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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소설'로 만든 대체 불가능한 걸작

‘혁신적’이라고 칭했던 과거의 현상, 최신 기술, 창의적 아이디어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다. 패션, 테크놀러지가 그렇지만 영화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TV드라마들을 통해, 다른 인물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펼쳐 나가면서 종국에는 하나로 연결되는 비선형(Nonlinear) 내러티브 방식이 유행했다. 이런 트렌드는 당연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 흐름 속에서 탄생한 영화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1994)이다.   30년전 ‘펄프 픽션’이 세상에 던진 신선한 충격, 그 기묘한 참신성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타란티노의 독창적 스타일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특정 양식에 갇히지 않으려는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가이 리치(셜록 홈즈, 젠틀맨), 크리스토퍼 놀란(오펜하이머, 테넷)과 같은 감독들과 TV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펄프 픽션이란 질 낮은 종이에 인쇄된 싸구려 소설을 일컫는다. 이런 류의 소설들에는 로맨스, 공상과학, 오컬트, 호러 등 각종 장르가 뒤범벅되어 있고 불륜, 음모, 치정, 살인 등의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주로 다룬다.   영화 ‘펄프 픽션’은 싸구려 소설의 오락성과 영화의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영화이다. 기존의 영화 방식을 파괴하고 자신의 영화를 아예 ‘저급’으로 정의한 타란티노의 등장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유럽 영화계였다. 타란티노는 1994년 자신의 2번째 작품 ‘펄프 픽션’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다.   고등학교 중퇴, 비디오 가게 점원 출신의 타란티노는 처음부터 이단아였다. 데뷔 시절부터 천재, 악동의 이미지로 주목받은 그는 이미 홍콩 느와르의 영향을 받아 만든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로 마니아층 팬들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칸영화제의 성공적 데뷔에 이어 ‘펄프 픽션’이 미국에서 개봉된 후 가장 먼저 대화의 화제에 오른 것은, 시제에 관한 혼돈이었다. 각 인물들의 스토리를 순서대로 짜맞춘 기승전결식 구성에 익숙해 있던 관객들이, 여러 개의 이야기가 앞뒤 구별 없이 혼재된 상태에서 펼쳐지는 ‘펄프 픽션’의 서술 방식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것은 당연했다.       타란티노에게 서사의 시퀀스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예측 가능한 전통적 스토리의 전개 방식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서 그가 마치 저급 소설처럼 스크린에 마구 늘어 놓은 이야기들은 느닷없이 암전 상태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감독 데뷔 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숱하게 접했던 B급 영화들은 훗날 그의 독창적 연출 스타일에 밑거름이 되었다. 극단적인 폭력과 저질스런 욕설이 담긴 대사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영화들은 일정 부분 B급 영화의 향취를 담고 있다.     LA 암흑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펄프 픽션’은 6편의 다른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각기의 에피소드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3류 인생들이고 모두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   LA의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두 연인 펌킨(팀 로스)과 허니 버니(아만다 플러머)가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청부살인 조직의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쥴스(새뮤얼 L. 잭슨), 그들의 두목 마셀러스(빙 레임스)와 부인 미아(우마 서먼), 퇴물 복서 버치(브루스 윌리스)와 그의 연인 등이 등장해 제각기 사건들을 펼쳐간다. 마약 중독, 권투경기 승부 조작, 총기 오발 사고로 인한 살인 등 그들의 스토리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보이지만, 종국에는 하나로 연결된다.   ‘펄프 픽션’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은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뜻밖의 상황을 연출한다. 온갖 욕설이 가득한 말장난식의 대사들과 기발한 설정에서 읽혀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타란티노의 엉뚱한 발상은 가히 천재적이다. 타란티노 영화가 비평이 불가한 ‘언터쳐블’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타란티노의 캐릭터들은 특별히 위트 넘치는 입담과 수다를 특징으로 한다.‘펄프 픽션’의 넘버 윈 입담가는 당연 새뮤얼 L. 잭슨이 연기하는 쥴스다. 그는 식당 화장실에서 그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강도를 순전히 현란한 입담만으로 제압해 버린다. 그리고 성경구절 에스겔 25장 17절을 인용, 마치 세상을 떠도는 선교사인 양 폭력과 구원에 대한 ‘설교’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1991년 ‘정글 피버’(스파이크 리 감독)로 칸영화제 최초의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잭슨은 타란티노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해 공포스러우면서도 수다스런 대체불가의 캐릭터들을 창출해 낸다.   ‘펄프 픽션’은 한물간 스타 존 트라볼타를 다시 할리우드로 불러내 한동안 잊혀졌던 그에게 제 2의 전성기를 안겨준 작품이다. 미아와 빈센트의 댄스 시퀀스는 가장 많이 재현된 아이코닉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주인공으로 알았던 빈센트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장면 또한 충격적이었다. 관객의 기대감을 이처럼 한순간에 배반해버린 장면은 영화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 영화 이후 트라볼타와 새뮤얼 L. 잭슨은 스크린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최근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새뮤얼 L. 잭슨은 “펄프 픽션은 나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이 영화에 출연한 이후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멋진 놈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Q&A를 진행한 우마 서먼은 “나의 삶은 펄프 픽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영화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펄프 픽션’과 함께 진화해 왔다”라고 말했다.     타란티노는 역사상 가장 두터운 마니아층 팬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감독이다. 반면 대사가 너무 많아 영화가 길게 늘어지는 느낌과 수위 높은 폭력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와는 거리가 멀다. ‘펄프 픽션’은 BBC 선정 역대 최고 영화 100편 28위에 올랐고 7백만 달러의 예산으로 미국에서만 1억 달러, 전 세계적으로 2억 1000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김정 영화 평론가 ckkim22@gmailcom불가능 걸작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펄프 픽션 영화 방식

