 표준어로 인정됐다. 따라서 귀에 다는 장식품을 의미할 때는 ‘귀걸이’와 ‘귀고리’ 중 어떻게 표기할지 고민하지 말고 아무것이나 쓰면 된다.   날씨가 추울 때 쓰는 귀마개도 ‘귀걸이’라고 표기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엔 ‘귀고리’라고 써선 안 된다.     그렇다면 ‘코걸이’와 ‘코고리’는 모두 써도 되는 걸까. ‘코고리’는 사전에 없는 단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잘 쓰이지 않는다. ‘코걸이’만 가능하다고 기억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목걸이’는 어떨까. ‘목걸이’와 ‘목거리’는 둘 다 써도 되는 낱말일까. ‘목걸이’와 ‘목거리’는 모두 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다. 그러나 두 표기는 뜻이 다르므로 내용에 따라 잘 골라 써야 한다. 목에 거는 장신구를 말할 때는 ‘목걸이’가 바른 표기다. 그렇다면 ‘목거리’는 무슨 뜻일까. 목이 붓고 아픈 병을 ‘목거리’라 하며, “약을 먹어도 목거리가 잘 낫지 않는다”와 같이 쓸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귀걸이 코걸이 표준어 규정 모두 표준어 한자 성어

2024-08-07

[우리말 바루기] 산 넘어 산

한 가지 어려운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더 힘든 일이 이어지는 걸 한자 성어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한다. 속담으로는 ‘갈수록 태산’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또 다르게는 ‘산 넘어 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산 너머 산’으로 잘못 적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 넘어 산’과 ‘산 너머 산’의 차이는 무엇일까. ‘넘어’는 동사 ‘넘다’에서 활용한 것이므로 ‘높은 부분의 위를 지나가다’란 의미가 살아 있다. 즉 ‘동작’을 나타낸다. ‘산 넘어 산’은 산을 넘었는데 또 산이 있다는 것으로 힘든 일이 계속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에 반해 ‘너머’는 ‘넘+어’에서 오긴 했지만 ‘동작’의 의미는 엷어져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때는 ‘위치’를 나타낸다. 즉 ‘높이나 경계로 가로막은 사물의 저쪽. 또는 그 공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래서 ‘산 너머 산’이라고 하면 ‘산 저편의 산’을 의미한다.   ‘못미처’와 ‘못 미쳐’도 이런 유형의 구별이 필요한 표현들이다. ‘못 미쳐’의 경우는 ‘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란 의미의 동사 ‘미치다’에서 활용한 것으로 ‘미치+어’ 형태이므로 ‘미쳐’로 쓴다. ‘못미처’는 일정한 곳에 이르지 못한 거리나 지점을 이르는 명사로서 ‘미쳐’와는 형태를 다르게 적는다.우리말 바루기 공간적 거리 한자 성어로 수준 따위

2024-08-05

[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는 어느 나라 말인가?

