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아들 같은 희생자 없길 바랐는데…"
경찰에 피살 양용씨 닮은 꼴
마이클 조씨 부모 인터뷰
16년전 13차례 총격에 사망
'억울한 죽음' 과잉진압 공분
되풀이 되는 비극 변화없어
총 뽑기전 한번 더 생각했어야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 지 16년 째다. 조성만씨와 어머니 조홍란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경찰 총격에 잃었다.
조씨 부부의 둘째 아들 마이클 조(당시 25세)는 지난 2007년 12월31일 라하브라 지역 리커스토어 앞에서 경찰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받고 숨졌다.〈본지 2008년 1월2일자 A-1면〉
억울한 죽음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한인 사회의 공분을 샀다.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과 함께 유가족의 소송은 물론 곳곳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촛불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마이클 조 사건은 지난 2일 LA한인타운에서 경찰 총격에 피살된 양용(40)씨 사건과 닮은 데가 많다. 〈본지 5월3일자 A-1면〉
피해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점, 경찰의 총기 폭력 논란, 여러 명의 경관이 가담한 집중 사격, 사건 발생 후 경찰의 불투명한 발표 등이 공통분모다.
조씨 부부는 어느덧 70대가 됐다. 이들은 지난 9일 아들이 잠들어있는 글렌도라 지역 오크 데일 묘지를 찾아갔다. 노부부는 그곳에서 가슴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아버지 조씨는 경찰의 민간인 총격 사건을 두고 “최악(worst)”이라고 했다.
어떤 부분이 최악인가.
“물론 경찰도 그사이 (총기 관련) 정책 변화 같은 게 있었겠지만, 사건이 또 발생하지 않았나. 나아진 건 없다고 본다.”
경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들 입장에서는 정당했다고 생각하겠지…. 다만, 우리 아들 사건만 봐도 경찰이 총을 뽑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하면 어땠을까 지금도 아쉽고 또 아쉽다. 아들은 분명 과잉진압으로 죽었다.”
사건 당일 경찰은 ‘무기를 든 사람이 서성거린다’는 신고를 받고 라하브라 지역 리커 가게 앞으로 출동해 마이클 조씨와 마주했다. 당시 조씨가 들고 있던 것은 ‘무기’가 아닌 ‘쇠 지렛대(crowbar)’였다. 경관들은 조씨에게 쇠 지렛대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정신질환을 앓던 조씨에게 10여 차례 총격을 가했다. 출동 후 마이클과 마주한 지 불과 ‘41초’ 만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총 쏜 경관들을 만나본 적 있나.
“없다.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대면한 적도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다 용서했다. 다만, 그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을 죽인 행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격 교육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이해하는 인성 교육을 좀 더 해야 하지 않나.”
당시 소송을 제기했는데.
“후회는 안 한다. 우린 그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게 잘못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절대 ‘잘못했다’라는 말을 안 하지 않나. 당시 배심원단의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었다. 배심원끼리 계속 팽팽하게 맞서니까 나중엔 판사가 합의하라 그러더라. 백인 중심 동네에서 사실상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나마 위안이 됐다. 나는 그 소송이 저쪽(경찰)의 잘못을 밝힌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당시 조씨 부부는 라하브라 시정부와 경찰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었다. 소송은 약 3년간 공방 끝에 시정부가 유가족에게 25만 달러를 지급한다는 합의로 마무리됐다. 변호사 비용 등을 모두 제외하고 유가족이 받은 건 10만 달러였다.
소송을 결심했던 이유는.
(조홍란 씨) “처음에 우리 부부는 그냥 잊으려고 했다. 그때 큰아들이 그러더라. 소송해야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을 수 있다고…그 말이 계기가 됐다.”
소송 과정은 어땠나.
(조홍란 씨) “당시 경찰들이 아들에게 모두 13발을 쐈다. 기가 막혔던 건 그렇게 총을 쏘고 아이가 이미 죽었는데도 거기에 수갑을 채워 (시신을) 옮겼다는 점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당시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13발 중 2발은 벽에, 나머지 11발이 조씨를 타격했다.
경찰의 총기 사용 규정을 어떻게 보나.
(조홍란 씨) “물론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그 상황과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길렀으면 한다. 생명이 오가는 문제 아닌가. 경관들이 총 쏘는 방법만 배우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다양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그걸 배웠으면 한다.”
사건 이후 어떻게 지냈나.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나. 정말 기도를 많이 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상황을 버텨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 찬양을 들었는데 그러면서 피리를 불게 됐다. 덕분에 그때 익힌 피리로 매주 노숙자 사역이나 멕시코 선교를 할 때 찬양을 연주하곤 한다.”
언제 아들이 생각나나.
“아직도 종종 아들의 꿈을 꾼다. 집사람도 마찬가지다. 화창한 날 보다는 우중충한 날에 아들 생각이 많이 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지난해 뮤리에타로 이사를 했다. 아들과 함께 살던 라하브라 집을 떠났다. 26년간 살았던 곳이었다. 마이클이 그림을 그렸었다. 아들의 작품도 다 그 집에 두고 나왔다.”
마이클 조는 UCLA에서 미술을 전공했었다. 그가 사망한 뒤 2008년에는 UCLA 타미 퀸 교수가 마이클의 유작들로 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어머니 조씨는 인터뷰 내내 20대였던 마이클을 평소에도 ‘아가’로 불렀다고 했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던 귀여운 마이클이 꿈에 그대로 나왔던 이야기도 해줬다. 꿈에서 ‘아가’ ‘아가’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 LA에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유가족에게 먼저 조의를 표한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보낸 부모의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도 아들이 떠난 이듬해 스트레스로 청력을 잃었다. 힘내시고 마음에 평안을 찾으실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
글 ㆍ사진=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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