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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한국전쟁과 평화"

I come from a generation that has mostly forgotten the sacrifices made by its former to provide the liberties and securities which are often disregarded and taken for granted. This self-absorbed generation seems to be only concerned with video games, superficial entertainment, and instant gratification. But even though I am a child of this generation, I am also the grandchild of a Korean War veteran, and I have become increasingly fervent about the Cold War. This awareness is one that was passed on to me by my father. He used to take out his father's medals to teach me about the tragic event and how honorable a person my grandfather was. Although my grandfather fought for the freedom of his country, he was always uncomfortable about showing pride about the war. Rather, my grandfather would shout, silently put away his "achievements," and say, "Anything that was earned from killing our own brothers is not honorable." Although I knew that any war is too cruel to talk about, at that time, no logic could be seen in my grandfather's reaction to my father, yet. A section in my U.S. history class triggered me to take the Korean War more seriously. I was uncomfortable with the fact that the Korean War was merely regarded as a conflict, not a civil war. Unhappy with the current treatment toward the war in my textbook, I decided to bring greater awareness of the war, honoring the sixtie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Therefore, I organized a photo exhibit about Korean War veterans to honor the veterans, in which I interviewed five veterans to talk with them about Korea then and today, and to vividly sketch the impressions of the battlefield. I captured the confident eyes of the old soldiers and their pictures taken back when they were in Korea, fighting for freedom. The exhibit offered an alternative perspective about Korean War. Preparing for the exhibit, I came to understand the war at the veterans' level and felt the need of minimize the generational apathy toward such a tragic event. While setting up the exhibit, I got involved with the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Impressed by such determination, board members of the organizing unanimously elected me as their key-note speaker for the appreciation event. The day I gave the speech is one that I will never forget. Standing nervously at the front of the convention hall at The Orleans Hotel in Las Vegas, clutching the copy of my speech with trembling fingers, I stared into the eyes of more than five thousand Korean War veterans and their families. "It is very easy to forget, but forgetting can be reversed, so that the proper respect is given." I assured them that their sacrifices will always be remembered, and that there are those-such as myself-who will continue to make efforts to raise awareness of the price our fore fathers paid for our freedoms. From the podium, I could see the fading eyes of the forgotten men in the convention room. Eyes of the veterans were tired from aging. Yet they were shining with the pride of what they fought for and secured. As I stepped down from the podium, applause erupted throughout the hall. This experience has allowed me to see the war through my grandfather's eyes. Medals are merely reminiscence of the days of hunger, blood and trauma to my grandfather. No matter what the veterans initially fought for, the war was just a massive massacre of our own brothers, and this sometimes made my grandfather feel extremely guilty, though he had no choice but to do so. My involvement in the Korean War 60th anniversary appreciation event taught me that if we are to start a world relationship, it must be based on respect for each other and each other's differences, sacrifices, and values. In the pursuit of deeper understanding in the global relationship, I hope to build ties among nations and minimize shallow perspectives about global issues. Seeking a deeper understanding about the past, present and the future, I hope to avert future conflicts and wars.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18명의 목숨을 살리다

