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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즈 고향 고등학교 신축 이전, 8월 개교

라이즈 고향 고등학교가 LA한인타운에서 새롭게 문을 연다.     TK~12학년 교육을 제공하는 한인타운의 유일한 공립 차터 스쿨인 라이즈 고향 학교는 2024~25학년도 새 학기부터 새롭게 지은 건물에 고등학교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버몬트 애비뉴와 1가에 위치할 라이즈 고향 고등학교(3500 W. 1st Street LA)는 오는 8월부터 공식적으로 개교할 계획이다.     그에 앞서 오는 5월에는 신규 등록 가족을 위한 투어를 진행한다고 학교 측은 밝혔다.   새롭게 오픈하는 고등학교에는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부대시설로 농구·배구 코트와 모든 트레이닝 운동기구가 완비된 웨이트룸이 갖춰져 있다.     총 23개의 최신식 교실로 구성되어있고 모든 교실은 자연 채광과 전망을 갖추고 있다.     학부모 및 커뮤니티센터도 준비되어 있으며 야외 수업이 가능한 공간을 갖추고 있어 실내외에서 학업과 창의적인 활동, 그리고 다양한 스포츠 분야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라이즈 고향 학교는 지난 2012년 중학교 오픈을 시작으로 2016년에 고등학교, 2019년에 초등학교가 차례로 오픈했다.     라이즈 고향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라파예트 공원 인근(600 S. La Fayette Park Place, LA)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라이즈 고향 공립 차터 스쿨은 2024~25학년도 TK~12학년까지 등록을 받고 있다. 자세한 등록 문의는 전화(323-954-9957, 한인 담당자 ext 1020)로 할 수 있다.     한편, 학교 측은 오는 4월 3일(수) 오전 8시 30분~10시 30분까지 커뮤니티 리더 대상 학교 설명회인 ‘커뮤니티 브렉퍼스트(Community Breakfast)’를 진행한다. 행사에서는 아침 식사가 제공되며 사전 예약(rkcommunitybreakfast.rsvpify.com/?securityToken=PhlUVdh7fHWK0yRxXj481q2Om0MmlFFD)이 필요하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고등학교 라이즈 라이즈 고향 고등학교 2019년 현재 라이즈

2024-03-28

[우리말 바루기] 나의 살던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가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고향의 봄’이다. 국민 동요라 할 만큼 많이 불리는 노래다.   그러나 노래 가운데 ‘나의 살던 고향’은 ‘의’를 잘못 사용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가 살던 고향’이 정상적인 우리말 어법이다.   우리말에선 원래 조사 ‘~의’가 흔하게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가리키는 ‘나, 너, 저’를 예로 들면 조사 ‘ㅣ’가 붙어 ‘내, 네, 제’로만 사용됐다. ‘내 마음’ ‘네 물건’ ‘제 자랑’ 등 현재도 그대로 쓰고 있는 형태다.   ‘~의’가 붙은 ‘나의, 너의, 저의’ 형태는 조선 후기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 개화기에는 흔히 쓰이게 됐다고 한다. 이는 일본어에서 여러 가지 문장성분으로 두루 쓰이는 조사 ‘노(の)’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선 ‘~의’를 남용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AI의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AI가 변화하는 과정을~”로 해야 한다.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스스로 한 약속을~”로 고쳐야 한다.   “소득의 향상과 식생활의 서구화로 쌀의 소비량이 부쩍 줄었다”는 ‘명사+의(の)+명사’로 이뤄진 일본어식 표현으로 ‘의’가 전혀 필요 없다. “소득 향상과 식생활 서구화로 쌀 소비량이 부쩍 줄었다”가 훨씬 간결하고 깔끔하다.우리말 바루기 고향 식생활 서구화 소득 향상 복숭아꽃 살구꽃

2024-03-26

[문예마당] 내 고향은 어디인가

한국 체류 중이던 지난해 10월 미국에 사는 5명의 친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중 3명은 여행사 단체여행 상품으로 왔다가 개인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모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인데 하필 그때 발가락을 다쳐 뉴욕에서 온 친구 한 명만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미국서 함께 살다 한국에서 만나면 더 반갑고 새로운 느낌이었을 텐데 전화 통화만 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기도 했다.         LA로 돌아온 후 그중 한 명을 만났더니 “한국은 타향이니 이제 고향인 LA에서 만나야죠”라고 말한다. 그 말에서 ‘옛 친지가 그리워 한국을 찾았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고 낯선 도시만 헤매다 왔다’는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 졸업 직후 유학을 왔거나 유학생 배우자를 따라왔으니 반세기 훌쩍 넘게 고국을 떠나 살았다. 한국에서 산 날보다 미국에서 지낸 세월이 훨씬 더 길다. 이젠 미국이 제2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아련한 향수에 잊지 않고 고국을 찾는 분들이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자주 한국을 찾는다. 그런데도 친지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으면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만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불쑥 나타나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것은 무리다. 앞으로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지에게만 귀국 소식을 알려야겠다.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 이주를 고려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민 와 고생하다가 애들도 다 커서 독립했고, 형제자매가 있는 한국서 살고 싶다”, “늘 마음속으론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한국적인 문화가 더 친숙한 것 같아요” 등 이유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고향이 그립기 때문일 게다.  대체 고향이 뭐길래!   오랜 세월 미국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소위 ‘미국물’이 든다. 오랜만에 돌아가면 한국은 말이 잘 통하는 또 다른 외국일 수 있다. 달라진 한국 문화나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또 미국생활을 청산해서 한국에 들어와 살기 힘들 정도로 한국의 주택가격과 물가가 올랐다. 어쨌든 목표가 뚜렷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지인 중에는 “미국과 한국, 어디가 더 살기 좋아요?”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이 물음에 나는 “한국에 가면 한국이 좋고, 미국에 오면 미국이 좋다”고 답한다. 공연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남편은 한국에 살고, 애들은 미국에 살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미국과 한국이 늘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데 그러면 내 고향은 어디인가?       타국 땅에 수십 년을 살아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내 나라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금 한국에 가도 모두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 기억 속의 옛 모습은 다 사라졌다. 마음에 품고 있는 나라보다는 세월이 갈수록 내 몸이 머무는 땅이 우리나라가 된다.       한국은 ‘우리나라’라는 의미보다는 고향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갈 땅이 미국이라면, 한국은 나의 고향이다. 고향인 한국이 잘되고, 살고 있는 나라도 잘되는 것, 그것이 이민자가 품고 있는 이중적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LA에 ‘hi-5’ 라는 5명의 친구 모임이 있다.  전부터 인연이 있거나 새로 알게 된 친구들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직도 LA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지만 한번 만나면 몇 시간이고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친구들이다.     미국에 ‘hi-5’가 있다면 한국에는 역시 5명의 친구 모임인 ‘오색회’가 있다. 학연으로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내가 외국에 나가 사는 동안 그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듯해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중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빨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내가 많이 아팠고 서로 시간을 맞추느라고 이제야 만나자고 연락한다.”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르 봄눈 녹듯 사라졌다.  5명이 모두 모였다. 한 명은 침대에서 떨어졌다며 가슴 둘레에 거북이 등 같은 보장구를 하고 나왔고, 또 한 명은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귀가 잘 안 들려 큰 소리로 말해야만 소통이 되는 친구도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으며 보장구를 착용한 친구에게 “야, 너 검투사 같다”며 웃어버렸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를 만나려고 나와 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워 귀갓길 전철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양 속담에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된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고려 말 길재는 500년 도읍지 개경을 둘러보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라고 탄식했다. 오늘날 한국은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 변해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옛 친구들은 여전하다. ‘산천은 간데없고 인걸은 의구하네’라는 생각을 한다. 오랜 친구들이 나를 변함없이 반겨 주는 곳, 그곳이 내게는 고향이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고향 고향인 한국 친지가 한국 한국 문화

