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해 주십시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에 처음 출석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정치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수인 번호 ‘503’ 표지가 달린 옷을 입고 손목에 수갑을 찬 채 법정에 들어서는 일그러지고 초췌한 모습에서 현직 대통령으로 보여주었던 품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3월 10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기 전 그의 모습과 2개월 후 지금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로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국정 농단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당당한 현직 대통령으로 국민 앞에 다가설 그가 피고인으로 방청객에게 둘러싸여 판사 앞에 앉아있는 풍경은 대한민국의 비극 그대로다. 하루속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런 치욕 속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무죄선고를 받거나 문재인 대통령이 사면해 주는 길밖에 없다. 무죄의 길은 좀 요원한 것 같다. 그러니 다른 길은 사면이다. 문 대통령이 정치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매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문 대통령은 그가 지닌 신앙 양심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1974년 9월 8일 전임 닉슨 대통령이 재직기간 저지른 워터게이트 도청과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벌인 권력 남용 등 모든 형사범죄 일체를 조건 없이 사면했다. 포드 대통령은 TV 회견에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이의 재임 중 범죄에 대해 현 대통령인 제가 취할 수 있는 조치”라며 “내 양심에 따라 저는 이미 덮인 책장을 다시 열어 나쁜 꿈을 지속시킬 수 없고, 그 책을 봉인할 수 있는 헌법적 권한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 저입니다”라고 말했다. 포드가 여기서 언급한 양심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의 양심을 말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론은 포드의 조치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그는 1976년 재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 사면조치로 2001년 ‘JFK 용감한 시민상’을 받았다. 한국에도 신양 양심에 따라 전직 두 대통령을 사면한 현직 대통령의 전례가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전두환·노태우 전 두 대통령을 동시에 특별 사면했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이 담긴 은행 예금 계좌 조회표를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12·12 사태와 5·18 내란’에 대해서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높아지면서, 국회가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했고, 검찰은 형법상 내란죄에 대해서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검찰은 1995년 12월 21일 두 전직 대통령을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기소했고, 5·18 내란 사건에 대해서도 1996년 1월3일 추가 기소해 재판에 넘겼다. 1996년 8월26일 1심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과 추징금 2259억 5000만 원을, 노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22년 6월과 추징금 2838억 9600만 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듬해 4월 2심 재판부가 판결한 대로 ‘전두환 무기, 노태우 징역 12년’을 확정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전·노의 사면을 요청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박 전 대통령은 법정에 선 세 번째 전직 대통령이 됐다. 세 전직 대통령 이외 다른 전직대통령들도 큰 불행을 겪었다. 이승만의 국외 망명, 박정희 불의의 피살, 노무현의 자살까지 이어졌다. 헌정 70년밖에 안 된 나라에서 일어난 이런 비극은 어느 나라 정치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은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가 지닌 기독교 신앙의 양심을 이번 기회에 용감히 발휘하기를 요구한다. 천주교인인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요청한 것이나, 이를 받아들인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닉슨 사면을 감행한 포드 대통령 등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사면을 감행하면서 포드 대통령처럼 재선의 위기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 문 대통령이 선배 대통령들이 보여 준 아름다운 선행을 이번 기회에 발휘하여 ‘한국국민으로부터 용감한 시민의 상’을 받기를 바란다. 허종욱/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