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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김창열의 물방울에 관한 명상

영롱한 물방울은 찰나의 아름다움이다. 아주 잠시 머물다 간다. 흘러내리거나 스며들거나 증발하거나 말라버리거나….  
 
아무튼 스러진다. 우리네 인생처럼 덧없다.
 
물방울은 스러지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의 긴장된 빛남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김창열 화백(1929~2021)은 50년간 오로지 물방울만 그렸고, 세계적 공감과 명성을 얻었다. 50년 외길,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한 길을 고집스럽게 파고든 수도자의 작업 태도이다. 화가의 말처럼 “영혼과 닿는” 작업이기도 했다.
 


50년 동안 그린 물방울이 도대체 몇 개나 될까? 그리면서 얼마나 몸과 마음이 축축했을까? 오로지 물방울만 그린다? 지겹지 않았을까?  
 
한 인터뷰에서 화가는 “물방울을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이 수없이 솟아오른다. 물방울이 내 운명처럼 돼버렸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에 담긴 사연과 아픔을 알고 나면, 화가의 절실한 집념이 이해된다. 물방울에 깊은 상처가 스며있다.  
 
참혹한 전쟁의 상처!
 
김창열 화백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월남하여, 실향민으로 타향을 전전했다. 검정고시로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와중에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넘나들었고, 전쟁에서 여동생을 잃었고, 중학교 동기 120명 중 60명이 죽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다. “당시 난 비명을 지르거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전쟁 통에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화가를 괴롭혔다. 그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리고 전쟁으로 영영 이별하게 된 북쪽 고향과 그리운 아버지의 추억들….
 
“진혼곡이지. 내게 그림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전쟁에서 본 피를 지우려 물방울을 그렸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 “(물방울 그리기는)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내 많은 친구의 혼을 달래는 살풀이였다.” “물방울은 내 친구들의 살점이고 피다. 그러나 그게 늘 피로 응고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것이 물방울이 됐고 눈물이 됐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리기는 비극적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인간의 소리 없는 비명, 불안을 지우기 위해 평생 반복하고 또 되풀이한 수행, 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그는 화실에서 마치 연금술사처럼 오랜 세월 연구한 끝에 그가 본 모든 피를 마침내 순수한 물의 원천으로 만들어냈다. 그 물방울은 치열하고 아린 눈물이다. 물방울은 그가 평생 도달하고 싶어 했던 평온의 경지이자 충만한 무의 세계였다. 아름답다.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화가를 구원한 것은 그림이었다. 매우 상징적이다. 화가의 아들은 아버지의 고뇌로 가득한 생애와 예술세계를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제목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그 영화가 완성된 얼마 후 화가는 세상을 떠났다.
 
“죽으면 나무 밑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제주도 김창열미술관 인근에 수목장을 치렀다. 마지막까지 한 방울의 물방울이고자 했다.
 
소원대로 ‘너절한’ 화가로 남지 않았고, 제주도와 서울에 번듯한 개인 미술관이 마련돼 작품들이 잘 모셔지고, 아들이 만든 영화에서 자기 작품에 대해 육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요, 복 받은 예술가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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