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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모아 태산', 페니 100만개 2만불 넘게 팔려

    1전 짜리 동전인 페니 100만 개를 돌아가신 아버지 집을 청소하면서 발견했던 부부가 이를 처분했다고 밝혔다. 판매 가격은 액면가인 1만 달러의 2배를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존 레이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LA 주택을 최근 청소하는 과정에서 100만 개가 넘는 페니를 발견하고 이 내용이 방송을 타면서 화제가 됐다.   레이스 부부는 뉴스에 보도된 이후 동전을 사겠다는 구매 의사를 밝힌 연락이 1000건 이상 쇄도했다고 밝혔다.   존은 "우리가 발견한 동전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이번에 최종적으로 거래가 성사돼 가족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 거래 가격은 이를 밝히지 않는다는 계약 조건에 따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레이스 부부는 약 1만 달러에 해당하는 액면가보다 2배 이상 높은 가격을 받고 싶다고 밝힌 바 있어 최소 2만 달러 이상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입자는 동전 수집가나 투자자로 예상된다.   이들 동전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남동생과 함께 거주하던 피코와 유니언 지역 주택에서 수십 년 동안 모은 것으로 지난해 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들 동전은 연방 조폐국이 동전 재질을 구리에서 아연으로 바꾸기 전에 제조된 것으로 동전 수집가 사이에서는 꽤 흥미를 끄는 상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일 기자티끌 태산 동전 수집가 동전 재질 아내 엘리자베스

2023-06-21

한인 소녀, 정신건강 지킴이로…아역배우 출신 엘리자베스 노

할리우드 아역배우 출신인 한인 여고생이 청소년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를 세워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온라인매체 패치닷컴(patch.com)은 LA지역 스타 스튜던트(Star Student) 후보로 엘리자베스 노(사진)양을 소개했다.   패치닷컴은 지역사회에서 눈에 띄는 봉사활동을 펼치는 청소년을 스타 스튜던트로 선정하고 있다. 노양을 추천한 아버지 앤드로 노씨에 따르면 노양은 8세 때부터 배우 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 소속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노양은 연기활동 외에도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부터는 한인클럽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한인가정상담소(KFAM) 위탁가정 둥지 찾기 프로그램 지원, 노숙자 식료품 나눔 행사 자원봉사 등에도 앞장섰다.   11학년이 된 노양은 최근 오빠 조슈아와 비영리단체 ‘SMC(Share My Cope)’도 설립했다. 노양은 SMC 활동을 통해 또래 청소년 정신건강 지킴이로 나섰다. 이 단체는 청소년 정신건강 정보안내, 우울증 등 대처방법, 지역사회 연대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현재 노양과 SMC는 청소년 자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노양과 오빠는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을 생각하는 또래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는 의지도 보였다.   노양의 아버지 앤드류 노씨는 “그녀의 활동은 세상을 더 좋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했다. 노양의 활동은 인스타그램(@elizabethlo_official)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형재 기자엘리자베스 정신건강 아역배우 출신 청소년 정신건강 할리우드 아역배우

