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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 샌드라 오 “언젠가 아시안 ‘블랙 팬서’도 나올 것”

최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한국계 여성들의 열정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배우 샌드라 오(52·오미주)는 할리우드에서 인종편견을 깬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2005년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2018년 ‘킬링이브’로 골든글로브 TV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제25회 배우 조합상 여배우상 등을 휩쓸었다. 특히 킬링이브에서 영국 MI5 요원으로 출연한 그는 아시아계라는 인종성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며 명품 연기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민자인 그에게 한인이라는 것은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다. 그는 영국 잡지 ‘더 젠틀 우먼’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전형적인 한국 가정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자식들이 높은 학위를 따고 편하게 살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은 모두 석사 학위가 있다고 한다. 그는 우연히 뮤지컬을 보고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고등학생 때부터 연기를 시작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95년 샌드라 오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처음에 그는 아주 작은 배역 혹은 존재감이 없는 배역에 캐스팅됐다. 당시 업계에서 만연했던 백인 중심주의, 성차별, 연령 우대 등을 이겨내고 커리어를 이어간 결과 당당히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주연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샌드라 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다준 작품은 2005년 방송한 ‘그레이 아나토미’다. 샌드라 오는 외과 의사 역인 크리스티나 양을 연기해 2005년 골든글로브와 배우조합상에서 여우조연상과 여배우상, 2007년에는 배우조합상 앙상블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2018년 BBC 아메리카의 TV 드라마 ‘킬링이브’의 주연 영국 MI5 요원으로 출연하게 됐다. 그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스스로 주연을 맡을 거라 상상할 수 없었다”며 “나도 모르게 사회에 그렇게 교육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2021년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에서 명문 대학 유색인종 여성 최초의 학과장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유색인종, 여성으로 사는 삶이 투영되는 역할이다.   샌드라 오는 유명인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아태계를 지지하는 비영리단체 CAPE(Coalition of Asian Pacific in Entertainment)에서 진행한 ‘나는 샌드라 오(#IAm Sandra Oh)’라는 인터뷰에서 “내가 처음 배우라는 길에 들어섰을 때는 일이 없었다. 인종차별을 알릴 만한 캠페인도 없었으며 인터뷰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고 그 변화가 매우 느리더라도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 언젠가 아시아계 ‘블랙팬서’가 생기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올 때까지 난 매일 연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할리우드는 전통적으로 백인 사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아직도 감독, 작가, 배우 등 영화 제작의 다양한 분야에서 백인의 비율이 월등하다. UCLA가 최근 발표한 ‘할리우드 다양성 보고서’에 따르면 동양인은 2022년 개봉된 영화의 주요 배역 중 2.3%, 전체 역할 중 6.5%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또 지난해 개봉한 영화 중 동양인 영화감독의 비율은 5.6%, 작가는 4.5%에 불과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부족한 다양성에 대한 여러 논쟁이 오가고 있지만, 아직도 할리우드의 영상물 제작 과정에서 동양인의 존재가 묻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샌드라 오는 LA 폭동 사태를 연상하게 하는 내용의 독립영화에 출연하거나 ‘블랙 라이브스매터(BLM)’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소수계를 위한 영향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 공인인 배우로서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지난 2021년 3월 20일에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아시아계 혐오 범죄 반대 집회에서 연설해 인종차별 금지를 위해서 힘썼다. 또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한국어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한국인으로서의 그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하은 기자아나토미 그레이 그레이 아나토미 배우조합상 앙상블상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2023-09-21

