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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국문화원, 김환기 특별전

김환기(1913-1974) 작가가 50대 들어 순수추상미술의 꽃을 피웠던 뉴욕에서의 작품을 톺아보는 전시가 열린다.   뉴욕한국문화원은 맨해튼 코리아타운 신청사(122 E. 32스트리트) 이전 기념 전시로 김 작가의 특별전 ‘환기 인 뉴욕(Whanki in New York.포스터)’을 서울 환기미술관과 협업해 다음달 2일부터 오는 6월 13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글로벌기업 LG전자가 헤드라인 파트너로, 네일뷰티기업 대싱디바가 공식후원사로 나선다.   이는 김 작가가 지난 1974년 7월 뉴욕서 타계한지 5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행사다.     김 작가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서 명예상을 받은 후 50세가 되어서야 뉴욕에 정착했다.   통상적으로 김 작가의 뉴욕 활동 시기는 완성도 높은 점화 등으로 절정을 이뤘다고 평한다. ▶일본 유학 도쿄시대(1933~1937) ▶한국서 두각을 드러낸 서울시대(1937~1956) ▶파리시대(1956~1959)에 이은 뉴욕시대(1963~1974)는 김 작가의 점화 시리즈 등이 본격 집대성된 시기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높다는 평을 받는데, 서양추상미술과 한국 정서를 결합한 점화시리즈가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별전엔 이 시기를 보낸 김 작가가 남긴 ▶사진 ▶일기 ▶종이 작품 ▶편지 등을 중점적으로 구성했다. 이밖에도 ▶김 작가의 뉴욕 지인 소장품 ▶LG전자의 작품 재해석 디지털 전시물 5점이 공개된다.   김천수 문화원장은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인 김환기 화백은 그의 전성기와 생애 마지막을 뉴욕에서 보내며 이른바 전면점화라 불리는 추상미술의 정점을 이곳에서 완성했다”며 “뉴욕한국문화원 신청사 개관 기념으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김환기 사후 50년만에 뉴욕에서 개최되는 가장 크고 공신력 있는 전시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김환기의 예술정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화원 갤러리 운영시간은 화~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객을 만난다.   문의는 전화(212-759-9550, #Ext.204)로 하면 된다. 강민혜 기자 kang.minhye@koreadailyny.comLG 뉴욕한국문화원 뉴욕한국문화원 신청사 김환기 화백 김환기 사후

2024-04-24

단색화 거장, 조용익 화백 북미 최초 회고전

  뉴욕 맨해튼의 갤러리장(Gallery Chang)'이 북미 지역 최초로 지난해 타계한 조용익 화백의 회고전 'The Hidden Masterpiece: Cho Yong Ik 1934-2023'을 오는 11일부터 개최한다.   조 화백은 한국 단색화의 주요 작가인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등과 함께 한국 현대추상회화를 이끈 인물로서,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에 있어 매우 비중이 큰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1934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추계예대 교수를 역임한 조 화백은 1961년에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의 연립전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 추상미술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갤러리장 이민지 수석 큐레이터는 “19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조용익 화백이 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시기였는데, 1961년 프랑스 파리 비엔날레(2nd Paris Biennale)와 1967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Bienal Sao Paulo) 등 세계 유수의 국제전 참가는 국내외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조 화백은 60년대부터 단색화 1세대 작가들과 함께 활동했지만, 2000년대 초반 개인적 사정과 병환으로 미술계를 떠나는 바람에, 2010년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단색화 열풍에 함께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6년 성곡미술관과 런던 올리버 말리그(Oliver Malingue)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과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연달아 소개되며, 한국 단색화 운동을 이끈 1세대 화가로 국내외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이 수석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에서는 총 20여 점의 작업을 선보이는데, 이를 통해 70년을 아우르는 그의 작품 세계와 한국 추상회화사의 발전 과정을 한 번에 만나 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는 국내외 어디서도 선보이지 않았던 조용익 화백의 초기 엥포르멜 회화 〈59-119〉(1959), 〈No 102〉(1966)와 한국의 기하학추상을 대표하는 작품 〈72-112〉(1973), 〈72-113〉(1973) 등을 최초로 선보여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는 갤러리장 1관(150 W 55스트리트)에서 5월 4일까지 열리는데, 관람 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com조용익 조용익 화백 조용익 회고전 조용익 뉴욕 회고전 갤러리장 갤러리 장 조용익 갤러리장 회고전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뉴욕 갤러리장