2024-02-08

한인사회는 내 고향…안전·정의 위해 헌신

“이민온 부모님이 한인타운에서 겪은 사건 탓에 법조인이 됐습니다.”     LA 법원을 더 반듯하게 만들고 싶다는 제이콥 이(36·사진) 카운티 법원(39호) 판사 후보가 설명한 자신의 출마 배경이다. 10년차 선임 검사로 활약해온 이 후보는 한인사회를 ‘고향’이라고 표현하며 안전과 정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전했다. 이 후보의 포부와 희망을 들어봤다.       - '강도 피해 경험’이 출마 이유라고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넉넉치 않은 이민 생활을 꾸려가셨는데 몇 차례 강도 피해를 받으셨다. 물론 나이가 어려서 내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후 범인도 무섭고 경찰도 무서워 제대로 신고도 못하고 금전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셨다. 당시 그런 분들이 한두분이었겠나. 그래서 검사가 됐다. 이제는 법원을 이끄는 판사로서 시민들을 보호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 교육과 검찰에서의 경험은     “UC버클리에서 수사학(Rhetoric) 전공 후 로욜라법대를 졸업했다. 첫 2년 동안 프레즈노 카운티 검찰에서, 이후 8년 동안 LA 카운티 검찰에서 일했다. 최연소로 ‘캘린더 검사(선임 검사)’ 역할을 맡아 다양한 형사 사건들을 다룬 경험을 갖고 있다.”   - 본인 고유의 경쟁력은   “다른 변호사 경력의 경쟁 후보들과 달리 형사 기소 검사로 일했다. 대부분 민생을 침해하는 범죄에 대해 강력한 단죄 의지를 가진 법정을 원할 것이다. 개스콘 검사장 등 법원의 제로 베일 정책에 맞서 소신있는 판단을 내리는 판사가 되겠다. 한인타운과 한인사회에서 자란 아들같은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좋겠다.”     - 검사장의 정책은 무엇이 문제인가.     “개스콘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구속 수감을 줄이고 특정 인종의 혐의를 확대 수사하지 말자는 취지였고 흑인계와 라틴계가 호응했기 때문이다. 물론 포화상태인 교도소와 재범을 줄이는 방법 하나로 제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게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잡범들을 양산하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이런 정책의 조속한 폐기를 원하고 있다.”   - 현재 선거 판세는     “6년 임기로 현재 3명의 경쟁 후보가 있다. 이중에 2명은 관선변호사이며 1명은 로펌 변호사다. 3월 예선에서 50% 이상을 득표하면 본선 없이 당선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엔 1, 2위 득표자가 11월 본선에서 붙게된다. 원래 판사 선거가 크게 화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한인 유권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는 부분이다.”       - 사실상 2세인데 한국어 능숙하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대학 수업, 한국어 예배 등이 도움이 됐고 아내가 한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 후보는 현재 현직 판사 50여 명, 라티노검사연합회, 스티브 쿨리, 재키 레이시 전 검사장의 지지를 받고 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한인사회 고향 개스콘 검사장 판사 후보 카운티 법원

