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삶과 죽음을 가른 유격대원
이선하
급조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부대가 부산 제4부두에서 상륙용 함정 LST를 타고 전지 영덕을 향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우리들 팔백여 학도병. "유격대는 적의 후방을 기습 아군을 돕는 것이 주 임무인 특수 부대다." 귀가 솔깃하게 들렸던 모병관의 그 말을 떠올렸다. 모두들 지치고 긴장해있었지만 기상은 뜨거웠다.
배낭을 베고 옆에 누워있던 남진태가 내게 다가왔다. "형 우리 중 누가 먼저 집에 가든지 부모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로 합시다." 제법 심각한 표정에 나는 되도록 태연스럽게 "알았어"라고 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착잡했다.
그의 이름은 내 평생 따라 다닐 듯하다. 그는 학교 연극반 후배로 또 밴드부에서 나는 트럼펫을 그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한 동네 살았다는 것외에 취미도 비슷해서 함께 어울린 시간이 많았다. 그가 유격대를 택한 것도 나와 함께 하겠다는 일념에서 일 게다. 그는 경찰서장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미남형 얼굴이었다. 그는 매년 개교기념일에 열리는 문예작품 공모에서 당선 된 시 '물안개 언저리'로 나는 콩트 '산골 편지'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는 베니 굿맨 같이 한국에 스윙재즈 보급 꿈을 가졌었다.
막 잠이 든 순간 LST 엔진의 가파른 역회전 소리와 선실 곳곳에서 붉은 비상등이 번쩍거렸다. 삑삑 버저소리도 울려댔다. 확성기에선 "전 장병 상륙준비" "전 장병 상륙 준비" 소리가 계속 나왔다. 탄창을 장전한 우리들은 초조와 긴장 속에 삼십분 넘게 기다렸지만 다음 명령은 없었다.
확성기에선 군가만 계속 나왔다. 한 시간은 족히 되었는데도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초조하고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명의 미군 고문관만 급히 서두는 모습이 심상치 않는 일이 생긴 듯 했다.
D데이 동트기 전 상륙해야 하는 시간을 놓쳤다. 날이 밝아 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때 LST 배 앞바닥과 그 옆 문이 열렸다. "제1소대부터 상륙개시" 하고 중대장이 명령을 내렸지만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파도가 배 갑판 높이까지 부딪쳤다.
배안에도 물이 들어와 어떻게 상륙할지 망설일 때 미 고문관이 배에 연결된 밧줄을 가리켰다. 언제 누가 연결했는지 가파른 바위 옆 소나무에 매인 밧줄이 보였다. 바람과 높은 파도는 훈련과 실전경험이 없는 대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선임하사와 함께 제1진이 밧줄에 매달려 한 팔 한 팔 전진했다. 뒤에서 보는 우리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백사장에 닿자 절벽 아래로 급히 몸을 숨긴 이십여 명 장병들은 제2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제2진은 갑자기 밀려온 파도에 두 명이 잡은 밧줄에서 떨어져 바다에 휩쓸렸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탈진 산위의 적군들 사격이 상륙하는 병사들에게 집중돼 삼 사명이 한꺼번에 물속에 떨어졌다. 배 앞에 붉은 핏물이 보이자 제3진은 겁에 질려 누구도 선뜻 나서려하지 않았다.
미 고문관이 권총을 빼들고 "컴온 컴온" 위협하면서 독려했다. 남진태는 내게 바짝 다가와 "형 함께 가요"하면서 내 뒤에 섰다. 그는 제5진이었는데 재빨리 누구와 바꾼 모양이었다. 후진(後陣)일수록 안전하단 보장은 없지만 어쩐지 그가 남의 운명을 대신 지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래도 잘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3진 출발은 타겟처럼 완전 노출된 상태라서 콩 볶듯 쏘아대는 적탄에 이십 명 중 절반이 상륙하고 절반은 행방불명됐다. 남진태를 본 것은 "형" 하는 비명소리에 돌아 봤을 때 이마에 피를 흘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려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제3진의 엄청난 희생에 밧줄을 끊고 LST 문을 닫았다. 조금 물러가는가 싶더니 속력을 내어 백사장으로 돌진했다. 뱃머리가 백사장에 쑥 올라갔지만 문은 열지 않았다. 삼사 분이 지나자 미군 쌕쌕이 편대가 날아와 언덕 위 솔밭을 불바다로 만들고 지축을 흔드는 폭격에 귀청이 떨렸다.