[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지구 끝 청자빛 빙하의 유혹

 '지구 끝'이라 생각하면 너무 머나먼 땅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도 있듯 막상 가보면 그리 멀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남미 대륙 아랫도리, 역삼각형 모양의 남위 40도 이남 지역을 통칭 파타고니아라고 부른다. 넓이는 한반도의 5배. 안데스산맥을 기점으로 서편 태평양 쪽은 칠레, 동편 대서양 쪽은 아르헨티나 땅이다.   그중 칠레가 자랑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은 태고의 순수한 자연이 마지막 희망처럼 남아 있는 곳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50 곳' 중 최상위에 랭크돼 있다.   만년설로 덮여 있어 새하얀 드레스를 걸쳐 입은 듯한 토레스 델 파이네는 화강암으로 이뤄진 3개의 거대한 봉우리다. 테우엘체(Tehuelche) 족의 언어로는 '푸른 탑' '푸른 뿔'을 뜻한다.   주요 볼거리는 파이네산의 3형제봉과 살토 그란데 폭포, 그레이 빙하 호수의 떠다니는 빙하들 그리고 밀로돈 동굴 등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은 암봉들 사이로 빙하가 녹아 냇물로 흐르다가 폭포가 되어 힘차게 떨어지고, 크고 작은 영롱한 호수들이 만들어진다. 한마디로 별천지가 따로 없다.     이곳은 유네스코 생물 다양성 보존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낙타와 사슴을 섞어놓은 듯한 과나코를 비롯해 퓨마, 안데스 콘 도르, 얀두, 플라멩코, 사슴 등 여러 야생동물들이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레이 호수는 말 그대로 회색빛 호수다. 그레이 빙하가 녹아 형성된 호수로 석회질이 많아 물 색깔이 회색으로 보인다. 호수 뒤편으로는 설산이 굽이치고 흰 구름조차 산봉우리에 무심히 내려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비경을 감상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레이 호수에서는 빙하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호수로 무너져내리는 절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빙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입이 쩍 벌어진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두루마기 삼아 유빙이 코앞으로 둥둥 떠내려간다. 태고의 빙하는 꼭 고려청자처럼 오묘한 빛깔이다. 여행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빙하를 직접 만져보기도 하고 으깨서 맛을 보기도 한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또한 전 세계의 트래커들을 불러 모으는 세계 3대 트래킹 스팟으로도 유명하다. 가능하다면 가장 인기 있는 4박 5일짜리 W 트랙에도 도전해 볼 만하다. 산봉우리 사이로 톱날처럼 솟아있는 웅장한 산줄기를 바라보고 청량한 공기를 깊이 마셔보는 것만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머금은 페오에 호수까지 트래킹을 마친다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이곳을 보지 않고 지구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라." 박평식 / US아주투어 대표·동아대 겸임교수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청자빛 지구 청자빛 빙하 그레이 빙하 그레이 호수