한자와 한자어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한글과 한국어가 완전히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자와 언어를 구별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글날에 한국어가 매우 과학적이라는 말을 듣는데, 이 말은 이상한 주장입니다. 한글은 과학적일 수 있지만, 한국어는 과학적이라는 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자와 한자어는 문자와 어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에도 한자어는 많지만 한자는 전혀 쓰지 않고 있습니다. 한자를 쓰는 것과 한자어를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순우리말을 쓰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순’이 한자어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한자어 없는 언어생활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기초어휘에도 이미 한자어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기초어휘란 오랜 역사에도 변하지 않고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따라서 비교언어학의 주 대상입니다. 자연이나 신체어, 색채어, 친족어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늘, 해, 달, 별, 땅과 같은 자연어나 머리, 눈, 코, 귀, 입 등의 신체어와 검다, 희다, 푸르다, 붉다와 같은 색채어, 아들, 딸, 엄마, 아빠 등과 같은 친족어가 기초어휘에 해당합니다. 모두 순우리말이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초어휘 속에서도 한자어휘가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산(山)과 강(江)이 있겠네요. 또한 초록색이나 주황색, 남색은 당연히 한자어입니다. 친족어 중에도 형, 동생, 삼촌 등은 한자어입니다. 이렇듯 한자어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어린아이가 한문을 배우던 책인 소학을 한글 창제 이후 번역을 하게 됩니다. 두 가지 종류가 출간되는데, 하나는 번역소학(1518년)이고, 다른 하나는 소학언해입니다. 번역소학과 소학언해는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두 태도를 보여주며, 특히 번역소학에는 의역이 많아서 우리말 속에 한자 어휘가 얼마나 널리 사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한문을 배우는 책이기 때문에 한자어가 많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어가 얼마나 이른 시기에 우리말 속에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번역소학에는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어휘가 나타나서 흥미롭습니다. 주로 고유명사인 인명이나 지명은 한자를 먼저 쓰고, 우리말을 적습니다. 공자, 안연, 맹자 같은 표현이 그 예가 됩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글에서 핵심어, 주제어로 보이는 말은 한자를 함께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덕, 학문, 강론, 쇄소응대, 선생 등의 단어는 한자에 우리말을 병기하여 쓰고 있습니다. 현재도 여전히 가독성을 위해서나 핵심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자를 섞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한자로 쓰지 않은 한자어입니다. 이 말들은 한자로 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물론 지식인층이 주 대상일 수는 있었지만, ‘소학’이 어린아이용 학습서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한자어가 이미 생활 속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상, 례, 현인, 온공, 경계, 부모, 덕, 구하다, 후, 자제, 피하다, 흉하다, 길하다는 한자와 병기된 표기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글로만 쓰이기도 합니다. 혼동이 있음을 볼 때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합니다.     번역소학에 한자로 쓰이지 않은 말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500년 전에도 쓰이던 어휘를 보면서 한자어는 어느 나라 말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 나라 친족어가 기초어휘 한자 어휘 신체어 색채어

2024-07-14

[아름다운 우리말] 문맹과 문해력 그리고 정치

문맹(文盲)이라는 말에는 차별의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글을 못 읽으면 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문맹은 퇴치해야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글을 못 읽으면 까막눈이라고 표현하는데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보고 있지만 못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문맹입니다. 그렇게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문해력(文解力)이라는 단어에도 차별이 느껴집니다.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문해력은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문해력이 높은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고, 문해력이 낮은 사람은 부족한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문해력이 언론에 등장하는 것도 대개는 이런 평가 때문입니다. 청소년의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청소년은 어른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 못 한다고 합니다. 문해력의 문제를 올바로 보려면 소통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 겁니다.   문맹을 퇴치하자거나 문해력을 높이자는 문제는 정치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글의 문제는 정치의 방향과 관련이 됩니다. 예전의 문자는 지배층의 독점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글을 아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한자가 어려운 것은 독점의 강화로도 보입니다. 모국어가 아닌 라틴어나 한자가 주요 소통의 수단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만 공유하는 문자 체계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문자 운동은 언제나 혁명적입니다. 기존의 정치체계를 깨뜨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배층의 문자를 민중의 문자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높이 기리는 것은 문자 생활의 대상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를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문자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특히 우리말에 맞는 문자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한자의 문제는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한국에서도 고민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한자 사용은 아예 사라졌습니다. 한자 없이 쯔놈이라는 문자 체계를 만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알파벳을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국어의 병음 표기도 알파벳입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아예 알파벳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타자기라는 문명 앞에서 한글은 매우 고민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용어이지만 2벌식, 3벌식이란 말은 이런 고민을 보여줍니다. 한글이나 한자는 컴퓨터 시대에 와서 다시 더 살아나게 됩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쉬운 글자와 쉬운 말 쓰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무래도 사회주의 사상이 인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에서 간체자를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쉬운 말로 바꾸는 ‘말다듬기 운동’을 실시하는 것도 정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글에서도 자연스럽게 한자 사용이 줄어들고 있는데, 모르는 사이에 영어 사용은 폭넓게 들어와 있습니다. 신문이나 책을 보면 한자는 없는데 알파벳은 엄청 많습니다. 저는 한자도 알파벳도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다고 봅니다.   문해력을 높이자고 이야기하면서 청소년, 청년의 언어에 관심이 없는 것은 모순입니다. 일방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문맹이 꼭 나쁜 것도 아닙니다. 문맹 중 많은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못 배운 게 아닙니다. 필요가 적어서 안 배운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종종 글 읽기가 필요한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글보다는 말로 소통하는 세상이 어떨까요? 우리는 지나치게 글에 의존하면서 사람 사이의 정을 잃고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문맹이나 문해력은 내가 원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가 주입한 개념일 수 있습니다. 문맹도 문해력도 어쩌면 정치의 영역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맹 정치 한자 사용 문자 체계 문자 운동