2024-01-23

[수필] 구멍 난 스웨터

노동절에 이어서 한해를 마감하는 두 번째 명절인 추수감사절도 지났다. 오늘따라 엷은 가을 햇빛은 게으름을 피우면서 앞뜰에 머물고 있다. 지금 것도 나무 몸체에 매달려 있는 주황색 감나무 잎들은 햇빛을 받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더 외롭고 찬란해 보인다. 입동이 지난 지 이미 며칠인데, 아열대 기후인 LA는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다. 그래도 흐르는 계절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감 나뭇잎을 보면서, 내가 칠십 대라는 것에 생각이 머물렀다. 이심전심인지 뉴욕에 있는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월화야, 네 수필 잘 읽고 있어. ‘고물상’도 공감이 가는 얘기야. 우리 나이에 쌓아 둔 것은 많고, 무엇을 정리할지 머리는 굳어져 있고….네 다른 수필 ‘대중이는 어디에 있을까’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어. 그런데…우리는 요즘 ‘비목’이라는 노래를 자주 듣고 있어. 아미 스테이지(Army Stage)라는 한국의 국군 악단이 현충원에서 부르는 것을 유튜브에 올린 것이야.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라 더 가슴에 울리네. 이 음악을 들으며 6·25 때 전사한 너의 큰오빠 생각을 많이 한단다. 묘지는 있지만, 유골이 없는 무덤, 그리고 묘지도 유골도 없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죽음을 맞은 많은 사람들…. 나도 늙었나 봐. 그리고 열심히 한글 홍보하는 너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Monica, 파이팅!”   나를 응원하는 짧은 문자에는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 안타까움, 억울함이 내재하여 있다. 한국 전쟁 때 3살이었을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3000마일 멀리에서, 나는 발신인(發信人)을 위로하고, 또한 응원한다. 그 발신인은 흔들리고 있던 수신인(受信人)에게 구멍 난 스웨터를 풀어서 다시 털옷을 짜고 완성하자고 한다. 내 큰오빠나, 친구의 아버님이 남기고 떠난 구멍들을 우리는 칠십 여 년 동안 열심히 메꾸어 오고 있었다.     친구가 알려 준 데로 아미 스테이지를 유튜브에서 찾아 ‘비목’이라는 노래를 들어 보았다. 이 가곡은 한명희 시인의 시에 장일남 작곡가가 곡을 붙인 것으로 1969년에 발표된 것이라고 한다. 트럼펫을 불고, 노래를 부르는 그들은 젊다 못해 무척 앳되어 보였다. 아마 내 큰오빠가 세상을 마감할 때도 그랬을 것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나는 울었다.     ‘비목(碑木)’이란 ‘비석(碑石)’의 뒷글자, 돌이라는 뜻의 ‘석(石)’을 나무라는 뜻의 ‘목(木)’자로 바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지가 죽으면, 죽은 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고 자리를 표시한다. 이름과 그에 관한 간단한 사항을 돌에 새겨서 무덤 앞에 세워 놓거나, 눞혀 놓는다. 그것이 비석이다. 돌 대신 나무로 망자가 묻힌 곳을 표시한 것이 비목이다.     돌이 아닌 나무를 써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 장례 치를 시간이 없는 급박한 상황인 경우이거나 빈곤한 죽음일 것 같다. 이 가곡을 들으면 전쟁터에서, 죽은 전우를 급히 묻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상상된다. 전우를 묻은 구덩이에 서둘러 돌을 쌓고, 비목을 세우고 후퇴했을 것이다. 언젠가 돌아와 제대로 장례를 치러 줄 것을 약속하고 믿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을 거다. 그렇게 큰 오빠의 전사 장소에 비목이 세워졌을 것이다. 비목을 세웠던 그의 전우들은 살아남았을까.     내 나이 칠십 대. 나는 큰 오빠가 이 세상에서 머물었던 기간의 세배 정도를 살고 있다. ‘칠십 대’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품고 나와 함께 있다. 흐르듯 지나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라는 추억 가운데 엉키고 설킨,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아파하며 울었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몇 년 전 보았던 드라마가 생각났다.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었다. 시작 부분에 ‘나이 칠십이 되니 친구의 장례식에선 이젠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별이 점점 익숙해져 간다’라는 대사가 있었다. 확인차 넷플릭스에 들어가 찾아서 다시 보았다. 은퇴한 우편집배원이 친구들의 별세에 슬퍼하지 않게 된 ‘나이 칠십’에 발레를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겪어 가는 이야기였다. 아들들과 딸, 아내, 발레 스튜디오 교수가 어림없는 일이라고 반대할 뿐만 아니라, 내어놓고 비웃기도 했다. 노인은 장래에 발레리노로서 비상하리라 믿고 있던 23세 예비생에게 수모를 잘 견디면서 발레를 배운다. 그 천재 예비생을 따라 결국 무대 위에서 비상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친구의 응원은 어깨에 메고 살아온 짐 보따리를 내려놓게 한다. 실오라기가 풀어진 부분과 방심하다 잘못 가위질을 해서 생긴 스웨터의 구멍들을 짜깁기해서 메꾸어 보려 한다. 짜깁기가 안 되면, 스웨터를 풀어서 새 스웨터를 짜면 되겠다.   류 모니카 / 수필가수필 스웨터 구멍 큰오빠 생각 나이 칠십 고향 초동친구

2023-12-07

애틀랜타 대표 '고향 음식'에 한식당 두 곳 선정

애틀랜타 저널(AJC)이 발표한 메트로 애틀랜타 지역의 가장 맛있는 '고향 음식(Comfort food)' 식당 50군데 중 한식당이 두 곳 포함됐다.     미국에서 흔히 '컴포트 푸드'라고 쓰이는 표현은 엄마가 어릴 때 차려준 음식, '고향의 맛,' 지쳤을 때 힘을 얻을 수 있는 음식 등의 뜻을 담고 있다. AJC는 메트로 지역의 남부 소울푸드부터 베트남 쌀국수까지 다양한 메뉴가 담긴 리스트를 발표했다.     스와니아씨몰 내에 위치한 '발리 부대찌개'의 부대찌개가 '고향 음식'으로 선정됐다. 매체는 한국의 부대찌개의 유래를 설명하며 "마음과 혀가 따뜻해지는 음식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 밥과 반찬을 곁들여 먹으면 나중에 친구들과 같이 가고 싶어질 것"이라는 평을 공유했다.     챔블리 뷰포드 하이웨이 선상의 한식당 '디쉬'의 불고기 돌솥비빔밥도 선정됐다. 매체는 돌솥이 만들어 내는 소리, 누룽지의 식감, 다양한 재료 등을 강조하며 "한 그릇을 더 먹고 싶을 정도의 감각적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태국, 인도, 일본, 이탈리아, 대만 음식 등도 포함됐다. 일식으로는 한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도라빌 '쇼야 이자카야'의 돈까스 카레와 둘루스에도 매장이 있는 '오키보루'의 돈코츠라멘도 선정됐다.     대표적인 '고향 음식' 중 하나인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애틀랜타의 '타이니 루스'의 메뉴가 뽑혔다. 또 유명한 파스타 메뉴인 카르보나라 파스타는 애틀랜타의 '벨리나알리멘타리'의 것이 포함됐다.   디저트 메뉴로는 '우디스치즈스테이크'의 밀크셰이크, 로즈웰 '더 파이홀'의 피칸 파이 등이 선정됐다.   자세한 리스트=ajc.com/things-to-do/atlanta-comfort-food-guide/ 윤지아 기자애틀랜타 한식당 애틀랜타 대표 음식 고향 고향 음식

