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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병실에서 만난 미국 노병

조순희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날도 노을 빛이 이리도 붉게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왔었는데.

12년 전 그 날은 몹시 바쁜 날이었다. 보통 때면 벌써 집에 갔어야 할 시간인데 환자 하나가 롱비치에 있는 재향군인병원으로부터 이송되어 와서 다음 날 스케줄이 첫번 째인 수술을 위해 저녁에 투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심장으로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세개나 막혀 있다고 했다.

나는 준비를 하여 그가 있는 병실로 가서 치료를 시작했다. 긴 하루를 보내고 피곤한 눈으로 바라 본 창을 통해 들어오던 저녁 노을 시시각각으로 빛을 잃어가며 더욱 짙게 변해가는 바로 그 빛이 화살이 되어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기는 하나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술을 앞둔 마음의 어수선함이 느껴질 것도 같아 이름을 부르니 눈을 뜨고 무슨 일인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착잡한 것인지 아니면 포기를 한 것인지 얼굴 표정이 읽혀지지 않았다. 그에게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이 아우르는 딱히 꼬집어 낼 수없는 무언가에 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기분을 걷어내려고 저녁 하늘 노을이 아름다우니 한 번 바라보라고 하며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를 시키면서 가족에 대해 물었다.



한 번 이혼했고 지금은 걸 프렌드와 살고 있다고 했다. 걸 프렌드가 아메리칸 인디언 스타일을 좋아해서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그는 '아이 돈 케어'라고 했다 . 자식이 있었으나 몇이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 그가 들려준 이야기로 해서 그 숫자는 기억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60을 넘긴지 네 다섯 해나 더 지났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말투는 침착하였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페이소스는 무엇 때문일까 궁금했는데 문득 그가 내게 물었다. 한국 사람인가하고.

그렇다고 하자 첫 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필리핀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들이 워낙 병원에 많기도 하고 또한 내 얼굴 색이 검은 편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첫 번에 알아 보았느냐고 하니 1951년에 한국에 갔었다고 했다.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17살. 고등 학교를 바로 졸업한 뒤 한국전에 투입된 것이었다.

미국도 그 때는 징집제여서 한국처럼 누구나 군대에 가야 했다고 했다. 어떤 마을은 같은 연배의 남자들이 모두 다 징집되었다고도 했다. 해병대로 들어간 그는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총쏘는 법과 다루는 법을 익혔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소년이었다. 배 안에는 비슷한 또래의 소년들이 제법 있어 한국으로 가는 동안 장난도 치고 놀았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오지였고 서방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였다. 내가 일본 위에 있다고 말하자 그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라 이름은 들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한국은 그 즈음 부산까지 쫓겨 내려가 거의 북한이 차지할 순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다시 북으로 치고 올라가 압록강(그는 the Yaru라 했다)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렵 그는 전쟁에 합류했다고 했다.

그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처음 부딪친 것은 상상도 못할 추위였다. 영하 20~30도나 되는 추위로 온 몸이 그냥 냉동이 되어 막대기처럼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그 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생각마저 얼어붙었는데 그 소리와 함께 허연 누비 옷에 모자를 쓰고 싸울 것 하나 지니지 않은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에는 그냥 밀려 왔다고 했다. 인해전술의 중공군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들이 나중에는 진절머리가 나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부대간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아 후퇴 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20여 명이 중공군에게 잡혔다. 그들은 포로들을 북으로 북으로 끌고 갔는데 그들의 말소리도 피리소리처럼 어지러웠다고 했다. 끌려가는 어느 순간 정신이 퍼뜩 들면서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I was only seventeen then. I didn't know any better."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눈 감은 그를 바라보면서 만약 내가 그 나이였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지레 놀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 나이 또래의 정신대로 나갔던 열 예닐곱 소녀들 정말 남자라고는 알지 못하던 소녀들이 이역 만리에서 어떻게 버텨냈을까.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나는 미국에 멀쩡하게 와서도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속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때문에 나 스스로를 얼마나 볶았는데 하며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들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 자꾸 중국 안 쪽으로 들어가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딘 줄 몰라 속이 탔다고 했다. 더구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니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감도 못잡고 무서웠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슬슬 무리에서 떨어지면서 도망을 쳤다고 했다.

어딘 줄도 모르고 그저 동물적 감각을 이용해 달렸는데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오금이 저리고 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달리 아무 대책도 없으니까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에 둘러보니 농가 마을이 보이기에 조금만 쉬었다 가려고 한 길가 집 헛간으로 숨어들었다. 늦은 밤이어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아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밖에서 '따따따' 말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그러면서 헛간으로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이 잡혔구나' 싶어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고 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 설명할 도리도 없고 온 천지에 도움이 올 구멍은 하나도 없이 외딴 헛간에서 얼어붙은 그의 눈에 농기구가 눈에 띄었다. 그러는 동안 삐걱 문이 열리며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그 남자를 향해 정신없이 낫을 휘둘렀다. 아무 생각없이 자기 집 헛간에 볼 일이 있어 왔던 남자는 '윽' 소리 지를 겨를도 없이 쓰러져 버렸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순간 그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그 자리에 붙박혀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다시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며 또 이쪽으로 언성을 높이며 오는게 아닌가. 자기가 한 짓이 어떤 것인지 안 그는 더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본능만이 그를 사나운 짐승으로 만들어 헛간으로 들어오는 그 여자를 향해서도 생존의 무기를 휘둘렀다. 여자가 또 그렇게 쓰러지고 난 뒤 피로 범벅이 된 자기 손을 보며 그는 짐승같은 울음을 울었다고했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할까 막막해서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그의 눈 앞에 'Oh No!'. 이제 갓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말까하는 계집애 하나가 중국말로 뭐라뭐라 하며 울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마 엄마를 뒤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바깥 사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그에게 든 생각은 만약 이 아이가 울어버리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비치는 눈물을 나는 보았다. 병상의 그는 17살 그때로 돌아가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내가 혼자 듣고 흘리기엔 너무도 벅찬 이야기였다.

그 때 죽은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그에게도 너무나 안된 일이었다. 그는 분명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나는 저 17살 소년에게도 지금 수술을 앞둔 예순 네 다섯의 노인에게도 위로의 말 한 마디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신부님이라면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을까?

그가 내 대답을 원해서 이야기를 하였던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뒤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하나 느낀 것은 사람의 목숨은 우리 판단의 잣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모두가 정확한 의학적 지식을 토대로 어떤 사람의 끝을 말하는데도 살아 남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갈 때에 가는 것이구나 다만 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됐지요."

이말을 들려주면서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가 조금이라도 위로 받기를 바랐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처음의 그 담담함으로 입을 열었다.

"Why me?"

나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 삶의 종결자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일로 평생을 고통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아 이 사람은 왜 이 말을 내게 하는 것인가?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 수많은 고해 성사의 시간을 어떻게 참았을까. 만약 그 사실을 고백했었다면 하고 나서 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지금 나에게?

나는 그에게 길에서 만난 한 사람의 나그네로 마침 한국 사람이어서 그리고 그는 생사를 가르는 큰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허락되어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하고 마음 가볍게 남은 길을 가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수술 후 롱비치의 재향군인 병원으로 다시 갈테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치료 시간이 끝나 나는 그에게 수술이 잘되기를 빌어 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그 어린 나이의 소년은 싸웠고 그 일로 해서 그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며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던가. 그 방을 나오면서 우리는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모르는 채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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