2024-05-27

한글·한자 문신에 정체성 새기는 아시안

한인 등 아시아계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글과 한자’ 문신을 통해 향수를 달래는 이들이 늘고 있다.     24일 LA타임스 칼럼니스트 프랭크 쉬영은 아시아계가 모국의 언어를 몸에 새김으로써 고향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들이 한글이나 한자 문신을 하면서 정체성을 되새기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   쉬영은 자신이 처음 문신을 하게 된 2014년 경험을 토대로 아시아계 문자의 힘을 긍정했다. 그는 대만 방문길 한 시장통에서 자신의 가족 성을 몸에 새겼고, 이후 문신을 할 때 한자를 선호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사실 한글이나 한자를 문신으로 선택할 때는 그 의미나 뜻을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서구권에서는 그저 ‘이국적 느낌’으로 한글이나 한자를 문신에 쓰인다. 물론 이국적 느낌의 문신에는 동양을 바라보는 선입견이 반영될 때도 많다.   실제 베니스비치 등 LA 주요 번화가에서는 한글이나 한자를 몸에 새긴 비아시아계를 종종 볼 수 있다. 쉬영은 이들의 몸에 새겨진 한자 등은 발음이나 뜻과 상관없이, 중국 문화권의 정신적 유산을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무심하게 ‘소비’될 뿐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한인과 중국계 등 아시아계가 모국의 언어를 몸에 새길 때는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쉬영은 자신의 팔뚝에 한자와 한글을 새긴 경험을 토대로 뿌리를 각인하며 정체성을 되새기는 기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LA에서 활동하는 한인이나 중국계 문신 아티스트 상당수는 자신의 몸에 한글이나 한자를 새기고 있다. 이들은 문신을 금지하는 1세대 부모의 유교적 관습에서도 벗어났다. 특히 한글이나 한자 문신을 남들도 쉽게 볼 수 있는 목 주위에 크게 새겨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베니스비치에서 11년째 문신가게 오션프런트를 운영 중인 마이크 조(45)씨도 목의 앞부분에 성 ‘조’를 한글로 크게 새겼다. 조씨는 “부모님이 내 목의 문신을 보고 뭐라 하실지 걱정도 됐다”며 “하지만 한글을 몸에 새기는 일은 신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자를 몸에 새기려는 이들이 꾸준히 찾아온다”며 달라진 분위기도 전했다.   한편 쉬영은 한자나 한글 문신이 중국이나 대만, 한국을 방문한 기억을 소환할 수 있다고 전했다. 최근 한국 광주를 방문했다는 그는 조씨 가게에서 손목에 한글 ‘맛’을 새겼다. 그는 광주의 맛있는 음식과 즐거웠던 경험을 기억하고 싶어 한글 문신을 선택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아시아계 정체성 아시아계 정체성 한글 문신 한자 문신

2023-11-24

[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침팬지가 웃는 까닭은?

