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서구 예술의 죽음' 선포한 그는 시대를 몰고간 '유목민'
‘백남준 전쟁’이라고? 그렇다, 전쟁이다. 그가 일흔네 살의 나이로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엄마’를 웅얼거리다 세상을 떠난 지 4년.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로서 서구 중심의 예술 질서를 교란하려 돌진했던 그의 칭기즈칸 같은 배짱과 뚝심은 뒤에 남은 사람들이 봉기할 것을 촉구한다. 백남준은 21세기 미디어 세상을 내다보고 세계적 비전을 제시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를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쯤으로 한정짓거나, 기인열전의 신화 속에 가두어 두려는 시각을 바로잡으려는 국내외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금은 문화전쟁 시대. 아시아의 하늘이 천년에 한 번 보내준 백남준의 재평가를 위한 싸움은 시작됐다. 여기 얼굴을 감싸 쥔 한 남자가 있다. 1965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예언했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이상(李箱)의 시를 연상시키는 이 묵시록과도 같은 글은 우주적 영혼으로 지구를 떠돌았던 그의 장쾌한 행보를 돌아보게 한다. 백남준(1932~2006)은 흔히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 불리지만 이제 그 진부하고도 해묵은 수식어는 버릴 때가 되었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전’은 사후 4년 만에 시작되는 ‘백남준 바로 세우기‘의 팡파르였다. <본지 9월 14일자 26면 참조>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일본, 독일 등지로 더 자유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 떠돈 유목민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다가 전위예술로 확장한 그의 예술세계는 과학과 자연, 수학과 신비주의 등 학문의 전 영역을 감싸 안고 돌아치는 통섭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광활한 정신의 파노라마를 알아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소외를 분출하는 에너지의 행위예술로 돌파하던 그의 초기 독일 시절은 좌충우돌 파격과 잔혹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와 쾰른 등지를 무대로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무명 예술가로 살았을 때 그가 남긴 편지 한 통은 당시의 심정을 해학 속에 버무리고 있다. “비평가는 공연 전에 자리를 떴고, 사진가는 공연 후에 왔습니다. 내 고통이 헛수고였나요? 하 하 하, 진정 난 타락했군요.” 쾰른의 라인강변 린트가세 28번지 건물 꼭대기 다락방은 백남준의 첫 행위예술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1960년 10월 6일 마리 바우어마이스터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연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그는 쇼팽을 연주하다가 머리로 건반을 내리친 뒤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선배 전위예술가인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다. 단단한 기성체계를 박살내는 것, 수천 년 서구 예술의 우월성을 깨부수는 것, 한마디로 기존 예술의 죽음을 선포하고 더 자유로운 인류 보편의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백남준의 꿈이었다. 라인강변 마리의 작업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연구하려 틀어박혔던 주택가 차고 자리를 둘러본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그는 자신이 재미있게 본 것들,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경지를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도록 고안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식으로 박제된 예술에서 벗어나 인간이 훨씬 더 큰 해방감을 느끼도록, 육신과 정신을 편안하게 놀릴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스스로 ‘실험 TV’ 보는 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눈을 사분의 삼 감으세요. 그리고 30분 이상 보세요.”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뻔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었다. 인간의 사고를 더 널리 뻗어나가게 늘려주고 자극하며 각성시키는 그의 전 작업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가를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체험했다. ‘레이저 콘’ 밑에 누운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건 말건 일어날 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산란 속에서 온 몸을 열어놓고 자신의 존재를 되살피고 있었다. 그런 예술을 인류에 봉헌한 백남준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 ‘우린 백남준의 나라다’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뒤셀도르프·쾰른·부퍼탈(독일)=정재숙 선임기자 200 백남준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10권 ① 벅민스터 풀러 지음, 마리 오 옮김, 앨피 펴냄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 = 우주를 항해하는 지구의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 백남준의 ‘텔레-비전’. ② 김호동 지음, 돌베개 펴냄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유라시아를 ‘최초의 지구촌’으로 통합시킨 몽골 제국의 ‘초원 고속도로’는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의 모델. ③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인간과 비인간(기계·자연·사물)이 대등하게 ‘잡종화된’ 세계에서 근대를 무효화하는 새로운 가능성 제시. ④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펴냄 『대칭성 인류학』 = 신화적 세계에서 테크놀로지가 출현하고, 테크놀로지로부터 신화적 상상력이 유발되는 유동적 지성의 엎치락뒤치락 세계. ⑤ 들뢰즈 &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펴냄 『천 개의 고원』 = 왜 늑대와 칭기즈칸과 이동 야금술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가. ⑥ 김진호 지음, 예리미 펴냄 『음색, 소음, 소리 객체』 =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서 구체음악과 전자음악의 기법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⑦ 빌렘 플루서 지음, 김현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그림의 혁명』 =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의 급변을 상상적인 그림 코드로 읽어내는 이미지 사유의 세계. ⑧ 앙토냉 아르토 지음, 박형섭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 『잔혹연극론』 = 관객을 해방시키고 신체적 음악의 퍼포먼스를 추구했던 백남준은 아르토를 탐독. ⑨ 안동림 역주, 현암사 펴냄 『벽암록』 = 백남준은 『벽암록』을 주변에 강의해줄 정도로 정통해 있었으며, 1963년 첫 전시에서 “처음에는 섬뜩하다가 문득 시원해졌다”는 ‘돈오’의 방식을 채택. ⑩ 백남준, 에디트 데커·이르멜린 리비어 엮음, 백남준아트센터 펴냄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 백남준이 직접 말하는 ‘백남준 세계’의 모든 것. 정리=김남수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