2023-08-24

염색 언제까지 해야 하나…'그레이 헤어' 어울릴 때까지 쭈~욱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신체 변화 중 하나가 머리카락에서 흰색이 나오는 것이다. 시니어로 비교적 젊은 50대만 되도70~80대에 버금갈 만큼 흰머리가 나온다. 현대 문명이 발달하면서 40세만 돼도 백발 청년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염색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데 최근 한국에서 샴푸로 검은색 으로 염색하는 제품이 나와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이전에도 비슷한 천연 제품이 있었지만 이번 만큼은 훨씬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제까지 염색을 해야 하는 지 고민해봤다.     밸리에 거주하는 에드워드 윤씨는 수년 전 가을 늦둥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학부모 행사에 갔다가 매우 놀랐다.     그 곳에서 만난 학부모 중에서 자신이 가장 연장자였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윤씨는 평소 흰머리가 있어도 굳이 염색을 하지 않았기에 흰색 머리가 없는 다른 학부모들을 보고 늙은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예전 큰 아이때 학부모 행사에서 만났던 나이든 학부모들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는 "부모들이 바쁜지 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많이 왔다고 생각했다"면서 "이제 생각해보니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늦둥이를 위해 학교를 방문한 부모였을 수 있다"고 말했다. 늦은 출산일 경우 윤씨같이 초등생 자녀를 가진 50대 부모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윤씨는 그래서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는 것을 심각히 고민했다고 전한다. 얼굴에 주름도 많아지는데 굳이 머리 카락만 생생한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자신을 보는 사람도 배려(?)해 줘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러면 흰 머리는 왜 나올까. 머리카락 색깔은 피부색과 마찬가지로 멜라닌의 색소량에 따라 결정된다. 흰머리는 멜라닌 세포의 이상으로 나타난다. 모발에 검은 색소를 공급하지 않아 흰머리가 자란다.     ▶염색과정   염색약은 머리카락 큐티클의 구조를 활용해 모발에 작용한다. 염색은 2가지 약품을 섞어서 머리카락에 바른다. 첫째는 암모니아에 원하는 색상의 염료를 혼합한 것이고 둘째는  과산화수소다. 암모니아는 머리카락을 부풀게 해 비늘같이 생긴 머리카락의 큐티클 층을 들뜨게 한다. 염료와 과산화수소가 속으로 잘 스며들게 하는 준비 과정이다. 과산화수소는 머리카락 속의 멜라닌 색소를 파괴해 머리카락을 하얗게 탈색하는 역할을 한다.   머리 카락은 보통 한 달에 1cm 정도씩 자란다. 뿌리 쪽부터 새로 자라 나오는 모발과 이미 염색한 모발 색깔이 차이 나더라도 너무 자주하면 좋지 않다. 두피 건강을 생각하면 최소 2~3개월 기간을 두고 염색하는 게 좋다. 부분 염색을 할 때는 새로 자라난 부분만 5주 정도 후에 하는 것이 적당하다.   주의할 것은 색깔이 잘 나오게 하려고 권장 시간보다 오래 기다리는 경우가 있는데 권장 시간을 넘기면 머릿결이 많이 손상되므로 보통 15~30분이 좋다.   ▶염색 위험한가   염색은 강한 화학물질로 머리카락에 색깔을 입히는 과정이다.  특히 다음 염색 때까지 색깔이  빠지지 않을만큼 강해야 한다. 그래서 부작용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두피 손상 화상 탈모증 등인데 이로 인해 겪는 피해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염색하는 데 사용하는 염모제의 주요 성분은 파라페닐아민 디아미노토루엔스 디아미노아이솔 등 여러 화학 물질로 피부에 독성 또는 앨러지 반응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런 성분이 든 염색약을 사용할 경우 두피 화상 또는 모발 손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염색을 하면 단순히 모발이 손상되는 정도의 피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시니어의 경우 젊은 사람들과 달리 탈색과정이 없어 그 정도가 덜하지만 어째든 염색 과정에서 암모니아나 과산화수소 뿐 아니라 때로는 과황산암모늄 같은 피부에 자극성이 강한 화학 물질이 사용된다. 더 안좋은 것은 미용실에서 시간에 쫓겨 화학 반응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전열 기구를 사용하고 있다.이때 사용되는 전열캡의 고열로 인해 환경 호르몬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유해 화학 물질이 발생하고 이를 호흡기를 통해 폐로 흡입되거나 두피 조직을 통해 머리로 흡수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머리 염색 전후에 혈액을 채취해서 세포핵 DNA가 손상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변이를 관찰했는데 피부로 흡수돼 직.간접적으로 DNA를 손상시킨다는 결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염색은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닌 한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사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혁신적인(?)인 염색약 출현   화학물질 투성이인 기존의 염색약에 한국의 스타트업 회사가 M샴푸를 내놨다.이들은 기존 염색약이 사용하는  파라페닐렌디아민(PPD)대신 식물성 물질인 폴리페놀이 들어간다. 폴리페놀은 공기와 만나면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갈변)을 일으킨다. 바나나 사과 등 식물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M샴푸의 핵심 물질인 THB(트리하이드록시벤젠)는 물에 녹지 않는 폴리페놀을 물에 녹여 샴푸에 녹아들 수 있게 해준다. THB 자체도 공기와 닿으면 색이 변하는 성질이 있다. 두 성분이 모발에 달라붙게 되고 샴푸 세정 후 공기에 노출되면 염색 효과를 낸다. THB와 폴리페놀이 동시에 색감을 내는 원리다.     M샴푸는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천연 물질을 활용해서 굳이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머리를 감기만 해도 바로 염색 효과를 낼 수 있는 혁신적인 샴푸용 염색약이다.     ▶시니어 염색   이제 코로나로 인해서 미용실이 아닌 집에서 염색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또한 이렇게 샴푸형 염색약이 출현하는 바람에 흰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 됐다. 반면 염색하지 않는 ''그레이 헤어''는 세계적 트랜드이기도 하다.     일본의 한 작가가 최근 흰머리 염색을 그만뒀다. 코로나를 계기로 재택과 비대면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레이 헤어를 시도했다. 그는 가족력인지 멜라닌 생성 조절 장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찍부터 새치가 생겼다고 전한다. 그는 "처음에는 주위에서 흰머리가 멋지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뽑기 어려운 수로 늘어나면서부터 염색으로 흰머리를 감췄다"고 말했다. 그는 "염색을 했던 것이 딱딱한 조직 문화 때문"이라며 "고위 임원들에게 노화의 상징 자기 관리의 부실로 여겨지는 흰머리를 보인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원인을 꼽았다.   그런데 반전은 이제부터다. 이 작가는 염색을 그만두고 3개월이 지난 다음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 1년 전부터 빠른 속도로 늘어났던 탈모가 멈추고 그 자리에 새로 머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효과를 자랑하는 발모제 육모제를 써 보기도 했는데 큰 효과가 없었기에 매우 놀랐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는 그레이 헤어가 50대 남성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 이들은 염색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에드워드 윤씨는 최근 유행하는 M샴푸를 이용해 염색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60세가 안됐다는 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흰색 머리보다는 검은 머리가 인물이 더 나아 보인다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들이 시집.장가가는 나이가 된다면 아무리 샴푸로 겸하는 염색이라도 중단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염색은 개인 취향  자기 관리와 관련돼 있어 복잡한 문제다. 정답이 없는 문제다. 장병희 기자그레이 염색 염색 여부 부분 염색 다음 염색