2023-10-12

[발언대] 고향을 묻지 마세요

며칠 전 어느 그룹 카톡을 열었다가 질겁을 한 적이 있다. 그 그룹 카톡은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모임에서 회원들 간 화합과 신속한 정보전달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 그룹 카톡에 버선발처럼 생긴 한반도 지도가 칼러로 예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단체 회원 가운데 누군가가 올린 것이었다.     지도는 우리가 늘 보듯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파란색, 북쪽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지도는 전라남북도를 북한과 똑같이 빨갛게 칠해 놓고 ‘전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 써놓고 있었다. 나는 지역적 편견은 물론 한국 정치에 별 식견도, 관심도 없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의도로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승만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장면 정권 때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대립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정적 제거를 위해 반공을 앞세웠다. 당시 민주주의를 외쳤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벌받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적 치적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권력욕으로 인해 나라는 부패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 지도, 바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갈라놓은 그 기막힌 지도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취지로 발족한 단체의 그룹 카톡에 버젓이 올라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면적으로만 보면 지금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나라다. 그런데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마저 동서로 나누자는 것인가. 다시 신라·백제·고구려로 나뉘었던 삼국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지. 도대체 스스로 극우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마치 전라도에 콤플렉스라도 있는 것 같다.       나는 같은 단체 회원으로 그 지도를 그룹 카톡에 올린 분의 인성이 참으로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그런 지도를 단체의 공식 카톡방에 올릴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이제부터 누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미국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보다. 이곳에서 오래 살았고 묘지까지 사 뒀으니 말이다. 진짜 고향은 저승에나 가서야 마음 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고향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임지나 / 수필가발언대 고향 한반도 지도 진짜 고향 그룹 카톡

2023-10-09

[문화산책] 돌아갈 고향 없는 디아스포라

‘날아라. 상념이여 빛나는 날개를 타고   내 조국 산비탈과 언덕에 내려앉아라.   부드럽고 따뜻한 산들바람   코에 맴도는 감미로운 흙냄새…’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첫 구절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3막에 나오는 이 아리아는 히브리 노예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조국을 향해 부르는 노래로, 디아스포라의 심정을 묘사한 대표적 노래로 꼽힌다.   길고도 끈질긴 유대인의 역사를 지탱해온 저력은 조국, 즉 고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촘촘히 엮어온 역사다. 인류의 빼어난 예술작품들이 거기서 많이 탄생했다. 고향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요, 예술 창작의 원동력인 것이다.   내게는 그런 고향이 없다.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고향의 추억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고향 그리는 마음을 멋진 작품으로 빚어내는 이들이 정말 부럽다. 추석 때면 펼쳐지는 귀향행렬도 부럽다.   삼팔따라지의 후손인 내게는 그저 여기저기를 서럽게 떠돌던 단편적 기억만 생생하다. 어쩌다 한국에 가도 찾아가고픈 추억의 장소가 없다. 기껏해야 대학 때 단골로 드나들던 학림다방 정도다. 서글퍼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무향민(無鄕民)’이라고 말하곤 한다. 마음 붙일 고향이 없다는 건 디아스포라에게는 결정적 약점이다. 정체성 확립에도 위태로운 걸림돌이다. 그래서인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같은 고향 그리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지곤 한다. 위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고향이 꼭 지리적인 장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결 더 간절한 것은 마음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가령, 어머니나 스승님처럼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 그래서일까, 어머니와 고향을 하나로 여기는 노래가 많다. 우리에게 친숙한 유행가에 그런 절절한 명곡이 많다.   “현해탄 파도 위에 비친 저 달아/ 찢어진 문틈으로/ 어머님 얼굴에도 비추어 다오”- 남일해의 ‘이국선(異國船)’   “어어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고향 하늘 아래/ 불효자식 기다리며/ 홀로 계신 어머님/ 떠도는 흰 구름아/ 고향산천 지나거든/ 몹쓸 놈 잘 있다고/ 어어이 어어이/ 전해주렴아”(이양일의 ‘내 고향 산울림아’)   ‘뉴 노마드’라는 낱말처럼 현대인들은 대부분이 타향살이 디아스포라들이다.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혼자 외롭게 살아간다. 태평양 건너 낯선 미국 땅 한 귀퉁이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도 같은 신세다.   조용필의 명곡 ‘꿈’은 그런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줄임〉…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를 듣는다”, 향기를 듣고 눈물을 먹는다…. 참 깊고 절절한 표현이다. 이런 가사를 쓰고 노래한 조용필은 빼어난 시인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고향 고향 산울림 고향 하늘 히브리 노예들

2023-10-05

“명절이면 더 그리워지는 고향”

     워싱턴지역원로목사회(회장 김영숙목사)가 지난 29일, 인터내셔널갈보리교회(담임 이성자 목사)에서 추석행사특별예배를 개최했다.     이날 예배는 유흥태 목사가 인도 및 대표기도를 드렸으며 이성자 목사가 신명기 16장13절-15절 말씀으로 ‘너희는 온전히 즐거워 할지어다’를 주제로 설교를 전했다.     이 목사는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에 대해 설교하며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과 매우 닮아있다”며 “‘누구든지 목마르건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하신 말씀처럼 오늘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날”이라고 말했다.     신선태 목사의 축도 후 이어진 2부 추석행사에서는 모두가 하나되어 ‘고향의 봄’을 합창하며 아련한 고향을 떠올렸다. 이어 윷놀이, 오자미 게임 등 민속놀이와 장기자랑을 즐기며 향수를 달랬다.     이날 특별예배로 진행된 추석행사에 대해 김영숙 회장(33대)은 “원로목사회에서 처음 갖는 추석행사라 무척 감회가 새롭다”면서 “해마다 이맘때 원로목사님들을 보며 고향땅을 떠나 와 타국에서 맞는 한국 고유 명절이 얼마나들 외로우실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의 옛 추억을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원로목사들을 위한 추석행사에는 쌀, 라면, 간장, 식용유, 시럽 등 푸짐한 명절 선물들이 참석자 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와싱톤중앙장로교회(담임 류응렬 목사), 교회협의회(회장 심대식 목사)에서 각각 1천불을 쾌척해 추석의 풍성함을 나누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명절 고향 회장 김영숙목사 명절 선물들 이맘때 원로목사님들