2023-05-05

[오픈업] 한국의 ‘필립 공’들에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그녀는 여왕으로만 71년을 살았다. 정치적 결정권은 없었지만 한 나라의 수장으로 세계의 관심과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여왕도 지구촌 일반 시민들처럼 시대적 변화를 겪었다. 국제 정세에 따라 영국의 지배 영역이 축소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대영제국에 속했던 56개 국가가 하나씩 독립하고 이들과 연방(Commonwealth)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위치를 여왕 시대에 포기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옆에는 항상 부군인 필립 공이 있었다. 둘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로 친척 간이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필립 공은 그리스, 덴마크, 프로이센,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족과 피가 섞인 사람이다. 젊은 시절의 여왕 부부는 싱그러운 모습으로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신경질적이거나 권위의식을 갖고 군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맑고 간사함이나 비겁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또 단정하고, 선하고, 가식이 없고 진실했다. 10대 공주 시절, 결혼식 당시, 그리고 왕관을 썼던 25세 때 등 여왕의  모든 모습에 세계가 환호하고 좋아했다. 그녀가 여왕의 자리를 잘 지키도록, 영국은 그녀를 사랑하고 보호하였다고 할까?   여왕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필립 공은 참 대단해. 앞장설 수는 없었던 입장이라 해도, 여왕인 부인 옆에서 함께 하는 모습이 뒷전으로 밀려 보이지 않고, 멋있어!”라고 말하자, 남편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아키(aqui)!”라고 말해 웃었다. 아키란 스페인어로 ‘여기’ ‘이곳’, ‘저’라는 뜻이다. 나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한다면 ‘나’라는 의미도 있다. 남편은 ‘나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엔 훌륭한 필립 공들이 많다. 남편은 외부 일, 아내는 집안 살림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됐다. 지금 한국과  해외 한인 가정들에서도 남녀의 역할이 바뀐 가정이 꽤 많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 보면, 역할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경계가 없어지고 부부나 동거인들이 가사를 함께 해결하는 모습이다.     나는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예과 때 ‘기독교 문학’이라는 과목이 필수였다. 중장년 연령의 목사님이 강의를 맡았다. 첫 강의가 있던 날, 그 목사님은 여자들이 집안 살림, 남편 보조, 육아 등을 하지 않고 의사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 의사는 새벽에 일어나 모든 가사 관련 일을 한 후에야 자기 일을 하러 출근한다는 예를 들었다. 가사 관련 일이란 혹시 늦게 귀가할 경우를 대비해 식사 준비까지 해 놓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는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입었던 외출복을 벗어 가면서 귀가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반세기 전의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국은 물론 세계의 노동시장은 꾸준히 변하고 있다. 미국의사협의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따르면 2018년에는 의과대학 지원자의 남녀 비율이 비슷했던 것이  2019~2020년에는 여성 비율이 53.5%로 더 많았다. 그러나 실제 의료인 가운데 여성 비율은 36.3%에 지나지 않는다. 의과대학 입학부터, 의료인으로 활동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보면 이해가 된다.     한국 국가통계국(KOSIS)은  2023년 한국의 전업주부 남성이 21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또 육아, 가사 부담이 큰 경우, 남편과 아내 두 사람 중 수입이 적은 쪽이 직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성이 포기하는 현상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 ‘필립 공’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겠다. 한국인 ‘필립 공’‘들에게 힘내시라 하고 싶다.   내 아버지 세대에는 ’필립 공‘들보다 ’신 사임당‘들이 더 많았다. 딴 세상에 가 계신 내 아버지는 여러 모자를 바꿔 써 가면서 사는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지 궁금하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오픈업 한국 필립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도 지구촌 필립 공들