2024-04-08

박대성 화백 ‘먹의 재창조’ 전시 열린다

한국 현대미술의 선도적인 작가 박대성 화백의 ‘먹의 재창조’ 전시회가 롱아일랜드 뉴욕주립 스토니브룩대에서 개최된다.     뉴욕한국문화원과 스토니브룩대 찰스 B 왕 센터는 25일 “한국 수묵화의 변혁적인 힘을 보여주며, 현대미술의 다채로운 면모를 선보이는 전시가 될 것”이라며 “예술계에 빛나는 업적을 이룬 박대성 화백에 대해 양질의 토론을 나누고, 박대성 화백의 예술을 이해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또한 “한국 수묵화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탐구하는 자리를 만들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4일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회는 오는 12월 10일까지 스토니브룩대 찰스왕 센터에서 개최된다.     10월 18일에는 전시와 연계한 심포지엄, 개막식 행사도 함께 개최된다. 심포지엄과 개막 리셉션에는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다.     개막식 행사는 10월 18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찰스왕 센터 갤러리에서 열리며, 심포지엄은 역시 10월 18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찰스왕센터 극장에서 열린다.     개막 리셉션에서는 소정의 음식과 음료도 제공될 예정이다.     전시 장소가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만큼, 맨해튼 뉴욕한국문화원(460 파크애비뉴)과 찰스왕 센터를 오가는 무료버스 서비스도 제공한다.     개막 행사에 앞서 오후 1시에 문화원에서 출발하는 무료버스 서비스로, 좌석 확보차 사전 예약은 필수다.     무료버스 예약은 10월 16일까지 구글 폼(tinyurl.com/wangshuttle)을 통해 하면 된다.   전시 및 행사 관련 문의는 진진영 찰스왕 센터 디렉터(전화 631-632-6353, 이메일 jinyoung.jin@stonybrook.edu)에게 하면 된다. 김은별 기자 kim.eb@koreadailyny.com박대성 재창조 박대성 화백 뉴욕한국문화원과 스토니브룩대 찰스왕센터 극장

2023-09-25

브라운갤러리, 유충목 작가와 조용익 화백의 기획전 ‘기억의 소환’ 개최

 럭셔리 아트 콜렉션 갤러리인 브라운갤러리(BROWN GALLERY)에서는 유리 아티스트 유충목 작가와 단색화 화가 조용익 화백의 전시를 연이어 배치한 기획전 ‘기억의 소환’을 오픈한다.   Part1과 Part2의 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는 ‘기억의 소환’ 기획전은 두 아티스트가 각자의 커리어 정점에서 탄생시킨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작가의 작품세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준비됐다.   우선 8월 8일(화)부터 23일(수)까지 진행되는 Part1은 유충목 작가의 작품으로 꾸며지는 ‘Recollection’ 이 진행된다. 유충목 작가는 10여 년에 이르는 미국과 영국 등 타국체류 시절을 지내며 자아와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적인 것’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급변하는 사회의 모습들 속에서 한국미술의 과거를 되짚어 보며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단청, 문양, 건축 등에서 다양한 우리 나라의 근현대 미술을 공부하면서 조소를 배우고 유리전공으로 석, 학사를 마친 후 과거와 현대, 미래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전달하는 유리 아티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유리를 주 소재로 하여 조형적 언어로서의 작업을 통해 평면으로 소재가 가지는 성질을 극대화 하거나 적극 활용하여 작품을 완성해낸다. 특히 단지 유리라는 느낌을 건내는 것이 아닌, 고온에서 액체 상태로 시작하여 저온에서 고체로 존재하는 유리의 완전체의 모습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Part2 전시는 8월 18일(금)부터 9월 1일(금)까지 단색화 1세대 화가로 알려진 조용익 화백의 작품들이 ‘Rememberance’라는 주제로 전시된다. 조용익 화백은 1934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90세를 넘기고 지난 7월 2일 별세할 때까지도 붓을 놓지 않고 있는 현역 화가로 활약했다. 1958년 '르뽕 3인전',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 1962년 '악튀엘전' 등 한국 현대추상회화의 시작을 알린 주요 전시 참여작가로 활동했으며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추계예술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특히 60년대에는 30대 젊은 작가들을 흔들었던 프랑스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추상 작업을 해 오고 70년에는 갓, 한복, 장구 등을 담은 반 구상 작품에 집중하며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 김창렬, 이우환, 박서보, 서세옥, 정창섭, 정상화 작가 등과 함께 한국현대미술가협회에서 한국 현대추상회화를 이끌어 온 작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전시를 기획하고 개최하는 브라운갤러리는 오크우드 프리미어 코엑스센터에 자리 잡은 갤러리로, 조용익 화백의 특별전 ‘단색의 변주곡, 휘호(揮毫)’가 이 브라운갤러리에서 지난 6월 개최된 바 있다. 브라운갤러리 홍소민 대표는 당시 특별전 직후인 지난 7월2일, 조용익 화백의 별세로 마지막 개인전을 함께 한 작가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깊고 특별한 인연을 만들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홍소민 대표는 “근현대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거론됨은 물론 미술시장에서 독보적으로 우위서 있는 화백들의 작품 세계관은 지금의 후예들에게 여러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조용익 화백의 70년대를 국제적으로 풍미했던 ‘점화’ 작품을 재 조명할 것이며, 유충목 작가의 시각적 재해석 속에서 탄생된 한국의 얼과 더불어 자아를 고민한 투명함 속에 깊게 녹아져 있는 작가 시그니쳐인 유리구슬에 담겨진 ‘점화’를 소개하고자 한다”며 “닮은 듯 다른 카테고리의 두 작가 작품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기획전은 시대를 넘어 세대를 넘어선 두 예술가의 기억이라는 한 호흡을 즐겁게 감상해볼 수 있는 뜻밖의 소환 속 관람이 될 것으로써 무더운 여름날 시간을 내어 방문한다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강동현 기자 kang_donghyun@koreadaily.com브라운갤러리 유충목 조용익 화백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유충목 작가

