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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부르고 행진하며 3·1 정신 기려

오렌지카운티 한인회(회장 조봉남)가 개최한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한인 단체 관계자와 정치인, 교계 인사 등 약 200명 참석하는 성황 속에 열렸다.   지난 1일 오전 11시 가든그로브의 OC한인회관에서 열린 기념식 참석자들은 법왕사 현일 스님의 선창에 따라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 삼창을 하며 선조들의 저항과 희생을 떠올렸다. 참석자들은 행사를 마친 뒤 태극기를 흔들며 한인회관이 있는 US메트로뱅크 몰 내를 도는 ‘태극기 대행진’도 벌였다.   이날 기념식은 조봉남 회장의 환영사, 성공회 가든그로브 교회 토머스 이 신부의 기도, OC원불교당 이정길 교무의 독립선언문 낭독, 권성환 LA총영사관 부총영사의 대통령 기념사 대독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조 회장은 “일제에 항거한 선조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억하자”라고 말했다.   설증혁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오렌지샌디에이고협의회장, 박굉정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남서부지회장, 권석대 OC한우회장, 태미 김 어바인 시의원, 프레드 정 풀러턴 부시장, 조이스 안 부에나파크 부시장 등은 선조의 숭고한 희생을 차세대에 전해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자는 취지의 축사를 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인 장미라 미주광복회장은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활동한 조부 장현근, 광복군으로 활약한 조모 신정숙 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한 뒤 “대한민국 만세”란 말로 연설을 마쳐 듣는 이를 숙연하게 했다.   지경 소프라노는 특별 찬양을 했다. 기념식에 이어 열린 2부 순서에선 무궁화합창단(단장 강성희), 샬롬합창단(단장 조영원), 실비치합창단(단장 김형구)이 기념 공연을 선보였다. 임상환 기자만세 행진 태극기 대행진도 만세 삼창 기념식 참석자들

2024-03-03

‘만세 할머니’ 백인명 여사, 고국 위해 웰페어 모든 돈까지 기부

백인명 여사(1898~1987)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건 1921년 12월이었다.   본적도 없는 남편의 얼굴 사진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사진 결혼을 통해 낯선 이국땅을 밟았던 백 여사는 생전 ‘만세 할머니’로 불렸다.   백 여사는 옥고를 치른 직후 미국으로 왔다. 경기도 가평 공립보통학교와 황해도 연안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19년 3월1일 진명여고 앞에서 독립을 외치다 체포됐다.   본지는 3.1여성동지회가 제공한 백인명 여사의 생전 육성 파일(1976년 2월28일 녹음)을 들어봤다.   2분 남짓한 녹음 파일에는 카랑카랑한 백 여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나라가 말살될 것이라는 감정 속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애국심…허리춤에 감춘 독립선언서를 이 상점, 저 상점에 다니며 전했다. 방방곡곡이 독립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때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 여사는 북가주 맥스웰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이후 윌리엄스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 LA로 왔다. 그때가 1945년이었다.   백 여사는 광복을 LA에서 맞았다. 그때의 감회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너무 좋아서 택시를 불러 대한인동지회 사무실로 달려갔다. 밤새도록 목이 메어라 만세를 부르며 날을 보냈다.”   백 여사는 이민 초창기 세대다. 쉴 틈 없이 일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고 어머니 그리고 아내로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LAPD의 한인경찰관 1호(1965년)인 레이 백씨가 백 여사의 아들이다.     백 여사는 푼푼이 모은 돈도 늘 고국을 위해 썼다.   UCLA에는 한국 전통음악과가 있다. 당시 백 여사가 학교 측에 쾌척한 2000달러를 기반으로 1973년에 개설된 학과다. 당시 화폐 가치를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연방노동부 데이터)해보면 약 1만5000달러에 달한다.   한국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모금 때도 웰페어를 조금씩 모아 마련한 1000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 사건 당시에도 구명 운동에 후원금을 냈다. 한국 정부는 백 여사에게 대통령상(1970년), 외무부장관상(1970년), 문화공보부장관상(1973년) 등을 수여했다.   백 여사는 평소 이승만 박사를 존경했다. 대한인동지회 지방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인 사회내 각종 행사 때마다 ‘대한민국 만세’를 선창했다.   본지 신문에도 백 여사의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1974년 11월3일, LA지역 맥아더 공원에서는 중앙일보 미주판 발행 및 동양TV개국 기념을 맞아 2만 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미국에서의 장수무대’가 열렸다. 이때 백 여사가 1등 장수상을 받았다. 76세였다.   그는 유머와 재치도 있었다.   사회자가 “미국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가 어떠냐”고 묻자 “아들은 많은데 모두 미국 며느리라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도 어렵다”고 답해 관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백 여사는 지난 1987년 9월 눈을 감았다. 향년 89세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대신 미국땅 곳곳에 그가 심은 대한민국의 흔적은 생생하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미국 할머니 만세 할머니 대한민국 만세 한국 독립기념관