2022-07-24

[삶의 한 가운데서] 2022년 첫날

새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후다닥 집밖으로 뛰어나가 심호흡을 하고 “굳 모닝 2022!” 외쳤다. 구름이 하늘을 꽉 잡고 있어서 떠오르는 해는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맑은 새벽의 기운이 상큼해서 좋았다. 일단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 첫날과 인사했으니 올해 일어날 멋지고 근사한 일들을 맞을 마음 준비는 됐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일찍 일어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사위가 놀랐던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새해인사 했어” 하고 내 오랜 습관을 말하니 사위가 깔깔 웃었다. 자기는 아이와 벌써 밖에 나가서 “새해인사” 하고 들어왔다면서 앞으로 자신도 그렇게 할거라 했다. 영국인 둘째 사위는 나와 정서 코드가 잘 맞아서 딸보다 더 가깝다고 느낄 적이 있는데 이런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남편과 딸은 잊고 사위와 나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맛있는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자정에 먹지 못한 메밀소바를 점심으로 준비했다. 한국과 일본의 새해 관습은 이렇게 우리집에서 지켜진다. 저녁은 사위가 준비한 유럽식 콜드 컷인 하몽, 프로슈토와 코파에 다양한 치즈를 먹었다. 다문화 가족이 즐기는 여러 음식을 나는 비빔밥처럼 좋아한다. 올해는 내가 연말에 걸린 감기로 휘청거려서 였던지 코믹한 사건을 일으켜서 모두에게 웃음거리를 선사했다. 점심때 소바 소스에 와사비를 풀고 무 갈은 것도 잘 섞고 뒷밭에서 자라는 쪽파를 다져서 올린 디핑 소스를 각자 앞에 놓았다.      메밀국수 맛을 처음 보는 아이가 긴 국수를 입안에 넣었다 끄집어내는 것을 보는데 먼저 점심을 먹기 시작한 남편이 “엥?” 하고 젓가락을 놓았다. 마침 국수를 입안에 넣으려던 딸과 사위도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 나는 정성껏 준비한 음식에 초를 치는 남편을 곱지않은 눈길로 봤다. 소스 맛을 보라는 남편의 불평에 따라 내 앞의 소스를 맛보고 나도 깜짝 놀라 부엌으로 갔다. 카운트 위에 있는 소스 병은 소바 소스가 아니라 폰주 소스였다. 살면서 이런 실수도 하는구나 하고 한숨을 쉬는데 딸에게 “네 엄마 이제 늙었어” 하는 남편의 투덜거림이 마치 “앞으로 네가 부엌을 맡아라” 로 들려서 웃음이 나왔다.       매년 새해마다 하던 새로운 각오나 계획은 몇 년 전부터 포기했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사랑하며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며 살기로 작정하니 정신적인 부담이 없고 마음도 자유로워서 좋다. 그런데 연말에 덴버에 사는 대학 동기가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나온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물은 것이 아직도 내 의식을 잡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하던 질문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는 일 이라고 답을 했더니 친구가 100점을 줬다. 가만히 생각하니 톨스토이는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친구에게 정답을 물었다. 첫번째 나의 답은 맞았고 두번째 질문,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 그리고 세번째 질문인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선하고, 사랑하는 일’ 이 정답이었다. 나이 70이 되어가도 아직 지혜가 한참 부족한 나의 어리석음을 마음이 깊은 옛 친구는 곱게 받아줬다.      솔직히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그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톨스토이의 철학은 만고의 진리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와 필연으로 마주섰다. 그 사람이 누구라도 싫던좋던 그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는 알고 있지만 복잡한 감정의 편파들이 양파처럼 겹겹이 마음의 문을 가둬두고 있어서 행동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연극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얼굴 표정을 가린 관객들 앞에서 열연하던 배우들처럼 나도 내 편견의 테두리를 묵살하고 무조건 상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삶의 한 가운데서 그레이 수필가 소바 소스 디핑 소스 점심때 소바

