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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가운데서] 시, 삶의 동반자

영 그레이 / 수필가

마른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처연한 모습을 외면하려고 해도 곳곳에 흩어져 몸부림치는 가랑잎들이 내 그림자 되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집안에서도 우수수 떨어져 눈에 밟히는 또 다른 낙엽을 본다. 소리없이 빠져서 곳곳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이 마치 뜰에 흩어진 낙엽처럼 힘이 없다. 
 
겨울이 지나면 마른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지만 내 머리카락은 아니다. 겨울이 오는 것이 겁난다. 가끔 예전에 머리숱이 많아 동여맸던 기억이 희미해서 잠자다 깨어나 어둠속에서 허덕인다. 그렇게 내일이 두려워서 숨죽이고 새벽을 기다리는 시간에 나와 함께 해주는 좋은 친구가 있다. 동서고금의 많은 시들이다.  
 
시를 앞세우고 밖의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온 시기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때였다. 시세계에 눈이 뜨인 사춘기시절을 떠올리면 기쁨과 슬픔의 어떤 순간에도 언어들의 아리아가 줬던 흥분이 느껴진다. 멋진 사실은 어떤 상황에도 내 마음을 움직인 시가 있었다. 혼자 시구절을 크게 읊고 또 읊으면 메아리되어 돌아오는 동류감이 있다. 그당시 좋은 시를 카드에 적어서 책상서랍에 차곡차곡 쌓아 뒀다가 생각나면 골라 읽었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카드들과 헤어졌다.
 
이민생활 힘들 적에 버틸 힘을 준 것도 시였다. 특히 열심히 되새김을 많이 했던 시구절은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였다. 고향이 그리울 적에는 박목월의 ‘나그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삶에 갈등이 생겼을 적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나를 달랬다. 그리고 혼란에 빠졌을 적에 우습지만 내가 기댄 것은 남편의 등이 아니라 이해인 수녀님의 시 ‘풀꽃의 노래’ 였다. 그렇게 살면서 계절마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내 속에 흐르던 좋은 시 구절들로 위로를 받고 지혜를 얻었다. 
 


한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 ‘길가메쉬’에 집중했었고 또 언젠가는 중국의 두보나 일본의 하이쿠에 반한 적도 있었다. 칼 샌드버그의 시를 읽으면 마치 이웃을 걷는듯 편안했던 시절은 미국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서다.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시에 반했다가 셰이머스 히니가 안내한 아름다운 자연에 푹 빠져서 아일랜드를 사랑한다. 내가 선호하는 시는 엄격한 절제를 중시한 것보다 구름에 달 가듯이 자유로운 스타일이다. 어느 순간 내 가슴에 확 안긴 사람과 자연을 화합시킨 구절들이 긴 여운을 남겼다. 
 
군대생활 힘겨웠던 시절 퇴근 후 저녁에 부대 안에서 운영하던 Central Texas College에서 14세기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공부했다. 고어에 버벅거리다 강의실을 나서며 하늘의 별을 많이 봤다. 많은 주인공들이 풀어놓은 스토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별처럼 잡히지 않아 원망스러웠다. 밤늦게 집에 오면 나를 기다리다 잠든 어린 딸들에게 미안했다. 그때 캔터베리 이야기를 공부하며 내가 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체험들이 나를 지켜준 에너지원이었고 시가 내포한 많은 의미는 내 삶은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밝혀줬다.  
 
얼마전부터 몽고메리에 사는 한인 여인 몇 사람과 정기적으로 만나 수다 모임을 갖는다. 매번 다른 이슈를 가지고 만나서 각자의 의견을 나누니 주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깨어있는 의식되어 좋다. 생활에 활력을 준다. 마침 지난주의 주제가 ‘가을의 시’ 였다. 사랑, 외로움과 그리움이 감상적인 아름다운 시를 통해서 여인들의 마음을 잡았다. 모국을 떠난 시기가 달라서 감성을 함께 공유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시들이 옛추억을 불러와서 포근한 시간을 가졌다. 모두의 삶에 시가 있어 좋았다.  
 
내 집의 곳곳에 붙어있는 시 구절들을 오가며 슬쩍 한 단어만 봐도 그 다음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서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눈물을 찔끔거리게 하는 구절이나 가슴에 기쁨을 꽉 채워주는 구절도 좋지만 평안을 주는 구절이 더 좋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만든 추억이 내 마음을 좌지우지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속에 가득 찬 별처럼 반짝이고 영롱한 시들은 내 삶의 동반자다.   
 
요즈음 데이비드 로마노의 시 ‘나 없이 내일이 시작된다면’ 읽으며 깊어가는 가을을 편안하게 마주본다. 이제는 인생의 겨울이 도도새가 아님을 분명히 안다.   
 
 

영 그레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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