6·25가 가까워 온다. 61년 전 그날 새벽 요란한 비상소집 사이렌 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본능적으로 머리맡의 전투복을 챙겨입고 모자를 썼다. 알람시계가 4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투화를 신고 권총을 뽑아든 채 본서로 향해 달렸다. 멀리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 온다. 간간히 포소리가 섞인다. 종전에는 없던 소리…. 전면전의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드디어 본서 앞 광장에 도착했다. 새벽을 뚫고 달려온 비번 서원들이 신속하게 소대편성 중이다. 말을 몰고 달려온 서장을 중심으로 간부회의가 열렸다. 통신주임이 본국(경기도 경찰국)에서 받은 무전내용을 전달했다. 경기도 관내 38선 경찰서 전체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서쪽부터 옹진 청단 연안 이곳 백천 그리고 특히 개성은 탱크가 앞장섰다고 했다. 소집에 달려올 때 들리던 포소리의 정체가 밝혀졌다. 내가 경창전문학교(현 경찰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임관돼서 처음 부임하던 1년 전부터 한 주일이 멀다하고 일어났던 38선 충돌사건에서는 포소리가 없었다. 포소리가 들리고 탱크가 앞장섰다는 소리에 남침이란 확신이 섰다. 이어 일선 지서도 탄약이 떨어져 고전 중이란 전화가 왔다. 곧 이어 서장 명령으로 일신 지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백천 서원 400여명 중 반 수 200여명이 4개 일선 지서에 50명씩 배치되어 교대로 38선을 지키고 있었다. 가진 무기로는 일본군이 두고 간 38식 단발 장총에 탄약 30발…. 드디어 본국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각 서는 서장 지휘 하에 병력을 수습하고 문서를 소각하고 서장 재량으로 유치자들을 처리하고 신속히 인천의 경기도 경찰국 앞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다. 서장은 경무 사찰 보안 통신주임과 더불어 남은 전체 서원과 가족을 데리고 트럭으로 벽란도(강화도 맞은편 포구)로 떠나고 경기 주임은 정예부대를 조직 본서 앞 남산에 진을 치고 적의 진격을 막아 지연 전술로 직원들 후퇴를 돕기로 했다. 서장이 떠날 때 유치장은 수사주임 책임이니 알아서 유치자들을 처리하고 인천에서 만나자고 했다. 경비주임이 내게 경험 많은 직원 8명과 실탄 8발씩을 나눠줬다. 트럭으로 직원과 가족들이 떠나고 남산의 경비 주임 소대도 떠났을 때 유치장에 들어섰다. 그 때 시간 오후 1시 반 폭풍전야 같은 적막이 있었다. 잡범들은 이미 석방이 됐고 보안법을 위반한 사람만 18명 새삼 서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 "유치자를 처리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멀지않은 곳에 적군이 몰려오고 있는 절박한 순간. 적과 한 통속인 유치자들을 처리하라는 말은 없애라는 말이다. 경비주임이 챙겨준 직원과 탄약은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다. 직원들이 철사로 두명 씩 팔목을 묶은 아홉쌍을 서 앞으로 끌어냈다. 번민의 시간이 흘렀다. 18명의 목숨을 나에게 맡긴 서장이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책임을 통감하는 순간이 흐르고 결론을 얻었다. '살리자! 사상이 뭔데? 사상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27세의 내가 겪은 경험과 믿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갈 길을 선택하도록 하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됐다. 유치자 18명을 모두 그늘에 앉히고 묶인 철선을 끊었다. 순간 창백했던 18명 얼굴에 혈색이 돌고 말 못할 감동이 흘렀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부터 자유입니다." 첫마디 말에 "아이구 고맙습니다 주임님!" 하며 모두 목이 메었다. "제 나이는 지금 27세 왜정 때는 좌익 책도 읽고 해방 후에는 직접 공산주의를 보기 위해 고향 옹진에서 38선 이북이 된 해주를 10여 차례 가 보고 내린 결론이 남북은 외국 세력의 점령지요 살기 위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딱꿍총보다는 M1 마차보다는 GMC가 종당에는 이길 것이라 믿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코 앞의 적이 우세해 보이지만 길게 보면 GMC가 이길 것으로 믿습니다." 이 때 혹시나 아들을 만날까 서 근처에서 서성이던 노부부가 풀려난 아들을 보고 얼싸 안았다. 내 말이 계속됐다. "자 이제 우리는 막차 GMC로 떠나려 합니다. 함께 갈 사람은 타시오. 저와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은 갑시다." 나의 말이 끝나자 놀랍게도 부모를 만난 두 사람만 남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트럭에 올라탔다.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를 태운 최후의 GMC 트럭은 적군의 포소리가 무척 가까워진 와중에 벽란도를 향해 쉼없이 내달렸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종종 그때 그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함께 남하한 대부분 젊은이들은 군에 자원 입대했다. 아마 지금 살아있다면 모두 80~90세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 있든지 선택한 자유를 누리며 사시길 간절히 바란다. 해마다 6.25가 되면 느끼는 추억이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병실에서 만난 미국 노병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날도 노을 빛이 이리도 붉게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왔었는데. 12년 전 그 날은 몹시 바쁜 날이었다. 보통 때면 벌써 집에 갔어야 할 시간인데 환자 하나가 롱비치에 있는 재향군인병원으로부터 이송되어 와서 다음 날 스케줄이 첫번 째인 수술을 위해 저녁에 투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심장으로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세개나 막혀 있다고 했다. 나는 준비를 하여 그가 있는 병실로 가서 치료를 시작했다. 긴 하루를 보내고 피곤한 눈으로 바라 본 창을 통해 들어오던 저녁 노을 시시각각으로 빛을 잃어가며 더욱 짙게 변해가는 바로 그 빛이 화살이 되어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기는 하나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술을 앞둔 마음의 어수선함이 느껴질 것도 같아 이름을 부르니 눈을 뜨고 무슨 일인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착잡한 것인지 아니면 포기를 한 것인지 얼굴 표정이 읽혀지지 않았다. 그에게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이 아우르는 딱히 꼬집어 낼 수없는 무언가에 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기분을 걷어내려고 저녁 하늘 노을이 아름다우니 한 번 바라보라고 하며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를 시키면서 가족에 대해 물었다. 한 번 이혼했고 지금은 걸 프렌드와 살고 있다고 했다. 걸 프렌드가 아메리칸 인디언 스타일을 좋아해서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그는 '아이 돈 케어'라고 했다 . 자식이 있었으나 몇이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 그가 들려준 이야기로 해서 그 숫자는 기억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60을 넘긴지 네 다섯 해나 더 지났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말투는 침착하였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페이소스는 무엇 때문일까 궁금했는데 문득 그가 내게 물었다. 