2023-08-06

김영화 화백, 첼시에서 개인전

골프 화가로 알려진 김영화(사진) 화백이 오는 29일까지 뉴욕시 맨해튼 첼시에 있는 ‘하이 라인 나인 갤러리(High Line Nine Gallery)’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김 화백의 60번째 개인전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김 화백은 크고 작은 신작 45점을 선보인다   김 화백은 골프에 대한 철학을 동양예술로 승화시킨 최초의 한국 화가로 한국의 전통적 기법을 현대 미술에 추상적으로 표현하여 독특한 그녀만의 화풍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화백은 “제가 추구하는 그림의 주제는 사랑과 희망 그리고 열정으로, 감상자가 평안하게 그림을 보고 각자 사유의 통로가 되었으면 한다”며 “앞으로의 꿈이라면 세계시장에 한국화를 널리 알리고, 기운 생동하는 그림으로 동서양을 융합하는 새로운 예술세계로 세계관을 확장하고 싶다”고 밝혔다.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김 화백은 한국 전통화의 거장인 김홍도의 후손이자, 4대 도예가문 도봉 김윤태 선생(부산 무형문화재 제13호)의 딸로, 백제 제25대 무령왕 표준영정(국가 지정 99호)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편 김 화백은 이번 전시를 앞두고 그림을 사랑하는 뉴욕 한인들을 위해 자신의 대표작인 ‘마법의 순간’ 1점을 뉴욕한인회(회장 찰스 윤)에 기증했다. 김은별 기자 kim.eb@koreadailyny.com김영화 화백 골프화가 김영화 김영화 첼시 개인전 High Line Nine Gallery 도봉 김윤태