2024-10-09

오랜 세월 조롱·비하 대상…한류 이후 긍정·친근 전환

‘대지’ 3부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펄 벅이 1960년대 한국의 농촌을 여행하다 농부가 소달구지에 타지 않고 소와 짐을 나눠서 지고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왜 달구지를 타고 편하게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농부는 “오늘 우리 소가 온종일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할 텐데 어떻게 타고 갑니까, 저라도 짐을 나눠서 지고 가야지요”라고 답한다. 이 말에 크게 감동한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설 ‘살아있는 갈대’의 첫머리에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로소 미국의 대중은 한국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된다. 1950~6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1970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매시(M*A*S*H, 로버트 올트먼 감독)’와 1972년부터 1983년까지 CBS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매시’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한국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한국인들에 대한 왜곡과 편견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매시’가 그 원조 격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한국 여성들, 베트남식 밀짚모자를 쓴 한국 남성 등 엉터리 고증이 많았다.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은 한국을 못살고 굶주린 나라로 인식했다.     1980년대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의 모습 역시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적당히 섞은 동양인, 일벌레, 돈벌레로 그려졌다. 스파이크 리의 1989년작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에서 흑인들은 “째진 눈(한국인)들이 뉴욕의 야채 가게를 다 차지했어”라며 조롱과 멸시를 보낸다.     평소 돈만 밝히고 흑인 고객들에게 무례했던 상점 주인은 영화의 피날레 폭동 장면에서 흑인들에게 가게를 습격당한다. 그는 그제야 짧은 영어로 “You, me, same”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비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는 미국 대중에게 한인들이 불친절한 돈벌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1992년 LA폭동 당시 한흑갈등이라는 주제 아래 이 영화가 자주 언급됐다.     한인들을 눈물도 인정도 없는 구두쇠로 묘사한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폴링다운(Falling Down)’(1993)은 한인을 왜곡하는 대표적 영화로 꼽혔다. 한인을 비하하는 노골적인 인종차별 때문에 한국에서는 영화 안 보기 운동이 있을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 K팝 스타들이 세계를 무대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한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할리우드 영화 속에 한인이 대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드라마의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되는 2010년작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의 메인 캐릭터인 한인 데릴은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지만 점차 인종을 초월한 ‘멋진 남자’로 그려진다. 그러면서 점차 부각되는 그의 한국적 특성에 매료된 여성층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글렌은 미국 여성들에게 ‘섹시한 남성’으로 어필된 최초의 한인 남성일지도 모른다. 그는 드라마에서 백인 여성 매기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결혼한다.     캐나다 CBC를 통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방영된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은 토론토 한인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그린 인기 드라마였다. 이민 1세 김상일은 일본에 대한 반감과 완고한 성격 때문에 2세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인정 많은 아버지고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엄청난 재산을 모은 성공한 이민 1세다.     그의 아내 김영미는 교회 활동을 중히 여기는 전형적인 한인 엄마다. 부지런하고 요리 실력이 뛰어나 갈비찜, 김밥, 꼬리곰탕, 약밥 등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호의 덕에 사람들은 공짜로 김치를 먹을 수 있다.     ‘김씨네 편의점’에서처럼 드라마 속 한인들은 보수적이고 교회 활동을 통해 공동체적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한인들의 교회는 종교 공동체라 하더라도 같은 민족의 상부상조 모임 성격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이 끼어들 틈이 없다.   미주 한인들의 종교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는 한인 2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영화는 아내 모니카를 신실한 교인으로 그리고 있는 반면, 교회로부터 상처받은 한인 이민자들의 모습도 솔직하게 표현, 종교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기독교 안에서의 한인 2세들의 공동체 의식은 2024년 골든글로브 3관왕, 에미상 8관왕 ‘비프(Beef)’에서도 이어진다. ‘비프’는 한인 2세들에게 교회가 종교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네트워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해 미국인들에게 한인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비프’는 또한 한인 사회에 가부장제가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음을 간접 표현한다. 여성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남성들, 교회 내에 만연한 성별 격차, 특히 교회의 모든 리더십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사실 등에서 성차별을 느낀 여성 시청자들이 많았다.     이 드라마는 한국인의 타자 지향성과 체면 중시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일례로 주인공 대니는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자살 충돌을 느끼고 있음에도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애써 숨긴다. 그는 예배를 드리며 비애의 눈물을 흘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채 상황을 무마한다.     영화나 드라마 속 한인들은 대체로 무뚝뚝하다. 편견을 조성하고 불특정 소수를 일반화하는 엄연한 오류이지만, 영화와 드라마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영화와 드라마 속 한인들은 인종차별과 왜곡을 충분히 경험해 왔다. 그러나 K팝, K드라마, K영화의 열풍이 지구촌 문화 흐름의 대세로 자리한 이후 한인들의 이미지가 상당히 개선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대중문화에 비친 한인의 이미지가 실제 우리의 모습이 아닐 수 있지만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김정 영화평론가친근 전환 할리우드 영화 칸영화제 그랑프리 한국 남성

2024-09-25

동물로 사육된 남자가 던진 슬픈 문명 비판

인간이 만약 언어 교육과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신체만 어른인 상태로 성장한다면 사회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The Enigma of Kaspar Hauser)’는 독일 역사의 기이한 실화를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특유의 실존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1960년대 라이너 베르너 파스판버, 빔 벤더스와 함께 독일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3대 명장 중 한명인 헤어조크는 광기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감독이다. 그의 독특한 영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 생존과 죽음의 본질, 비애와 비밀을 간결하고도 리얼하게 표현한다. 1975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돕는다.’   성경 구절인 듯 들리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속담에서 유래됐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 ‘Jeder fur sich und Gott gegen alle’를 번역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그에 반한다’(Every Man for Himself and God Against All)이고, 이를 좀 더 풀어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74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기존 속담의 반어법적 효과와 헤어조크의 실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1828년 오순절 일요일 독일의 뉘른베르크 길가에 한 아이가 버려진다. 그의 이름이 ‘카스퍼하우저’이고 군인으로 징집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들고 있다. 모든 게 미스터리한 이 아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어느 가난한 농부에 의해 지하실에 갇혀 동물처럼 사슬에 묶여 살다가, 그마저도 농부의 형편이 좋지 않아 버려졌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기이한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완전히 문명과 격리된 그의 백지상태는 사람들의 호기심 또는 지식인층의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서커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카스파는 어느 교수의 집으로 도망을 한다.     교수는 몇 마디 말과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그에게 학문과 음악, 미술, 종교 등을 가르친다. 빠른 학습에 점차 ‘문명’에 눈을 뜨게 된 카스파의 말과 행동은 나름의 자아 세계를 형성한다. 곧 자서전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카스파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상류사회에 당혹스러운 존재로 떠오른다.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카스파를 마을에 버린 망토를 두른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사악한 이 자는 언어를 구사하게 된 카스파가 자신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할지도 몰라 두려워한다.     세상은 카스파를 발견하고 카스파는 세상을 발견한다. 세상에 낯선 사람으로 온 현명한 바보 카스파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사회이다.  카스파에게 문명이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도구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학문과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는 교수와의 대화 중에 그에게 모든 사람이 늑대였다고 토로한다. 그는 교회 회중의 침묵이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왜 피아노를 호흡처럼 연주할 수 없나, 라고 반문한다. 토론에서 종교와 합리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오만한 논리학자를 제압한다. 그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다.   카스파는 1833년 두 번째 폭행을 당하고 가슴 깊숙이 칼에 찔린 채 살해된다. 사람들은 그의 기형성 또는 비정상성을 분석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한다.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위해서다. 공증인은 카스파의 뇌의 어느 한 부분이 변형됐다고 기록한다. 변형이라는 말 외에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없던 독일 지식인들의 위선을 상징하는 듯, 영화는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공증인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헤어조크는 카스파의 음울한 우화를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탐문으로 이어간다. 그는 카스파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함으로 서구 문명의 큰 축인 이성과 종교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을 조롱하는 ‘문명화된 카스파’와 문명화의 비극을 목도한다. 헤어조크는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포착해 낸다.     헤어조크 감독은 카스파 역에 브루노 슐라인슈타인이라는 43세의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그는 평생 보호 시설에서 보냈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그의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슐라인슈타인은 연기 이상의 것을 연기한다. 순수하고 교활한, 그리고 선량하고 악의적인 카스파의 장난기를 과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표현한다. 젊은 카스파를 연기하기엔 나이가 좀 많긴 했지만 카스파 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이 배우는 코믹한 카스파 역을 이질감 없이 잘 소화해 냈다. 낯선 세계에 휘둥그레진 어린 그의 눈은 영화의 중심 이미지이다.   헤어조크는 50년 전 사회 제도 또는 체제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권력에 대한 민중의 두려운 심리를 리얼하게 파헤쳤다. 상상력과 지성에 기반한 이 영화는 후세대 거장들인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라르스 폰 트리에의 ‘바보들’(1998),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최근 작품 ‘푸어 씽스’(2023) 등의 영화들에 영감을 주었다. 상류층 엘리트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 제도가 그들 외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삶을 안겨 주고 있음을 비판한 영화들이다.     명상적이며 가슴 아픈 담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예의 바른척하는 지성인들의 학문과 이성은 문명의 오만함이며 혼돈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헤어조크는 이 영화를 통해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를 ‘학문적 창조물’로 인식했던 상류사회의 오만을 반성하고자 했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비판 문명 바보 카스파 칸영화제 그랑프리 서구 문명