인간과 웃는 모습이 가장 닮은 동물은 침팬지라고 한다. 침팬지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내지 않고 표정을 만들 수 있으며 웃을 때는 인간과 같은 얼굴 근육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침팬지의 웃음소리는 갓난아기들의 웃음소리와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아기들의 웃음을 분석한 결과, 신생아들은 처음엔 침팬지와 같은 방식으로 웃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기들은 공통으로 들숨과 날숨에 모두 웃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말을 배우게 되면서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지는데 나이가 들면서 숨을 내쉴 때만 웃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이유로 웃는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상호작용이 발생할 때 웃기도 하고 우스운 상황에서 웃기도 한다. 그리고 억지로 웃기도 한다. 최근 방문한 LA동물원에서 한 어린아이를 보고 미소 짓는 한 침팬지를 사진에 담았다. 사육사에 의하면 침팬지가 어떤 위험을 감지한 후 사소한 상황임을 인지하면 웃기도 한다고 한다. ‘별거 아니네’하며 웃는 것이다. 인간과 아주 비슷하다.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한자 성어가 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고 직역되는 사자성어다. 많이 웃고 화내지 말라는 뜻이다. 추석이다. 어렵고 힘겨웠던 일들 다 내려놓고 ‘별거 아니네’ 하며 많이 웃는 한가위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상진 사진부장 kim.sangjin@koreadaily.com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침팬지 까닭 일소일소 일노일 들숨과 날숨 한자 성어

2023-09-29

[우리말 바루기] ‘잔고’, ‘잔액’

다음 중 일본식 표현 또는 일본어 발음이 아닌 것은?   ㉠잔고 ㉡구좌 ㉢거래선 ㉣에누리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는 일본식 표현이나 일본어 발음이 적지 않다. 이들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잔고’를 보자. 은행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다. “잔고가 부족하다” “통장 잔고가 바닥났다”처럼 사용된다. 여기에서 잔고(殘高·ざんだか)는 일본식 한자 조어에 따른 표현으로 우리식인 잔액(殘額)으로 바꿔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산고·수출고·판매고 등도 생산액·수출액·판매액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 좋다.   ‘㉢구좌’ 역시 일본식 표현이며 계좌(計座)로 바꿔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건이나 돈 등을 계속 거래하는 곳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거래선’도 마찬가지다. 사고판다는 뜻의 우리말 거래(去來)에 일본에서 장사나 교섭 상대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선(先·さき)’을 붙여 만든 일본식 한자어다. 이러한 ‘선(先)’은 ‘처(處)’로 바꾸면 된다. 즉 ‘거래선’은 ‘거래처’라고 하면 된다. 구매선·구입선·판매선 등도 구매처·구입처·판매처로 바꿔 쓰는 게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에누리’는 일본어 발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에누리’는 순우리말이다. 값을 깎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간혹 일본말로 오해받는 것으론 사리·모도리·짬짜미 등도 있다. 각각 국수 등을 포개어 감은 뭉치, 아주 야무진 사람, 자기들끼리 짜고 하는 약속을 뜻하며 모두 순우리말이다.우리말 바루기 잔고 잔액 통장 잔고 우리말 거래 한자 조어

