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서구 예술의 죽음' 선포한 그는 시대를 몰고간 '유목민'
글로벌 브랜드 백남준 그의 발자취를 좇아서
피아노 넘어뜨리고 존 케이지 넥타이 자르고…
파격의 첫 행위예술은 광활한 정신의 분출
여기 얼굴을 감싸 쥔 한 남자가 있다. 1965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예언했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이상(李箱)의 시를 연상시키는 이 묵시록과도 같은 글은 우주적 영혼으로 지구를 떠돌았던 그의 장쾌한 행보를 돌아보게 한다. 백남준(1932~2006)은 흔히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 불리지만 이제 그 진부하고도 해묵은 수식어는 버릴 때가 되었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전’은 사후 4년 만에 시작되는 ‘백남준 바로 세우기‘의 팡파르였다.
<본지 9월 14일자 26면 참조>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일본, 독일 등지로 더 자유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 떠돈 유목민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다가 전위예술로 확장한 그의 예술세계는 과학과 자연, 수학과 신비주의 등 학문의 전 영역을 감싸 안고 돌아치는 통섭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광활한 정신의 파노라마를 알아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소외를 분출하는 에너지의 행위예술로 돌파하던 그의 초기 독일 시절은 좌충우돌 파격과 잔혹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와 쾰른 등지를 무대로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무명 예술가로 살았을 때 그가 남긴 편지 한 통은 당시의 심정을 해학 속에 버무리고 있다. “비평가는 공연 전에 자리를 떴고, 사진가는 공연 후에 왔습니다. 내 고통이 헛수고였나요? 하 하 하, 진정 난 타락했군요.”
쾰른의 라인강변 린트가세 28번지 건물 꼭대기 다락방은 백남준의 첫 행위예술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1960년 10월 6일 마리 바우어마이스터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연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그는 쇼팽을 연주하다가 머리로 건반을 내리친 뒤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선배 전위예술가인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다. 단단한 기성체계를 박살내는 것, 수천 년 서구 예술의 우월성을 깨부수는 것, 한마디로 기존 예술의 죽음을 선포하고 더 자유로운 인류 보편의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백남준의 꿈이었다.
라인강변 마리의 작업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연구하려 틀어박혔던 주택가 차고 자리를 둘러본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그는 자신이 재미있게 본 것들,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경지를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도록 고안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식으로 박제된 예술에서 벗어나 인간이 훨씬 더 큰 해방감을 느끼도록, 육신과 정신을 편안하게 놀릴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스스로 ‘실험 TV’ 보는 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눈을 사분의 삼 감으세요. 그리고 30분 이상 보세요.”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뻔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었다. 인간의 사고를 더 널리 뻗어나가게 늘려주고 자극하며 각성시키는 그의 전 작업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가를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체험했다. ‘레이저 콘’ 밑에 누운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건 말건 일어날 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산란 속에서 온 몸을 열어놓고 자신의 존재를 되살피고 있었다. 그런 예술을 인류에 봉헌한 백남준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 ‘우린 백남준의 나라다’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뒤셀도르프·쾰른·부퍼탈(독일)=정재숙 선임기자
200 백남준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10권
① 벅민스터 풀러 지음, 마리 오 옮김, 앨피 펴냄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 = 우주를 항해하는 지구의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 백남준의 ‘텔레-비전’.
② 김호동 지음, 돌베개 펴냄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유라시아를 ‘최초의 지구촌’으로 통합시킨 몽골 제국의 ‘초원 고속도로’는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의 모델.
③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인간과 비인간(기계·자연·사물)이 대등하게 ‘잡종화된’ 세계에서 근대를 무효화하는 새로운 가능성 제시.
④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펴냄 『대칭성 인류학』 = 신화적 세계에서 테크놀로지가 출현하고, 테크놀로지로부터 신화적 상상력이 유발되는 유동적 지성의 엎치락뒤치락 세계.
⑤ 들뢰즈 &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펴냄 『천 개의 고원』 = 왜 늑대와 칭기즈칸과 이동 야금술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가.
⑥ 김진호 지음, 예리미 펴냄 『음색, 소음, 소리 객체』 =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서 구체음악과 전자음악의 기법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⑦ 빌렘 플루서 지음, 김현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그림의 혁명』 =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의 급변을 상상적인 그림 코드로 읽어내는 이미지 사유의 세계.
⑧ 앙토냉 아르토 지음, 박형섭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 『잔혹연극론』 = 관객을 해방시키고 신체적 음악의 퍼포먼스를 추구했던 백남준은 아르토를 탐독.
⑨ 안동림 역주, 현암사 펴냄 『벽암록』 = 백남준은 『벽암록』을 주변에 강의해줄 정도로 정통해 있었으며, 1963년 첫 전시에서 “처음에는 섬뜩하다가 문득 시원해졌다”는 ‘돈오’의 방식을 채택.
⑩ 백남준, 에디트 데커·이르멜린 리비어 엮음, 백남준아트센터 펴냄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 백남준이 직접 말하는 ‘백남준 세계’의 모든 것.
정리=김남수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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