2023-03-06

[뉴스 포커스] ‘젋은 천재 기업인’에 대한 환상

IT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 ‘젊은 천재 기업인’들의 등장이다. 지금은 6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주인 빌 게이츠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도 ‘젊은 천재 기업인’ 소리를 들었다. 이어 아마존의 제프 베이저스,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메타(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등의 계보로 이어진다. 워낙 괴짜 이미지가 강해 이미지 손상은 있지만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도 이 그룹에 포함시킬만 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감한 승부수다. 대부분이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젊은 나이에 과감하게 창업을 택했다. 관심과 호기심에서 출발해 가능성을 확인하고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물론 실패가 성공 사례보다 훨씬 많지만 ‘젊은 천재 기업인’은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이뤄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천재’라는 수식어에 무한한 신뢰감을 보인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출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열광한다. 특히 IT 등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그러다 보니 종종 부작용도 생긴다.  ‘실리콘밸리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테라노스 사태도 그중 하나다. 테라노스의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는 혈액 몇 방울로 암을 포함해 250여 가지 질병 진단이 가능한 기술을 개발했다고 홍보했다. 2003년 테라노스 창업 당시 홈스의 나이는 19세에 불과했다.  홈스는 천재라는 수식어와 함께 ‘여자 스티브 잡스’라는 찬사를 들었고 테라노스에는 엄청난 투자금이 몰렸다. 당연히 홈스는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고, 홈스는 신데렐라에서  하루아침에 ‘희대의 사기꾼’으로 추락했다.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요즘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암호화폐 거래소 FTX의 창업자 샘 뱅크맨-프리드의 몰락이다. 올해 30세인 그는 2년 전인 2021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400대 부자에 올랐던 인물이다. 당시 20대로는 유일했으며 포브스가 평가한 그의 재산은 87억 달러나 됐다. 놀라운 것은 그의 이런 성공 스토리가 5년 만에 쓰인 것이라는 점이다. 2014년 명문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한 그는 주식,채권,외환 거래 등을 하는 트레이딩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2017년 퇴사 후 알라메다 리서치라는 트레이딩 업체를, 그리고 2019년에는 암호화폐 거래소인 FTX를 창업했다.     암호화폐 투자 열풍을 타고 FTX는 급성장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FTX는 파산보호신청을 했고 수사 기관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융사기라고 발표했다. 뱅크맨-프리드에게는 역시 역사상 최대 규모인 2억500만 달러의 보석금이 책정됐고, 대출사기, 자금세탁, 선거자금법 위반 등 무려 8가지나 되는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이다.     투자자들은 왜 뱅크맨-프리드에게 몰렸을까?  또 한 번 ‘젊은 천재’의 환상에 빠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FTX의 파산 과정을 관리하는 전문가에 따르면 FTX의 경영 방식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자산 수백억 달러의 기업에서 회계 업무가 중소기업용 퀵북 프로그램으로 처리됐고, 서류 결재가 채팅 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회사의 주요 결정 논의가 시간이 지나면 자동 삭제되는 채팅 플랫폼을 통해 이뤄지는 바람에 주요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수익을 좇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성 가운데 하나다. 그것도 가능하면 쉽고 빠른 방법으로. 이런 조급함에 투자자 스스로가 ‘젊은 천재 기업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뱅크맨-프리드가 잘나가던 시절 사람들은 그를 JP모건 창업자인 존 피어몬트 모건, 투자의 전설인 워런 버핏에 비교했다. 뱅크맨-프리드는 항변한다. “회사 경영에 좀 더 집중하지 못하고 잘못 운영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투자자들을 속일 의도는 없었다.” 김동필 / 논설실장뉴스 포커스 기업인 천재 천재 기업인 창업자 엘리자베스 암호화폐 거래소

2023-01-05

[별별영어] 여왕의 영어 (Queen‘s English)

엘리자베스 여왕의 연설을 들어보셨는지요? 흔히 접하는 미국식 영어와 상당히 다릅니다. 영국은 여러 민족이 만든 긴 역사 속에 지역방언과 사회계층방언이 발달했어요. 상류층은 런던을 포함하는 동남부의 말에 기반한 특정한 말투를 쓰는데 이를 RP라 부릅니다.   RP는 Received Pronunciation의 준말로 왕에게 ‘수여받은’ 발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기숙학교로 진학하는 상류층의 교육 전통과 관련 있어요. 해리 포터가 11세에 호그와트에 갔듯이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은 이내 학교에서 RP를 익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계층이 높을수록 지역의 색채가 줄어들죠. 왕실의 말투는 RP의 정점이고요.   여왕의 영어엔 여러 특색이 있습니다. 우선 모음 뒤의 ‘r’을 발음하지 않기(‘car’는 ‘카아’[kaː]로), ‘house’의 이중모음 ‘아우’를 ‘아어’ 정도로 약화하기, ‘white’ 등 단어 말미의 ‘t’ 소리 분명히 내기 같은 RP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즉위 당시와 최근 연설을 비교하면 구강의 앞부분을 좁게 사용하는 보수적인 RP에서 좀 더 구강을 넓게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자연스러운 변화겠지만 대중에게 다가가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죠. 흥미로운 것은 ‘very’ 등 모음 사이의 [r]을 혀끝으로 입천장을 살짝 쳐서 내는 여왕의 발음입니다. 이는 RP보다 스코틀랜드 영어에 더 두드러지는 특징이거든요.   여왕은 런던이 아니라 가족과 시간을 보내곤 했던 스코틀랜드의 별장에서 서거해 비행기로 운구됐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여왕이 이곳에서 서거한 사실은 스코틀랜드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군주제 폐지와 더불어 분리 독립을 추구하던 곳이 조용하니 말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시기가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이름이 같은 엘리자베스 1세가 세운 대영제국이 차츰 해체됐는데 여왕이 평화를 우선시했기에 존경받았지요. 윈스턴 처칠의 예언이 맞았어요. 그는 “영국의 역사는 대대로 여왕의 재임 시기가 좋았다”며 젊은 여왕의 즉위를 반겼거든요. “Famous have been the reigns of our queens. Some of the greatest periods in our history have unfolded under their sceptre. (우리 여왕들의 통치가 유명합니다.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시기 중 일부가 그들의 지휘 아래 펼쳐졌지요.)”   전통에 따라 관 위에 두었던 왕관(crown)과 지휘봉인 홀(sceptre)이 내려지며 여왕의 시대가 막을 내렸네요. RP는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채서영 /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별별영어 english queen 엘리자베스 여왕 스코틀랜드 영어 우리 여왕들

