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수필 공모 입상작-최우수상] 지금도 뻐꾸기는 울고 있을까
전문숙
나무들이 녹색으로 짙어가는 6월이 오면 '높은별' 뒷산에서 울던 뻐꾸기가 생각난다. 61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6.25전쟁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들여주고 싶구나. 할머니가 9살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우리 손주 지원이 보다 한 살 더 어렸을 때였지. 할머니는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단다. 맑은 금강이 흐르는 마을이었어.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강가의 예쁜 조약돌을 줍곤 했지. 여름이면 노란 참외와 수박 복숭아가 가을이면 포도가 달게 익어가던 과수원이 많던 마을은 흰구름이 한가로이 떠나니던 하늘 아래 평화스러운 곳이었다.
6월 어느 날 밤 빨리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깨어보니 보따리 짐들이 보였고 무섭고 불안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아직도 밖은 깜깜한 데 한 살된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4살 된 남동생과 나는 피란길을 떠났단다. 서울에서 점점 내려오는 대포소리가 정말 무서웠단다. 업고 이고 들고 길을 나선 어머니를 따라 동생과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었지. 돌부리에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찔려 피가 나도 아픈 것도 잊은 채 엄마만 따라 가야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터널에 모여든 많은 동네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꼭 가져와야할 보따리 대신에 요강을 들고 나와 웃었던 기억도 있다. 너희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너무 무서우면 그럴 수 있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우리는 '높은별'로 향하는 40리 산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올라갔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길에 엎드리고 나무 밑에 숨었지.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높은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높은별'이었고 지형상 비행기 폭격이 불가능한 곳이라 거기로 피란을 갔었단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미리 그곳에 먹을 양식과 거처할 곳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산으로 떠나셨었다.
우리가 있던 방은 시골 싸리문 옆 소 외양간에 달린 흙방이었다. 문을 열면 소가 여물을 먹는 소리와 숨 쉬는 소리가 왜 그리 무섭게 들리던지. 낮이면 북한 인민군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내려온다고 해서 뒷산에서 지냈단다. 머루와 산딸기를 따먹고 땔감나무를 주우러 내려오곤 했지.
한여름 녹음이 짙어가고 호두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한낮의 햇볕이 시골 마당에 쏟아지는 6월 산속의 나무 밑에서 우리는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언제 우리집에 갈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지. 높고 깊은 산속에서 뻐꾹뻐꾹 뻐꾸기 우는 소리가 메아리되어 들려오곤 했단다.
어느 날이었지. 부상당한 군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 우리 마을에 들어왔었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도 파랗고 그중에는 흑인들도 있었다. 우리들은 외국사람을 처음 보아서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었다. 붕대로 머리를 싸맨 사람 다리를 다쳐 혼자 못 걷는 사람 총에 맞아 치료도 못하고 쓰러질 듯 지쳐있는 낯선 군인들이었지.
동네 이장 할아버지는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미국에서 온 군인들이라며 무서워 하지 말고 빨리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했지. 보리밥과 김치 장아찌 같은 한국의 시골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집집마다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여 소다를 넣어 빵을 만들어 참기름에 찍어먹게 했었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멀고도 작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었는지 생각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이제 가장 무서웠던 기억을 이야기 해야겠다. 심천 우리집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내려갔던 날이었다. 마을엔 북한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들고 다녔고 학교와 교회는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옷과 모자의 빨간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였는지 그날 하루종일 B29라는 비행기가 쉬지않고 폭격을 했었다. 비가 오듯 쏟아지는 폭탄에 마을은 불타 잿더미만 남았고 대문 옆 감나무는 까맣게 탄 채로 서 있었다.
비행기가 뜰 때마다 우리는 엎드리고 숨고 뛰었다.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는 다리가 잘려 일어서질 못하고 피투성이로 살려달라 손짓하던 사람이 무서워 떨고 있었지. 나는 엄마손을 놓칠까봐 뛰어야만 했고 비행기 소리가 나면 나무처럼 보이기 위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해가 지고 밤이되어 산밑에 있는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죽을 끓여 나누어 먹고 있는데 불빛을 보고 폭격을 한 것이었다. 집 뒤쪽 장독대가 있던 곳에 숨었는데 폭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지붕 위로 파편들이 불꽃 떨어지듯 쏟아 내리는 것을 보며 땅에 떨어지는 순간 머리 위 고추장 단지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내 머리위를 덮쳤단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더듬거리는데 머리는 단지고 몸은 나였단다.
