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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겨낸 후엔 한층 단단해질 것

선생님, 보내주신 산불 걱정과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바다를 건너온 따스한 말씀 한마디에 제 마음의 답답한 어둠과 잿더미가 많이 가시는 느낌입니다. 특히, “하늘을 믿고, 굳건하게 이겨내시기를. 이겨낸 후엔 한층 단단해질 것으로 믿어요”라는 말씀이 가슴을 울립니다.   한마디 말씀이 이렇게 큰 울림을 주다니…. 현실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연말 한국에서 들려온 느닷없는 비상계엄, 탄핵 찬반 갈등과 갈라치기, 비행기 참사 같은 서글픈 소식에 잔뜩 우울해 있던 차에 산불까지 일어나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 산불은 참 대단합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산불이 연례행사처럼 일어난 탓에 어지간히 면역력이 생겼는가 싶었는데, 이번 산불은 감당이 어렵네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자연재해라고 할 정도로 피해가 크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아마겟돈’이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저희는 직접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작은 산불이 일어나 조마조마했습니다. 대피령이 내리면 바로 피할 수 있도록 짐을 싸놓고 뉴스를 응시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할 수 없죠. ‘아보하’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이렇게 소중한 줄을 미처 몰랐으니….   그런데, “아, 다행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네요. 피해를 입은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죠. 아무런 피해 없는 것이 오히려 미안할 지경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이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이 깨달음은 아마도 비극을 극복하고 일상을 되찾는 일에 큰 정신적 기둥이 되고,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아픔을 함께 느끼는 일 말입니다.   산불 피해가 커지자 한인사회가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LA 한인회를 중심으로 대피소를 찾아가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고, 모금 운동을 전개했고, 미 주류 언론들이 그 모습을 모범 사례로 소개했습니다.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사실, 더 큰 걱정은 산불이 잡힌 후의 일입니다. 산불이야 어찌 되었건 잡히겠지요. 미 전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소방 인력도 달려와 힘을 합하고, 죄수들까지 동원하고, 바닷물까지 퍼붓고 있으니.   하지만, 산불이 진화된 뒤에 잿더미가 된 수만 채의 집을 다시 지어 보금자리로 만드는 일, 사람들의 마음에 내려앉은 잿더미를 털어내는 일에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할까요. 엄청난 참을성과 노력이 필요할 텐데요.   어디 그뿐인가요. 산불의 원인 규명도 필요하고, 재발 방지책 마련도 시급합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심각한 산불이 자주 일어날 텐데 그 원인은 기후변화 탓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강수량과 심한 가뭄이 번갈아 발생하면서 대형 재난을 만들어내는 ‘기후 채찍질’ 현상도 언급합니다. 대기가 물을 빨아들였다가 내뿜는 ‘대기 스펀지’ 효과가 커지면서 홍수와 가뭄을 오가는 극단적 날씨가 강화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그 기후변화의 주범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지요.   이런 판국에, 정치가들은 벌써부터 싸움질로 바쁘시고, 아니면 말고 식의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산불보다 더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말씀을 굳게 믿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이겨낸 후엔 한층 단단해질 것이라는 말씀, 이겨내기 위해선 ‘우리’라는 마음이 꼭 필요하겠죠.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무척 어렵겠지만, 손에 손잡고 어깨동무하는 일 정도야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도 할 수 있겠죠.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산불 피해 산불 걱정 이번 산불