2022-10-10

워싱턴 지역도 엘리자베스 여왕 추모 열기

    워싱턴 지역에서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을 추모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8일 여왕의 서거 소식과 함께 워싱턴D.C. 매사츄세츠 애비뉴 선상의 영국 대사관 앞 국기 게양대에는 수많은 추모 꽃다발이 싸여 발디딜 틈이 없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여사는 오후 6시 대사관을 직접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에 조기를 게양했으며 워싱턴 대성당에서 조종을 96회 타종했다.   뮤리엘 바우저 워싱턴D.C. 시장과 글렌 영킨 버지니아 주지사 등도 여왕에 대한 추모 메시지를 발표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영국 출신 이민자 뿐만 아니라 53개 영연방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추모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를 받았던 인도와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던 만큼 이들은 큰 슬픔을 표시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시기 동안 미국 대통령은 14번이나 바뀌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주 시절이었던 1951년 남편 필립공과 함께 워싱턴을 처음 방문해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과 면담했으며 이후 네차례 더 방문했다.  김옥채 기자 kimokchae04@gmail.com엘리자베스 워싱턴 엘리자베스 여왕 워싱턴 지역 워싱턴 대성당

2022-09-09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타계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   영국 왕실은 8일(현지시간) 여왕이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왕위 계승권자인 여왕의 큰아들 찰스 왕세자가 즉각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5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뒤 영국의 군주와 영연방의 수장 자리를 지켜왔다.   영국 최장수 군주이면서 세계 역사상 두번째로 오랜 기간 재위하며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여왕은 즉위 70년 만에 임무를 내려놓게 됐다.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난 6일 엘리자베스 트러스 신임 총리를 임명하는 등 최후까지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이날 왕실이 여왕의 건강이 우려된다는 의료진의 판단을 공개한 후 왕실 직계 가족들은 속속 밸모럴성에 모여들었고 BBC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여왕 관련 소식을 생중계로 전하는 등 전국이 긴박하게 움직였다.   한편 백악관은 여왕의 타계 소식에 즉각적으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언론 브리핑 도중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여왕의 가족과 영국 국민에게로 향한다"며 깊은 애도의 뜻을 밝혔다.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말했듯이 미국과 영국 국민과의 관계는 점점 더 강해져왔다"며 "영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동맹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타계 엘리자베스 트러스 도중 엘리자베스

2022-09-08

"서양화가들이 그린 구한말 작품 감상하세요"

  노스캐롤라이나 그린빌 한인회(회장 강진애)와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 미술대학이 오는 26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양화가 눈에 비친 올드 코리아'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한국 모습을 담은 엘리자베스 키스, 릴리안 밀러, 폴 자쿨레, 윌리 세일러 등 서양화가의 작품을 공개한다.   전시회에 전시되는 그림은 총 70여점으로 모두 송영달 이스트캐롤라이나대학 명예교수가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송 교수는 한국 관련 서양 고서와 서양인 화가들이 그린 한국 소재 그림 수집에 전념하고 있다. 특히 엘리자베스 키스 작품의 중요성을 인식해 키스의 책을 우리말로 옮겨 펴냈고, 국립현대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과 미국의 여러 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키스 전시회를 열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스코트랜드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한국을 방문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매료된 것으로 전해진다. 키스는 풍경보다는 농부, 음악가, 선비, 신부, 신랑 등 사회 각층의 다양한 인물과 풍습을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하여 서양에 소개했다.   이번 전시는 해외동포재단과 캐롤라이나 아시아 센터,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한국 기업 대동공업, LS 케이블 시스템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매주 토요일 10시 30분에는 도슨트들이 관람객들에 작품 설명을 할 예정이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그린빌 한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교실도 준비되어 있다.   ▶웹사이트= ww.oldkorea.net ▶문의= KANGJ@ecu.edu(강진애 교수)  박재우 기자서양화가 구한말 구한말 일제강점기 노스캐롤라이나 그린빌 엘리자베스 키스