2024-09-18

음모의 시대 어두운 내면을 엿듣는 예리한 귀

현대 영화사의 걸작들인 ‘대부’, ‘대부2’, ‘지옥의 묵시록’ 등을 감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1974년 ‘대부’의 차기작으로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을 발표했다. 영화는 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상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코폴라의 다른 대작들에 비해 비교적 생소한 이 영화는 ‘대부 1’(1972)과 ‘대부 2’(1974) 사이에 발표됐다. ‘대부’ 시리즈에 비하면 캐스팅, 제작비 면에서 규모가 작은 영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무너지는 미국의 도덕에 들이대는 코폴라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코폴라와 주연 배우 진 해크먼은 추후 이 영화를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코폴라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재편집하는 완벽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다. 오늘날 여러 버전의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코폴라는 1974년 개봉한 이래 50주년이 되는 오늘까지 이 영화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완벽한 영화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멀리 떨어진 곳, 방해 전파와 소음 속 낯선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직업인 도청 전문가 해리 콜(진 해크먼).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거주지를 옮긴 그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며 고립된 ‘감시자’의 삶을 살고 있다. 수줍은 성격의 해리는 필연적으로 외롭고  우울하다. 뉴욕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이 아직도 그의 잠재 심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혼자 아파트에 있을 때만 색소폰을 연주하는 해리의 연락처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여성과의 만남조차도 거리를 유지한 채 절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리는 거금의 착수금을 받고 젊은 커플의 일상을 도청하라는 의뢰를 받는다.     샌프란시스코 공원에서 도청한 커플의 대화에는 이들이 불륜 관계이고 ‘그’가 그들을 죽일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해리는 이들의 일상의 대화를 음모로 오인한다.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 했던 뉴욕에서의 일이 되풀이될 것 같은 불안이 그의 심리를 파고든다. (당대의 조연 배우이며 코폴라가 최애했던 로버트 듀발이 크레딧 없이 의뢰인 ‘그’를 연기한다.)   남의 대화를 엿들어야 하는 해리의 심리는 늘 양심과 충돌한다. 비극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그는 의뢰인에게 테이프를 넘기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그의 ‘음모론’은 더욱 그를 고립시키고 동료,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고통의 당사자는 도청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청 전문가로 자부해왔던 해리 자신이다.     해리는 결국 도청 테이프를 빼앗기게 되고 젊은 커플이 암살당하기 전 테이프 속에 담긴 그 누군가와 증거를 찾기 위해 호텔로 향한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반대의 상황에 부딪힌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로 알았던 의뢰인이 피해자가 되어버린 기막힌 상황에 이르자 해리는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주던 정체성에서 이탈해버린다.     극도의 불안 증세, 무력감과 절망감, 죄의식이 그를 조여온다. 그의 모든 것을 삼켜버린 편집광적 의심은 마침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광기를 유발하기에 이른다.     해리의 광기는 고독과 단절의 다른 모습이다. 영화는 해리가 누군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아파트 전체의 바닥을 뜯어내고 허탈감에 빠져 그나마 온전히 남아 있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컨버세이션’은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의 수사 직전에 발표되었다. 영화가 발표된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 흑인들의 민권운동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차이나타운’(1974),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 ‘마라톤 맨’(1976), ‘블랙 선데이’(1977), ‘브라질에서 온 소년’(1978) 등 음모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코폴라 감독은 해리의 도청과 감시를 관음증의 한 형태로 표현한다.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남을 엿보는 감시와 도청이 지속되는 동안 해리의 죄의식은 쌓여만 간다.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다. 혼자만의 처절한 사투 끝에 반전의 결말은 충격과 고통 그 자체이다.   감독의 예리하고 냉소적인 관찰은 진 해크먼이라는 대배우의 대체불가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해크먼은 관음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민하고 방황하는 가운데 나락으로 빠져가는 해리의 어두운 심리를 스릴과 서스펜스로 묘사해낸다.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내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해크먼은 자신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이전 작품 ‘프렌치 커넥션’(1971)을 통해 각인시켰던 냉정하고 강직한 캐릭터를 이 영화에 그대로 가져온다. 두 인물 모두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안티 히어로들이다. 당시 44세의 해크먼은 노년에 접어들어 주연 못지않은 조연 연기로 더욱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수퍼맨’ 시리즈의 렉스 루터 역은 그가 연기한 대표적 악역이었다.   레인코트를 걸치고 철 지난 뿔테 안경 차림의 내성적인 해리는 사실 외향적인 성격의 해크먼과는 반대되는 인물이어서 연기가 쉽지 않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엔딩의 색소폰 연주 장면을 위해 해크먼이 색소폰을 배웠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에는 메릴 스트립의 연인이었으며 고작 5편의 영화에 출연, 영화 5편이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그중 3편이 작품상을 수상했던 존 카제일(‘대부’에서 마이클의 둘째 형 프레도 역), 젊은 시절의 해리슨 포드, 해크먼에 버금가는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듀발 등이 모습을 보인다. 김정 영화평론가내면 음모 그해 칸영화제 현대 영화사 코폴라 감독

2024-09-11

영웅도 꿈도 없는 미국, 그래도 여인은 꿋꿋하다

‘앨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Alice Doesn’t Live Here Anymore)’는 남성성의 상징적 영화들을 만들어온 현대 미국영화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보기 드문 여성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다. 남성에 의존하면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주인공 앨리스가 여러 남자들을 거치면서 자아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영화는 ‘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인가’(1969), ‘비열한 거리’(1973) 등의 독립영화로 비평가들의 관심을 모아오던 스콜세지의첫 번째 스튜디오 영화다. 이후 스타로 떠오른 조디 포스터,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로라 던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콜세지 영화의 단골 배우 하비 카이텔과 다이앤 래드도 모습을 보인다.     1974년 개봉된 대작들 ‘대부2’와 ‘차이나타운’에 밀려 아카데미상에서는 엘렌 버스틴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지만, 영국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스콜세지는 2년 후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불멸의 명작 ‘택시 드라이버’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그는 네 작품 만에 거장의 대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34세에 불과했던 시기의 일이다.     35세의 평범한 가정주부인 앨리스(엘렌 버스틴). 12세 아들 토미를 옆에 태우고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사막을 달리고 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살림을 정리한 후 고향 몬터레이로 가는 중이다.     트럭 운전을 하던 건달 남편은 아들이 앨리스의 이전 남자의 아이라며 토미를 학대했다. 앨리스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을 새 학교에 입학시키고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가수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들의 여정은 두 모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앨리스는 집으로 가는 도중 돈을 벌기 위해 술집 밤무대 가수로 취직하고 술집 주인 벤(하비 카이텔)을 만나 사귀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벤이 유부남인 사실이 드러나고 이에 실망한 앨리스는 사이코 기질이 농후한 벤을 피해 목장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연하남 데이비드(크리스 크리스토퍼슨)를 만난다. 그녀는 셔츠 단추도 제대로 끼지 못하는 데이비드의 신사다운 매너와 친절함에 호감을 느낀다. 앨리스에게 ‘완벽한 남자’로 다가온 데이비드와 함께 이제 그녀는 고통스러웠던 지난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가 있을까.     사회의 모순이나 부정적 현실에 비판적 시각이 강했던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성향이 강한 이 영화는 영웅도, 신화도, 꿈도 없는 미국 사회의 실상을 통해 남녀 관계 속에서 억압 받는 여성을 동정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일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영화의 통속적인 결말에 대해 스콜세지가 할리우드와 타협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한 여인의 홀로서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두 모자의 여정을 그린 로드무비 ‘앨리스는 여기 살지 않는다’는 엘렌 버스틴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주었다. ‘레퀴엠’, ‘엑소시스트’ 등의 작품으로 당시 ‘여자 잭 니컬슨’으로 평가받던 버스틴은 최고조에 오른 감정 표현 연기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의 박수를 받았다. 그녀는 아들 토미 역의 아역 배우를 리드하며 엄마와 아들이 서로에게 짜증을 내는 즉흥적이고 웃픈 장면들을 연출해냈다.   연기파 배우 다이앤 래드의 조연 연기에도 찬사가 이어졌다. 가시가 돋친 말로 앨리스를 골탕 먹이는 동료 웨이트리스 플로렌스를 연기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래드의 딸 로라 던이 영화 속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여자아이 역으로 출연한다.   엘튼 존의 ‘다니엘’, 돌리 파튼의 ‘I Will Always Love You’ 등의 노래들이 앨리스의 지치고 고달픈 인생 여정을 묘사하는 배경음악으로 사용됐다. 1976년 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시트콤 TV 스핀오프가 기획되어 로버트 앨트만 감독의 연출로 9년 동안 CBS를 통해 방영됐다. 김정 영화평론가미국 여인 스콜세지 영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여주인공 앨리스