2022-12-04

[문화산책] 김창열의 물방울에 관한 명상

영롱한 물방울은 찰나의 아름다움이다. 아주 잠시 머물다 간다. 흘러내리거나 스며들거나 증발하거나 말라버리거나….     아무튼 스러진다. 우리네 인생처럼 덧없다.   물방울은 스러지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의 긴장된 빛남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김창열 화백(1929~2021)은 50년간 오로지 물방울만 그렸고, 세계적 공감과 명성을 얻었다. 50년 외길,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한 길을 고집스럽게 파고든 수도자의 작업 태도이다. 화가의 말처럼 “영혼과 닿는” 작업이기도 했다.   50년 동안 그린 물방울이 도대체 몇 개나 될까? 그리면서 얼마나 몸과 마음이 축축했을까? 오로지 물방울만 그린다? 지겹지 않았을까?     한 인터뷰에서 화가는 “물방울을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이 수없이 솟아오른다. 물방울이 내 운명처럼 돼버렸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에 담긴 사연과 아픔을 알고 나면, 화가의 절실한 집념이 이해된다. 물방울에 깊은 상처가 스며있다.     참혹한 전쟁의 상처!   김창열 화백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월남하여, 실향민으로 타향을 전전했다. 검정고시로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와중에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넘나들었고, 전쟁에서 여동생을 잃었고, 중학교 동기 120명 중 60명이 죽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다. “당시 난 비명을 지르거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전쟁 통에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화가를 괴롭혔다. 그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리고 전쟁으로 영영 이별하게 된 북쪽 고향과 그리운 아버지의 추억들….   “진혼곡이지. 내게 그림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전쟁에서 본 피를 지우려 물방울을 그렸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 “(물방울 그리기는)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내 많은 친구의 혼을 달래는 살풀이였다.” “물방울은 내 친구들의 살점이고 피다. 그러나 그게 늘 피로 응고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것이 물방울이 됐고 눈물이 됐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리기는 비극적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인간의 소리 없는 비명, 불안을 지우기 위해 평생 반복하고 또 되풀이한 수행, 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그는 화실에서 마치 연금술사처럼 오랜 세월 연구한 끝에 그가 본 모든 피를 마침내 순수한 물의 원천으로 만들어냈다. 그 물방울은 치열하고 아린 눈물이다. 물방울은 그가 평생 도달하고 싶어 했던 평온의 경지이자 충만한 무의 세계였다. 아름답다.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화가를 구원한 것은 그림이었다. 매우 상징적이다. 화가의 아들은 아버지의 고뇌로 가득한 생애와 예술세계를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제목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그 영화가 완성된 얼마 후 화가는 세상을 떠났다.   “죽으면 나무 밑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제주도 김창열미술관 인근에 수목장을 치렀다. 마지막까지 한 방울의 물방울이고자 했다.   소원대로 ‘너절한’ 화가로 남지 않았고, 제주도와 서울에 번듯한 개인 미술관이 마련돼 작품들이 잘 모셔지고, 아들이 만든 영화에서 자기 작품에 대해 육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요, 복 받은 예술가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김창열 물방울 물방울 그리기 제주도 김창열미술관 김창열 화백

2022-11-10

수묵화 거장 ‘박대성’ 화백 LA서 전시한다

수묵화가 박대성 화백의 대작 수십 작품을 LA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EK 갤러리(관장 유니스김)가 18일부터 8월 7일까지 박대성 화백 초대전을 연다.     전시되는 작품은 박 화백의 대표작인 ‘신라몽유도’, ‘광한루’, ‘청우’, ‘구룡폭포’, ‘유류’ 등 대작 5점 외 소품 30여점 이상이 공개된다.     또한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는 1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박대성:고결한 먹과 현대적 붓’ 전시회를 개최된다.     ‘고결한 먹과 현대적 붓’ 전시회에서는 현대적 주제로 서예를 보는 듯한 선으로 동서양의 미학을 담아 그려낸 박대성 화백의 대형 수묵화 6점과 비교적 작은 2점 등 총 8점이 전시된다.   박대성 화백의 미 순회전을 기획한 가나아트 측은 “LACMA가 현재 리노베이션 중으로 전시 공간이 제한되어 ‘금강산’, ‘경주 남산’, ‘불국사 설경’ 등 8점의 작품만 선보일 수 있다”며 “한인사회에서 박대성 화백의 작품을 좀 더 가깝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한인타운에 위치하고 전시공간이 넓은 EK갤러리에서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1945년에 태어난 박대성 화백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수묵화 작가다.     5세부터 그림을 독학으로 배운 박 화백은 진경산수화 맥을 이으면서도 전통 수묵화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올해 LACMA 전시에 이어 하버드대 한국학센터(9월 19일~12월 31일), 다트머스대 후드 미술관(9월 24일~내년 3월 19일),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9월 30일~11월 27일) 전시 일정이 예정되어 있고 내년에도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메리워싱턴대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가나아트의 크리스티 박 기획부장은 “‘우리나라 전통이 어디에 와 있는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이번 미순회 전시를 기획했다”며 “전통 한국 수묵화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박대성 화백의 대표 작품을 통해 전통과 다음 세대가 맞닿는 접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주소: 1125 Crenshaw Blvd. LA   ▶문의: (323)272-3399 이은영 기자수묵화 박대성 박대성 화백 수묵화 거장 전통 수묵화