2022-08-19

[오픈 업]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지켜야해”

19세기 중엽, 여성 해방운동이 시작되던 무렵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 이라는 스무살 처녀가 투병 중인 이웃집 메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했다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9명의 형제 중 셋째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당신은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몸도 건강하니 의사가 되면 어떨까요? 제 의사는 너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데다 자궁 검사를 너무 아프게 하기 때문에 치료받는 것을 포기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17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런 끔찍한 시술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치료법은 히포크라테스 때부터의 영향으로 질병은 4가지 체내 물질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생긴다는 가설 아래, 피뽑기, 물집 터트리기, 설사시키기 등이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굳혔지만 이번엔 가족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스토우( Stowe) 부인마저 심한 차별대우로 고생을 할 거라며 강하게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친구 메리처럼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 싫어 많은 여성이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자금 마련부터 시작했습니다.     음악 교사로 남부의 학교에 취직한 그녀는 그곳 교장이 과거 의사였음을 알았습니다. 교장의 허락으로 많은 의학 서적들을 읽으며, 자신의  선택에 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3000달러(현재로 환산하면 약 9만5000달러)가 모이자 그녀는 의과대학이 많은 필라델피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 최초의 의과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등 4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여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조차 전국에 두세 곳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여자 교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의과대학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의 의과대학에 입학신청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의사 중에는 그녀의  강한 의지에 감동해 의대 준비에 필요한 해부학이나 생리학 등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여성에게 적합한’ 간호사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9개 의대에서 입학 거절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의과대학 수업이 시작된 10월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뜻밖에도 뉴욕주 서부의 작은 도시 제네바에 있는 의대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식 허가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워링턴 박사라는 분이 간곡히 입학을 부탁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교수들이 학생 찬반 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제네바시로 달려간 그녀는 방을 얻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자 의사를 본 적이 없던 주민들은 그녀를 불법 낙태 시술자로 오인해 아무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의대생들은 찬반투표가 건너편 마을에 있는 경쟁 의과대학에서 만들어낸 장난이라 여겨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강의실에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 129명의 남학생은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방학이 되면 의대생들은 큰 병원에서 실습해야 되는데, 불행히도 그녀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빈민들을 위한 자선병원으로 가 진심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방학을 보냈습니다.   1849년 1월 23일 그녀는 드디어 수석으로 의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졸업 소식은 많은 여성 의사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간 엘리자베스는 다른 여의사들과 함께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올리비아 캠블이라는 언론인이 쓴 ‘위민 인 화이트 코츠(Women in White Coats)’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여자 의과대학 수업 여자 교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2022-08-17

[오픈 업]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지켜야해"