2024-09-04

‘대부’에 견줄 레오네 감독의 뒷골목 아메리칸 드림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영화감독,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창시자 세르지오 레오네. 그의 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가 개봉 40주년을 맞았다. 갱스터 장르에 누아르의 분위기를 가미한 이 영화는 ‘대부’ 시리즈에 필적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레오네는 ‘대부’를 감독해줄 것을 제안받았지만, 이 영화에 전념하고 하고자 파라마운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레오네는 10년 동안 제작자를 찾지 못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던 시기에 제작에 들어갔다. 건강이 악화하여 작품을 완성하기 어려웠지만 사력을 다해 촬영을 끝냈다. 결국 영화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완벽주의자이던 레오네가 영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건강을 해친 것이 죽음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작품에 집착이 강했던 레오네는 이 영화를 긴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실제로 촬영을 끝냈을 때의 분량은 10시간에 달했다. 1964년 5월 칸영화제에서 229분 편집본이 초연되면서 8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개봉 시 배급사는 긴 상영시간 때문에 흥행이 되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초기 편집 후 6시간으로 줄였지만 6시간짜리 영화를 극장에 걸 수는 없었다. 배급사 워너 브러더스는 더 자르라고 주문했고 레오네는 영화를 1부와 2부로 나눠 개봉하자고 제안했다.     영화는 결국 제작사 래드컴퍼니(Ladd Company)가 감독과 상의 없이 노년의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원래의 방식을 시대순으로 재편집, 139분 축약본으로 개봉된다. 그리고 평론가로부터 ‘최악의 영화’라는 혹평을 받는다. 불과 한 달 만에 최고의 영화가 ‘최악의 영화’로 전락해 버렸다. 현재는 251분 감독 확장판과 246분 칸영화제 복원판이 DVD로 출시되어 있다. 6시간짜리 판본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레오네는 그의 주종인 이탈리아 갱스터들의 이야기에서 유대계 미국인 갱스터로 소재를 옮겨 간다.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의 우정과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소재로 한  영화는 1920년대 유년기에서 시작해 금주법과 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의 청년기, 그리고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혼란기인 1968년도까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시대순이 아닌 노년의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921년 뉴욕의 유대인 지역. 좀도둑질을 일삼던 누들스(로버트 드니로)와 맥스(제임스 우드) 일당은 밀수품을 운반하며 돈을 벌어들인다. 이들에 위협을 느낀 갱 두목 벅시는누들스의 친구를 죽이고 이에 분노한 누들스는벅시와 경찰을 살해한 후 감옥에 들어간다.   1932년 출소한 누들스는 그의 어린 시절 첫사랑 데보라(엘리자베스 맥거번, 아역 제니퍼 코넬리)와 밀주 사업을 일으켜 크게 성공한 맥스를 다시 만나 사업에 동참하지만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맥스는 누들스에게 연방준비은행을 털자고 제안한다. 누들스는 맥스의 위험한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밀고하고 잠적해 버린다.     1968년, 노년의 누들스는 옛 친구들과 다시 만나 맥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베일리 재단의 창립기념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기념사진 속에서 데보라를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가 자신을 초대한 베일리 장관에 대해 묻지만데보라는 그를 찾지 말라며 경고한다.     데보라의 만류에도 누들스는 마침내 의문의 베일리 장관을 만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맥스가 베일리였으며 누들스의 밀고 이전에 맥스의 배신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그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조정되고 있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된다.   레오네는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과거의 장면들로 대치, 전환한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관객의 자의적 해석에 맡긴다. 누들스의 연인이었던 데보라는누들스에게 겁탈당한 후 상처를 안고 할리우드로 떠났다. 30년 만에 만난 그녀가 어떻게 맥스의 애첩이 되어 아들까지 낳았는지를 영화는 밝히지 않는다. 영화의 최대 미스터리인 맥스의 죽음 역시 관람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에서의 아메리칸 드림은 희망적이기보다 염세적이다. 맥스는 엄청난 부를 이루지만 그의 야심과 탐욕의 결과는 결국 비극으로 끝이 난다. 레오네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쓰레기차와 연관시켜 그가 이룬 부의 허망함을 표현한다. 영화 시작 부분에 아편을 파는 장소가 나오고 이를 다시 마지막 장면에서 누들스가 아편을 흡입하고 웃는 장면과 연결시킨 것 역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표현한 레오네의 의도로 읽힌다.         그러나 레오네 감독은 ‘친구의 우정’이라는 부분에서 인간주의적 세계관으로 귀의한다. 철부지 시절부터 서로의 존재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던 누들스와 맥스의 운명은 30년의 공백 끝에 노년이 되어 다시 이어진다.   패거리의 리더 맥스는 철저한 이윤 추구자이며 후회나 죄책감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누들스의 손에 자신의 삶을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베일리로 신분 세탁을 하고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자신이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어린 시절 함께 놀다가 자동차가 바다에 빠지면서 사라진 누들스를 애타게 찾는 맥스의 모습이 교차편집 되면서 관객은 싸이코패스적인 그의 평소 모습과 다른 맥스를 보게 된다.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깨졌지만 순수한 우정이 있었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픈 맥스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난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았어. 난 네가 살아야 할 집, 너의 돈, 너의 여자, 너의 모든 걸 가져갔어.  30년 동안 내 마음속에 쌓여온 슬픔 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네. 이제 방아쇠를 당기게.”     쓰레기차가 지나가고 화면에서 사라지는 맥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레오네 감독의 의도적 모호함은 이후 영화사에 영원한 숙제를 남긴다. 그는 과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일까.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미국 아메리칸 이탈리아 영화감독 아메리칸 드림 칸영화제 복원판