2023-09-06

[아름다운 우리말] 문화와 평화

문화는 주로 자연의 상대어로 사용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문화는 자연적인 상태를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이 인위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영어인 CULTURE는 ‘경작하다, 재배하다’에서 온 말로 보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냥보다는 유목 상태가 유목 생활보다는 정착 생활이 문화의 의미를 더 잘 알게 합니다. 문화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서 도구를 사용하고, 이를 전승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를 ‘발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의 문화가 발전되어 온 것과 관련이 깊을 것입니다.   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던 문화 인류학자들은 자연과 문화의 경계, 즉 문화의 시작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원시사회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오지를 찾아가거나 정글이나 산속, 섬에 고립된 마을을 찾아서 마치 석기 시대 같은 흔적을 찾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의 시작, 즉 문화의 시작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물질적인 문명은 매우 뒤처져 있던 곳이지만 정신적인 면은 뒤처지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인류의 지혜가 오히려 깊게 성숙되고 남아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지금도 많은 영적 학자 또는 수행자들이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의 주민들에게서 배운 지혜의 말씀을 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서는 오히려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린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다른 뜻으로는 ‘교양 있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교양이 있다는 것도 자연 상태에서는 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배우고, 예술을 즐깁니다. 특히 예술을 향유하는 것을 문화생활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때 문화는 아무래도 고급한 정신문화나 성취문화로 나아가게 됩니다. 문화가 부의 척도처럼 사용되는 것도 예술이나 성취를 위해서는 사회의 경제적, 기술적 수준이 발달해야 하였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도 문화생활을 위해서 공연장을 찾고, 미술관을 찾고, 박물관을 찾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양을 늘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문화 즉 컬처는 동아시아에서는 한자어 ‘文化’로 번역되었습니다. 한자 문화권에서 원래 사용되었던 의미와는 달리 서양에서 발달한 문화의 개념을 담는 어휘가 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한자의 번역이 기가 막힌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근대 어휘 중 많은 어휘는 일본이 서양문화의 개념어를 번역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사회, 민주 등의 말이 그렇습니다. 문화도 그중 한 어휘입니다.      문화를 한자의 의미로 해석해 보면 글로 하는 것 말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글이나 말로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나타낼까요? 우선 우리의 많은 문화적 산물이 말이나 글을 통해서 전승된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이 없었다면 문화는 발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글을 통해서 기존의 지식이 축적되어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문화의 해석을 말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말에서도 말로 하자, 말로 하라는 말은 주먹으로 해결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게 됩니다. 즉 싸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문화는 싸우지 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상태라면 화가 나면 싸우는 것이 정상이었을 겁니다. 배가 고프면 빼앗아 먹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혈투도 벌였을 겁니다. 그게 자연 상태였을 겁니다. 하지만 자연을 벗어난 인간은 서로 협동하고 싸우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문화를 달리 말하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면 싸우면 안 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해치면 문화가 아닙니다. 문화는 평화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 평화 한자 문화권 문화 인류학자들 문화적 산물

2022-08-07

[이 아침에] 향가를 다시 읽다

우리나라는 역사가 깊은 만큼 주옥 같은 문학작품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린 향찰로 표기한 향가가 14편 전하고 있다. 먼 옛날에 쓰여진 향가들이 오늘까지 깊은 공감을 갖게 하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어쩐지 의아한 느낌을 갖게 하는 글도 있다.     먼저 경덕왕 때 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는 일찍 죽은 누이를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하고 있다. ‘생사로는/ 여기 있으매 두렵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구나.’ 130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죽은 누이에 대한 슬픔이 극진하게 전달 되고 있다. 또한 경덕왕 때,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추모하여 지은 ‘찬기파랑가’도  기파랑의 고결한 마음을 냇물에 비친 달의 모습과 서리에 굽히지 않는 잣나무에 빗대어 찬양하는데 뛰어난 수사법 사용으로 문학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헌화가’는 읽을수록 다르게 느껴진다. 그 전문은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이다. 이는 신라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길에 일행이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그의 아내 수로부인이 천길 바위 봉우리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다고 말했으나 주위에 있던 시종자들은 위험하다 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 때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노인이 이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바치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그런데 이 설화를 좀 더 확장해서 구체화해 본다면, 이 노인이 꽃을 꺾으러 바위를 오르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을 것이다. 이때 들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견우노옹의 뒤에는 부인이 따라가고 있었다. 앞서 가던 영감이 소를 놓고 갑자기 천길 벼랑에 붙어서 기어올라가고 있었다면 부인은 어떤 눈길로 바라보았을까?     이 시의 중심 사상은 대체적으로 ‘신라인의 낭만적 사랑과 미의식 또는 수로부인의 아름다움 예찬’으로 정리되었는데 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생업에 필수적인 소를 놓아버리고 왜 낭떠러지에 기를 쓰고 올라갔는가? 그 자발적인 행동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당시 고관대작 부인이라는 사회적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복종의 관념 때문인가? 아니면 천둥 같은 남편 순정공이 옆에 있건 말건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을 바치고 싶은 순수한 사랑 때문인가? 현실적인 주변 관계를 저버린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 지고지순함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중받아야만 하는가? 처음 본 절세미인을 위해 위험천만의 결정을 감행하는 용기도 낭만으로 미화되어야 하는가?     문학을 통해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저렇듯 무모하게 행동하는 남편에게 할머니는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이런 소중한 작품을 남긴 작가에게 찬사를 보내며,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 선사에게 감사해 마지 않는다. 삼국의 야사와 불교적인 내용과 더불어 구전되어 사라지기 쉬운 고전문학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업적이 지대하다. 가끔씩 고전 문학을 다시 꺼내서 천편일률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권정순 / 전직 교사이 아침에 향가 아내 수로부인 남편 순정공 신라시대 한자