2023-09-21

만세 삼창하며 광복절 경축…OC한인회 78주년 기념식

오렌지카운티 한인회(회장 조봉남)는 지난 15일 가든그로브의 OC한인회관에서 제78주년 8·15 광복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잔 노 상근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 참석한 이들은 순국 선열 및 호국 영령에 묵념을 올리며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행사는 조봉남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심상은 OC기독교교회협의회장의 기도, 권성환 LA부총영사의 대통령 기념사 대독 순으로 진행됐다.  박굉정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남서부지회장은 경축사에서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대한민국이 번영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노상일 OC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은 "일제 강점기 선조들의 고통은 짐작하기도 어렵다"라며 "순국 선열과 애국 지사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말했다.  영 김 연방하원의원, 프레드 정 풀러턴 시장, 태미 김 어바인 시장, 유수연 ABC통합교육구 교육위원도 축사를 했다. 미셸 박 스틸 연방하원의원과 데이브 민 가주상원의원은 동영상 축사를 보내왔다.  행사 참석자들은 광복절 노래를 제창하고 OC법왕사 현일 스님 주도로 만세 삼창을 했다.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OC한인회관이 속한 US메트로뱅크 몰을 1바퀴 돌며 태극기 대행진 재현식도 가졌다.  지경 소프라노, 샬롬합창단, 실비치 합창단 등은 축하 공연을 했다.   임상환 기자광복절 만세 광복절 경축 광복절 기념사 만세 삼창