2025-01-16

[문화산책] 젊은 신바람 문화의 엄청난 힘

참으로 어수선한 연말연시를 보냈다. 한국의 느닷없는 비상계엄과 탄핵의 소용돌이가 참 어지럽다. 순리대로 극복되고 정상의 삶으로 돌아오려면 아직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살벌하고 시커먼 불확실성이 우리를 슬프고 답답하게 한다. 조국이 어두우면 우리는 더 컴컴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국이니까.   하지만, 그런 어둠 속에도 우리는 귀한 것을 얻기도 했다. 건강한 국민들이 보여준 희망이다. 한국 국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믿음, 특히 젊은이들이 보여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위문화는 실로 놀랍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세계가 놀라고, 외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감탄하며 부러워했다. ‘광장의 품격’ ‘경쾌한 저항’이라는 멋진 말도 나올 정도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 낭독의 밤’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이 보여준 진실과 용기 때문에 감동을 많이 했어요. 자정이 넘은 시각에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집에서 달려나가서, 모여서,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 서 있기도 하고, 맨주먹으로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군인들을 껴안아 달래기도 하는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공격적인 구호와 깃발, 머리띠, 주먹질만 난무하는 살벌한 시위를 흥겹고 신바람 나는 축제로 변화시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야무지게 다 하고, 수만 명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정연하게 질서를 지키고,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는 감동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2030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 집회 참가자들은 온갖 아이돌의 형형색색 응원봉을 흔들며, K팝을 떼창으로 불렀다. “오랜만에 콘서트에 간 것처럼 스트레스 풀고 왔어요. 큰 소리로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할 말 다 하고 왔습니다.”   그들이 들고나온 깃발이나 손피켓에 담긴 풍자와 해학은 뉴욕타임스 같은 외국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연맹’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전국 수족냉증 연합’ ‘직장인 점심 메뉴 추천 조합’ ‘전국 과체중 고양이 연합’ ‘(내향인)’ ‘나, 혼자 나온 시민’ 같은 재미있는 깃발들….     어떤 소속이나 주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각자의 정체성을 발랄하게 드러낸 것이다. 과거의 촛불 시위처럼 하나의 상징으로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깃발과 응원봉으로 수없이 다양한 개개인이 하나의 지향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팽팽한 긴장과 대결의 상황을 재미와 신바람으로 풀어내면서 하고픈 말은 다하는 슬기, 이것이 바로 세계로 뻗어가는 K-컬처의 정신적 바탕이자 저력이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의 이런 시위문화를 ‘K팝 문화의 진화된 형태’로 해석하기도 한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드는 과거의 과격 시위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한 시위라는 것이다.   새로운 집회문화의 바탕을 거슬러 올라가면, 월드컵 축구 응원과 촛불 시위가 있고, 더 올라가면 판소리나 탈춤의 질펀한 풍자와 해학, 익살, 골계의 미학이 있다. 그것을 오늘의 암울한 현실에서 살려낸 젊은이들이 자랑스럽다. 희망을 건다. 제발, 기성세대를 닮지 말기 바란다, 제발!   정치에 대한 생각이나 이념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모두의 생각이 똑같으면 그건 병든 사회다. 문제는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적대시하며 싸우지 말고,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자세일 것이다.     대동소이(大同小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가르침, 거기에 더해 요새 젊은이들처럼 흥과 신바람과 재미를 더하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   신문기사의 한 구절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국은 정치인들이 잠든 사이에 성장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신바람 문화 깃발과 응원봉 시민의식과 민주주의 촛불 시위

2025-01-09

[문화산책] 2024년 미주 한인 문화계 결산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고갯마루에 서서 지난 한 해 문화예술계를 되돌아보고 정리한다. 2024년 남가주 한인 문화는 전반적으로 코로나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2024년에도 K-문화가 상승세를 이어가며 빛나, 우리를 자랑스럽게 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정점을 찍은 느낌이다. 한국문화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정상에 섰다.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과 연기상, 칸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의 큰 상을 수상했고,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음악 콩쿠르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는 건 뉴스도 아니게 되었다. 대중음악에서도 방탄소년단의 뒤를 이어 빌보드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아이돌 그룹의 활동이 눈부시다.   미술 쪽에서도 세계 정상의 미술관들에서 한국 미술 특별전을 열리고 있고, 이우환 등에 이어 서도호, 이불, 양혜규 등 젊은 작가들에 주목하여 초대전을 열고 있다.   이제 한국문화는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 선두에 서서 인류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갈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런 전망이 많다.     그만큼 우리 예술가들의 책임과 정신적 부담도 커졌다. 우선은 한류 열풍을 바람직하게 이어가는 일이 숙제다. 이제 서양 것 흉내 내기로는 어림도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하고 당당하게 내세우고 독창적 예술세계를 열어야 한다. 과연 한국적인 것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한국문화의 세계적 열풍은 미주 한인 문화계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물론, 매우 긍정적인 영향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미주 디아스포라 문인들에게도 큰 자랑이요, 자극이 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한글로 글을 쓰는 작업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당당한 자부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한강 작가에게 집중되는 관심 때문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1.5세 소설가 김주혜 작가의 톨스토이 문학상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 쾌거다. 그것도 반일투쟁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로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앞으로 영어로 글을 쓰는 1.5세, 2세 작가들에게 기대를 걸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미술계는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는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미술가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현혜명 회고전, 유제화 초대전을 비롯한 많은 전시회가 꾸준히 열렸다.   UCLA 해머 뮤지엄에서 열린 ‘한국실험미술전’은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회로 꼽을 수 있다. 반면에 LA카운티 뮤지엄이 체스터 장씨의 기증품 중 35점을 엄선하여 개최한 ‘한국의 보물전’은 위작 논란에 휩싸였는데,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K-문화가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쏠렸다. 전통문화 공연으로는 지난 11월7~10일 나흘간 풀러턴에서 열린 ‘어흥 문화예술축제’가 눈길을 끌었다. 국악경연대회, 한복패션쇼, K팝, 비보이 공연, 다양한 먹거리 등 풍성하게 열린 이 축제는 문화 교류의 축제로 정착될 것으로 기대된다.   LACMA에서 열린 ‘한국전통국악의 밤’에는 박종대, 박영안, 김동석, 이태준, 유희자 등 이 지역 원로 국악인들이 출연해 우리 전통음악의 뛰어난 예술성을 널리 알렸고, 김응화 무용단의 카네기홀 공연 참가도 화제가 되었다.   LA 한국문화원과 코리언 아메리칸 뮤즈(KAM)가 ‘가주 한복의 날’ 기념으로 개최한 ‘한복 특별전’도 큰 관심 속에 열렸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문화계 미주 미주 한인 노벨문학상 수상 남가주 한인