한국 사람인가하고. 그렇다고 하자 첫 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필리핀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들이 워낙 병원에 많기도 하고 또한 내 얼굴 색이 검은 편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첫 번에 알아 보았느냐고 하니 1951년에 한국에 갔었다고 했다.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17살. 고등 학교를 바로 졸업한 뒤 한국전에 투입된 것이었다. 미국도 그 때는 징집제여서 한국처럼 누구나 군대에 가야 했다고 했다. 어떤 마을은 같은 연배의 남자들이 모두 다 징집되었다고도 했다. 해병대로 들어간 그는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총쏘는 법과 다루는 법을 익혔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소년이었다. 배 안에는 비슷한 또래의 소년들이 제법 있어 한국으로 가는 동안 장난도 치고 놀았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오지였고 서방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였다. 내가 일본 위에 있다고 말하자 그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라 이름은 들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한국은 그 즈음 부산까지 쫓겨 내려가 거의 북한이 차지할 순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다시 북으로 치고 올라가 압록강(그는 the Yaru라 했다)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렵 그는 전쟁에 합류했다고 했다. 그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처음 부딪친 것은 상상도 못할 추위였다. 영하 20~30도나 되는 추위로 온 몸이 그냥 냉동이 되어 막대기처럼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그 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생각마저 얼어붙었는데 그 소리와 함께 허연 누비 옷에 모자를 쓰고 싸울 것 하나 지니지 않은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에는 그냥 밀려 왔다고 했다. 인해전술의 중공군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들이 나중에는 진절머리가 나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부대간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아 후퇴 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20여 명이 중공군에게 잡혔다. 그들은 포로들을 북으로 북으로 끌고 갔는데 그들의 말소리도 피리소리처럼 어지러웠다고 했다. 끌려가는 어느 순간 정신이 퍼뜩 들면서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I was only seventeen then. I didn't know any better."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눈 감은 그를 바라보면서 만약 내가 그 나이였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지레 놀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 나이 또래의 정신대로 나갔던 열 예닐곱 소녀들 정말 남자라고는 알지 못하던 소녀들이 이역 만리에서 어떻게 버텨냈을까.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나는 미국에 멀쩡하게 와서도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속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때문에 나 스스로를 얼마나 볶았는데 하며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들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 자꾸 중국 안 쪽으로 들어가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딘 줄 몰라 속이 탔다고 했다. 더구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니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감도 못잡고 무서웠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슬슬 무리에서 떨어지면서 도망을 쳤다고 했다. 어딘 줄도 모르고 그저 동물적 감각을 이용해 달렸는데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오금이 저리고 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달리 아무 대책도 없으니까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에 둘러보니 농가 마을이 보이기에 조금만 쉬었다 가려고 한 길가 집 헛간으로 숨어들었다. 늦은 밤이어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아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밖에서 '따따따' 말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그러면서 헛간으로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이 잡혔구나' 싶어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고 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 설명할 도리도 없고 온 천지에 도움이 올 구멍은 하나도 없이 외딴 헛간에서 얼어붙은 그의 눈에 농기구가 눈에 띄었다. 그러는 동안 삐걱 문이 열리며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그 남자를 향해 정신없이 낫을 휘둘렀다. 아무 생각없이 자기 집 헛간에 볼 일이 있어 왔던 남자는 '윽' 소리 지를 겨를도 없이 쓰러져 버렸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순간 그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그 자리에 붙박혀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다시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며 또 이쪽으로 언성을 높이며 오는게 아닌가. 자기가 한 짓이 어떤 것인지 안 그는 더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본능만이 그를 사나운 짐승으로 만들어 헛간으로 들어오는 그 여자를 향해서도 생존의 무기를 휘둘렀다. 여자가 또 그렇게 쓰러지고 난 뒤 피로 범벅이 된 자기 손을 보며 그는 짐승같은 울음을 울었다고했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할까 막막해서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그의 눈 앞에 'Oh No!'. 이제 갓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말까하는 계집애 하나가 중국말로 뭐라뭐라 하며 울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마 엄마를 뒤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바깥 사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그에게 든 생각은 만약 이 아이가 울어버리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비치는 눈물을 나는 보았다. 