2022-07-03

[아름다운 우리말] 심장이 뛰다

심장(心臟)은 순우리말로 염통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 염통도 한자로 보입니다. 생각할 염(念)에 무엇을 담는 통(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북한에서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려고 할 때 혁명의 심장이라는 말을 혁명의 염통이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겠냐고 했던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심장도 염통도 한자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염통의 염을 생각 염이 아닐까 추측한 것은 심장이 생각의 기관이라는 느낌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슴으로도 합니다. 감정으로 느낄 때는 우리의 가슴이 생각의 주체입니다. 머리가 아픈 것과 가슴이 아픈 것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입니다. 가슴 속의 생각을 우리말로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몸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 몸은 그대로 맘이기도 합니다. 가슴 부위를 몸통이라고도 하는 거로 봐서 비유이기도 하겠지만 가슴이, 몸이, 심장이 그대로 마음입니다.    심장은 뛰는 곳입니다. 뜨거운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심장이 뛸 때는 감정이 솟을 때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뛰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두렵고 걱정이 깊을 때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두근두근은 심장의 소리입니다. 심장이 뛰면 힘이 듭니다. 어쩔 줄 모르는 내 마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너무 심장이 뛰면 터질 것 같습니다. 높고 가파른 산을 오를 때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라고 할까요? 숨이 막힐 지경으로 뜁니다.    심장은 내 맘대로 할 수 없어 더 힘이 듭니다. 어떨 때는 잘 때도 심장이 뜁니다. 가장 평온해야 하는 시간인데 말입니다. 아마도 꿈속에서 나도 모르는 괴로움에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심장이 뛰면 깊은 수면이 어렵습니다. 문득 새벽에 깨어나 어쩔 줄 몰라하거나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내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방법을 씁니다. 단전호흡이나 요가, 명상이 그런 겁니다. 좋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파도 소리나바람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자연의 소리에 내 심장의 박동을 맞추면 좀 낫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숲을 걷는다든지, 모닥불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모두 심장에 관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아예 심장을 최대한 뛰게 하기도 합니다. 그건 내 심장이 뛰는 상태에 내가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고, 폭발할 것 같았던 심장이 원상태로 돌아왔을 때, 내 심장의 박동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심장에서 비롯되어 심장으로 마무리됩니다. 불안이라든가 염려라든가 우울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서러움이라든가 슬픔은 모두 심장으로 이어집니다.   요즘 저는 심장이 마구 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모르는 불안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고 있는 가라앉음이겠네요. 가라앉아도 심장은 뜁니다.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이 다스려지지 않아서 전에 배운 단전호흡을 하고 선인들의 수행을 따라 합니다. 조금은 나아집니다. 요즘은 차고 있는 시계에 심박 측정 기능이 있어서 가끔 눈길을 주기도 합니다. 어느 때 내 심장은 편안한가를 살펴봅니다.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박동의 수치를 살폈는데 무척 낮게 나왔습니다. 마음이 편안했나 봅니다. 읽던 책이 고마웠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심장 모두 심장 염통도 한자 가슴 부위