2024-12-26

[문화산책]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 열풍

2024년에도 K-문화의 뜨거운 열기가 이어져 우리를 자랑스럽게 했다. 미국사회에서 그 열기가 시작된 것은 K-팝,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였다.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파급력도 클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적 스토리나 정서는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 그 배경에는 〈미나리〉 〈기생충〉 〈파친코〉 〈오징어게임〉 등이 있다. 이 작품들 덕분에 한국어 영화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2024년 할리우드에서 큰 관심을 모은 K-문화 콘텐츠의 대표적 작품은 드라마 〈성난 사람들〉과 저예산 독립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였다.   이성진 감독, 스티븐 연 주연의 〈성난 사람들(BEEF)〉은 골든 글로브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3관왕에 이어,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무려 8개 부문을 휩쓸며 돌풍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 화제를 모았다. 특히 스티븐 연은 이외에도 미국 비평가협회상, 미국 배우조합상에서도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한국계 이민자의 삶에 밴 현대인의 고독과 분노를 그려내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낸” 드라마가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다.   한편,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은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의 데뷔작이다.   전생(前生)의 인연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베를린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영국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어서 2024 필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고, 미국 독립영화상인 고섬 어워즈 작품상을 받았다. 젊은 여자 감독의 첫 작품이 이렇게 큰 주목을 받은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다.   이와 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열풍을 반영하여,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윤여정 회고전〉을 마련해 〈미나리〉 〈화녀〉 등 대표작 8편을 상영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코너를 마련해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고 있는 영화인들을 집중 조명했다.   할리우드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숨은 한인 인재들도 기대를 모은다.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K-뮤지컬의 미국 무대 진출도 주목된다. 대표적인 예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위대한 개츠비〉다. 한국의 제작사 오디컴퍼니가 현지 제작한 이 작품의 의상을 담당한 린다 조는 토니상 의상상을 수상했다. 올해 토니상에서는 하나 김이 〈아웃사이더〉로 조명상을 받았다.   남가주에서는 한국에서 제작된 뮤지컬 〈프리다〉가 USC 빙 시어터에서 공연되어 화제를 모았다.   한편, 남가주 한인 연극계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뮤지컬 도산〉이 윌셔이벨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선교극단 이즈키엘의 성탄공연이 있었다. 한편, 〈모임극회〉는 50주년을 맞아 자축행사를 가졌다.   K-콘텐츠의 세계적 위상으로 한국인이 세계 문화 속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아카데미상, 에미상, 골든글로브, 토니상 등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최근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열풍은 미국에 사는 한인인 우리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심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이민자의 정체성을 담아낸 화제의 작품들은 이민 온 한인들의 삶을 역사적 맥락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열린 시각을 통해 백인 주류사회의 한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성난 사람들〉의 이성진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감동은 우리 안에 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코리안 콘텐츠 문화 콘텐츠 한국계 이민자 어워즈 작품상