2023-09-29

[문화산책] 돌아갈 고향 없는 디아스포라

‘날아라. 상념이여 빛나는 날개를 타고   내 조국 산비탈과 언덕에 내려앉아라.   부드럽고 따뜻한 산들바람   코에 맴도는 감미로운 흙냄새…’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첫 구절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3막에 나오는 이 아리아는 히브리 노예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조국을 향해 부르는 노래로, 디아스포라의 심정을 묘사한 대표적 노래로 꼽힌다.   길고도 끈질긴 유대인의 역사를 지탱해온 저력은 조국, 즉 고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촘촘히 엮어온 역사다. 인류의 빼어난 예술작품들이 거기서 많이 탄생했다. 고향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요, 예술 창작의 원동력인 것이다.   내게는 그런 고향이 없다.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고향의 추억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고향 그리는 마음을 멋진 작품으로 빚어내는 이들이 정말 부럽다. 추석 때면 펼쳐지는 귀향행렬도 부럽다.   삼팔따라지의 후손인 내게는 그저 여기저기를 서럽게 떠돌던 단편적 기억만 생생하다. 어쩌다 한국에 가도 찾아가고픈 추억의 장소가 없다. 기껏해야 대학 때 단골로 드나들던 학림다방 정도다. 서글퍼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무향민(無鄕民)’이라고 말하곤 한다. 마음 붙일 고향이 없다는 건 디아스포라에게는 결정적 약점이다. 정체성 확립에도 위태로운 걸림돌이다. 그래서인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같은 고향 그리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지곤 한다. 위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고향이 꼭 지리적인 장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결 더 간절한 것은 마음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가령, 어머니나 스승님처럼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 그래서일까, 어머니와 고향을 하나로 여기는 노래가 많다. 우리에게 친숙한 유행가에 그런 절절한 명곡이 많다.   “현해탄 파도 위에 비친 저 달아/ 찢어진 문틈으로/ 어머님 얼굴에도 비추어 다오”(남일해의 ‘이국선(異國船’)   “어어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고향 하늘 아래/ 불효자식 기다리며/ 홀로 계신 어머님/ 떠도는 흰 구름아/ 고향산천 지나거든/ 몹쓸 놈 잘 있다고/ 어어이 어어이/ 전해주렴아”(이양일의 ‘내 고향 산울림아’)   ‘뉴 노마드’라는 낱말처럼 현대인들은 대부분이 타향살이 디아스포라들이다.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혼자 외롭게 살아간다. 태평양 건너 낯선 미국 땅 한 귀퉁이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도 같은 신세다.   조용필의 명곡 ‘꿈’은 그런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줄임〉…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를 듣는다”, 향기를 듣고 눈물을 먹는다…. 참 깊고 절절한 표현이다. 이런 가사를 쓰고 노래한 조용필은 빼어난 시인이다.   그렇게라도 위로받을 수 있는 고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고마워할 일이다. 고향은 어머니 품처럼 짙은 향기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고향 고향 산울림 고향 하늘 히브리 노예들

2023-09-28

한국전 전사자 고향찾아 4만마일…버몬트 구성열·김창화씨 부부

한국전 참전 용사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전국의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감사를 전하는 한인 노부부가 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전사자들의 고향이다. 버몬트주에 사는 구성열(80), 김창화(77)씨 부부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고향을 찾아가 전사자들의 이름으로 지역 초등학교 도서관에 책과 기부금을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전사자를 기리고 한국전의 뜻깊은 역사를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0년 10월 버몬트주 리즈보로센트럴학교(Readsboro Central School)를 시작으로 지난 19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식스 마일 초등학교(Six mile Elementary School)까지 총 33개 주 33개 학교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구씨 부부는 현재 식스 마일 초등학교 방문을 마치고 플로리다, 아칸소, 켄터키주 지역으로 이어지는 전사자의 고향 방문 일정을 28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구성열 씨는 19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전사자 명단을 일일이 살피며 마음에 와 닿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있으면 주마다 한 명씩 선정해 그들의 고향 지역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있다”며 “켄터키주까지 가면 36개 학교에 기부금을 전달하게 되는데 내년까지 50개 주를 모두 마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일례로 식스 마일 초등학교의 식스마일 지역은 ‘찰스 헤이워드 바커(당시 18세)’ 일등병의 고향이다. 바커 일등병은 미군 제7보병사단 소속으로 경기도 연천군 천덕산 주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던 ‘폭찹힐(Pork Chop Hill)’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한 청년이다.   구씨는 “바커 일등병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부모 몰래 서명을 해서 15살 때 입대를 했다고 하더라”며 “그런 아이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는데 어떻게든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세 가지 선물을 들고 초등학교를 방문한다.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새겨진 명패, 한국전 역사가 담긴 책 그리고 기부금(5033달러)이다. 초등학생들을 만나 한국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전사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은 이들에게 가장 보람찬 일이다. 이번에 켄터키주 일정까지 마치게 되면 36개 초등학교 도서관에 총 18만1188달러를 전사자들의 이름으로 기부한 셈이 된다.   구씨 부부는 지난 2019년에 6.25 재단(625foundation.org)을 설립했다. 구씨는 “예전에 네팔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한인 2세 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한국전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 그때부터 교육 목적으로 재단을 설립했다”며 “한국전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지 않나. 6·25 때 미국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는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구씨 내외는 재단 설립 후 전사자 고향 방문 프로젝트를 위해 ‘리버티 워크(Liberty Walk·자유의 걸음)’ 행사를 매년 6월25일 마다 개최했다. 1마일을 걸을 때마다 일정액을 기부하는 행사다.    가족을 비롯한 이웃, 친지, 동창 등 모두가 후원자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도 행사가 진행됐다. 후원자들과 주한 미군이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미8군 기지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까지 함께 걸었다.   구씨는 “첫 리버티 워크 행사 때가 한국전 70주년이었는데 그때 걷힌 모금액이 5033달러였다”며 “그때부터 5033달러를 기부 금액으로 정했고 여러 후원자의 기금과 사비 등을 털어 재단을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구씨 내외는 직접 운전을 하고 기부할 학교에 방문한다. 대부분 시골 지역 학교라서 구석구석 다니려면 비행기보다 자동차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동부에 살면서 캘리포니아 등 서부 지역까지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기부를 위한 운행 거리만 무려 4만 마일이 넘는다.   구씨는 경기고등학교(57회),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1965년)했다. 이후 1967년에 미국에 온 구씨는 뉴욕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체를 운영했다.   구씨 부부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차세대가 리버티 워크 행사를 이어받길 바라고 있다.    구씨는 “학교를 한 군데 정해서 교육구와 협의하고 결정이 되기까지 약 1년 정도의 준비 시간이 필요한데 젊은 친구들이 함께한다면 의미가 배가 될 것”이라며 “50개 주 방문 프로젝트가 끝나도 계속 리버티 워크 행사를 이어갈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7000여명이다. 7000여명은 여전히 실종(Missing in Action) 상태다.     자유의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한국전 전사자 전사자 고향 한국전 참전 초등학교 방문