병상의 그는 17살 그때로 돌아가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내가 혼자 듣고 흘리기엔 너무도 벅찬 이야기였다. 그 때 죽은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그에게도 너무나 안된 일이었다. 그는 분명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나는 저 17살 소년에게도 지금 수술을 앞둔 예순 네 다섯의 노인에게도 위로의 말 한 마디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신부님이라면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을까? 그가 내 대답을 원해서 이야기를 하였던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뒤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하나 느낀 것은 사람의 목숨은 우리 판단의 잣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모두가 정확한 의학적 지식을 토대로 어떤 사람의 끝을 말하는데도 살아 남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갈 때에 가는 것이구나 다만 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됐지요." 이말을 들려주면서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가 조금이라도 위로 받기를 바랐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처음의 그 담담함으로 입을 열었다. "Why me?" 나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 삶의 종결자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일로 평생을 고통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아 이 사람은 왜 이 말을 내게 하는 것인가?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 수많은 고해 성사의 시간을 어떻게 참았을까. 만약 그 사실을 고백했었다면 하고 나서 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지금 나에게? 나는 그에게 길에서 만난 한 사람의 나그네로 마침 한국 사람이어서 그리고 그는 생사를 가르는 큰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허락되어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하고 마음 가볍게 남은 길을 가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수술 후 롱비치의 재향군인 병원으로 다시 갈테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치료 시간이 끝나 나는 그에게 수술이 잘되기를 빌어 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그 어린 나이의 소년은 싸웠고 그 일로 해서 그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며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던가. 그 방을 나오면서 우리는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모르는 채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삶과 죽음을 가른 유격대원

줄에 매달린 원 그림 타겟이 줄지어 왔다 갔다 한다. 그 타겟 과녁은 초보의 총구에도 명중돼 뻥 뚫린다. 연속 뚫리는 타겟! 사격연습장 안 풍경이다. 세상에 그런 유형의 전쟁이 있을까 만은 군번 없는 우리 유격대원들의 영덕 상륙전이 그랬다. 다른 동작을 할 수 없는 줄 건너기에서 생사가 갈린 운명 그리고 처형되기 직전 적군으로부터의 반전회생을 어찌 봐야 할까. 급조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부대가 부산 제4부두에서 상륙용 함정 LST를 타고 전지 영덕을 향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우리들 팔백여 학도병. "유격대는 적의 후방을 기습 아군을 돕는 것이 주 임무인 특수 부대다." 귀가 솔깃하게 들렸던 모병관의 그 말을 떠올렸다. 모두들 지치고 긴장해있었지만 기상은 뜨거웠다. 배낭을 베고 옆에 누워있던 남진태가 내게 다가왔다. "형 우리 중 누가 먼저 집에 가든지 부모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로 합시다." 제법 심각한 표정에 나는 되도록 태연스럽게 "알았어"라고 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착잡했다. 그의 이름은 내 평생 따라 다닐 듯하다. 그는 학교 연극반 후배로 또 밴드부에서 나는 트럼펫을 그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한 동네 살았다는 것외에 취미도 비슷해서 함께 어울린 시간이 많았다. 그가 유격대를 택한 것도 나와 함께 하겠다는 일념에서 일 게다. 그는 경찰서장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미남형 얼굴이었다. 그는 매년 개교기념일에 열리는 문예작품 공모에서 당선 된 시 '물안개 언저리'로 나는 콩트 '산골 편지'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는 베니 굿맨 같이 한국에 스윙재즈 보급 꿈을 가졌었다. 막 잠이 든 순간 LST 엔진의 가파른 역회전 소리와 선실 곳곳에서 붉은 비상등이 번쩍거렸다. 삑삑 버저소리도 울려댔다. 확성기에선 "전 장병 상륙준비" "전 장병 상륙 준비" 소리가 계속 나왔다. 탄창을 장전한 우리들은 초조와 긴장 속에 삼십분 넘게 기다렸지만 다음 명령은 없었다. 확성기에선 군가만 계속 나왔다. 한 시간은 족히 되었는데도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초조하고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명의 미군 고문관만 급히 서두는 모습이 심상치 않는 일이 생긴 듯 했다. D데이 동트기 전 상륙해야 하는 시간을 놓쳤다. 날이 밝아 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때 LST 배 앞바닥과 그 옆 문이 열렸다. "제1소대부터 상륙개시" 하고 중대장이 명령을 내렸지만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파도가 배 갑판 높이까지 부딪쳤다. 배안에도 물이 들어와 어떻게 상륙할지 망설일 때 미 고문관이 배에 연결된 밧줄을 가리켰다. 언제 누가 연결했는지 가파른 바위 옆 소나무에 매인 밧줄이 보였다. 바람과 높은 파도는 훈련과 실전경험이 없는 대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선임하사와 함께 제1진이 밧줄에 매달려 한 팔 한 팔 전진했다. 뒤에서 보는 우리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백사장에 닿자 절벽 아래로 급히 몸을 숨긴 이십여 명 장병들은 제2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제2진은 갑자기 밀려온 파도에 두 명이 잡은 밧줄에서 떨어져 바다에 휩쓸렸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탈진 산위의 적군들 사격이 상륙하는 병사들에게 집중돼 삼 사명이 한꺼번에 물속에 떨어졌다. 배 앞에 붉은 핏물이 보이자 제3진은 겁에 질려 누구도 선뜻 나서려하지 않았다. 미 고문관이 권총을 빼들고 "컴온 컴온" 위협하면서 독려했다. 남진태는 내게 바짝 다가와 "형 함께 가요"하면서 내 뒤에 섰다. 그는 제5진이었는데 재빨리 누구와 바꾼 모양이었다. 