2024-12-19

[문화산책] 올해 별이 된 문화계 인사

올해도 많은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별세한 사람들은 한 시대의 마침표인 셈이다. 마침표를 찍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새 문장을 시작하듯 세월이나 시대도 마침표를 찍는다. 그 문장 안에는 수많은 느낌표와 물음표, 쉼표, 말없음표, 따옴표 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가신 이들의 삶은 나의 세상살이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기도 하고, 추억의 한 장면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리움에 젖기도 하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가신 이의 삶을 그리움으로 되새김질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올해 우리 곁을 떠난 문화 예술 쪽 몇 분의 뜻깊은 발자취를 되살펴 본다.   ▶배우, 연기자들   ‘세기의 미남’으로 이름을 날렸던 영화배우 알랭 들롱(1935~2024)이 우리 곁을 떠났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일약 전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는 들롱의 신비로운 외모는 우리 젊은 시절 청춘의 한 페이지를 불러온다.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프랑스로 돌아온 들롱은 1960~1970년대 프랑스 영화계를 이끈 대표적인 배우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고, 2017년 은퇴를 선언했다.   말년에는 거의 활동을 못했다.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고, 오랜 투병 끝에 안락사를 결정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한국의 배우로 올해 세상을 떠난 스타는 ‘한국의 그레고리 펙’으로 불린 미남배우 남궁원, 감칠맛 나는 감초 연기로 이름난 오현경, 일용엄니 김수미, 연극배우 권성덕 등이 있다.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1935~2024)는 백인 지휘자 일색의 지휘계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양의 마에스트로였고, 당대의 거장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의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지휘자였다. 그는 1973년부터 29년 동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이후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그는 그래미상을 2회 수상했고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으며, 케네디 센터의 명예 음악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시아 음악가들의 롤모델’이었지만, 동양인 지휘자에 대한 편견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1980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지휘하던 중 관중들의 야유를 받은 일은 유명하다.   2010년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여러 합병증으로 무대에 제대로 서지 못했다. 하지만 2022년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고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을 지휘한 장면으로 전 세계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인, 문인들   시집 〈농무〉로 한국 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신경림 시인(1936~2024)은 대중의 삶과 괴리된 현학적인 작품을 경계하며, 당대의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뚜렷한 문학관을 견지하며, ‘민중문학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1973년 발간한 첫 시집 〈농무〉는 1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신경림 시인은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문단의 자유실천운동과 민주화운동에도 부단히 참여해 왔다. 암으로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한편, 성춘복 시인(1936~2024), 김광림 시인(1929~2024), 송기원 소설가(1947~2024) 등 문인이 올해 세상을 떠났다. 미주 한인문인으로는 손용상 소설가(1946~2024)가 올해 별세했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문예지 〈한솔문학〉을 발간하며, 미주 이민문학 발전에 앞장섰다.   그밖에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작가이자 똘레랑스를 역설한 언론인 홍세화(1947~2024), UC 어바인 교수로 재직하며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1세대 디아스포라 작가 민영순(1953~2024) 등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아침이슬〉의 작곡가이자 가수인 ‘뒷것’ 김민기(1951~2024)도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노래 한 구절을 모든 가신 이들에게 바친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문화계 인사 지휘자 오자와 백인 지휘자 미남배우 남궁원

2024-12-12

[문화산책] 가로쓰기와 내리쓰기의 다름

때로는 지극히 당연하게 넘기는 일의 바탕에 근본적인 문제가 깔려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것을 찾아서 꼼꼼히 살펴 교훈을 얻는 일이 인문학의 시작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책이 그렇다. 지금 우리가 읽는 책이나 신문은 당연히 가로쓰기로 되어 있다. 왼쪽 위에서 옆으로 읽어가며,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읽어가는 형식이다. 서양의 책들과 같은 구조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대로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은 오랫동안 내리쓰기를 해왔다. 우리의 옛 문헌들은 띄어쓰기 없는 내리쓰기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가로쓰기를 전용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책이나 신문이 모두 내리쓰기였다. 중국어 책이나 일본어 책은 아직도 내리쓰기를 한다. 컴퓨터의 영향으로 가로쓰기로 변해가는 중이긴 하지만, 아직은 내리쓰기 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가로쓰기 또한 띄어쓰기와 마찬가지로 ‘구미선진국 따라 하기’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가로쓰기를 하는 까닭은 ‘사람의 눈이 가로로 찢어져 있으니 가로쓰는 것이 과학적이다’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다.   “책의 판면(版面) 짜기에서, 1980년대까지 이어 오던 세로짜기가 하루아침에 가로짜기로 바뀌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화조직이 ‘냄비현상’에 휘둘리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세로짜기에서 가로짜기로 가더라도, 오랫동안 세로짜기 또는 세로쓰기를 해온 동아시아의 문자문명이 하루아침에 가로쓰기로 가야 하는지, 그 사유를 분석하고 검토하고, 그리고 검증하고 하는 신중함과 진지함이 크게 결여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중략〉… 알파벳 문화에의 맹종을 경계하는 지적에 귀 기울일 일이라고 생각한다.”-이기웅,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 중에서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옛 문화를 읽을 때, 특히 그림을 볼 때 드러난다. 세상을 보고 표현하는 관점과 방법이 다른 것이다. 가로쓰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가게 되어 있는데, 내리쓰기 문화에서는 오른쪽 위에서부터 내리읽으면서 왼쪽으로 옮겨 가게 된다. 별것 아닌 차이 같지만, 한국미술사학자 오주석(吳柱錫)의 설명을 들어 보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을 읽는 동서양의 방식 차이는 아주 작은 듯하나,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예상 밖으로 엄청나다. 우리 옛 그림은 애초 가로쓰기 식으로 보면 그림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옛 화가들에게는 세로로 읽고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으므로, 보는 이도 당연히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 쪽으로 감상해 나갈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도를 잡고 세부를 조정하고 또 필획(筆劃)의 강약까지도 조절했기 때문이다.”-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이렇게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는 우리 문화 전반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인제 와서 내리쓰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전통을 무시하고 뭉개버리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그런 일이 너무나 많다. 현대화,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속절없이 스러져 되살릴 수 없어진 무수한 우리 것들, 납득하기 어려운 쏠림 현상들….   이건 그저 농담이지만, 내리쓰기 책을 읽을 때는 고개를 끄떡거리게 되는데, 가로쓰기를 읽을 땐 도리도리를 하게 된다. 도리도리와 끄떡끄떡, 매몰찬 부정과 넉넉하고 수더분한 긍정의 차이….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가로쓰기 애초 가로쓰기 한국미술사학자 오주석 알파벳 문화