2023-08-16

[김형석의 100년 산책] 자유를 찾아서…나도 탈북자의 한 사람이었다

1947년의 일이다. 해방 2년 후였기 때문에 북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정권 밑에서는 교육다운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내가 추진해온 중고등교육을 단념하고 월남하기로 했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었다. 7월 10일이었다. 집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등지고 생각에 잠겼다가 꿈을 꾸었다. 제복을 입은 보안서원이 나타나 장총을 내게 겨누며 “왜 김일성대학에 교수로 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미안하다. 더 좋은 사람을 추천하기로 했으니까 좀 기다려 달라고 약속했다” 했더니, 그가 그렇게 됐느냐는 표정으로 하늘로 향해 발포했다.   아내와 함께 탈북자 수용소 갇혀   그 총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산 아래 동네를 내려보았다. 내 동생이 헐떡이면서 뛰어오더니 “형님, 빨리 산속으로 도망치세요. 저 아래 자동차에 김현석 장로가 잡혀가는데 형님도 잡으러 올라올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 한 대가 우리 집으로 오는 길목에 서 있고, 두 사람이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차가 다시 떠났다. 김 장로는 내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 이사장이었는데, 그날 체포되었다가 6·25 때 피살되었다.   나는 탈북을 서두르기로 했다. 8월 16일 아침, 아내는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나는 아무 짐도 갖지 않기로 했다.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 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사리원에서 해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늦은 오후에 간신히 해주역에 도착했다. 가까이 있는 한 여관을 찾았다. 여관주인이 우리를 깊숙한 안방으로 안내했다. “안심해도 됩니다.” 탈북인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용강 바닷가로 가다가 검문을 받고 탈북자 수용소로 인계되었다. 초등학교 비슷한 두 채의 건물이었는데 앞 건물은 취조실과 남자수용소, 뒷 건물은 여자수용소였다. 나를 인계받은 계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벽에 걸린 전화통이 요란히 울렸다. 계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통화 내용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계장입니다.” “오늘도 월남하다가 잡혀 온 놈들이 많아요?” “예, 어제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막 평양에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놈들은 책임지고 무조건 북송하라는 명령입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온 계장이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딴방에 대기 중이던 아내에게 나오라고 했다. 부하 한 명을 불러 “이 가족을 버스 정거장에서 떠나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가 나간 후에 갑자기 쪽지 생각이 났다. 나와 함께 교사로 있던 조 선생이 “혹시 도움이 될까 알려 드리는데 제 누님이 해주에 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을 돕고 있는데 제가 전화번호를 드리겠습니다”라며 건넨 메모였다.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묻더니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여자는 내 아내를, 남자는 나를 이끌고 나섰다.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조 선생 누님이 인사를 하면서 “죄송하지만, 불편하시더라도 선생님은 다락방에서 쉬시고 사모님만 거실에 머물러 달라”고 했다. 검문관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나겠느냐고 물었다. 빠를수록 좋다고 했더니, 오늘 밤이나 새벽에 떠나도록 해보자고 했다.   자정이 넘었을 때였다. 안내원을 따라나섰다. 수수밭 안으로 들어서더니 바다 쪽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걸었다. 다행히 아들애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200~300m씩 왕복하면서 바닷가를 순시하고 있었다. 그 중간시간에 작은 나룻배가 와 닿았다. 탈북자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옆 숲속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서 배는 순식간에 만원이 되었다. 나는 아내를 태우고 더 올라탈 수가 없어 다음 배를 기다렸다. 10여 분 후에 또 한 척이 왔다. 남자 다섯이 곧바로 승선했다.   우리 배를 본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나 배는 이미 바다에 들어선 뒤였다. 마치 작은 배들의 전쟁터 같았다. 경비원이 탄 배가 나룻배를 쫓아가고 나룻배들은 큰 어선 사이로 숨어가곤 했다. 사공이 “위급하게 되면 수영을 하는 손님은 바다로 뛰어들어 어선들 뒤에 숨어라”고 했다. 아내가 탄 배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들애가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하느님께 돌보아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느님께 기도, “자유 만세” 외쳐   얼마 후 사공이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자유 만세!”를 선창했다. 나도 눈물을 닦았다. 새벽 시간이었다. 바다 남쪽 해안에는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있었다. 서북청년단원들이 월남한 사람들을 위해 새벽 한기를 피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사공이 “선생님들이, 우리도 자유로운 새 나라에서 살게 도와 달라”던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북청년단원에게 아내 이름을 적어 주면서 내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모닥불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 탈북자가 50~60명, 또는 그 이상일 것 같기도 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아내가 청년의 안내를 받아 찾아왔다. 우리는 말 없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믿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드린 것에 대한 감사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경비정에 끌려가는 나룻배를 셋이나 보았다는 것이다. 아들애는 그제야 눈을 뜨면서 엄마 품에 안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음을 참고 참았다. 자유는 목숨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탈북자 자유 탈북자 수용소 아내 이름 자유 만세

2023-06-09

독립 만세 외치며 3·1 정신 되새겨…한인회 104주년 기념식

오렌지카운티 한인회(회장 조봉남)는 지난 1일 가든그로브의 OC한인회관에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잔 노 상근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 참석한 이들은 순국 선열 및 호국 영령에 묵념을 올리며 3·1 정신을 되새겼다.   행사는 조봉남 회장의 환영사, 심상은 OC기독교교회협의회장의 기도, 이정길 OC원불교 교무의 독립선언문 낭독, 대통령 기념사 대독 순으로 진행됐다. 조 회장은 “순국 선열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과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승해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남서부지회장, 김동수 민주평통 오렌지샌디에이고지역협의회장의 기념사에 이어 이선자 전 OC여성목사회장이 3·1절 시를 낭송했다.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3·1절 노래를 제창한 데 이어 OC법왕사 현일 스님의 주도로 만세 삼창을 했다.   기념식은 태극기 행진으로 마무리 됐다.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OC한인회관이 속한 US메트로뱅크 몰을 1바퀴 돌았다.   기념식에 이은 3·1절 기념 공연엔 실비치합창단과 샬롬합창단, 지경 소프라노, 박춘희씨(한국무용) 등이 출연했다. 임상환 기자독립 만세 독립 만세 독립선언문 낭독 만세 삼창