2023-09-21

[수필] 내 고향 헌팅턴비치

나의 고향은 강원도다. 그러나 난 그곳에서 여섯 살에 떠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울에서 졸업했다. 올해 강릉에 갔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100세를 넘기신 고모 한 분뿐이었다. 고모는 홀로 외롭게 살고 계셨다.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운 친구, 친지, 누구 하나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그리던 진정한 고향은 어디 있을까? 미국서 온종일 한국 TV를 보며 그리던 고향산천은 어디였을까?  TV 속의 고향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친구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인사동 한복판에서 만났다. 점심 먹고, 차 마시고, 헤어졌다. 대학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고향은 꼭 시골이어야만 하나? 강릉은 더는 시골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뛰놀던 친구도 없고 이름도 기억 못 한다.   1980년 9월에 네 살, 한 살짜리 딸 둘과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몬테벨로에서 헌팅턴비치로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그 집 근처에는 오른쪽에 중국인 부부, 왼쪽엔 일본인 부부가 살았었다. 그들은 50세가 조금 넘어 보였다. 그 당시 29세였던 나를 딸처럼 챙겨 주었다. 그러나 직장을 오렌지카운티로 옮기는 바람에 정답게 살던 인연을 2년 만에 접고 이사를 했다.   헌팅턴비치로 이사 온 다음 날 집 앞에 세워둔 차 윈도에 누군가 쪽지를 남겼다. 자동차를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옆집 아저씨가 쓴 것 같았다. 이사 오자마자 옛 동네가 그리웠다.     헌팅턴비치는 주민의 70%가 백인이고, 백인 우월주의자도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엔 그들의 갑질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나 헌팅턴비치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지금 이곳에 사는 한인은 통계상 1500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계도 많아 아시안 주민 수가 늘면서 차별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내가 사는 게이트 안에도 한인이 다섯 집이나 있다. 서로 바빠서 자주 못 보지만 만나면 반갑게 서로 손을 흔들어 준다.   헌팅턴비치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계획에 없던 임신을 했다. 한국에 계신 시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남편이 임종을 보러 간 사이에 임신 사실을 알고 남편 몰래 유산을 고민했었다. 그때 아기를 돌봐줄 만한 사람도 없고 아이를 3명이나 키울 형편도 못 됐다. 그러나 친정 언니가 ‘너는 아들이 없는데 누가 아니 뱃속의 아이가 아들일 수도 있잖아?“ 하며 유산을 말렸다. 몇 개월 후에 태어난 아기는 정말 아들이었다. 그해 우리 동네에 아들이 여섯 명이 태어났다. 유치원에  갔는데 모두 옆집에서 같이 놀던 남자아이들이었다.     나도  아들 친구 엄마랑 친하게 지냈다. 그들 엄마 중 누가 아기를  낳으면 모여서 베비샤워도 해주고 여행도 같이 다녔다. 아이들 야구 원정 경기도 어울려 다니고 보이스카우트 캠핑도 따라다니며 금발의 엄마들과 몰려다녔다. 제레미는 우리 아들과 특별히 친한 친구인데 그의 엄마 데비는 나 대신 학교에서 자동차로 우리 아이를 자기 집에 데려가 점심도 차려주었다. 또 제레미와 그의 동생들과 같이 놀게 하며 돌봐주다 내가 퇴근하면 아들은 걸어서 집에 오곤 했다. 지금도 페이스북 친구로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데비는 아직 옛날 동네에 살고 있다. 마치 고향을 지키는 충직한 소나무마냥.   옆집 베티와 제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20살은 많았지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도와주었다. 우리 집 보험이 잘못되어서 걱정하니 전화로 해결도 해주고, 어느 해 여름휴가 때 마이애미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 놓았는데 허리케인 앤드류로 인해 비행기가 못 뜬다고 연락이 왔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결항은 항공료 환불이 안 된다고 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제리가 설명을 잘해 환불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제리와 베티는 나이가 70세가 넘으니 고향인 플로리다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는 날 섭섭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 명의 아이들을 시간 맞춰 등교시키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때마침 뒷집에 살던 피클이란 예명의 몰몬교 신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녀가 6명이나 됐다. 아이들 중 세 명은 우리 아이들과 같은 반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등교를 나눠서 시켰다. 피클은 다른 금발의 엄마들이랑 차원이 다른 여자였다. 첫째 잘난 척을 안 했다. 친절하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겸손했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되어서 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그녀는 지금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던 그 동네에 가면 데비도 있고 피클도 있다.     헌팅턴비치는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나와 내 가족에게 남겼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모래사장에 가서 집도 짓고 성도 쌓았다. 파도가 밀려오면 고향 생각이 나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 다 잊고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그러나 너무 바빠서 딴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인간의 계절이 봄에서 여름, 또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선 지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 때가 다시 찾아온 것 같다. 가까이 지내던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역이민을 간다.     그러나 나는 데비와 피클 같은 친구가 있고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가 있는 이곳에서 살련다. 사람이 모두 떠나버린 한국의 강릉이 아니라 많은 추억과 사람이 있는 이곳이 진정한 나의 고향이다. 나는 늘 바다 건너를 바라보던 내 마음을 헌팅턴비치에 앉힌다. 김규련 / 수필가수필 헌팅턴비치 고향 아들 친구 초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