2022-07-10

[문화 산책] 탄생 110주년에 재조명된 예술가

한국 서양화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백철극(간노미) 화백의 작품세계를 다시 조명하는 회고전이 LA한국문화원에서 열렸다.   이번 회고전에는 백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나기’와 ‘비’ 연작, ‘예수 얼굴’ 연작을 비롯해서, 1940년도 일본미술가협회 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상하이 거리’ 등 24여점의 유화작품과 다양한 드로잉 작품, 생전에 남긴 편지와 사진 등의 자료가 폭넓게 전시되어, 작가의 작품세계와 삶을 다시 살펴보고 평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이 회고전은 몇 가지 중요한 관점을 시사한다. 우선은, 올해로 탄생 110주년을 맞은 백간노미 화백의 작품세계와 미술사에서의 위치에 대한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잊혀진 작가를 재평가하고 조명하는 의미있는 작업을 문화원 같은 공공기관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씀이 지금도 진리로 통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유족이나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고 갈무리하고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예술작품은 영원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공공기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이다.   백철극(간노미) 화백은 1912년 평안북도 박천 태생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1934년 일본 도쿄 니혼대학 미술과에 입학하여, 같은 과 동창이며 친구인 김환기 화백과 함께 공부했고, 한국 초창기 서양화 1세대의 한 사람으로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남관 등의 작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백 화백의 작품들에는 ‘간노미(Gannomi)’라는 서명이 적혀 있는데, 이는 평안도 사투리로 금방 낳은 어린애를 뜻하는 말로, 어머니가 사투리로 정감 있게 불렀던 것을 잊지 못해 평생 즐겨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 유학 이후 백간노미 화백은 한국과 중국에서 활동했고, 세계무대를 목표로 캐나다 몬트리올, 파리, 뉴욕, LA 등지로 옮겨 다니며 활발하게 자기 세계를 펼쳤고, 많은 상을 받으며, 관심을 모았다.   1970년 뉴욕 개인전을 시작으로 뉴욕과 파리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며,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한국적 정서의 개성적인 추상화로 주목 받았다.     말년에는 LA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펼치다가 2007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서양화 1세대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정작 대중이 백 화백의 작품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최근 들어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LA아트페어 등을 통해 유작들이 소개되는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LA한국문화원의 회고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문화원의 가장 큰 임무는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주류사회에 널리 알리는 일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지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잊혀진 예술가를 발굴해서 재평가하는 작업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 한국 문화는 풍성해지고, 한국문화의 세계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웬만한 대가들은 지자체와 협업으로 개인 미술관을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고, 살아 생전에 개인 미술관을 개관하는 작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문화 세계화의 첨단기지인 해외의 한인사회는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리 남가주 미술계에도 재조명하고 새롭게 평가해야 할 훌륭한 작가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한우식, 임규삼, 김순련, 황하진, 한국화가 이명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한 판화가 배융, 서예가 소지 강창원, 하농 김순욱 등…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따스한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 산책 재조명 예술가 이번 la한국문화원 한국문화 세계화 김환기 화백

2022-06-30

[문화 산책] 나이를 이겨낸 열정

 원로화가 장정자 화백의 개인전이 잔잔한 화제가 되었다.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8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고, 전시장을 가득 채운 검은색 위주의 그림들이 내뿜는 곰삭은 연륜의 향기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도 높이 평가할 만했다.   이번 장정자 개인전은 나이 탓하며 의욕을 잃어버린 노년층에 용기를 주었고, 타성에 젖어 게을러진 후배 작가들에게는 따끔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미주한인 예술계의 고질적 문제인 고령화에도 작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날이 갈수록 노령화되어가는 미주한인 예술계의 현실에서 90대의 고령에도 나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하는 박복수 시인이나 80대 중반의 나이에 미주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하고 첫 소설집을 펴낸 민원식 작가 같은 분들은 큰 힘이 된다. 그밖에도 나이를 잊고 열심히 활동하는 많은 노익장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이 같은 원숙하게 농익은 열정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건강해야 비로소 가능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이 나이에 뭘 하랴?”고 퍼질러 앉아버리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나이 먹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는 법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과감한 변신이 어려워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겁이 많아지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성(慣性)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습관으로 작품을 하는 ‘언어 기능공’이나 ‘조형 기능공’으로 전락하기 쉽다.   어느 분야나 비슷한데 일단 자기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어느 정도 명성이 생기면 그에 알맞은 성공이 보장되고, “아무개 작가는 어떠어떠한 작품을 한다”라는 식의 틀이 만들어진다. 그걸 ‘개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거기에 안주하게 된다. 그리고 매너리즘이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말년에 과감하게 변신하여 멋지게 성공한 작가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김환기 화백의 대표작인 전면 점화(點畵)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뉴욕에서 활동할 때 피어났다.   박생광(1904~1985년) 화백 같은 작가도 좋은 예다. 내고(乃古) 박생광 화백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장르를 구축해낸, 수묵채색화의 거장으로 평가 받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런데 이런 성취가 생애 마지막 8년 동안의 놀랍고도 대담한 예술적 변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에서 오랜 동안 공부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평가 받다가 70세가 넘어서 과감하게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주제를 수묵화에 강렬한 오방색의 채색을 혼합하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을 통해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성이 생명력으로 들끓어 오르는 그의 작품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 박생광 화백의 말이다.   한국적인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호를 ‘그대로’로 바꿨고, 작품에 적는 제작연도도  서기가 아닌 단기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운 작품세계를 연지 얼마 안된 1985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 산책 나이 열정 박생광 화백 미주한인 예술계 장정자 화백