2024-05-22

한인 1.5세 제작 영화 칸 진출

LA 출신 한인 1.5세 여성이 제작한 장편영화가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5월15~23일)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할리우드의 신생 프로덕션 필드트립(Field Trip)의 샐리 수진 오(사진) 대표가 제작한 ‘블루 선 팰리스(Blue Sun Palace)’가 제63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경쟁부문에 출품된 1050편 중에서 7편의 장편 중 하나로 선정됐다고 15일 주최 측이 발표했다.   1962년 시작된 비평가 주간은 프랑스비평가협회 소속 평론가들이 전 세계 신규 감독의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 중 참신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는 부문이다. 매년 장편 7편, 단편 12편 안팎을 소개한다.   올해 경쟁부문의 7편은 상금 1만 파운드의 그랑프리와 심사위원상, 최고의 시나리오에 수여되는 SACD상, 영화 배급을 돕는 개너(Gan) 재단 상, 유명 샴페인회사 루이 로드레가 만든 재단의 떠오르는 스타상 등 5개 부문 수상을 놓고 겨루게 된다.     블루 선 팰리스는 뉴욕 퀸즈에 사는 중국 이민자 커뮤니티를 다룬 영화로, 중국계 감독인 콘스탄스 탕이 메가폰을 잡고, 대만 배우 이강생 등이 출연했다. 주연을 맡은 이강생은 대만 유명 감독 차이밍량의 페르소나로, 지난 2020년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데이즈(Days)’를 통해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6살 때 미국에 온 오 대표는 라크라센타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UC샌타바버러를 졸업했다. 비욘세 뮤직비디오 제작팀에서 활동하며 할리우드에 입문, 경력을 쌓은 그는 3년 전 독립해 프로듀서로 나섰다.     오 대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원은) 적지만 유능한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모두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는 소감을 밝혔다.     또 “이 이야기를 전 세계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며 “내 가족에게도 커다란 축하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한인 제작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제작 영화 베를린영화제 경쟁

2024-04-26

한인 1.5세 제작 영화 칸 진출…필드트립 샐리 수진 오 대표

LA 출신 한인 1.5세 여성이 제작한 장편영화가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5월15~23일)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할리우드의 신생 프로덕션 필드트립(Field Trip)의 샐리 수진 오(사진) 대표가 제작한 ‘블루 선 팰리스(Blue Sun Palace)’가 제63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경쟁부문에 출품된 1050편 중에서 7편의 장편 중 하나로 선정됐다고 15일 주최 측이 발표했다.   1962년 시작된 비평가 주간은 프랑스비평가협회 소속 평론가들이 전 세계 신규 감독의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 중 참신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는 부문이다. 매년 장편 7편, 단편 12편 안팎을 소개한다.   올해 경쟁부문의 7편은 상금 1만 파운드의 그랑프리와 심사위원상, 최고의 시나리오에 수여되는 SACD상, 영화 배급을 돕는 개너(Gan) 재단 상, 유명 샴페인회사 루이 로드레가 만든 재단의 떠오르는 스타상 등 5개 부문 수상을 놓고 겨루게 된다.     블루 선 팰리스는 뉴욕 퀸즈에 사는 중국 이민자 커뮤니티를 다룬 영화로, 중국계 감독인 콘스탄스 탕이 메가폰을 잡고, 대만 배우 이강생 등이 출연했다. 주연을 맡은 이강생은 대만 유명 감독 차이밍량의 페르소나로, 지난 2020년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데이즈(Days)’를 통해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6살 때 미국에 온 오 대표는 라크라센타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UC샌타바버러를 졸업했다. 비욘세 뮤직비디오 제작팀에서 활동하며 할리우드에 입문, 경력을 쌓은 그는 3년 전 독립해 프로듀서로 나섰다.     오 대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원은) 적지만 유능한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모두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는 소감을 밝혔다.     또 “이 이야기를 전 세계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며 “내 가족에게도 커다란 축하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게시판 한인 제작 영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베를린영화제 경쟁

2024-04-18

‘화장실’로 돌아온 거장 “완전에 이르면 세상은 없다”

빔 벤더스는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상업주의 탈피를 외쳤던 60, 70년대 독일의 영화사조 ‘뉴저먼 시네마’를 주도했던 감독이다. 198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파리, 텍사스’, 천사의 눈을 통해 바라본 베를린을 그린 1987년작 ‘베를린의 천사’(Wings of Desire)가 그의 대표작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은 대체로 전후 독일의 회의적 운명론과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 그리고 동시에 타문화를 침식하는 미국 문화에 대한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 80년대의 전성기 이후, 침체기를 가졌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극영화보다는 ‘피나’(2012),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2014), ‘안셀름’(2023)과 같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주로 활동해왔다.     빔 벤더스의 6년 만의 장편 컴백작으로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줬으며 오스카 국제장편영화의 일본 출품작이었던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 시의 ‘화장실 프로젝트’ 홍보영상 기획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둡고 더럽고 냄새나고 무서운 인식이 지배적인 공중화장실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쿄시는 2022년 초 벤더스 감독에게 단편 4편 중 1편을 의뢰한다.     “예술적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과 함께 단편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 도쿄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나를 화장실의 비중이 높은 일본 문화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줘서 그 제안이 고마웠다.”     그와 일본, 특히 도쿄와의 인연은 70년대 초로 돌아간다. 그가 50년대 일본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에 매료되어 일본에 빠져들어 가던 시기였다.   “처음 도쿄를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지하철을 타고 매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거대한 공간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돌아다닌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도쿄와 사랑에 빠졌다. 옛것들과 현대적인 것들, 고층빌딩과 지하 2층, 3층 고속도로 등 혼란스러움 가운데 보이는 심플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둘러본 시부야의 공중 화장실들은 ‘위생의 사원’처럼 보였다. 도시의 복잡함, 그러면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생활 공간, 그 안에 보이는 미로가 그를 유혹했다. 공중화장실을 소재로 한 빔 벤더스 버전의 도쿄 ‘퍼펙트 데이즈’의 제작 동기다.     “화장실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사람과 예술을 찾아내고 싶었다. 일본에서 화장실은 작은 성역이다. 평화와 존엄이 존재하는 곳이다. 단편은 나의 언어가 아니다. 화장실을 소재로 한 장편영화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일본의 ‘공동선’ 의식, 도시와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은 그에게 영화로서 접근하기에는 버겁고 너무나도 새로운 영역이었다. 각본을 함께 작업한 타카사키 타쿠마와 많은 토론을 하며 벤더스 감독은 마침내 ‘우리의 남자’ 히라야마의 캐릭터를 찾아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그 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히라야마를 연기한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다. 야쿠쇼는 이 역으로 칸영화제를 비롯, 일본 아카데미상, 토론토영화제, 아시안영화제, 시애틀평론가협회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최우수남우연기상을 수상했다.     “야쿠쇼는 평소 존경하던 배우였다. 그는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지닌 히라야마의 삶을 연기할 수 있는 최고의 배우였다.”     ‘퍼펙트 데이즈’는 공중화장실 청소부가 직업인 한 남자의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행복의 디테일’을 찾아가는 내용을 다룬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늘 겸허하며 겉으로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도심 한구석의 외로운 영혼이었음을, 벤더스 감독 특유의 시적인 터치로 묘사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건, 가장 낮은 지점에서 깨달음을 얻은 히라야마의 내면이다. 그는 과거를 가진 남자이다. 그가 어떻게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지옥을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히라야마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보게 된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태양 빛에 반사되는 실루엣을 히라야마가 촬영하는 장면이 있다. 벤더스 감독은 히라야마의 일상 안에 숨어있는 상징성을 ‘코모레비’라는 말로 설명한다.     “코모레비라는 햇빛에 의해 벽에 춤추는 나뭇잎의 그림자 이미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서 히라야마는 단순함과 겸손함을 배운다. 그리고 청소부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다.”   히라야마는 자신이 가진 몇 안 되는 것들에 만족한다. 그는 구식 필름 카메라로 나무 곁에 앉아 코모레비의 순간을 포착하고 문고판 책만을 읽으며 어렸을 때부터 모아둔 카세트테이프로 록음악을 듣는다.   “공중 화장실 청소부는 ‘열등한’ 직업이 아니다. 오히려 영적인 행위이다. 평등과 겸손, 공동선의 몸짓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한다. 그것이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라는 걸 알고 공동선의 개념을 이해하게 됐다.”   ‘퍼펙트 데이즈’는 벤더스 감독이 그의 스승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하는 영화다. 1982년, 오즈 감독의 마지막 영화 ‘꽁치의 맛’(1962) 이후 20년 만에 다큐멘터리 ‘Tokyo-Ga’를 제작했었다. 그리고 60년이 지나 다시 도쿄에 입성, ‘퍼펙트 데이즈’를 제작했다. 두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히라야마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즈 감독의 어떠한 점들이 그의 영화에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궁극적으로 그를 일본 문화에 심취하게 했을까.       “그의 영화에 스며든 모든 느낌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 그의 영화의 모든 것이 독특하다.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들이지만, 그가 펼치는 이야기들에는 영원성이 담겨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Always’라는 규칙적인 리듬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를 통해, 우리의 삶이란 독특한 이벤트, 독특한 만남, 독특한 순간이 사슬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 ‘완전(Perfect)’에 이르면 그 이상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분히 동양적인, 그리고 극히 단순한 진리를 탐구하는 영화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화장실 완전 공중화장실 청소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2024-03-13