후진(後陣)일수록 안전하단 보장은 없지만 어쩐지 그가 남의 운명을 대신 지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래도 잘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3진 출발은 타겟처럼 완전 노출된 상태라서 콩 볶듯 쏘아대는 적탄에 이십 명 중 절반이 상륙하고 절반은 행방불명됐다. 남진태를 본 것은 "형" 하는 비명소리에 돌아 봤을 때 이마에 피를 흘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려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제3진의 엄청난 희생에 밧줄을 끊고 LST 문을 닫았다. 조금 물러가는가 싶더니 속력을 내어 백사장으로 돌진했다. 뱃머리가 백사장에 쑥 올라갔지만 문은 열지 않았다. 삼사 분이 지나자 미군 쌕쌕이 편대가 날아와 언덕 위 솔밭을 불바다로 만들고 지축을 흔드는 폭격에 귀청이 떨렸다. 전투기가 떠나자 배문을 열고 전 병력을 상륙시켰다. 공습에 힘입어 상륙에는 성공했지만 보급품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 5사단과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투에서 수백 명이 전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영덕 남단 장사리 양동작전이었다. 얼마쯤의 희생을 예견하고 우리 부대 학도병 유격대를 투입한 것 같았다. 내가 포로가 된 것은 전날 밤 기습을 받은 전투에서 본진을 놓친 우리 소대가 산골 초등학교 분교에 들어가 잠을 자던 때였다. 새벽녘 후퇴하는 적 패잔병들에게 잡혀 험준한 태백산을 타고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우리 유격대원 이십팔 명 외 안강전투에서 붙잡힌 이십 명이 대오를 이뤄 밤 낮 이틀을 걸었다. 오대산 초입부터 포로병 숫자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가까운 골짜기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났음에도 적들의 무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 포로는 두 감시병에 이끌려 다른 방향 길로 접어들자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질 조짐에 목안이 바싹 탔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그 때 귀공자 같이 생긴 감시병이 내게 다가오더니 "공포를 열 발 정도 쏠 테니 빨리 달아나라"고 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와 나는 마음이 좀 통한 편이었을까. 내가 대구 출신 학도병임을 안 그도 대구출신으로 서울대 재학 중 의용군이 된 조현수라고 했다. 자기가 살아서 돌아가면 삼덕동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과 포항 안강전투에서 전 사단이 퇴각하면서 북으로 갔다는 것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수성중학교장이고 삼덕교회 장로라고도 했다. 대여섯 발의 총성과 동시에 우리들은 무작정 사방으로 뛰었다. 연이은 총성을 뒤로하고 뛰고 또 뛰었다. 총성은 산 메아리가 되어 수백 발을 쏜 것처럼 온 골짜기를 울렸다. 다섯 명 포로 중 다른 한명과 나는 이틀 동안 요기라고는 빈집에서 생고구마 두 개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긴장한 탓에 허기진 줄도 몰랐다. 춘천을 거쳐 의암호와 소양강 쪽에 있는 임시수용소를 찾아 신고를 했다. 나는 군번이 없는 유격대라 확인이 늦어 부대복귀도 늦었다. 아침 일찍 막사 밖을 나오면 소양강과 의암호에 물안개가 자욱이 덮쳐오곤 했다. 나를 따랐던 남진태의 시 '물안개 언저리'가 오대독자인 그의 장래를 암시한 것 같았다. 공포를 쏴 나를 도망치게 했던 적 의용군 조현수와 숨 막혔던 일도 떠올랐다. 나는 그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조현수 집에는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남진태 집이다. 내가 그의 집을 찾은 것은 귀가한 지 나흘째 날이다. 그가 영덕 전투에서 행방불명됐다는 통지를 받은 지 한 달 반 만이었다. "누구세요"하는 그의 여동생 목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게 마지막 말을 하려하던 바로 그의 눈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황급히 달려온 그의 아버지와 두 모녀가 내 입만 쳐다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나를 따라 제3진에 합류한 장면을 지우고 백사장 전투 후 보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확신에 찬 말로 위로했다. 아버지는 이슬 맺힌 눈을 돌리면서 묻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해변에 학병들의 모자와 허리띠가 수없이 나뒹굴었다는 말을 한 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배웅하던 여동생이 내게 다가서더니 심중에 있는 말을 했다. "오빠 숨긴 거 있지 다 알아 그렇지만 나도 오빠같이 연극 같은 인생을 살아갈 거야." 그것이 그녀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다. 전리도 승패도 불명한 전쟁. 나 때문에 죽은 사람과 나를 살린 적군도 있어 혼돈스런 그 전쟁. 결국 일으킨 쪽과 막아낸 쪽 모두 한 맺힌 피해만 입지 않았나. 그뿐이랴. 죽은 자와 산자로 가른 그 무엇이 지금도 내 가슴을 끓인다. 그 때처럼 가쁜 숨을 넘긴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남한 사람이야, 북한 사람이야"

학생인 내가 학교에서 미국인 친구들을 처음 만날 때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이고 거기에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농담처럼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묻는다.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냥 웃으며 넘기지만 가끔은 우리나라가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농담을 듣는구나 싶어 서글퍼질 때도 있다. 나는 한국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도 한국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에게도 벌써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매 학기 으레 학교에서는 '반공 글짓기 대회'가 열렸었고 단체로 반공 이념에 대한 만화 영화나 이승복 어린이에 대한 반공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 때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만화 속에서 녹색 옷을 입은 돼지가 동물 농장에 있는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불합리하게 대하던 모습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이 단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 어린이를 처참하게 죽였던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는 나에게 있어 막연히 공포의 대상 그리고 절대 없어져야 할 존재 정도로 여겨졌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 조부모가 있는 친구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놀러간다는 친구 또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았다며 자랑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실까 부러워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께 들은 나의 조부모 이야기는 한참동안 나를 슬프게 했던 기억이 난다. 