19세기 중엽, 여성 해방운동이 시작되던 무렵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 이라는 스무살 처녀가 투병 중인 이웃집 메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했다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9명의 형제 중 셋째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당신은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몸도 건강하니 의사가 되면 어떨까요? 제 의사는 너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데다 자궁 검사를 너무 아프게 하기 때문에 치료받는 것을 포기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17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런 끔찍한 시술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치료법은 히포크라테스 때부터의 영향으로 질병은 4가지 체내 물질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생긴다는 가설 아래, 피뽑기, 물집 터트리기, 설사시키기 등이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굳혔지만 이번엔 가족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 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스토우( Stowe) 부인마저 심한 차별대우로 고생을 할 거라며 강하게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친구 메리처럼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 싫어 많은 여성이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자금 마련부터 시작했습니다.     음악 교사로 남부의 학교에 취직한 그녀는 그곳  교장이 과거 의사였음을 알았습니다. 교장의 허락으로 많은 의학 서적들을 읽으며 ,자신의  선택에 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3000달러( 현재로 환산하면 약 9만5000달러)가 모이자 그녀는 의과대학이 많은 필라델피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 최초의 의과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등 4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여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조차 전국에 두세 곳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여자 교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의과대학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의 의과대학에 입학신청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의사 중에는 그녀의  강한 의지에 감동해  의대 준비에 필요한 해부학이나 생리학 등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여성에게 적합한’ 간호사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9개 의대에서 입학 거절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의과대학 수업이 시작된 10월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뜻밖에도 뉴욕주 서부의 작은 도시 제네바에 있는 의대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식 허가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워링턴 박사라는 분이 간곡히 입학을 부탁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교수들이 학생 찬반 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제네바시로 달려간 그녀는 방을 얻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자 의사를 본 적이 없던 주민들은 그녀를 불법 낙태 시술자로 오인해 아무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의대생들은 찬반투표가 건너편 마을에 있는 경쟁 의과대학에서 만들어낸  장난이라 여겨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강의실에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 129명의 남학생은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방학이 되면 의대생들은 큰 병원에서 실습해야 되는데, 불행히도 그녀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빈민들을 위한 자선병원으로 가 진심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방학을 보냈습니다.   1849년 1월 23일 그녀는 드디어 수석으로 의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졸업 소식은 많은 여성 의사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간 엘리자베스는 다른 여의사들과 함께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올리비아 캠블이라는 언론인이 쓴 ‘위민 인 화이트 코츠(Women in White Coats)’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여자 의과대학 수업 여자 교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2022-08-02