2022-06-19

[기고] ‘침묵의 소리’까지 듣는 경청

 옛 성현들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이 태어나 세상사를 습득할 때 그냥 건성으로 듣고 배우지 말고 무엇이든 귀 기울여 집중해서 들어야 깨우친다고 했다.     영어로 말하면 ‘hear’하지 말고 ‘listen’하라는 얘기다.     hear와 listen은 우리말로 하면 둘 다 ‘듣는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나 그 쓰임은 다르다. ‘hear’는 들려오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는 걸 의미하지만 ‘listen’은 귀 기울여 집중해서 듣는 걸 의미한다. 즉 경청(傾聽)을 의미한다.     동서양의 고전 설화라 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나 ‘탈무드’ 또는 공맹의 어록에서도 ‘듣는 마음’을 곧 경청이라 했다. 이는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사람 됨됨을 상대에게 보이고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말은 ‘딴청’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문서답을 말한다. 즉. 딴청을 부린다는 말이다. 나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대화가 안 된다. 물론 소통도 안 된다. 아니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의미공유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것이고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이다.   한자 풀이로 ‘듣는다’는 의미의 청(聽)은 ‘왕의 귀(耳+王)로 듣고, 열개의 눈(十+目)으로 보고, 하나의 마음(一+心)으로 대하고 듣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왕의 귀로 듣고, 열개의 눈으로 보고, 하나의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미덕이 없어진 것 같다. 가끔 사람을 만나 세상 얘기를 하다 보면, 어떤 대화이건 간에 상대의 말을 전혀 들어보려는 생각도 없이 논리도 안 맞는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경우를 본다. 완전히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아 황당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늘 소통이 문제라고 한다.     경청에 대해서는 5가지의 여러 단계들이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1단계 무시하기, 2단계 듣는 척하기, 3단계 선택적 듣기, 4단계 귀 기울여 듣기 5단계 자신을 중심에 두고 공감적 경청하기 등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의 말 듣기는 어디에 속할까. 현인들은 경청을 제대로 하려면 하심(下心)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선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어찌 되겠는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어찌 되겠는가. 세상이 온통 물들어 보일 것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러한 경청 5단계니 하는 ‘소리의 경청’보다는 우리 모두가 서로 간에 말하지 못하는 ‘침묵의 말’과 억눌러 놓았던 ‘내면의 소리’, 그리고 무심했던 이웃의 ‘신음소리’와 천리(天理)를 이르는 ‘하늘과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댜 한다. 진실을 듣고자 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기고 침묵 소리 경청 5단계 선택적 듣기 한자 풀이로