오래 된 흑백 사진으로만 보았던 나의 할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에 의한 인민재판에서 지주라는 이유만으로 죽창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도 6개월이 채 못 되어 한을 가슴에 안고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또 일곱 형제 중 제일 큰 아버지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라던 남은 육남매는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말할 것도 없이 생존을 위해 무던히 고생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꽤나 공부도 잘 하고 꿈도 많던 큰 고모님은 당시 겨우 여섯 살도 채 안 된 나의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느라 당신의 꿈도 접어두어야만 했었다고 하셨다. 잠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말로만 듣던 보릿고개를 죽을 힘을 다해 넘겨야만 했던 이야기 또 어린 나이였지만 살아야 했기에 방직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고모의 이야기.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 단지 한국전쟁이라는 슬픈 한국사가 일어난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로 겪어야만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만약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형제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 요즈음 한국에 계신 우리 부모님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아버지는 틈틈이 아버지가 어렸을 때 사셨던 생가에 찾아가 대추나무며 밤 나무를 가꾸시며 시간을 보내고 오시곤 한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지만 깨끗이 보존될 수 있도록 청소도 가끔 하고 오신다고 한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데리고 그 집에 가셔서 '여기가 아빠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야'라며 보여주셨었던 집은 이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골집이다. 아직도 가끔 부모님과 통화할 때 그 집에 있는 나무들을 가꾸고 계신다고 감도 한 바구니 따왔다는 아버지 말에 괜히 뭐하러 힘들게 그랬냐고 타박을 해 보기도 하지만 사실 나도 조금은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나에게도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생각나고 그립듯 아버지도 당신이 어렸을 때 행복했던 그 집에서의 기억을 붙잡고 싶으신 것이었으리라. 이제 어디에서도 멸공을 외치는 사람은 없다. 흔히 TV 에서 상영하던 반공 이념을 담은 만화 영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상흔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탈출해서 목숨이라도 연명해 보겠다는 북한의 꽃제비들 이야기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주민들은 나몰라라 하면서도 항상 전쟁 준비에는 열을 올리고 툭하면 핵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북한 정권 지도층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같은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남북 통일이 되고 내 부모님 세대나 그 윗 세대 어르신들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의 상처들이 아물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최우수상] 지금도 뻐꾸기는 울고 있을까

"지금도 뻐꾸기는 울고 있을까." 나무들이 녹색으로 짙어가는 6월이 오면 '높은별' 뒷산에서 울던 뻐꾸기가 생각난다. 61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6.25전쟁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들여주고 싶구나. 할머니가 9살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우리 손주 지원이 보다 한 살 더 어렸을 때였지. 할머니는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단다. 맑은 금강이 흐르는 마을이었어.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강가의 예쁜 조약돌을 줍곤 했지. 여름이면 노란 참외와 수박 복숭아가 가을이면 포도가 달게 익어가던 과수원이 많던 마을은 흰구름이 한가로이 떠나니던 하늘 아래 평화스러운 곳이었다. 6월 어느 날 밤 빨리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깨어보니 보따리 짐들이 보였고 무섭고 불안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아직도 밖은 깜깜한 데 한 살된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4살 된 남동생과 나는 피란길을 떠났단다. 서울에서 점점 내려오는 대포소리가 정말 무서웠단다. 업고 이고 들고 길을 나선 어머니를 따라 동생과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었지. 돌부리에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찔려 피가 나도 아픈 것도 잊은 채 엄마만 따라 가야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터널에 모여든 많은 동네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꼭 가져와야할 보따리 대신에 요강을 들고 나와 웃었던 기억도 있다. 너희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너무 무서우면 그럴 수 있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우리는 '높은별'로 향하는 40리 산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올라갔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길에 엎드리고 나무 밑에 숨었지.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높은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높은별'이었고 지형상 비행기 폭격이 불가능한 곳이라 거기로 피란을 갔었단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미리 그곳에 먹을 양식과 거처할 곳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산으로 떠나셨었다. 우리가 있던 방은 시골 싸리문 옆 소 외양간에 달린 흙방이었다. 문을 열면 소가 여물을 먹는 소리와 숨 쉬는 소리가 왜 그리 무섭게 들리던지. 낮이면 북한 인민군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내려온다고 해서 뒷산에서 지냈단다. 머루와 산딸기를 따먹고 땔감나무를 주우러 내려오곤 했지. 한여름 녹음이 짙어가고 호두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한낮의 햇볕이 시골 마당에 쏟아지는 6월 산속의 나무 밑에서 우리는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언제 우리집에 갈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지. 