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폭동'이 나를 바꿨다…'나도 한인' 정체성 확인하는 계기
‘그날’ 이후 17년이 흘렀다. 전쟁터나 다름없었던 1992년 4월29일의 LA. 한인들은 눈물을 빼면 남는 건 잿더미 밖엔 없었다. 어떤 가장은 불 타 버린 가게 앞에서 땅을 쳐야했고, 모친은 주검으로 변한 자식을 껴안고 통곡했다. 억울함에 당사자들은 울분했고, 무력감에 한인사회는 공분했다. 그 벌건 흉터를 기억하자고 매해 오늘만 되면 되새김질 해오길 열 일곱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아픔은 어느덧 서서히 박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맘 때면 수십명에게 장학금이 지급되고 경쟁이라도 하듯 단체들이 행사를 열고 있지만 일년에 한번 숙제로 끝날 뿐이다. 그날의 슬픔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게되는 걸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슬픔은 다른 곳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당시 10대의 나이로 부모의 눈물과 한숨을 목격한 자녀들이 그 주역이다. 아직 어려 분을 삭히기만 했던 그들은 ‘크면 힘없는 한인이 되진 않겠다’고 다짐했고 삶의 목표를 바꿨다. 이제 30대가 된 그들은 경찰관으로, 정치인 보좌관으로, 공무원으로 스스로의 다짐을 실천해나가고 있다. 역사속 4·29는 그들을 바꿨지만 ‘정의’와 ‘권익’이라는 목표가 있는 한 앞으로의 4·29는 그들이 바꿔나갈 것임은 분명하다. 그들에게 폭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니, 미래형이다. '나도 한인' 정체성 확인하는 계기 "한인사회의 존재를 알게 됐죠." LA커뮤니티재개발국(CRA)의 커뮤니티 어페어 스페셜리스트 홍연아씨는 '나도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홍씨는 인디애나주 퍼듀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폭동 소식도 흑인 친구를 통해 처음 접했다. "충격이었죠. 한인들과 타인종간의 갈등이 그렇게 심한줄 몰랐어요. 1.5세로 한인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고민하게 되었죠." 이후 가족과 남가주로 이주하면서 고민은 현실이 됐다. 친구들은 주류 기업 쪽으로 취업을 했지만 홍씨는 한인건강정보센터 LA교육구 CRA 등 비영리단체와 정부기관에서 줄곧 일하고 있다.홍씨는 정부기관에 몸담으며 한인사회와 정부기관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4.29 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기 때문. "아직도 할일이 많다고 느낀다"는 홍씨는 "정부의 각종 프로그램이나 사업에 한인사회의 목소리와 이익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씨는 이어 "현재 맡고 있는 업무가 각 커뮤니티 관련 일인만큼 한인사회가 흑인 커뮤니티를 비롯 다른 커뮤니티와 서로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기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