2023-03-01

[독자 마당] 마누라 중독 증후군

제때 식사 챙겨 먹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약도 시간 맞춰 잘 먹으라고…. 길 떠나는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채근하듯 나에게 거듭 당부하고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밀고 인파 속으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밤 12시30분. 아내는 비행기를 타고 그리운 고국으로 훌쩍 날아갈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는 어머님의 사랑이 녹아 있는 어릴 적 같이 놀던 따뜻한 형제들 손을 잡고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 타임머신을 타고 꿈속 여행을 떠날 것이다.   갑자기 혼자라는 느낌에 힘이 쭉 빠져 집으로 돌아오는 프리웨이 밤길이 칠흑 같았다. 젊었을 때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다니러 집을 나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격조했던 친구에게 전화해서 술 한잔 하자는 약속도 하고 역전다방 보조개가 예쁜 이양 얼굴도 보고 싶어지고, 하여튼 해방된 들뜬 기분에 신바람이 났었는데….   조여청사 모성설(朝如菁絲 暮成雪)이라, 젊었을 때의 검은 머리는 어느새 백설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변했으며, 좋은 세월 다 보내고 황천 문턱까지 왔다. 한창때는 아이들 키우고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가 잘난 남편(?) 덕에 편하게 잘사는 줄 알았다. 나만 가족 먹여 살리려고 동분서주 뼈 빠지게힘든 줄 알았다. 집에서 아이들 키워주고 살림 잘하는 아내가 있어 내가 밖에서 마음 편히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랜 세월 아내의 보이지 않는 내조의 큰 힘 덕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으니….   ‘마누라 신드롬’은 백약이 무효, 현대 의학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한 병인 듯하다. 나는 자금 한시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마누라 중독 증후군’ 환자가 되어 버렸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성경 말씀처럼 지금 마누라는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마누라 만세.   이산하 / 노워크독자 마당 마누라 증후군 마누라 중독 마누라 신드롬 마누라 만세

2023-02-26

[독자마당] 우중 산행

조세핀 트레일 입구. 낮게 내려앉은 잿빛 구름, 굵은 빗방울, 차가운 바람은 온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단체로 몰려오고 단체로 몰려간다. 그것도 엄청 바쁘게.   말없이 빠른 손놀림으로 우장을 챙긴다. 저 사람들은 이 궂은 날씨에도 왜 산행길을 나서는가. 누굴 위해 ,무었을 위해 이런 악천후에도 산을 찾을까?   30여 개의 판초 행렬이 장관이다. 들숨 날숨이 바쁘게 교차한다. 오고 가는 잡념 속에 천몇백년 전의 해초 스님을 생각해 본다. ‘스님께서는 뭐를 위해 그 험한 길을 걸으셨습니까? 무슨 신발을 신으시고, 방한 장비는 어떻게 꾸리시고, 그 험한 눈산을 넘으셨는지요. 생명을 걸고 넘으신 그 구도의 길을 필부의 산행길과 비교하는 무례함을 용서해 주소서’.   넓은 소방 도로엔 도랑물이 굽이치고 언덕에선 흙과 돌멩이가 심심찮게 흘러내린다. 3마일 지점 세들에 도착하니 기온은 급강하, 광풍엔 젊은이들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돌아서자. 광풍이 막춤을 추든, 장대비가 얼굴을 휘갈기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산길의 즐거움은 유년 시절의 하굣길을 생각나게 한다.   어느덧 출발지까지 되돌아 왔지만 점심 먹을 장소가 있어야지. 소방서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하늘 한번 쳐다보고 흘러가는 빗물 한 번 내려다보고….   이때 일행 중 조순 님이 소방서에 들어가 우리의 딱한 사정을 얘기했더니 망설임 없이 넓은 실내 사용을 허락했다. 의자는 물론 화장실도 청소까지 해주면서 사용하란다. 세상에 이런 일이!!! 궁즉통이요, 고진감래라 했던가.   소방서의 허락을 받고 만두도 끓이고 라면도 끓이고 누룽지도 끓이고 미역국도 끓이고…. 너무너무 고마워서 모임의 안경아 회장이 기부금을 전달하려 했지만 일언 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클리어 크릭 소방서(Clear creek fire station) 만세, 클로버 하이킹 클럽( Clover hiking club) 만세. 정 제이슨독자마당 우중 산행 우중 산행 소방서 처마 만세 클로버