영국의 최장수 군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의 최장수 군주 엘리자베스 2세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지난  70여년 동안 엘리자베스 2세가 통치했던 영국은 무사했고, 영국인들에게 ‘마음의 여왕’이 됐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인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영국인들은 왜 왕조를 유지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영국의 왕가는 몰락한 다른 왕가들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명예혁명이 끝나고 얼마 후, 영국에는 왕위를 이어받을 스튜어트 왕가 자손이 바닥나 버렸다. 결국 의회는 독일에서 스튜어트 왕가의 먼 친척을 데려와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하노버 왕조의 시조인 조지 1세다. 평생 독일에 살았던 조지 1세는 영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잘 몰랐고 아예 영어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영국에서 정치적 실권을 쥔 것은 의회였고 왕은 자연스럽게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하노버 왕조의 가장 큰 문제는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왕의 위엄을 유지하느냐’ 였다. 어떻게 해야 군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것인가. 시간이 걸렸지만 하노버 왕조는 그럭저럭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다. 그것은 국기나 국가처럼 왕이 국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왕의 역할이란 대외적으로는 영국을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계급은 달라도 우리는 폐하의 신하라는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던 하노버 왕조의 군주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 출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의 둘째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아이들에게는 하노버가 아니라 작센-코부르크-고타라는 성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작센-코부르크-코타 왕조가 시작되면서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아주 나빠졌다.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과 독일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독일에 본가를 두고 있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였다. 더군다나 1차 세계대전 후에 얼마나 많은 왕조들이 무너졌던가? 그들도 같은 꼴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한 몰락을 막기 위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한다. 우선 작센-코부르크-코타라는 성부터 '윈저'로 바꿨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격려했다. 또 국민들이 싫어한다면 외국 왕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 4월 21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고, 알렉산드라는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메리는 할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 긴 이름 대신 그녀를 릴리벳이라고 불렀다. 릴리벳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녀가 고조할머니처럼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큰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왕세자가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조지 5세가 죽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바로 에드워드 8세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지 1 년도 못 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이것이 세기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로맨스다. 이제 영락없이 차남이자 릴리벳의 아버지인 앨버트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차례였다. 그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거기다가 앨버트는 사람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말더듬이가 아니었던가! 1936년 결국 앨버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지 6세이다. 더불어 릴리벳은 아버지의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그 말은 앞으로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는 한,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자, 릴리벳의 교육문제가 중요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릴리벳은 아버지, 조지6세처럼 되지 않기 위해 이 때부터 왕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큰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개인의 행복보다는 국왕으로서의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은 훌륭한 교사들 밑에서 배우면 그만이지만, 국왕으로서의 책임은 교사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릴리벳에게는 군주로서의 책임을 가르쳐줄 누구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바로 릴리벳의 할머니인 메리 왕비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였다. 할머니 메리 왕비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왕실의 위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에게 대중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 역시 왕실의 의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릴리벳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런던이 독일 전투기에 폭격을 당하자, 릴리벳과 그녀의 동생 마가렛은 버킹검 궁을 떠나 윈저 성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 중 메리 왕비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누구보다 먼저 솔선수범하고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국민들에게 선심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생존전략이었던 셈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릴리벳은 열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 조지6세를 귀찮게 졸라댔다. 자신에게도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신도 입대해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딸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던 조지6세는 결국 타협책을 찾아냈다. 1945년 3월 릴리벳은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했다. 릴리벳의 계급은 소위였다.  릴리벳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트럭을 몰거나 탄약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지금까지 거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었던 그녀가 흙바닥에 앉아 타이어를 바꾸고, 보닛을 열어 엔진을 수리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현재 총 25억의 인구를 가진 영연방 15개국의 수장이다. 그런데 지금이 대체 어느 시절인데 그것도 명색이 민주국가에 군주가 존재한단 말이냐는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아무리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지만 말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왕실은 국민 통합의 도구로 꽤나 유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구조와 사고방식이 급변해온 와중에도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상당 부분 이 엄격하고도 노회한 여왕의 역량 덕분이라고 하겠다. 여왕은 본인의 역할을 전통의 수호자이며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국민을 보호하는 자로 설정하고 그와 같은 이미지를 조심스럽게 생산해 왔다.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지만, 적정한 가이드라인을 주는 믿을만한 존재인 것이다.  또 늘 바뀌고 사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주기 마련인 선출직 정치인들과 대조적인 안정감을 준다.   지난해 4월 여왕은 남편 필립공(99)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여왕은 70여 년간 자신의 곁을 지키며 외조를 해왔던 필립공과 큰 잡음 없이 해로했지만, 자식문제로 골치를 앓아왔다. 아들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이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며 ,다아애나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는 왕실을 향한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올해로 즉위 70주년을 맞았다. 현군주중에 단연 최장수다.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축제가 지난 2일부터 나흘간 영국과 영연방 전역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 여왕은 1년에 두 차례 생일축하를 받는다. 실제로 태어난 날인 4월21일, 그리고 6월초에 열리는 ‘공식 탄생일’이다. 공식 생일축하 행사는 5월말에서 6월초에 걸쳐 날씨가 좋은 날을 잡아 따로 열린다, 영연방 국가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한다. 영국인들은 역사적 순간마다 구심점이 되어준 그를 ‘마음의 여왕’으로 여기고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은‘살아있는 현대사’ 그 자체다.  김지민 기자영국 엘리자베스 어머니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엘리자베스 2세