2023-09-21

[열린광장] 포기한 희망

논에 쌓아 놓은 볏단이 보인다. 집 앞의 실개천은 흰색으로 나타났다. 구글 지도에 북한의 고향 주소를 입력했더니 꿈에도 그립던 우리 집과 동내가 흑백 사진으로 나타났다. 인공위성으로 찍은 사진이다. 복사본을 만들어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수박 겉핥기로 고향 집에 가본다.     함박꽃 뿌리, 더덕, 그리고 도라지를 캐러 다니던 약산도 보인다. 약산을 지나면 도굴범들이 파헤쳐 기와, 항아리 조각 등이 버려진 작은 고분들이 있었다. 늦가을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무르익은 머루와 다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 산에 올라가면 사촌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붉은 언덕 언저리의 칡뿌리를 뽑아 씹으면 뱉어버릴 것 없이 맛있었다.   우리 집이 선명하다. 그 안에 누가 살고 있을까. 사진을 좀 더 확대할 방법이 없을까. 100세가 넘은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이다. 병약했던 동생도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할 동생의 자녀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고향 집에 가도 나를 반겨줄 사람은 없다.     독일과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나 남북 왕래 길이 열려 고향 집에 갈 수 있을까, 70여년을 기다렸다.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나를 위해 빌던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만져보기를 기다렸다. 어머니의 기도 덕에 한국을 거처 미국에 와 노후를 편안히 보낸다고 말하고 싶었다.   장모는 90세 때 시민권을 받고 그다음 날 여권을 신청했다. 고향에 가게 되면 사용하겠다고. 허황한 꿈이었다. 장모는 한 살과 세 살 된 딸을 남겨두고 월남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딸들을 만나는 것이 평생의 염원이었다. 장모는 그 염원을 풀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95세에 세상을 떠났다.     많은 실향민이 북한의 가족을 만나지 못한 한을 품고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남은 잎사귀가 몇 되지 않는다. 한을 품고 타계한 이들의 영혼은 지금 구천(九泉)을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이 영혼들을 어떻게 달래줄까.   이산가족 상봉위원회의 통계에 의하면 북한 방문을 원하는 한인은 약 5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별로 관심이 없다. 나와 같은 80-90세 세대가 몇 년 지나 모두 숨지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아이러니하게 소멸할 것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동안 미 의회에서 이산가족 상봉 법안이 만장일치로 몇 번이나 가결되었지만, 현재 국무부의 북한 여행 금지령이 발효된 상태다.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어 외교 채널이 열리고, 북미 연락 사무소가 설치되기 전 이산가족 상봉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때 북한 방문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이 없는 북한 방문은 별 의미가 없다. 나는 이제 고향 집 방문의 희망을 포기했다. 많은 실향민이 동감할 줄 안다. 윤재현 / 전 공무원열린광장 희망 이산가족 상봉위원회 고향 주소 늦가을 산골짜기

2023-08-25

[이 아침에] 고향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세월을 살면서 사람들은 착각에 빠져 살 때가 있다. 나도 그랬다. 내가 착각에 빠져 산 것은 고향에 대한 착각이었다.   나는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했고 여섯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심야에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며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서울에서 6·25전쟁을 겪은 후, 우리 가족은 영등포구 신길동과 대방동 지역에서 살았고 나는 그 지역에서 성장하며 중·고·대학 등 모든 교육 과정을 마쳤다. 결혼한 후에도 그 동네에서 살다 50년 전 우리 가족은 미국에 이민을 왔다.    인간에게 고향이란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그리움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내가 출생한 신의주를 향해서는 전혀 그리움이 없었기에 고향이란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단하고 힘든 이민생활, 타향살이에 이골이 나면서도 가끔 향수병에 걸릴 때는 가슴 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동네, 나와 내 가족들의 과거와 추억이 있는 곳, 신길동,대방동 그 동네를 회상하며 돌아가고 싶었던 그리움을 품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문학 행사가 있어 한국을 방문했다. 행사가 끝난 후, 건강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한국으로 이주한 딸네 집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고향 같은 동네를 찾아갔으나 내 딸들이 놀던 정든 그 동네는 그곳에 없었다. 내 옛집이나 내 이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이웃들은 수소문을 해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고층 아파트와 새로운 상점들, 거리에는 온통 낯선 사람들로 붐볐다. 사라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고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가 밀려왔다. 고향이라 여기며 그리움을 품고 살았던 마음의 고향은 나의 착각의 고향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해바라기 습성을 버렸다.   1년 7개월 만에 내 집으로 돌아오니 익숙한 것에 편안함, 행복감을 느꼈다. 내가 토런스 지역에 산 지도 어언 40년 세월이 넘었으니 모든 면에 익숙하고 정겨운 것이다. 타인종 이웃들도  나를 보자 놀라며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면서 네가 보고 싶었다며 두 팔로 나를 포옹해 주었고 너를 많이 걱정했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단골로 다니던 한인 업소들을 찾았더니 그들은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듯 나를 반겼다. 그동안 통 뵐 수가 없어 혹시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것이 아닌가 걱정이 돼서 우리 집으로 여러 번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는 이가 없었다는 따뜻한 말들도 했다. 음식도 주고 선물도 챙겨 손에 쥐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가슴에 뜨겁게 전해지는 뭉클한 고마움이 내 전신을 감싸며 감동이 아침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서로 인정을 나누며 외로운 이민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그들이 내 이웃이다. 내 이웃들이 사는 토런스가 나의 정신적인 고향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고향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갈매기가 춤추는 레돈도의 푸른 바다가 보이는 토런스가 내 고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영중 / 수필가이 아침에 고향 토런스 지역 이민생활 타향살이 타인종 이웃들

