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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18명의 목숨을 살리다

어현수

6·25가 가까워 온다. 61년 전 그날 새벽 요란한 비상소집 사이렌 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본능적으로 머리맡의 전투복을 챙겨입고 모자를 썼다. 알람시계가 4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투화를 신고 권총을 뽑아든 채 본서로 향해 달렸다. 멀리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 온다. 간간히 포소리가 섞인다. 종전에는 없던 소리…. 전면전의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드디어 본서 앞 광장에 도착했다. 새벽을 뚫고 달려온 비번 서원들이 신속하게 소대편성 중이다. 말을 몰고 달려온 서장을 중심으로 간부회의가 열렸다. 통신주임이 본국(경기도 경찰국)에서 받은 무전내용을 전달했다. 경기도 관내 38선 경찰서 전체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서쪽부터 옹진 청단 연안 이곳 백천 그리고 특히 개성은 탱크가 앞장섰다고 했다.

소집에 달려올 때 들리던 포소리의 정체가 밝혀졌다. 내가 경창전문학교(현 경찰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임관돼서 처음 부임하던 1년 전부터 한 주일이 멀다하고 일어났던 38선 충돌사건에서는 포소리가 없었다. 포소리가 들리고 탱크가 앞장섰다는 소리에 남침이란 확신이 섰다.

이어 일선 지서도 탄약이 떨어져 고전 중이란 전화가 왔다. 곧 이어 서장 명령으로 일신 지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백천 서원 400여명 중 반 수 200여명이 4개 일선 지서에 50명씩 배치되어 교대로 38선을 지키고 있었다. 가진 무기로는 일본군이 두고 간 38식 단발 장총에 탄약 30발….



드디어 본국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각 서는 서장 지휘 하에 병력을 수습하고 문서를 소각하고 서장 재량으로 유치자들을 처리하고 신속히 인천의 경기도 경찰국 앞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다. 서장은 경무 사찰 보안 통신주임과 더불어 남은 전체 서원과 가족을 데리고 트럭으로 벽란도(강화도 맞은편 포구)로 떠나고 경기 주임은 정예부대를 조직 본서 앞 남산에 진을 치고 적의 진격을 막아 지연 전술로 직원들 후퇴를 돕기로 했다.

서장이 떠날 때 유치장은 수사주임 책임이니 알아서 유치자들을 처리하고 인천에서 만나자고 했다. 경비주임이 내게 경험 많은 직원 8명과 실탄 8발씩을 나눠줬다. 트럭으로 직원과 가족들이 떠나고 남산의 경비 주임 소대도 떠났을 때 유치장에 들어섰다. 그 때 시간 오후 1시 반 폭풍전야 같은 적막이 있었다.

잡범들은 이미 석방이 됐고 보안법을 위반한 사람만 18명 새삼 서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 "유치자를 처리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멀지않은 곳에 적군이 몰려오고 있는 절박한 순간. 적과 한 통속인 유치자들을 처리하라는 말은 없애라는 말이다. 경비주임이 챙겨준 직원과 탄약은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다.

직원들이 철사로 두명 씩 팔목을 묶은 아홉쌍을 서 앞으로 끌어냈다. 번민의 시간이 흘렀다. 18명의 목숨을 나에게 맡긴 서장이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책임을 통감하는 순간이 흐르고 결론을 얻었다.

'살리자! 사상이 뭔데? 사상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27세의 내가 겪은 경험과 믿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갈 길을 선택하도록 하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됐다. 유치자 18명을 모두 그늘에 앉히고 묶인 철선을 끊었다. 순간 창백했던 18명 얼굴에 혈색이 돌고 말 못할 감동이 흘렀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부터 자유입니다."

첫마디 말에 "아이구 고맙습니다 주임님!" 하며 모두 목이 메었다.

"제 나이는 지금 27세 왜정 때는 좌익 책도 읽고 해방 후에는 직접 공산주의를 보기 위해 고향 옹진에서 38선 이북이 된 해주를 10여 차례 가 보고 내린 결론이 남북은 외국 세력의 점령지요 살기 위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딱꿍총보다는 M1 마차보다는 GMC가 종당에는 이길 것이라 믿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코 앞의 적이 우세해 보이지만 길게 보면 GMC가 이길 것으로 믿습니다."

이 때 혹시나 아들을 만날까 서 근처에서 서성이던 노부부가 풀려난 아들을 보고 얼싸 안았다. 내 말이 계속됐다.

"자 이제 우리는 막차 GMC로 떠나려 합니다. 함께 갈 사람은 타시오. 저와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은 갑시다."

나의 말이 끝나자 놀랍게도 부모를 만난 두 사람만 남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트럭에 올라탔다.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를 태운 최후의 GMC 트럭은 적군의 포소리가 무척 가까워진 와중에 벽란도를 향해 쉼없이 내달렸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종종 그때 그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함께 남하한 대부분 젊은이들은 군에 자원 입대했다. 아마 지금 살아있다면 모두 80~90세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 있든지 선택한 자유를 누리며 사시길 간절히 바란다.

해마다 6.25가 되면 느끼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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