너희들은 그 장면을 생각하며 재밌다고 웃겠지만 9살이던 할머니는 얼마나 무섭고 아팠겠느냐. 고추장 범벅이 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산밑 동굴쪽으로 뛰셨고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울 수조차 없었단다. 산속에 굴을 파고 방공호라고 했지. 비행기 소리가 나면 굴안에 숨고 입구는 나뭇가지로 막아 놓았단다. 북한 괴뢰군들은 남자들 심지어 총을 쏘지 못하는 학생들까지도 다 잡아갔단다. 그래서 아버지도 부산으로 내려 가셨지.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석도 지나고 겨울이 왔는데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아버지도 오시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쪽에 있는 부산으로 가기위해 어렵게 피란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지금은 KTX로 서울서 부산까지 3시간이면 편안히 갈 수 있는데 대전에서 탄 열차는 옆도 지붕도 없는 바닥만 있는 곳에 전쟁에 필요한 탱크와 지프차를 부산으로 운반하는 기차였지. 나와 동생들은 탱크사이에 이불을 쓰고 비가오면 맞아야하고 눈이 내리면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을 덮고 자야만 했었어.
꽁꽁 언 주먹밥을 먹었다면 너희들은 믿을 수 있겠니. 나중에는 쌀을 조금씩 씹으면서 물대신 눈을 녹여 먹었던 피란 열차. 그해에 왜 그리 눈이 많이 내렸을까? 우리 옆에 있던 가족 중 한 아이는 아침이 되어보니 죽어 있었단다. 또 다른 화물칸 꼭대기에 매달려오던 사람들 중에서 터널을 통과할 때 부딪쳐 떨어져 죽었다. 아침이 되면 아들이 떨어졌다고 엄마가 없어졌다고 사방에서 울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 쉬고 슬퍼할 시간이 없이 3일 간을 피란 열차에서 지내고 4일째 되는 날 밤 부산에 도착했었다.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내렸다. 보따리들을 이고 짊어지고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였었다.
그렇지만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단다. 나는 엄마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동생과 함께 엄마옷을 잡고 따라 다녔었지. 부산에는 엄마와 아빠를 잃은 전쟁고아들을 보호하는 고아원이 많았단다. 미국의 도움으로 고아원은 운영되었고 약과 먹을 것을 도와주었단다. 너희 부모들이 후원하고 있는 월드비전을 통해 한국은 6.25 전쟁때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었다.
부산 친척집에는 28명이 복닥거리며 살았고 학교에 가니 학생수가 많아 4학년으로 들어간 나는 주로 옥외에서 수업을 했었다. 교실은 5 6학년이 사용했고 저학년들은 길에 있는 계단이나 운동장 나무 그늘 산에서 무릎에 두꺼운 합판을 놓고 쓰고 땅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했지.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 되었고 종이가 부족해 매끄럽고 흰 종이가 아니라 재생해서 만든 누런 종이를 사용했었지.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아껴 쓰면서 구구단을 외우고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했단다. 당시 학생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학용품이었지.
지금 우리 손주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행하는 브랜드 신발을 사는 너희들은 할머니가 떨어진 신발을 꿰매어 신고 다녔다면 상상할 수 있을까? 옥수수 빵을 학교에서 주면 집에있는 동생을 생각하고 주머니에 넣어가던 친구도 있었지. 전기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공부 그만하고 불끄라던 부모님들도 있었다.
전쟁은 이렇게 가난을 가져 왔단다. 조금 쓰고 버리는 매끄럽고 하얀 종이들 여기저거 굴러다니는 연필과 크레용 몇 번 마시고 버리는 캔음료 버려지는 음식들 이런 것들을 보며 아깝고 죄스런 마음이 든다. 아끼라는 말은 6.25 전쟁으로 가난을 경험한 할머니의 잔소리가 되었다.
61년전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 우습기도 하고 재밌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무섭고 비참한 것이란다. 부모를 잃은 고아가 생기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평생동안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비극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옥수수 죽도 못먹어 배고픔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많단다. 우리 손주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 안에서 남을 도우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