2023-01-22

[분수대] 메시

 월드컵 트로피를 거머쥔 리오넬 메시(35.사진)의 ‘축구 황제’ 대관식은 수십 년에 걸친 인간드라마 속 절정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메시가 가진 천부적 재능만큼이나, 그가 극복해온 역경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는 11살 때 성장호르몬 결핍증 진단을 받았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철강노동자와 파트타임 청소부로 일하던 그의 부모에게 월 100달러가 넘는 호르몬 주사 치료비는 벅찼다. 메시가 뛰던 유소년팀도 치료비 부담에 난색을 보였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팀이 FC바르셀로나였다. 약값을 대는 조건으로 2000년 그를 영입했다. 당시 메시의 재능에 매료된 구단 스카우터가 즉석에서 냅킨에 서명해 계약서를 꾸몄다. ‘냅킨 계약서’의 도박은 성공이었다. 꾸준한 치료로 170㎝까지 자란 메시는 2004년 1군에 데뷔해 17년간 뛰며 말 그대로 전설이 됐다.   국가대표팀 경력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네 번의 월드컵과 코파아메리카에서 번번이 우승을 놓치자, 극성팬들은 메시가 아르헨티나보다 바르셀로나를 더 사랑한다고 비난했다. 메시의 외할아버지조차 2014년 월드컵 직후 방송에서 “스페인에서 보여주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2016년 코파아메리카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메시는 결국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전 국민의 광적인 만류에 2개월 만에 은퇴를 번복하긴 했지만,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그런 메시에게 이번 월드컵은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대표팀에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자신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운 ‘메시 키즈’가 적지 않았다. 사우디 전의 충격적 패배로 출발도 나빴다. 그러나 메시는 동료들을 하나로 묶어 아르헨티나를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월드컵 결승전이었다. 왜소한 몸에 질병을 앓던 가난한 소년에서 ‘축구의 신(神)’이 된 그를 향해 아르헨티나 국민은 “메시 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10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 40%에 이르는 빈곤율 등 경제난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메시가 준 선물이 우리 대표팀이 그랬던 것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이길 바란다. 한영익 / 한국 정치에디터분수대 메시 리오넬 메시 메시 키즈 메시 만세