높고 깊은 산속에서 뻐꾹뻐꾹 뻐꾸기 우는 소리가 메아리되어 들려오곤 했단다. 어느 날이었지. 부상당한 군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 우리 마을에 들어왔었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도 파랗고 그중에는 흑인들도 있었다. 우리들은 외국사람을 처음 보아서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었다. 붕대로 머리를 싸맨 사람 다리를 다쳐 혼자 못 걷는 사람 총에 맞아 치료도 못하고 쓰러질 듯 지쳐있는 낯선 군인들이었지. 동네 이장 할아버지는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미국에서 온 군인들이라며 무서워 하지 말고 빨리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했지. 보리밥과 김치 장아찌 같은 한국의 시골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집집마다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여 소다를 넣어 빵을 만들어 참기름에 찍어먹게 했었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멀고도 작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었는지 생각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이제 가장 무서웠던 기억을 이야기 해야겠다. 심천 우리집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내려갔던 날이었다. 마을엔 북한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들고 다녔고 학교와 교회는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옷과 모자의 빨간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였는지 그날 하루종일 B29라는 비행기가 쉬지않고 폭격을 했었다. 비가 오듯 쏟아지는 폭탄에 마을은 불타 잿더미만 남았고 대문 옆 감나무는 까맣게 탄 채로 서 있었다. 비행기가 뜰 때마다 우리는 엎드리고 숨고 뛰었다.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는 다리가 잘려 일어서질 못하고 피투성이로 살려달라 손짓하던 사람이 무서워 떨고 있었지. 나는 엄마손을 놓칠까봐 뛰어야만 했고 비행기 소리가 나면 나무처럼 보이기 위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해가 지고 밤이되어 산밑에 있는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죽을 끓여 나누어 먹고 있는데 불빛을 보고 폭격을 한 것이었다. 집 뒤쪽 장독대가 있던 곳에 숨었는데 폭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지붕 위로 파편들이 불꽃 떨어지듯 쏟아 내리는 것을 보며 땅에 떨어지는 순간 머리 위 고추장 단지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내 머리위를 덮쳤단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더듬거리는데 머리는 단지고 몸은 나였단다. 너희들은 그 장면을 생각하며 재밌다고 웃겠지만 9살이던 할머니는 얼마나 무섭고 아팠겠느냐. 고추장 범벅이 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산밑 동굴쪽으로 뛰셨고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울 수조차 없었단다. 산속에 굴을 파고 방공호라고 했지. 비행기 소리가 나면 굴안에 숨고 입구는 나뭇가지로 막아 놓았단다. 북한 괴뢰군들은 남자들 심지어 총을 쏘지 못하는 학생들까지도 다 잡아갔단다. 그래서 아버지도 부산으로 내려 가셨지.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석도 지나고 겨울이 왔는데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아버지도 오시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쪽에 있는 부산으로 가기위해 어렵게 피란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지금은 KTX로 서울서 부산까지 3시간이면 편안히 갈 수 있는데 대전에서 탄 열차는 옆도 지붕도 없는 바닥만 있는 곳에 전쟁에 필요한 탱크와 지프차를 부산으로 운반하는 기차였지. 나와 동생들은 탱크사이에 이불을 쓰고 비가오면 맞아야하고 눈이 내리면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을 덮고 자야만 했었어. 꽁꽁 언 주먹밥을 먹었다면 너희들은 믿을 수 있겠니. 나중에는 쌀을 조금씩 씹으면서 물대신 눈을 녹여 먹었던 피란 열차. 그해에 왜 그리 눈이 많이 내렸을까? 우리 옆에 있던 가족 중 한 아이는 아침이 되어보니 죽어 있었단다. 또 다른 화물칸 꼭대기에 매달려오던 사람들 중에서 터널을 통과할 때 부딪쳐 떨어져 죽었다. 아침이 되면 아들이 떨어졌다고 엄마가 없어졌다고 사방에서 울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 쉬고 슬퍼할 시간이 없이 3일 간을 피란 열차에서 지내고 4일째 되는 날 밤 부산에 도착했었다.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내렸다. 보따리들을 이고 짊어지고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였었다. 그렇지만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단다. 나는 엄마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동생과 함께 엄마옷을 잡고 따라 다녔었지. 부산에는 엄마와 아빠를 잃은 전쟁고아들을 보호하는 고아원이 많았단다. 미국의 도움으로 고아원은 운영되었고 약과 먹을 것을 도와주었단다. 너희 부모들이 후원하고 있는 월드비전을 통해 한국은 6.25 전쟁때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었다. 부산 친척집에는 28명이 복닥거리며 살았고 학교에 가니 학생수가 많아 4학년으로 들어간 나는 주로 옥외에서 수업을 했었다. 교실은 5 6학년이 사용했고 저학년들은 길에 있는 계단이나 운동장 나무 그늘 산에서 무릎에 두꺼운 합판을 놓고 쓰고 땅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했지.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 되었고 종이가 부족해 매끄럽고 흰 종이가 아니라 재생해서 만든 누런 종이를 사용했었지.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아껴 쓰면서 구구단을 외우고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했단다. 당시 학생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학용품이었지. 지금 우리 손주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행하는 브랜드 신발을 사는 너희들은 할머니가 떨어진 신발을 꿰매어 신고 다녔다면 상상할 수 있을까? 옥수수 빵을 학교에서 주면 집에있는 동생을 생각하고 주머니에 넣어가던 친구도 있었지. 전기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공부 그만하고 불끄라던 부모님들도 있었다. 전쟁은 이렇게 가난을 가져 왔단다. 조금 쓰고 버리는 매끄럽고 하얀 종이들 여기저거 굴러다니는 연필과 크레용 몇 번 마시고 버리는 캔음료 버려지는 음식들 이런 것들을 보며 아깝고 죄스런 마음이 든다. 아끼라는 말은 6.25 전쟁으로 가난을 경험한 할머니의 잔소리가 되었다. 61년전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 우습기도 하고 재밌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무섭고 비참한 것이란다. 부모를 잃은 고아가 생기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평생동안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비극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옥수수 죽도 못먹어 배고픔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많단다. 우리 손주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 안에서 남을 도우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곰팡이가 핀 건빵