요리…음식에 사랑을 쓰다

프랑스의 2024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부문 출품작. 근대 베트남의 어두운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1993)와 ‘시클로’(1995)를 연출했던 베트남 출신의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흥의 최근작으로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사랑과 음식은 하나다. 음식에 대한 욕구, 배고픔은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하는 행위와 사랑을 하나로 ‘조리’하는 영화 ‘테이스트 오브 싱스’는 19세기 미식가 도댕(브누아 마지멜)과 그의 연인 유진(쥘리에트 비노슈)의 사랑 이야기다.     도댕이 주최하는 미식가 클럽의 만찬을 준비하는 주방 풍경을 스케치하는 38분 동안의 오프닝신. 음식을 만들고 맛보고 평가하는 이 초반부의 오랜 조리 시퀀스는, 음식을 만드는 행위도 예술일 수 있음을 입증(?) 해 보인다.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관객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나도 저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면.   그러나 관객은 곧 영화가 후각 자극의 이면에 ‘관계’를 숨기고 있음을 감지한다. 화면을 오가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관찰하면서 이 영화가 음식들의 층 위에서 말하고자 함이 사랑이란 걸 알게 된다.     도댕과 유진은 20년을 함께 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도댕이 유진에게 구혼을 하는 장면이 있고 유진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들만의 사랑의 밀어로 둘의 관계를 이어간다. 도댕은 가끔씩 기절하는 유진의 건강이 우려스럽다.     주방에서 힘든 하루를 보낸 후 휴식을 취하는 밤, 그녀를 찾아오는 그의 방문. 유진은 그와 함께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의 방문을 기다리는 지금의 설레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한다. 도댕과 결혼을 하게 되면 이 모든 행복이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언제나 일관되게 유지되는 건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존중이다.   영화는 사랑에 관한 프랑스적 감성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그들의 시적 표현들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도댕과 유진은 그 사랑을 요리로 표현한다.     도댕이 오직 유진만을 위해 요리하는 후반부의 한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행위가 그 어떤 말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트란 안 흥 감독은 은유와 상징을 영화 언어로 사용하는 감독이다. 정물의 정직함을 믿는 그는 종종 설명 없이 이미지로만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의 후반부. 유진은 가고 없다. 그녀가 없는 주방 공간에 도댕과 유진이 나누었던 달콤한 대화들이 메아리쳐 온다. 진정한 요리의 미학은 음식의 맛에 있지 않다. 영화는 질문한다. 당신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음식 사랑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영화 언어 지난해 칸영화제

2024-02-09

여교사·학생 성관계, 20년 뒤 그들은…

1996년 자신이 가르치던 학교에서 13살 제자 빌리 푸알라우와 성관계를 맺고 아동 강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30대 여교사 ‘메리 케이레트르노(Mary Kay Letourneau) 사건’이 모티브다.  ‘다크 워터스’(2019)를 연출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작품으로 지난 5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이었다.   실제 사건이 더욱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레트르노가 7년의 형량을 마치고 출소한 뒤 푸알라우와 다시 만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교사와 남자 제자 사이에 일어났던 성범죄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됐던 사건, 그들의 관계와 사랑에 숨어 있는 미스터리에 헤인즈 감독은 심도 있는 심리극 형식과 상상력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영화는 20년 전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유부녀와 미성년자의 불륜을 영화화하기 위해 여주인공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먼)가 실제 사건의 주인공 커플 그레이시(줄리앤 무어)와 조(찰스 멜턴)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이제 30대이고, 그녀는 50대이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녀는 꽃꽂이를 가르치며 케이크를 만들어 팔고 그는 엑스레이 기술자다. 그레이시의 위엄과 조의 온화함 때문인지 이 커플은 마치 상하 관계에 있는 듯 보인다.     엘리자베스와 이들 부부가 조우하면서 묘한 3각 구도가 형성된다. 그레이시와 조의 어둡고 뒤틀린 과거가 표면으로 올라온다. 세상은 지금도 가족을 버리고 미성년자와 불륜을 저지른 유부녀 그레이시를 갖가지 형태로 비난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커플의 사생활보다 배우로서의 자신의 커리어에만 몰두한다. 조를 따로 만나 그를 유혹한다. 조는 압박감과 불안에 몸부림치며 그레이시에게 달려간다. 그는 그레이시로부터 헤어나오려 하지만 그녀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달을 뿐이다.   영화는 외설적인 내용을 부각시키기보다 3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데 주력한다. 실제 사건의 주인공 그리고 그녀를 연기하는 배우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 깊어만 가는 미스터리, 흔들리는 조의 영혼.     영화적 공간은 상상력과 예술적 표현의 영역이다. 그 안에서의 윤리적 판단은 늘 모호하다.   김정 영화평론가여교사 성관계 학생 성관계 유부녀 그레이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23-12-08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상영…내달 1일 LA한국문화원에서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이 내달 1일 문화원 아리홀에서 장철수 감독이 웹툰을 바탕으로 연출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포스터)’를 상영한다.     올해 개봉 10주년을 맞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는남파한 북한의 엘리트 간첩이 동네 바보가 되라는 특수지령을 받고 한국 달동네에서 체류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우  ‘김수현’, ‘박기웅’, ‘손현주’ 등이 출연해 만화와 같은 완벽한 싱크로율과 연기로 화제를 모으며 개봉 당시 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장철수 감독은 이달말 채프먼대학교와 UC어바인 대학에서 영화 전공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영화 클래스를 진행하기 위해 LA를 찾는다. 영화 상영 후에 장철수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장 감독은 2010년 개봉된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로 대종상 신인감독상, 제라르메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고,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공식 초청되기도 했다.      본 상영회는 좌석이 한정되어 문화원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해야 한다.     ▶주소: 5505 Wilshire Blvd. LA   ▶문의: (323)936-7141 이은영 기자la한국문화원 영화 영화 상영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최우수상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2023-10-29