2022-12-21

[이 아침에] 노인대학 조기 입학생

여고 졸업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에 다녀오신 선배님이 한숨을 푹 쉬며 말씀하신다.  “팬데믹 전만 해도 단체로 옷 맞춰 입고 라인댄스에 연극도 했었는데 양상이 달라졌어. 그 사이 하늘나라 간 친구들이 여럿, 휠체어 탄 친구가 셋, 지팡이를 짚은 친구가 둘이더라고” 하며 우울해 하신다. 나보다 13년 선배시니 팔순에 가까운 선배님들이긴 하다. 몇 년 전 3박4일로 남해 리조트 빌려 놀던 프로그램은 없어지고, 점심시간에 만나 밥만 먹고 조용히 헤어지는 것으로 바뀌어 큰돈 들여 한국 나간 것이 아깝더라 하신다. 100세 시대니 뭐니 해서 영원히 살 것 같아도 끝은 있기 마련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렇다. 페이스북 친구로 오래 알던 캐나다의 소설가 J선생님도 뉴욕의 시인 H선배도 와병 이후의 소식이 궁금해 가보니 부고가 올라와 있어 덜컹했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평안하다던데 왜 나는 두려운 것일까? 가족과의 이별, 사랑하던 모든 것과의 단절이 슬퍼서일 것이다.   지난 가을부터 두 곳의 학교에 등록하여 다니기 시작했다. 큰 수술 후 백수로 산 지 여러 해, 삶에 자극이 필요했다. 클래식 음악 동아리는 가보니 노년층이 대부분이라 약간 실망했다. 내 발로 노인학교에 찾아간 셈이니. 그래도 좋아하는 취미여서 열심히 다니는 중이다. 입을 크게 벌려 노래하면 안면근육도 풀려 노화 방지에 좋다니 믿어보기로 한다. 마음을 정화해주는 고전 음악 감상도 참 좋다. 오시는 분들이 모두 건강한 노년들이라 선한 영향을 받는 건전 모임이다.   다른 한 곳은 노인 성경 대학이다. ‘노인’이 붙어 주저했으나 65세 이상이면 등록을 권한다기에 가보니 가장 어린 학생이 되었다. 성경공부에 이은 한글 퍼즐 맞추기 시간과 색칠하기가 유치원 수준이라 자존심 상하긴 해도 어느덧 종강하게 되었다. 노인대학이라 성경공부도 죽음과 종말론,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이다. 그만큼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사실 매일 산다는 것은 죽음 쪽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니.   65세가 되면서 연금 나오고 메디케어 의료 혜택을 받게 되니 큰돈 번 듯 좋았다. 그러나 바로 호칭에 ‘시니어, 어르신, 노인’이 붙게 되어 갑자기 늙어버린 억울함도 있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 조기 입학한 셈 치니 그럭저럭 가을학기 졸업식을 맞았다. 졸업식에 대표로 나가 졸업장 대신 졸업 선물을 받았다. 코스트코의 대용량 식물성 식용유였다. 이런 실용적인 졸업 선물이라니. “노인대학 만세! 브라보 시니어 라이프!”. 종이 졸업장보다 훨씬 좋았다. 아직도 물질에 열광하는 나. 철들려면 아직 멀었다. 봄학기도 등록해야겠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노인대학 입학생 노인대학 조기 노인대학 만세 가을학기 졸업식

2022-11-29

[문장으로 읽는 책] 소설 만세

나는 소설을 한 사람의 삶에 들어가 그의 마음과 감정을 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알고 확인하는 것을 넘어 알게 된 것에 책임감을 갖고 그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를 믿고 변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소설에 매료되고 지금도 소설을 사랑하는 핵심적인 매력이 그것이다.   정용준 『소설 만세』   그러니까 소설이란 “단 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를 설명하고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소설가가 쓴 소설예찬, 혹은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에 대한 가이드북이다.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쓰는가? 내면에 무엇인가 가득한 사람이 소설을 쓴다. 다른 사람이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생각들을 하며 의문과 질문을 품고 어느 것 하나 사소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그렇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쓴다.”   소설가를 꿈꾼다면 일단 써야 한다. 재능은 두 번째 문제다. “소설을 쓰면 소설가가 된다. 더 나은 소설을 쓰면 더 나은 소설가가 되는 것뿐이다.” “많은 사람이 믿고 예상하는 것처럼 재능은 소설가가 되는 데 필수적인 요건도 아닐뿐더러 막상 소설을 써 보면 크게 도움도 안 된다. 물론 소설가에게 필요한 재능이 있긴 하다. … 계속 쓰려는 마음과 그 마음을 지켜내는 능력과 그 능력에 의지해 소설 쓰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여러 어려움과 실패의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계속 소설을 써 나가는 행동력, 그것이 바로 재능이다. 용기를 내는 작가가 되자. 용감하게 쓰자.” “소설을 쓸 때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소설 만세 소설 만세 소설 쓰기 행동력 그것

