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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곰팡이가 핀 건빵

정성환

먹을 것이 풍부한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건빵하면 있으면 먹고 없어도 찾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기농 식품을 찾고 건강을 챙기기 시작한 이래로 건빵도 보리건빵 현미건빵 심지어 홍삼건빵이니 다이어트 식품으로 개발되어 맛도 좋고 먹을 만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건빵은 엄지손가락만 하게 크고 넓적하고 밋밋한 밀가루 건빵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맛이 없었지만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건빵은 없어서 못 먹었습니다. 누런 봉투의 커다란 건빵 한 봉지 들고 밖에 나가면 동네 친구들을 한 줄로 세우고 한 알씩 한 알씩 나누어 주며 유세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군에 다녀온 삼촌이 건빵으로 요리를 해 주는 데 정말이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발을 대고 건빵을 위에 올려놓습니다. 김이 나면 그 위에 설탕을 살살 뿌립니다.

그리고 떡을 찌듯이 폭 찌면 달면서도 몰랑몰랑한 것이 꼭 작은 케이크 같이 맛이 있었습니다. 튀겨서 먹어도 맛있습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건빵을 얹고 설탕을 살살 뿌려서 튀기면 바싹바싹한 쿠키와 같은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건빵하면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6.25때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곰팡이가 핀 건빵'입니다. 전쟁이 터지고 6개월 후 1951년 1월 엄동설한에 강원도 한 산골 벽촌 중학교에 어린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적게는 16살에서 스물 갓 넘은 결혼한 학생까지 중학교 1학년에서 4학년까지 120여명의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한 선생님의 인솔로 경북 춘양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받고 바로 전쟁터에 투입되니 이들은 영월 간성 김화 양구 등지를 두루 헤매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크고 작은 전공을 여러 번 세웠습니다. 가장 큰 전공은 중공군에게 포위된 국군 3사단을 구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6.25전쟁 중에 이들 중 18명이나 전사했습니다. 그들 전사자 중에 한 나이든 학도병의 이야깁니다.



한창 때에 어린 학생들이 완전 군장을 하고 자기 키보다 큰 M1 소총을 들고 행군을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6.25전쟁 중에 겨울 추위는 왜 그리 추웠는지 여름에 더위는 왜 그렇게 더웠는지 모릅니다. 얼마 안 되는 주먹밥은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미군용 건빵이 간식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먹어치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한 나이든 학도병은 한두 알 입에 넣곤 먹지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싸서 배낭에다 넣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고향집에는 먹지 못하여 굶주리는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빨리 집에 돌아가 이 건빵을 동생들에게 주어야지." 맛있게 건빵을 먹을 동생들을 눈에 그리며 한알 두알 모은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 잡고도 계속해서 건빵을 모았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강원도 중부 전선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전투가 아주 심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날 하루에 3명이나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안타깝게도 동생들을 주려고 건빵을 모으던 나이든 학도병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동료들은 울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울부짖으며 교가를 불렀습니다. 모두 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전사한 그 동료의 배낭을 열어 보았습니다. 배낭 안에서는 식기도구와 옷가지와 함께 더러는 곰팡이가 핀 건빵들이 주르륵 흘러 나왔습니다. 동료들은 그 건빵을 움켜지고 다시금 목 놓아 울었습니다. "살아서 동생들에게 갖다 주지?" "네가 이렇게 죽으면 이 건빵은 누가 네 동생들에게 갖다 준단 말이냐!" 어린 학도병들은 흩어진 건빵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친구 학도병들 몇 명이 전사한 학도병의 고향집에 들렀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에게 유품을 전해주고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전사한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열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친구를 타향천리에 묻고 살아 돌아온 학도병들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미리 싸온 건빵 한 보따리를 어린 동생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건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주 신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건빵 한 보따리에 마냥 즐거워하는 어린 동생들을 보며 살아 돌아온 친구 학도병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 두어도 곰팡이가 잘 피지 않는 건빵인데 곰팡이가 피도록 먹지 않고 모아두었던 그 건빵은 비록 나이든 학도병의 무덤 앞에 묻혔지만 그 건빵을 한알 두알 모으던 그 학도병의 마음은 그의 동생들과 그 후손들의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사는 우리 대한의 백성들 아니 태평양을 건너온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들 마음속에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태백중학교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존경하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아들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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