편견·배타심…뇌검사 필요한 사회

주인공의 아버지가 뇌검사를 받는 장면이 있다. 영화 제목 'RMN'은 루마니아어로 뇌검사(MRI)를 뜻한다.   2007년 차우세스쿠 독재정권 치하의 낙태 문제를 다루었던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 크리스티안 문지우(Cristian Mungiu)는 최신작 'RMN'에서 뇌검사가 필요한 존재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거의 모든 국가가 직면한 최저임금제,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전통과 변화에 대한 갈등과 분열을 다룬다. 임금 조건이 좋은 독일에서 일하던 루마니아인 마티아스는 직장 동료들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동료 한 명을 때려 눕힌다. 크리스마스와 때를 같이해 고향 트란실바니아로 도주한 그는 루마니아의 고용시장에서도 횡행되고 있는 인종차별과 또다시 맞닥뜨린다.   마티아스는 직장을 찾던 중 옛 애인 실라와 재회한다. 그녀는 그가 없는 동안 빵공장의 매니저로 승진했다. 공장은 EU의 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 스리랑카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의견이 갈리고 그들의 더러운 손으로 만든 빵을 사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마티아스는 실라와, 루마니아사람들은 이웃국가 헝가리 사람들과, 고용주는 고용인들과 갈등한다. 카톨릭 신자인 스리랑카 사람들은 교회에서 내쫓기고 방화와 협박으로 온 마을이 시끌벅적거린다.     'RMN'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 다른 인종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배타심은 루마니아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국경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타주의는 여전하고 우리는 모두 인종문제에서만큼은 관대하지 못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작동 방식은 우리의 사고 회로와 일치하지 않는다. 아니, 많은 부분,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반대로 작동될 때가 많다. 영화는 꽤 비관적이다. 그러나 손 놓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지우 감독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영화 'RMN'을 통해 제기하는 비관적 문제의식에는 어렴풋이 희망이 있는 듯 보인다. 김정 영화평론가뇌검사 배타심 루마니아인 마티아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최저임금제 외국인

2023-04-28

한인 2세 스토리 담당…칸영화제 폐막작 선정

한인 2세가 감독한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이 오는 5월 27일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세계 최초 상영된다.     픽사 애니메이션이 칸 영화제에 선정된 건 ‘업’, ‘인사이드 아웃’, ‘소울’에 이어 4번째다.   한인 피터 손 (사진) 감독이 감독한 엘리멘탈은 불, 물, 땅, 공기 거주자들이 함께 사는 엘르멘트 시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강하고 열정적인 여주인공 엠버와 재미있고 재빠르면서도 변덕스러운 웨이드가 우정을 쌓아가며 그들이 사는 세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픽사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인 피터 닥터는 “비범한 이야기꾼 피터 손이 감독한 엘리멘탈은 너무 재미있고, 마음을 가득 채우며 놀랍다. 관객들이 큰 스크린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품으로 칸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될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인 2세인 손 감독은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이자 아티스트다.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를 거쳐 2000년 9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한 후 ‘니모를 찾아서’(2003), ‘인크레더블’(2004) 등에서 스토리보드 작업을 했고, 2015년 ‘굿다이노’로 첫 장편 애니메이션 연출을 맡았다.     또 ‘라따뚜이’(2007), ‘몬스터 대학교’(2013)에서는 성우로 활동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업’의 러셀, ‘몬스터 대학교’의 스퀴시는 손 감독을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한편 엘리멘탈은 오는 6월 16일부터 미국에서 개봉한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미국 칸영화제 칸영화제 폐막작 국제영화제 폐막작 한인 피터

2023-04-20

[영화몽상] 왕관의 무게를 견딘 ‘칸의 여왕’

요즘은 한국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탄들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기가 겸연쩍다. 국제 영화제만 아니라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이미 엄청난 활약을 봤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작품상·감독상을 포함해 트로피 네 개를 휩쓸었고, 윤여정은 미국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서구의 국제 영화제 중 이름난 칸영화제는 말할 것도 없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즉 최고상을 안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과 ‘브로커’의 송강호가 나란히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미래의 한국 관객들에겐 실감이 덜 할지 몰라도, 2007년 전도연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은 호들갑을 떨고도 남을 일이었다. 한데 한국 배우 사상 첫 칸영화제 트로피가 그에게 영광만 안겨주진 않았다. 수상 이후 신작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오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든 데다, 들어오는 작품도 다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칸의 여왕’인데 이런 작품을 할까 하는, 그가 최근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쓴 표현을 빌리면 “무게감 있고 영화제에 갈 법한 작품”이나 “작품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만 할 것이란 지레짐작이 작용했던 셈이다.   그가 연기 잘하는 배우,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인 배우란 건 진작부터 이견이 없었다. 동시에 그는 대중 스타, 멜로나 로맨스를 포함해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캐릭터로도 친근한 스타였다. 지난달 종영한 TV드라마 ‘일타 스캔들’은 그 장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반찬가게 사장님이자, 조카를 딸처럼 키워온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고 연애하는 모습을 특유의 연기로 아주 사랑스럽게 그려냈다. ‘맞아, 전도연이 이런 배우였지’하는 느낌을 준달까.   이어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길복순’의 전도연은 또 다르다. 중학생 딸을 둔 엄마이자, 기업형 살인 청부 조직의 에이스 킬러로 등장한다. 장르의 전형성을 판타지적 스타일로 변주하는 이 영화는 이 관록의 배우가 지닌 이미지 역시 살짝살짝 변주해 투영하는 듯 보인다. 극 중 킬러들이 일할 때 ‘슛 들어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역시 총을 쏜다(shoot)는 뜻이 아니라 영화 촬영(shoot)에 킬러의 일을 비유하는 듯 들린다.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는 걸 밥 먹듯 해온 배우 메릴 스트리프는 수상 트로피들을 집에 전시해 두지 않는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영광의 순간은 흘러간다. 전도연이 이전에 보여준 연기의 스펙트럼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보여줄 게 많은 배우란 점에서 ‘칸의 여왕’으로만 그를 기억하는 건 공평하지 않을 듯싶다. 그게 한국 영화의 영광스러운 자산을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할 터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왕관 무게 칸영화제 트로피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국제 영화제

2023-04-12

[그 영화 이 장면] 티탄

“신인류의 탄생을 목격하다.”(박찬욱 감독) “내가 지금 뭘 본 건가.”(강동원 배우) “이건 ‘처음보는 영화’다.”(이해영 감독) 작품에 대한 코멘트만으로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2021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쥘리아 뒤크루노 감독의 ‘티탄’은 꽤 충격적이다.     특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우리가 ‘몸’에 대해 지닌 관념과 감정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티탄’은 젠더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신체와 기계를 결합시킨다.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어릴 적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는 수술을 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유독 금속에 끌리는 그는 모터쇼 쇼걸이 되고, 어느 날 자동차와 성관계를 맺는다. 일반적인 ‘카섹스’가 아니다. 그리고 임신을 한다.   이후 ‘티탄’은 기계-금속과 결합된 기괴한 육체를 지니게 된 알렉시아가 출산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때 그는 뱅상(뱅상 랭동)을 만난다. 긴 세월 동안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던 뱅상은 그를 자식으로 받아들이는데, 이후 알렉시아가 아기를 낳을 때 곁에 있는다. 이 대목은 꽤 충격적이다.     삭발을 한 산모 알렉시아, 그를 아들로 여기는 산파 뱅상. 양수 대신 검은 기름이 흘러나오고 금속성 빛이 드러나는 알렉시아의 육체에선 다소 기이한 비주얼의 아이가 태어난다. 우린 이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표현 말고는 불가능할 것 같다. “신인류의 탄생을 목격하다.” 김형석 / 영화 저널리스트그 영화 이 장면 티탄 알렉시아가 출산하기 이후 알렉시아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23-03-10