2022-06-08

[문화 산책] 나이를 이겨낸 열정

원로화가 장정자 화백의 개인전이 잔잔한 화제가 되었다.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8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고, 전시장을 가득 채운 검은색 위주의 그림들이 내뿜는 곰삭은 연륜의 향기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도 높이 평가할 만했다.   이번 장정자 개인전은 나이 탓하며 의욕을 잃어버린 노년층에 용기를 주었고, 타성에 젖어 게을러진 후배 작가들에게는 따끔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미주한인 예술계의 고질적 문제인 고령화에도 작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날이 갈수록 노령화되어가는 미주한인 예술계의 현실에서 90대의 고령에도 나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하는 박복수 시인이나 80대 중반의 나이에 미주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하고 첫 소설집을 펴낸 민원식 작가 같은 분들은 큰 힘이 된다. 그밖에도 나이를 잊고 열심히 활동하는 많은 노익장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이 같은 원숙하게 농익은 열정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건강해야 비로소 가능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이 나이에 뭘 하랴?”고 퍼질러 앉아버리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나이 먹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는 법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과감한 변신이 어려워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겁이 많아지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성(慣性)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습관으로 작품을 하는 ‘언어 기능공’이나 ‘조형 기능공’으로 전락하기 쉽다.   어느 분야나 비슷한데 일단 자기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어느 정도 명성이 생기면 그에 알맞은 성공이 보장되고, “아무개 작가는 어떠어떠한 작품을 한다”라는 식의 틀이 만들어진다. 그걸 ‘개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거기에 안주하게 된다. 그리고 매너리즘이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말년에 과감하게 변신하여 멋지게 성공한 작가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김환기 화백의 대표작인 전면 점화(點畵)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뉴욕에서 활동할 때 피어났다.   박생광(1904~1985년) 화백 같은 작가도 좋은 예다. 내고(乃古) 박생광 화백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장르를 구축해낸, 수묵채색화의 거장으로 평가 받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런데 이런 성취가 생애 마지막 8년 동안의 놀랍고도 대담한 예술적 변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에서 오랜 동안 공부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평가 받다가 70세가 넘어서 과감하게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주제를 수묵화에 강렬한 오방색의 채색을 혼합하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을 통해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성이 생명력으로 들끓어 오르는 그의 작품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 박생광 화백의 말이다.   한국적인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호를 ‘그대로’로 바꿨고, 작품에 적는 제작연도도  서기가 아닌 단기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운 작품세계를 연 지 얼마 안 된 1985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박생광 화백의 예는 고령화로 날이 갈수록 활기를 잃어가는 우리 미주 한인문화계에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 산책 나이 열정 박생광 화백 미주한인 예술계 장정자 화백

2022-06-02

[문화 산책] 장욱진 화백과 루브르 박물관

날이 갈수록 세상이 작고 좀스러워지니 큰 어른이 그립다.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도 통쾌한 큰 어른이 꽤 계시다. 가슴이 답답할 때,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큰 어른을 만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닮으려 애쓰면 더 좋을 텐데….   미술 동네에서는 장욱진(1917~1990) 화백도 그런 큰 어른 중의 한 분이다. “나는 심플하다”라고 선언하고, 한국인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매우 단순한 화면에 담아낸 화가로 유명한 분이다.   통쾌한 일화를 통해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긴 스승으로 존경 받는 분이기도 하다. 그 장욱진 화백과 루브르박물관에 얽힌 일화 한 토막 소개한다.   “아버지(장욱진)를 모시고 루브르를 갔다. 그림 문외한도 한 번은 찾는 곳이 루브르 아닌가. 자동차를 가진 지인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입구에 당도하자 아버지가 뜻밖의 말을 했다. ‘밖에서 가다릴 터이니 일행들은 어서 들어갔다 오라.’ 차를 태워준 사람의 체면도 있고 해서 함께 들어가자고 재촉해도 소용없었다. 거듭 채근하는 장녀에게 마침내 한 마디 던졌다. ‘이 나이에 지금 루브르를 보아서 무얼 하겠단 말인가?’”(김형국 저 ‘하늘에 걸 조각 한 점’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 김병기 화백(1916-)은 “장욱진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자기 고집의 세계인 것이다”라고 글에 썼다. 화답 또한 시원하다.   인류 미술의 최고 성지(聖地)인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볼 것 없다”며 안 들어가는 고집, 그 사람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고 두둔하는 친구… 어지간한 신념과 배짱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참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일까?   장욱진 화백의 그림에는 네 마리의 새가 줄지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제자인 최종태 교수가 무슨 새냐고 물었다.   “참새다.”   “기러기라면 모를까, 참새는 줄지어 날지 않는데요….”   장욱진 화백이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하라 했다.”   그림의 주인은 오롯이 화가라는 선언이다. 이런 확고한 자존감이 있으니 루브르박물관에서 볼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통쾌하다.   장욱진 화백에 얽힌 일화는 다양하고 화려하게 전해온다. 전기나 제자들이 엮은 회고록 등을 보면 그런 전설적 일화들이 가득 실려 있다. “술 먹은 죄밖에 없다”는 말씀대로 술에 얽힌 흥겨운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어지간히 술을 즐기신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을 즐겼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엄격함도 고수했다. 철저한 작가정신이다.   각설하고, 인용문으로 칼럼을 채우고 나니 어쩐지 죄송스럽다. 하지만 섣부르게 쓴 글보다는 인용문이 정직한 것으로 믿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고 관심 있는 독자께서는 책을 사서 읽으시기를 권한다.   또 한 가지, 우리 같은 중생에게는 루브르까지 가서 안 들어가는 만용은 절대 금물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아, 언제나 루브르 박물관에 또 가볼 수 있으려나? 한 일주일 일정으로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면….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 산책 장욱진 루브르 장욱진 화백 루브르 박물관 전설적 일화들