2023-08-24

[열린광장] 포기한 희망

논에 쌓아 놓은 볏단이 보인다. 집 앞의 실개천은 흰색으로 나타났다. 구글 지도에 북한의 고향 주소를 입력했더니 꿈에도 그립던 우리 집과 동내가 흑백 사진으로 나타났다. 인공위성으로 찍은 사진이다. 복사본을 만들어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수박 겉핥기로 고향 집에 가본다.     함박꽃 뿌리, 더덕, 그리고 도라지를 캐러 다니던 약산도 보인다. 약산을 지나면 도굴범들이 파헤쳐 기와, 항아리 조각 등이 버려진 작은 고분들이 있었다. 늦가을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무르익은 머루와 다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 산에 올라가면 사촌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붉은 언덕 언저리의 칡뿌리를 뽑아 씹으면 뱉어버릴 것 없이 맛있었다.   우리 집이 선명하다. 그 안에 누가 살고 있을까. 사진을 좀 더 확대할 방법이 없을까. 100세가 넘은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이다. 병약했던 동생도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할 동생의 자녀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고향 집에 가도 나를 반겨줄 사람은 없다.     독일과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나 남북 왕래 길이 열려 고향 집에 갈 수 있을까, 70여년을 기다렸다.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나를 위해 빌던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만져보기를 기다렸다. 어머니의 기도 덕에 한국을 거처 미국에 와 노후를 편안히 보낸다고 말하고 싶었다.   장모는 90세 때 시민권을 받고 그다음 날 여권을 신청했다. 고향에 가게 되면 사용하겠다고. 허황한 꿈이었다. 장모는 한 살과 세 살 된 딸을 남겨두고 월남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딸들을 만나는 것이 평생의 염원이었다. 장모는 그 염원을 풀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95세에 세상을 떠났다.     많은 실향민이 북한의 가족을 만나지 못한 한을 품고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남은 잎사귀가 몇 되지 않는다. 한을 품고 타계한 이들의 영혼은 지금 구천(九泉)을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이 영혼들을 어떻게 달래줄까.   이산가족 상봉위원회의 통계에 의하면 북한 방문을 원하는 한인은 약 5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별로 관심이 없다. 나와 같은 80-90세 세대가 몇 년 지나 모두 숨지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아이러니하게 소멸할 것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동안 미 의회에서 이산가족 상봉 법안이 만장일치로 몇 번이나 가결되었지만, 현재 국무부의 북한 여행 금지령이 발효된 상태다.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어 외교 채널이 열리고, 북미 연락 사무소가 설치되기 전 이산가족 상봉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때 북한 방문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이 없는 북한 방문은 별 의미가 없다. 나는 이제 고향 집 방문의 희망을 포기했다. 많은 실향민이 동감할 줄 안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희망 이산가족 상봉위원회 고향 주소 늦가을 산골짜기

2023-08-20

한인타운 '라이즈 고향' 중·고교 이전

LA한인타운에 위치한 라이즈 고향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최근 각각 이전했다.   윌셔 불러바드와 윌셔 플레이스에 있던 라이즈 고향 중학교는 현재 6가와 사우스 벤톤웨이(600 S. La Fayette Park Place, LA, 90057)로 옮긴 상태다.   이전한 자리는 라이즈 고향 초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중학교가 함께 같은 건물을 사용하게 됐다.   중학교가 이전해 오기 전에 초등학교와 함께 있었던 라이즈 고향 고등학교는 보드리 애비뉴와 템플 스트리트 선상(1081 W. Temple St.)으로 임시 이전했다. 고등학교는 이후 내년 1월에는 버몬트 애비뉴와 1가 인근(3500 W. 1st St.)으로 영구적으로 옮기게 된다.     학교 측에 따르면 중학교 건물은 재개발 계획으로 이전하게 됐으며 고등학교는 라이즈 고향 소유의 건물로 이전이 확정됐다.   학교 측은 이전 고등학교 건물은 체육관이 없어 공원에서 수업을 진행했지만, 내년 1월부터는 학교 내 체육관에서 더욱 안전하게 학생들이 체육을 즐길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또 라이즈 고향 중학교도 캘리포니아 주 정부와 LA통합교육구(LAUSD)로부터 그랜트를 받아 오는 2025년에 새 건물을 설립해 이전할 계획이라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라이즈 고향 중학교 루스 김 교장은 “라이즈 고향이 학생들에게 더 나은 환경 제공을 위해 대이동을 하게 된다”며 “라이즈 고향 공립 차터 스쿨은 내일(10일)부터 가을학기를 시작해 최고의 교육을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특히 중학교는 학년별 상담교사가 있어 더욱 세심하고 깊은 상담이 가능하다. 일반 공립학교는 평균적으로 학생 570명당 상담교사가 1명이지만 라이즈 고향은 학생 100명당 상담교사 1명의 비율이다”며 “라이즈 고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 중 하나가 교사와 학생 간의 유대 관계 형성이다.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해 높은 교육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라이즈 고향 중학교는 매년 ‘인생체험’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이 행사는 2박 3일 혹은 3박 4일간의 타주 여행을 통해 교우 및 교사와의 깊은 유대감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매년 설날 및 추석에 한국 전통문화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라이즈 고향은 다민족이 거주하는 LA에서 민족 간의 형평성과 존중, 평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라이즈 고향 중학교는 지난 2012년에 가장 먼저 설립됐고 이후 고등학교가 2016년, 초등학교는 2019년부터 시작됐다.   ▶등록 문의:(323)954-9957 ext.1020(한국어), 1030(영어)       김예진 기자한인타운 라이즈 라이즈 고향 한인타운 라이즈 중학교 건물

20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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