막판 대반전도 못 바꾼 음란한 자본주의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은 2022년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스웨덴 출신 루벤 외스틀룬드 (Ruben Ostlund) 감독의 전작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더 스퀘어’(201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은 ‘부조리한 남성’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3월 27일 거행되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있다.     지난해 5월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확실시되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제치고 이 영화가 수상작으로 선정, 발표되자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사회 풍자성이 강하고 대중성보다는 아트하우스 청중을 지향하는 외스틀룬드 감독의 작품 성향이 다가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자못 기대된다.     러시아 무기상을 비롯, 상상을 초월하는 부호들이 호화 크루즈에 오른다. 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인 모델 야야(찰비 딘)와 그의 모델 남친 칼도 홍보용(?)으로 초대된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선장 토마스(우디해럴슨)의 지휘 아래 요트 항해에 들어간다.     그러나 선장과 무기상이 술에 취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설전을 벌이면서 크루즈가 전복되고 그중 일부가 무인도에 남겨진다. 전복된 것은 크루즈뿐만이 아니다. 크루즈에서의 갑과 을의 서열도 뒤바뀌어 버린다. 화장실 청소부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재빠르게 생존자 그룹의 권력을 장악한다. 물고기를 잡고 불을 지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 애비게일은 구명정 안에 자신의 개인 침대를 마련하고 칼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대가로 성을 상납(?)받는다. 야야의 질투심이 유발되고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영화는 계급평등론과 마르크스주의를 숨기면서 진수성찬을 즐기고 섹스를 탐닉하는 자본주의의 사치와 음란한 삶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외스틀룬드 감독이 사용하는 풍자의 노골적인 방식은 종종 관객의 시각을 불편하게 한다. 정교하게 연출된 그의 세계관에서 자본주의의 부유한 향락은 음란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가 돈이 썩어 나는 ‘갑’들에게 던지는 조롱과 비난은 한동안 가난한 ‘을’들에게 보상심리를 제공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역대급 대전환은 절망에 가깝다. 무인도가 결국은 어느 부호의 휴양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부유할 뿐 무능한 백인들의 타락을 그대로 흉내 내던 애비게일은 어떤 길을 택하게 될까. 필리핀 배우 드 레온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서 제외된 것은 유감이다. 그녀는 칸영화제 기간 내내 연기상 유력 후보로 언급됐었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자본주의 대반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황금종려상 수상작 작품상 감독상

2023-02-03

[그 영화 이 장면] 400번의 구타

‘400번의 구타’는 프랑수아 트뤼포가 27살 때 내놓은 그의 첫 장편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물결(누벨 바그)가 시작되었음을 알린 작품이다. 감독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토대로 한 이 영화는 긴 세월 동안 그의 페르소나가 될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세상에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앙트완 드와넬은 이른바 ‘문제아’다.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혼나기 일쑤고, 무단결석을 한 후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부모도 그다지 아들에게 관심 없고, 급기야 앙트완은 가출한 후 타자기를 훔치다가 경찰에 넘겨져 소년원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도 탈출한 앙트완은 어디론가 정처 없이 달린다. ‘400번의 구타’는 학교와 가정에서 소외당하고 교화 시설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소년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장 영화다.     흥미로운 건 유독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앙트완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기성세대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앙트완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엔딩은 인상적이다. 달리던 앙트완은 바닷가에 도달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는 돌아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이때 화면은 멈추며 소년의 클로즈업으로 영화는 끝난다.     외롭고 방황하는 청춘을 담아낸,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엔딩 중 한 장면이다. 김형석 / 영화 저널리스트그 영화 이 장면 구타 칸영화제 감독상 프랑스 영화 프랑수아 트뤼포

2023-01-27

국민배우는 과찬…묵묵히 연기하겠다

'밀양'(여우주연상 전도연)으로 시작, '박쥐'(심사위원상), '기생충'(황금종려상)에 이르기까지 칸영화제와 남다른 인연을 이어온 송강호(사진)에게 지난 5월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 '브로커'가 지난달 28일을 기해 미주 개봉에 들어갔다.   '브로커'는 201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을 연출한 일본 감독 코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작으로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한 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예기치 않은 일들을 따듯한 감동으로 그려낸 로드무비이다. 송강호는 늘 빚에 시달리며 건달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세탁소 주인이며 신생아를 암거래하는 브로커 '상현'을 연기한다.   -일본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칸영화제에서 첫 번째 연기상을 수상했다.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어느 배우도 수상을 생각하고 연기를 하는 배우는 없다. 한국 거장들의 좋은 작품을 꾸준히 하다 보니 영화제에 7번이나 초청됐고 코레에다 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번 작품에 행운이 따랐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본다."   -송강호 특유의 한국적 토속성이 과연 외국 관객들에게 유효하게 전달될까 하는 의문이 항상 있었다.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영화에는 정해진 규정이 없다.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현지의 반응이 국내와 상당히 다르다는 걸 느껴왔다. 현실적인 부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국내 관객과는 달리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영화를 대한다. 칸의 관객들은 보다 객관적이고 다양하며 자유로운 평가들로 반응한다. 나의 연기가 토속적이라는 생각은 국내에만 존재하는 거 같다."   -'송강호 장르'라는 말을 접했다. 한국영화에 과연 송강호 장르가 존재하는가.   "봉준호, 박찬욱 감독에게는 그런 표현을 붙이는 게 맞다. 그러나 배우에게는 무슨 장르가 있겠는가. 배우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칭찬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양한 감독들과 다양한 작품을 하게 되는 배우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본다. 배우로서 묵묵하게 걸어온 길을 다시 묵묵하게 걸어갈 뿐, 어차피 모든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상현' 역을 연기하면서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특별히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나.   "'베이비 박스'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매개로 해서 풀어가는 이야기이다 보니 한국의 미혼모 문제를 다루는 영화로 보는 시각들이 있다. 미혼모가 주소재인 건 맞지만 '브로커' 또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코레에다 감독은 혈연 외에도 다른 형태의 가족이 있다는 걸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이웃에 대한 마음이 혈연관계 이상의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상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브로커'를 굳이 가족영화로 한정하기보다는, 거대한 가족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영화, 인간의 순수한 마음으로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영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브로커'는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K콘텐츠의 지형이 넓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로 보인다. 앞으로 한국영화계에서 이런 시도들이 지속될 것이라고 보나.   "반가운 문화현상이라고 본다. '브로커' 외에도 최근 OTT를 통해 일본 감독의 '커넥트'라는 드라마가 소개됐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리라 예상한다. 반대로 일본 작품을 한국 감독들이 연출하는 일도 있다. 국적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는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저에게는 위대한 예술가와 협업을 했다는 일이 가장 큰 의미로 남을 것 같다."   -고레에다 감독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지게 됐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면.   "코레에다 감독은 15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만났고 '브로커'의 출연 제의를 받은 건 6년 전의 일이다.  코레에다 감독의 매니아들이 한국에도 있던 터라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동안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그래서인지 이질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친한파 감독이고 특별히 한국의 문화에 관심이 많다. '브로커'가 로드 무비이고 강동원 배우가 미식가이다 보니 그의 안내로 전국을 돌려 '맛집 탐방'을 다닌 일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 같다. 코레에다 감독은 낙곱새와 간장게장을 특별히 좋아한다."   -송강호 배우를 '국민배우'라고 부른다. 국민 배우 송강호가 말하는 좋은 배우란.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과찬이다. 결과를 의식하지 않는 배우가 진정한 좋은 배우다. 배우든 감독이든 예술가는 대중적인 성과 혹은 예술적 결과를 보고 움직이는 존재들이 아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새로움을 향해 나가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다."   -차기작을 소개해달라.   "'반칙왕', '밀정' 등을 함께 작업한 김지운 감독과 함께 5번째 작품 '거미집'을 끝냈다. 내년에 개봉될 예정인데 이전 작품들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대중적 재미를 지녔으면서도 상당히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기대해도 될 것 같다." 김정 영화평론가일본 국민배우 송강호 배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한국 감독들

202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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