2022-08-22

한인사회 77주년 광복절 기념…"만세, 만세, 만세"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애틀랜타 한인사회 곳곳에서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개최됐다.   먼저, 한인 오케스트라 뉴애틀랜타필하모닉은 지난달 31일 개스사우스 시어터에서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한미 양국 국가는 물론 아리랑 등 다양한 곡들이 연주됐다.   애틀랜타 소재 한국학교들과 교회들도 광복절을 맞아 광복절 수업, 광복절 예배 시간을 가졌다.   섬기는학교는 지난 13일 개학식에서 광복절을 기념해 전교생이 만세 삼창을 외친 뒤 광복절에 대한 동영상을 보고 보충 수업을 통해 광복절의 역사를 배웠다. 냇가에 심은 나무 한국학교도 전교생이 태극기를 그리는 시간을 갖고 순국선열을 기리며 각반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쳐보기도 했다.   나눔선교교회는 지난 14일 광복절 77주년 기념 예배를 열고 국민 의례, 광복절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물론 만세 삼창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큰 행사는 단연 애틀랜타 한인회가 개최한 광복절 행사였다. 애틀랜타 한인회는 15일 오후 6시 한인회관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한인사회뿐 아니라 주류사회의 정치인들도 함께해 한국의 광복절을 축하했다. 박윤주 주애틀랜타 총영사는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를 대독했고, 김상민 교회협의회 회장이 순국선열을 기리며 기도를 했다.   광복절 노래는 물론 만세삼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등을 통해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이번 한인회의 광복절 행사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런 결정으로 한인사회의 의견수렴이 부족했단 비판이 나오자 한인회는 9월 중 공청회를 열고 제막식을 미루기로 했다. 박재우 기자만세 한인사회 광복절 기념사 만세삼창 순국선열 광복절 행사

2022-08-15

토론토에 울려퍼진 '만세 삼창'

 토론토 한인회(회장 김정희)가 주최한 제 103주년 삼일절 기념식이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온주의 방역 규제 완화 조치에 따라 대면 행사로 진행된 이번 기념식은 참석자 간 2미터 거리두기를 비롯해 실내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조치를 준수하며 진행됐다.   이번 삼일절 기념식은 박보흠씨가 사회를 맡았으며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와 함께 시작됐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이후 시작된 본 행사에서는 가장 먼저 김득환 주토론토총영사가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를 대독했다.   이어 토론토 한인회 김정희 회장의 제 103주년 삼일절 기념식 기념사, 이춘수 전임 회장의 독립선언문 낭독이 이어졌다.   김정희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3.1 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들에 대한 감사인사와 함께 현대를 살아가는 한인 동포들의 화합을 강조했다.   이어서 진행된 삼일절 노래 제창, 만세 삼창은 김정희 한인회장이 강조한 동포들의 화합이 가장 잘 표현된 순간이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한인 동포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삼일절 노래를 제창했으며, 김홍양 한카노인회 회장의 주도로 진행된 만세 삼창에서는 참석한 동포 모두가 큰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온타리오주의 정치권에서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제 103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축하했다.   온주의 조성준 노인 및 장애인 복지부 장관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삼일절 기념식 축하와 함께 애국지사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달했다.   한편, 이번 행사를 주최한 토론토 한인회는 "먼저 어려운 시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산화하신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다"며 "삼일절 기념식을 위하여 바쁘신 중에도 참석해 주신 동포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원홍 기자토론토 만세 토론토 한인회 만세 삼창 김정희 한인회장

2022-03-02

애틀랜타서도 "만세, 만세, 만세"

애틀랜타 한인회(회장 이홍기)는 지난 1일 노크로스에 위치한 한인회관에서 제103주년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홍기 한인회장을 비롯, 박윤주 애틀랜타 총영사, 최병일 미 동남부한인연합회 회장, 박형선 민주평통 수석 부회장, 김상민 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이 참석해 자주독립의 의미를 되새겼다.   김상민 한인교회 협의회 회장이 개회 기도를 했고 이홍기 회장, 최병일 회장, 박형선 부회장 등이 기념사를 전했다. 박윤주 총영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대독했다.   이홍기 회장은 "애틀랜타 한인들은 만세를 외친 선조들처럼 한마음으로 코로나19 극복하고 애틀랜타 한인회를 건강하게 재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효민 양 등 7명의 지역 한인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나상호 애틀랜타 한인 노인회 회장은 '만세 삼창'을 진행했다.   독립유공자 남현서 선생의 손녀 남미쉘씨(스와니 거주)는 남 선생의 소개 시간을 통해 3·1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남씨는 "남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 활동을 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돼 2년 옥살이 하셨고 62세 나이로 돌아가셨다"라며 "이번 문재인 대통령 재임시 4형제 모두가 건국훈장 받았다"고 소개했다.   특별공연 순서도 있었다. 소프라노 유니스 강씨가 '삼일절 노래'와 '8호 감방의 노래'를 불렀고, 애틀랜타 국악원의 대북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한편 한인회는 이날 참석자들에게 박선근 한미우호협회 회장이 기부한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 7장면'(이종호 지음·포북)' 도서를 나눠줬다. 박재우 기자만세 애틀랜타 애틀랜타 한인회 이홍기 애틀랜타 애틀랜타 한인들