2022-06-08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 엘리자베스 김 회장 취임식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가 2021년을 마감하는 연말 파티를 겸하는 회장 이취임식 행사를 개최했다. 지난 12월 29일 오후 6시에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소재한 힐사이드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는 무려 80여명의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 회원들과 관계자, 덴버쪽 초대객들이 다수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마이클 송 명예영사를 비롯해 데이빗 도널드슨 콜로라도 스프링스 시의원 부부, 포트 카슨 데퓨티 시큐리티 사무실 관계자 부부 등 영어권 초대객들도 10여명이 참석해 행사는 영어와 한국어 두가지로 진행됐다.이번에 23대 회장에 취임해 앞으로 2년간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를 이끌게 된 엘리자베스 김(65)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한인회장으로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주류사회와의 협력관계 강화, 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2세들의 참여를 많이 독려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콜로라도스프링스 남부 한인회는 비영리 단체로 등록되어 있지만, 활성화가 안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를 비영리 단체로서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또 우리 한인회를 명실공히 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발전시키고, 한인들을 단결시켜 한인회를 이 지역 미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힘있는 단체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김 회장은 당선확정 직후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선 소감으로 “책임이 무겁다. 어떻게 보면 내가 차세대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 세대의 회장인 것 같다. 이민 1세대의 마지막 회장으로서, 차세대에게 한인회를 잘 넘겨줄 준비를 하고, 주류사회와 함께 협력하는 한인 공동체의 기초를 닦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1980년 8월에 미국으로 온 김 회장은 94년에 부동산 사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28년째 부동산 브로커로 활동하고 있으며, 1980-90년 당시 영어가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한인들을 위해 법정 통역일도 하고, 노인들 시민권 강좌, 미군과 결혼해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사는 한인 여성 피해자들을 돕는 단체도 결성해 도왔으며, 상공인회 부회장, 민주평통 15기와 17기 위원, 이승규 회장과 함께 11대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20년간 콜로라도 스프링스 한인성당에서 지휘자로 봉사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에 기꺼이 매진해왔다. 김 회장은 “요즘에는 한인회가 구심점이 되어 한인 이민자들을 도울 일이 많지 않다. 이민오는 한인들의 학력이 높고 인터넷이 발달해 필요한 정보들을 그때그때 쉽게 웹서핑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인회의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인회의 역할도 현대사회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 이제 한인회는 한인 커뮤니티를 주류사회와 연결시키고, 한인들의 인지를 높이고 그 위상을 끌어올리는 역할이 주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인회는 주류사회와 연계 및 소통 기회를 늘려야 한다. 그동안 한인 회장님들께서는 영어권이 아니다 보니 언어소통의 문제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다. 나는 2년간의 재임기간동안 이런 주류사회와의 연계를 통해 동포사회에 많은 이익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전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어떤 회장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에 "모범된 한인회를 운영한 회장, 한인들만을 위한 한인회가 아니라, 동포사회 뿐만 아니라 주류사회와도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한 회장, 소통을 많이 한 회장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답변했다.        현재 콜로라도 스프링스에는 최소한 만명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지만, 한인회관은 없다. 그래서 국선 전 회장은 지난 2017년에 한인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인회관 건립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 회장은 "물론 한인회관이 있으면 좋다. 내가 11대 부회장을 할 때부터 한인회관 건립 이야기는 늘 나왔었다. 그러나 한인회관 건립보다는 한인회라는 구심점이 한인사회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사무실이라든지 늘 같은 전화번호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회장이 바뀔 때마다 연락 채널이 달라지고 인수인계가 불분명해지게 되면 한인회 운영이 제대로 될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시대에서 우리 한인회는 한인만을 위한 단체에 머무르지 않고 2세들이 마음껏 날개를 펴고 주류사회에 참여해 시의원이나 상하원 의원에 당선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한인회는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한인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채널로서 홍보를 할 것이다. 앞으로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는 다양한 주류인사들의 행사 참석을 유도하고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하는 모범적인 한인회로서의 역할에 힘쓸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하린 기자엘리자베스 콜로라도 남부 한인회 남부 콜로라도 회장 이취임식

2022-01-07

영국 여왕 허리 '삐끗'…참전용사 추모행사 불참

영국 여왕 허리 '삐끗'…참전용사 추모행사 불참 참석 의지 강했으나 뜻 접어…"여왕 대단히 유감"       (파리=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95세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허리를 다쳐 14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열리는 참전용사 추모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버킹엄궁은 이날 "허리를 삐끗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오늘 아침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참전용사 추모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AFP, AP 통신 등이 전했다. 다른 왕실 구성원은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아들인 찰스 왕세자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대신해 헌화한다고 버킹엄궁은 설명했다. 당초 이날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8년 만에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고 나서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등장하는 자리로 예상됐다. 참전용사 추모행사만큼은 직접 참가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고령에도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해온 엘리자베스 여왕은 지난달 20일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음 날 퇴원했다. 그 이후 화상으로 가벼운 공무를 재개했다. 그러나 의료진은 지난달 29일 2주간 휴식을 더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여왕은 이에 따라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6)에 참석하지 못하고 영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run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영국 참전용사 참전용사 추모행사 여왕 허리 엘리자베스 여왕

202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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