먹을 것이 풍부한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건빵하면 있으면 먹고 없어도 찾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기농 식품을 찾고 건강을 챙기기 시작한 이래로 건빵도 보리건빵 현미건빵 심지어 홍삼건빵이니 다이어트 식품으로 개발되어 맛도 좋고 먹을 만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건빵은 엄지손가락만 하게 크고 넓적하고 밋밋한 밀가루 건빵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맛이 없었지만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건빵은 없어서 못 먹었습니다. 누런 봉투의 커다란 건빵 한 봉지 들고 밖에 나가면 동네 친구들을 한 줄로 세우고 한 알씩 한 알씩 나누어 주며 유세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군에 다녀온 삼촌이 건빵으로 요리를 해 주는 데 정말이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발을 대고 건빵을 위에 올려놓습니다. 김이 나면 그 위에 설탕을 살살 뿌립니다. 그리고 떡을 찌듯이 폭 찌면 달면서도 몰랑몰랑한 것이 꼭 작은 케이크 같이 맛이 있었습니다. 튀겨서 먹어도 맛있습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건빵을 얹고 설탕을 살살 뿌려서 튀기면 바싹바싹한 쿠키와 같은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건빵하면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6.25때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곰팡이가 핀 건빵'입니다. 전쟁이 터지고 6개월 후 1951년 1월 엄동설한에 강원도 한 산골 벽촌 중학교에 어린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적게는 16살에서 스물 갓 넘은 결혼한 학생까지 중학교 1학년에서 4학년까지 120여명의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한 선생님의 인솔로 경북 춘양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받고 바로 전쟁터에 투입되니 이들은 영월 간성 김화 양구 등지를 두루 헤매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크고 작은 전공을 여러 번 세웠습니다. 가장 큰 전공은 중공군에게 포위된 국군 3사단을 구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6.25전쟁 중에 이들 중 18명이나 전사했습니다. 그들 전사자 중에 한 나이든 학도병의 이야깁니다. 한창 때에 어린 학생들이 완전 군장을 하고 자기 키보다 큰 M1 소총을 들고 행군을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6.25전쟁 중에 겨울 추위는 왜 그리 추웠는지 여름에 더위는 왜 그렇게 더웠는지 모릅니다. 얼마 안 되는 주먹밥은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미군용 건빵이 간식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먹어치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한 나이든 학도병은 한두 알 입에 넣곤 먹지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싸서 배낭에다 넣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고향집에는 먹지 못하여 굶주리는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빨리 집에 돌아가 이 건빵을 동생들에게 주어야지." 맛있게 건빵을 먹을 동생들을 눈에 그리며 한알 두알 모은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 잡고도 계속해서 건빵을 모았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강원도 중부 전선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전투가 아주 심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날 하루에 3명이나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안타깝게도 동생들을 주려고 건빵을 모으던 나이든 학도병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동료들은 울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울부짖으며 교가를 불렀습니다. 모두 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전사한 그 동료의 배낭을 열어 보았습니다. 배낭 안에서는 식기도구와 옷가지와 함께 더러는 곰팡이가 핀 건빵들이 주르륵 흘러 나왔습니다. 동료들은 그 건빵을 움켜지고 다시금 목 놓아 울었습니다. "살아서 동생들에게 갖다 주지?" "네가 이렇게 죽으면 이 건빵은 누가 네 동생들에게 갖다 준단 말이냐!" 어린 학도병들은 흩어진 건빵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친구 학도병들 몇 명이 전사한 학도병의 고향집에 들렀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에게 유품을 전해주고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전사한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열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친구를 타향천리에 묻고 살아 돌아온 학도병들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미리 싸온 건빵 한 보따리를 어린 동생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건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주 신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건빵 한 보따리에 마냥 즐거워하는 어린 동생들을 보며 살아 돌아온 친구 학도병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 두어도 곰팡이가 잘 피지 않는 건빵인데 곰팡이가 피도록 먹지 않고 모아두었던 그 건빵은 비록 나이든 학도병의 무덤 앞에 묻혔지만 그 건빵을 한알 두알 모으던 그 학도병의 마음은 그의 동생들과 그 후손들의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사는 우리 대한의 백성들 아니 태평양을 건너온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들 마음속에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태백중학교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존경하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아들이 씁니다.

201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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