2022-03-02

[특별 기고] 기미년 3·1절 회고

 1919년 1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였고 이에 일본인들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인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때였다.     바로 몇 개월 전이었던 1918년은 1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대전쟁이 끝난 해였다. 강대국 사이에선 크나큰 희생을 치른 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강대국이 약소민족을 침략하는 일은 끝내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이어 소련의 레닌도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지배당하는 약소민족들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등 식민지 중심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런 약속은 대부분 패전국에만 해당하였을 뿐 가혹한 식민지배하에 있던 조선 민족에겐 정말 꿈만 같던 소식이었다. 이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독립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별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던 그해 2월 놀라운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이 주동이 되어 적의 심장부인 동경 YMCA 회관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에도 적용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2·8 선언이다.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이광수,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 주동이 된 대학생을 체포했고 그중에 한 명이 2·8 독립선언서를 모자에 감춰 국내에 들여와 조선의 33인 민족 대표에게 전하게 되자 민족대표들은 타지의 어린 학생들마저 이렇게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데 우린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조하며, 서둘러 준비하던 평화 시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에 최남선 기초, 한용운이 추가한 독립선언서가 제작되니 이것이 기미 독립선언서가 되었다.     정해진 날은 고종의 장례식 날인 3월 3일이었으나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열다섯분은 장례식날 시위를 하는 것은 승하하신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며 반대했고 열여섯분 기독교 대표들은 3월 2일은 주일이라며 반대하여, 거사 일은 경비가 삼엄할 것 같은 장례식 날짜보다 이틀 이른 3월 1일 토요일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장소는 탑골공원으로 정하였으나,  막상 당일엔 무려 수십만 군중이 모였고 이렇게 많은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을 하면 일이 커지고 폭력시위가 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민족대표는 결국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하고 자진 투옥하게 된다.   한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답답하여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던 터에 한 학생이 팔각정에 뛰어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학생들은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나라를 잃은 슬픔과 핍박과 울분을 되새기며 가슴이 북받쳐 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기만 할 뿐이었다.   조선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억눌려온 민중의 열망이 한 번에 폭발했으며 수십만에 달하는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외쳤고 4월 초 무렵엔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하여 만주, 연해주, 미주 등 전 세계로 독립선언이 울려 퍼지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 민족이 이에 호응하여 수개월 동안 강한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표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평화로운 시위였지만 그들은 우리의 조상님들을 평화적으로 대해주지 않고 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횡포를 저질렀으며 말을 탄 헌병들은 칼로 찌르고 건물에 사람을 몰아넣고 불을 지르기도 하고 끔찍한 참수를 하기도 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 거대한 독립운동은 지도부가 없었음에도 국민 각자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참여하고 연대하여 이루어졌다는데 온 국민의 단결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독립운동가들은 국외에서 외교적 활동과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감과 동시에 국내에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3·1 운동을 계승해 한반도 내외의 항일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정신적 뿌리가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2022년 3월 1일. 103번째의 감회가 깊게만 느껴지며, 목이 터져라 외쳤던 함성을 잊지 않고, 2019년 100주년에 후손 대표로 광화문 앞에서 10만여 시민 앞에서 애국가를 불렀던 감성을 되새기며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처럼‘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 대한민국이 온 세계에 문화강국이 돼 가는 과정을 몸소 느끼며 체험해가는 한민족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유진희 / 광복회 회장특별 기고 기미년 회고 기미 독립선언서 조선독립 만세 조선 유학생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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