2022-02-10

[분수대] 안녕, 찌빠

 수업시간 공책에 그림을 자주 그리던 남학생은 꿈이 많았다. 화가가 되고 싶어 그림을 배웠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에 낙방하고, 공군에 자원입대해 비행기만 실컷 봤다. 제대 후, 먹고살 거리를 고민하던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만화. 집에서 독학했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의 글에 따르면 그림을 그리다 틀리면 수정액으로 지우면 되는데, 그 수정액을 쓸 줄 몰라 처음부터 다시 만화를 그렸다. 만화가 신문수의 이야기다.   당시만 해도 신문엔 독자만화 투고가 가능했는데, 20대 청년이던 그 역시 만화를 그려 보냈다. 이렇게 눈에 띈 그는 ‘도깨비 감투’(1972년)로 주목을 받는다. 1979년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에 새 만화를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로봇찌빠(사진)’. “미국의 어떤 로봇 제작회사에서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 녀석이 어디로 도망쳤다는구나.” 설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빠가 펼쳐 든 신문에 등장한 도망친 로봇. 무려 미국에서 태어난 그 로봇이 한국에 있는 팔팔이네 집에 등장한다. 똑똑한 로봇이면 좋으련만,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   로봇 이름은 찌빠. 늘어나는 긴 팔, 코는 돼지코가 트레이드 마크인데, 이 코는 특히나 만능이었다. 미사일도 쏘고 영상도 보여줬다. 아이들이 그렇듯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며 찌빠는 팔팔이와 우정을 나눈다.   ‘로봇찌빠’는 1980~90년대 아이들의 친구였다. 십수년간 연재가 이어지며 아이들을 위한 일상의 웃음을 대변하는 ‘명랑만화’ 장르를 대표하는 대표작이 됐다. 2010년대엔 TV 만화로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년중앙’에 실리고 난 원고를 받아다 1편부터 모아왔을 정도로 신문수 화백은 찌빠에 대한 애정이 컸다.   찌빠를 그린 한국 만화의 대부, 신문수 화백이 82세 나이로 지난달 30일 별세했다. 찌빠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돼 부모의 자리에 섰다. 명랑만화가 가득 채웠던 아이들의 손엔 이제 수학이니, 영어니, 한자니 ‘학습’이란 이름을 단 만화책과 스마트폰으로 보는 웹툰이 들어서 있다. 세월은 변했지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며 아이들을 위해 그가 그려온 찌빠 이야기는 우리에게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현예 / 한국 페어런츠팀장분수대 안녕 독자만화 투고 신문수 화백 한국 만화