2021-11-29

[김창준] "한자 아는 첫 미국의원" 취재 기자들까지 환호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2〉 두고두고 기억나는 중국 방문 '하나의 중국' 발언했다 대만계 유권자에 반감 병아리 수프 식사에 보좌관들 비명 지르는 소동 중국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깝다. 지난 4000년간 한반도와 중국 관계는 늘 파란만장했다. 여러 차례 전쟁도 겪었다. 한때 우리 선조들이 중국 영토 일부를 점령한 적도 있다.     중국 문자인 한문은 오랜 문화교류로 적지 않게 한국어가 되다시피 했다. 중국은 지금도 한국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다. 경제의 87%를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 입장에서 중국만한 교역 상대를 찾기 어렵다.     우선 위치가 가깝고 인구는 한국의 30배에 달한다. 중국 3% 부자 수가 대한민국 전체 인구와 같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중국 사람들은 “중국보다 더 싸게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중국 짝퉁은 진짜보다 더 좋다”고 한다. 하원의원 시절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이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 빌딩에서 중국의 입법기구인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건물은 바깥에서 볼 때 어마어마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썰렁했다. 5분쯤 기다리니 10명 정도가 한꺼번에 들어오는데 위원장은 보이지 않았다. 키가 작아서 안 보였다.     그를 수행하는 젊은이 모두가 한결같이 키가 크고 체격이 당당한 데 비해 인민 위원장은 키가 작은 데다 초라한 촌사람같이 보였다. 오랫동안 중국 노동자와 농부를 대표해온 활동가여서 외모가 볼품이 없는 듯했다.   좌우를 정돈하고 앉았다. 수행원들과 기자들로 꽉 찬 회의실에 긴장감이 돌았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대만은 중국 영토인데 왜 미국은 대만을 두둔하며 군비를 지원하는가, 이는 내정간섭이 아니냐?”는 그쪽 질문이 나왔다. 이런 질문은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충분히 브리핑을 받았기에 나는 대답할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이번 중국 방문 목적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한인 연방하원 의원의 친선방문이었다. 이런 민감한 질문은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은 이미 하나의 중국 정책을 채택했고 대만은 중국 영토라는 입장인데 뭐가 문제냐?” 고 반문했다. 얼른 대화를 돌렸다.   방안을 둘러보니 한문으로 쓴 족자가 걸려있었다. ‘天下太平(천하태평)’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도 한문을 읽을 줄 안다고 말하고 ‘천하태평’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 심지어 기자들까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중국 역사상 한문을 읽을 줄 아는 미국 연방하원 의원은 처음 만났다고 했다.       한문을 어디서 배웠냐는 질문에 어린 시절 한국에서 배웠다고 했다. 천자문은 이미 통독했다고 했더니 더 좋아했다.     삼국지 연속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 스토리라고 했다. 그 많은 영웅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기에 종이에 쓸 테니 먹과 붓을 가져오라고 했다. 준비된 듯 바로 먹과 붓을 가져왔다. 소매를 걷어 ‘조자룡’이라고 한문으로 적었다. 다들 일어나 손뼉 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좋은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중국 측은 나의 한문 실력을 과대평가했는지, 이튿날 아침 유명한 한자박물관 방문을 주선했다. 다른 흥미로운 관광을 취소하고 대신 박물관에 도착했다. 관장 안내를 받으며 관장실에 차려놓은 차와 과자를 몇 점 먹고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 병풍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장이 이 병풍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듣기 괴로웠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냥 참고 열심히 듣는 척했다. 관장이 중국말로 설명할 땐 그를 바라보고, 다음엔 통역관의 서툰 영어를 들어가며 설명을 듣자니 시간이 두 배로 들었다. 정치인인 게 괴로울 때가 바로 이런 때다.     박물관은 돌로 지은 5층의 아름다운 빌딩이었다. 이 5층이 모두 서예로 가득 차 있는 줄은 몰랐다. 2층을 거쳐 3층에 가니까 더는 지루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다지 서예에 대해 잘 아는 바도 없고 흥미도 없는데 ‘조자룡’ 석 자 때문에 마치 서예의 일가견이 있는 듯 잘못 알려져 다른 관광 일정까지 바꿔가며 이리 온 게 화가 났다.     결국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대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래도 여운이 남았다. 중국의 무궁무진한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중국인들의 환심을 샀고, 그들의 친구가 됐지만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내 지역구 내 대만계 미국인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됐다. 당시 대만 독립 문제가 대만에서 이처럼 큰 이슈가 돼 있는지 몰랐다. 또 내 지역구의 중국인 대다수가 대만계란 걸 미처 몰랐다. 미국에 있는 중국 교포들은 크게 둘로 갈라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자리 잡은 중국인들은 대개 홍콩 출신이고, 남쪽 내 지역구 근처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주로 대만 출신이다. 이들은 만다린이라는 중국 말을 쓰기 때문에 홍콩 출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이 필요하다. 미국은 오직 영어, 한국도 오직 한국어다. 한 나라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대만계 중국인 인심을 몽땅 잃었다. 첫 선거 당시 철저히 내 편이었던 이들이 이제는 나의 낙선 운동에 가장 열심히 뛰었다. 충격이었다. 지금도 대만은 미국과 중국 관계에 있어 큰 이슈지만 내가 의원인 시절에는 첨예한 쟁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 일로 대만계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은 사고도 있었다.   두 번째 중국 여행은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과 약 20명의 의회 보좌관과 함께였다. 장쩌민과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그가 카리스마가 넘치는 타고난 지도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만찬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수프를 먹기 시작하는데 별안간 옆에 앉아있던 백인 여자 보좌관들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 놀라 바라보니 수프가 병아리 배 안에 양념을 넣고 끓인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구경하지 못한 요리였다. 젊은 미국 여자들이 포크로 집어보니 금방 나온듯한 어린 병아리가 눈을 감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통째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병아리를 젓가락으로 들고는 눈을 감고 통째로 입 안에 넣었다. 상상외로 맛이 기가 막혔다. 홍콩에서 희귀한 음식들을 먹어보았기 때문에 많이 놀라진 않았지만, 이들에겐 기절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요리는 돼지고기 같은데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자세히 물어보는 게 실례란 말을 듣고 수행원들에게 묻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중국식당에서는 결코 부엌으로 지나가지 말라는 말도 있었다.     원용석 기자미국 한자 대만계 유권자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원장 역사상 한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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