전투기가 떠나자 배문을 열고 전 병력을 상륙시켰다. 공습에 힘입어 상륙에는 성공했지만 보급품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 5사단과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투에서 수백 명이 전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영덕 남단 장사리 양동작전이었다. 얼마쯤의 희생을 예견하고 우리 부대 학도병 유격대를 투입한 것 같았다.
내가 포로가 된 것은 전날 밤 기습을 받은 전투에서 본진을 놓친 우리 소대가 산골 초등학교 분교에 들어가 잠을 자던 때였다. 새벽녘 후퇴하는 적 패잔병들에게 잡혀 험준한 태백산을 타고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우리 유격대원 이십팔 명 외 안강전투에서 붙잡힌 이십 명이 대오를 이뤄 밤 낮 이틀을 걸었다. 오대산 초입부터 포로병 숫자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가까운 골짜기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났음에도 적들의 무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 포로는 두 감시병에 이끌려 다른 방향 길로 접어들자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질 조짐에 목안이 바싹 탔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그 때 귀공자 같이 생긴 감시병이 내게 다가오더니 "공포를 열 발 정도 쏠 테니 빨리 달아나라"고 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와 나는 마음이 좀 통한 편이었을까. 내가 대구 출신 학도병임을 안 그도 대구출신으로 서울대 재학 중 의용군이 된 조현수라고 했다. 자기가 살아서 돌아가면 삼덕동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과 포항 안강전투에서 전 사단이 퇴각하면서 북으로 갔다는 것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수성중학교장이고 삼덕교회 장로라고도 했다.
대여섯 발의 총성과 동시에 우리들은 무작정 사방으로 뛰었다. 연이은 총성을 뒤로하고 뛰고 또 뛰었다. 총성은 산 메아리가 되어 수백 발을 쏜 것처럼 온 골짜기를 울렸다. 다섯 명 포로 중 다른 한명과 나는 이틀 동안 요기라고는 빈집에서 생고구마 두 개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긴장한 탓에 허기진 줄도 몰랐다. 춘천을 거쳐 의암호와 소양강 쪽에 있는 임시수용소를 찾아 신고를 했다. 나는 군번이 없는 유격대라 확인이 늦어 부대복귀도 늦었다.
아침 일찍 막사 밖을 나오면 소양강과 의암호에 물안개가 자욱이 덮쳐오곤 했다. 나를 따랐던 남진태의 시 '물안개 언저리'가 오대독자인 그의 장래를 암시한 것 같았다. 공포를 쏴 나를 도망치게 했던 적 의용군 조현수와 숨 막혔던 일도 떠올랐다. 나는 그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조현수 집에는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남진태 집이다.
내가 그의 집을 찾은 것은 귀가한 지 나흘째 날이다. 그가 영덕 전투에서 행방불명됐다는 통지를 받은 지 한 달 반 만이었다. "누구세요"하는 그의 여동생 목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게 마지막 말을 하려하던 바로 그의 눈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황급히 달려온 그의 아버지와 두 모녀가 내 입만 쳐다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나를 따라 제3진에 합류한 장면을 지우고 백사장 전투 후 보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확신에 찬 말로 위로했다. 아버지는 이슬 맺힌 눈을 돌리면서 묻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해변에 학병들의 모자와 허리띠가 수없이 나뒹굴었다는 말을 한 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배웅하던 여동생이 내게 다가서더니 심중에 있는 말을 했다. "오빠 숨긴 거 있지 다 알아 그렇지만 나도 오빠같이 연극 같은 인생을 살아갈 거야." 그것이 그녀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다. 전리도 승패도 불명한 전쟁. 나 때문에 죽은 사람과 나를 살린 적군도 있어 혼돈스런 그 전쟁. 결국 일으킨 쪽과 막아낸 쪽 모두 한 맺힌 피해만 입지 않았나. 그뿐이랴. 죽은 자와 산자로 가른 그 무엇이 지금도 내 가슴을 끓인다. 그 때처럼 가쁜 숨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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