2021-12-05

[문화 산책] 여성을 ‘성자’로 그린 박수근

삶이 고달프고 쓸쓸할 때 음악이나 그림에서 위로를 받는다. 나는 화집을 꺼내서 어머니를 그린 그림들을 감상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고, 어머니와 나눈 애틋한 대화를 상상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가가 가졌을 축축한 감정도 함께 느끼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둘러싼 공기가 따스하고 편안해진다.   많은 화가들이 어머니를 그린 작품을 남겼다. 로트렉, 피카소, 마네, 고흐, 고갱, 세잔느, 샤갈, 휘슬러, 변월룡, 김종영 등 하나같이 감동을 주는 그림들이다. 어머니야 말로 인류를 지탱해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만 귀한 것이 아니다. 그 정점인 성모(聖母)부터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소중하고 성스럽다. 어머니란 그런 존재다.   예를 들어, 박수근(1914~1965)의 그림에 등장하는 아낙네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여인들도 모두 어머니요, 아내이기 때문이다.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낙네들은 일하는 모습이다. 아기를 업고 절구질을 하고, 행상을 하고,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일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살림’을 하는 여인들이다.   그는 여성을 ‘거룩한 성자’로 그렸다. 일하는 아낙네, 노인네 등 자신의 이웃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세속적 종교화처럼 그렸다. 존경하는 밀레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래서 박수근을 당시 사회를 리얼하게 그려낸 모더니스트로 평가하기도 한다.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나목(裸木)들은 지금은 헐벗었지만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상징한다.   ‘국민화가’, 또는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주인공 등으로 불리는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우선 한국적이고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내용이나 조형적 기법에서 그렇다. 박수근은 서양의 유화로 한국적 조형미를 잘 표출했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한 것임을 보여준 작가다. 그래서 훌륭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화강석 표면을 연상시키는 두껍고 울퉁불퉁 거친 마티에르가 특징이다. 절제된 색채의 물감을 여러 겹 쌓아올린 질감과 입체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발명품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은 소박하고 따듯하고, 정겹고 편안하다. 단순한 구성미, 마치 암각화 같은 단단한 조형은 한국의 냄새를 풍긴다. 김치나 된장찌개의 냄새 같은 것이다. 사람냄새 뭉클하다. 착한 인간성과 돈독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냄새다.   ‘박수근 아내의 일기’에 나오는 일화다. 박수근이 창신동 살 때다. 밖에 비가 내려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는데 행상을 하며 길에서 과일 파는 아주머니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박수근은 과일을 한 곳에서 사지 않고 여러 곳에서 나눠 샀다. 부인이 왜냐고 물으니 “한 아주머니에게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하지 않겠어?”   ‘박수근 회고전’ 지금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총 174점이 소개되는 역대 최다 전시로, 그동안 못 본 박수근 작품을 실컷 볼 수 있는 아주 드믄 기회라고 한다.   가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 엉덩이가 들썩거리지만 갈 수가 없으니 약이 오른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 산책 박수근 여성 박수근 작품 박수근 화백 박수근 아내

2021-12-03

"미인도 위작 맞다, 화랑협 회유로 거짓 진술"

천경자(1923~2015) 화백의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했다가 말을 뒤집었던 위작범 권춘식(69)씨가 "미인도는 내가 위작한 것이 맞다"고 다시 번복했다. 특히 권씨는 지난 3월 초 미인도를 그린 사실이 없다고 밝힌 이유에 대해 "당시 전.현직 화랑협회 고위 임원들의 회유를 받아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중앙일보가 27일 입수한 권씨의 자필 진술서에 따르면 권씨는 99년 동양화 위조 사건으로 입건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담당 검사였던 최순용(53) 변호사에게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미인도를 본인이 그린 것'이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 진술은 지난해 8월 천 화백이 사망한 후 유족들이 제기한 위작 논란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하지만 지난 3월 2일 권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수사에 협조하면 감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우물쭈물하다가 시인했다"고 번복했다. 하지만 50여 일 뒤 천 화백 유족 측에 건넨 진술서에서 권씨는 "91년 미인도 사건 발생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의 감정위원으로 참여했던 A씨가 전화해 '진술을 번복하라. 착오였다고 하면 간단하다'고 회유했다"고 적었다. 또 "현 화랑협회 고위 관계자도 전화를 해 '현대미술관의 원본 그림도 직접 본 적이 없지 않느냐. 착오였다고 해라'고 했다"고 전했다. 권씨는 위작할 당시인 79~80년 무렵 S화랑 대표의 의뢰로 3점을 그려준 게 있고, 그 무렵 서울 인사동 다른 화랑의 주인이 화첩 종이와 견본 그림을 가져와 4호 크기(미인도 사이즈 27×22㎝)의 작은 그림을 총 5점 정도 그렸다고 기억했다. 그는 "(99년 검찰 진술 때) 미인도를 15년 전에 그렸다고 진술했는데 이 때문에 위작 시기가 84년으로 나가면서 많은 오해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등은 권씨가 84년에 위조했다고 주장했지만 80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권씨의 위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문병주 기자

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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