2022-01-13

[삶의 한 가운데서] 시, 삶의 동반자

마른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처연한 모습을 외면하려고 해도 곳곳에 흩어져 몸부림치는 가랑잎들이 내 그림자 되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집안에서도 우수수 떨어져 눈에 밟히는 또 다른 낙엽을 본다. 소리없이 빠져서 곳곳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이 마치 뜰에 흩어진 낙엽처럼 힘이 없다.    겨울이 지나면 마른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지만 내 머리카락은 아니다. 겨울이 오는 것이 겁난다. 가끔 예전에 머리숱이 많아 동여맸던 기억이 희미해서 잠자다 깨어나 어둠속에서 허덕인다. 그렇게 내일이 두려워서 숨죽이고 새벽을 기다리는 시간에 나와 함께 해주는 좋은 친구가 있다. 동서고금의 많은 시들이다.     시를 앞세우고 밖의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온 시기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때였다. 시세계에 눈이 뜨인 사춘기시절을 떠올리면 기쁨과 슬픔의 어떤 순간에도 언어들의 아리아가 줬던 흥분이 느껴진다. 멋진 사실은 어떤 상황에도 내 마음을 움직인 시가 있었다. 혼자 시구절을 크게 읊고 또 읊으면 메아리되어 돌아오는 동류감이 있다. 그당시 좋은 시를 카드에 적어서 책상서랍에 차곡차곡 쌓아 뒀다가 생각나면 골라 읽었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카드들과 헤어졌다.   이민생활 힘들 적에 버틸 힘을 준 것도 시였다. 특히 열심히 되새김을 많이 했던 시구절은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였다. 고향이 그리울 적에는 박목월의 ‘나그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삶에 갈등이 생겼을 적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나를 달랬다. 그리고 혼란에 빠졌을 적에 우습지만 내가 기댄 것은 남편의 등이 아니라 이해인 수녀님의 시 ‘풀꽃의 노래’ 였다. 그렇게 살면서 계절마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내 속에 흐르던 좋은 시 구절들로 위로를 받고 지혜를 얻었다.    한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 ‘길가메쉬’에 집중했었고 또 언젠가는 중국의 두보나 일본의 하이쿠에 반한 적도 있었다. 칼 샌드버그의 시를 읽으면 마치 이웃을 걷는듯 편안했던 시절은 미국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서다.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시에 반했다가 셰이머스 히니가 안내한 아름다운 자연에 푹 빠져서 아일랜드를 사랑한다. 내가 선호하는 시는 엄격한 절제를 중시한 것보다 구름에 달 가듯이 자유로운 스타일이다. 어느 순간 내 가슴에 확 안긴 사람과 자연을 화합시킨 구절들이 긴 여운을 남겼다.    군대생활 힘겨웠던 시절 퇴근 후 저녁에 부대 안에서 운영하던 Central Texas College에서 14세기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공부했다. 고어에 버벅거리다 강의실을 나서며 하늘의 별을 많이 봤다. 많은 주인공들이 풀어놓은 스토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별처럼 잡히지 않아 원망스러웠다. 밤늦게 집에 오면 나를 기다리다 잠든 어린 딸들에게 미안했다. 그때 캔터베리 이야기를 공부하며 내가 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체험들이 나를 지켜준 에너지원이었고 시가 내포한 많은 의미는 내 삶은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밝혀줬다.     얼마전부터 몽고메리에 사는 한인 여인 몇 사람과 정기적으로 만나 수다 모임을 갖는다. 매번 다른 이슈를 가지고 만나서 각자의 의견을 나누니 주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깨어있는 의식되어 좋다. 생활에 활력을 준다. 마침 지난주의 주제가 ‘가을의 시’ 였다. 사랑, 외로움과 그리움이 감상적인 아름다운 시를 통해서 여인들의 마음을 잡았다. 모국을 떠난 시기가 달라서 감성을 함께 공유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시들이 옛추억을 불러와서 포근한 시간을 가졌다. 모두의 삶에 시가 있어 좋았다.     내 집의 곳곳에 붙어있는 시 구절들을 오가며 슬쩍 한 단어만 봐도 그 다음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서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눈물을 찔끔거리게 하는 구절이나 가슴에 기쁨을 꽉 채워주는 구절도 좋지만 평안을 주는 구절이 더 좋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만든 추억이 내 마음을 좌지우지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속에 가득 찬 별처럼 반짝이고 영롱한 시들은 내 삶의 동반자다.      요즈음 데이비드 로마노의 시 ‘나 없이 내일이 시작된다면’ 읽으며 깊어가는 가을을 편안하게 마주본다. 이제는 인생의 겨울이 도도새가 아님을 분명히 안다.        영 그레이 / 수필가삶의 한 가운데서 동반자 그레이 아일랜드 시인 캔터베리 이야기 시인 제프리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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