2024-12-05

[문화산책] 유홍준 잡문집 읽는 즐거움

‘만약 이민을 오지 않고 한국에 그냥 살았다면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이 탓일까? 그렇다고 이민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타향살이의 아쉬움이야 많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현실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그래도 가끔 고국 생각에 잠기는 것은 향기로운 참사람, 스승의 짙은 그림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 노릇을 해온 큰 어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한층 간절해진다.   유홍준 잡문집 ‘나의 인생 만사 답사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 많이 부러웠다. 이 책에는 저자가 스승으로 모셨던 어른들, 짙은 우정을 나눈 벗들과 예술가 등 사람에 대한 진득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스승으로는 리영희, 백기완, 신영복, 통문관 옛 주인 이겸로 선생들과의 인연과 존경심을 이야기했고, 몸이 자연과 합일(合一)하는 ‘자연춤’을 꿈꾼 춤꾼 이애주, 광주 민주화운동의 대들보 박형섭, 똘레랑스를 역설한 언론인 홍세화, 가수 김민기 등의 친구들과 나눈 진한 우정과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화가 신학철, 민중미술의 전설이 된 판화가 오윤, 김지하 시인, 서예가 김가진 같은 예술가들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진면목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한국 3대 구라’로 불리는 이름난 글쟁이답게 유홍준의 글은 맛깔스럽다. 얼핏 보기엔 사사로운 사연이나 일상사를 자분자분 이야기하면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삶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이영희 선생의 주례사, 우리의 구전 민중설화를 순우리말 토속어로 이야기한 작품을 통해서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중적 삶의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업에 매진해온 백기완 선생, 개성적인 ‘어깨동무체’를 개발한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 빼어난 시인이자 훌륭한 현대 문인화가 김지하 시인의 49제와 그림 이야기, 김민기를 보낼 때 가족의 요청에 따라 영결식 없는 조용한 분위기의 가족장으로 치러진 것에 대한 아쉬움 등….   만약 한국에 그냥 살며 활동했다면, 나도 큰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람답게 사는 지혜를 배우는 영광을 누릴 기회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속 깊은 친구나 동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멋진 친구로 지냈을 법한 인물들도 많다.   사실,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일은 글이나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대하고 모실 때처럼 절실하게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우리 삶에서는 아주 사사롭고 작은 일에도 커다란 울림이 있는 법이다.   우리가 목말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삶의 지혜다. 지식이라면 컴퓨터나 인공지능으로 넘쳐날 정도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나 정보는 건조하다. 그래서 생생하고 따스한 깨우침을 주시는 스승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유홍준처럼 스승님을 가까이 모시고 체온과 숨결을 느끼며, 가르침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 스승을 찾아 모시기라도 해야….   나는 그런 목마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배울 점이 있는 분을 내 멋대로 스승으로 모시는 길을 택했다.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을 스승으로 모시고, 영화를 통해 예술가의 자세나 인생의 철학을 배우는 식이다. 궁금한 것을 그때그때 여쭙고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안타까움은 크지만, 그래도 큰 공부가 된다.   마음을 열고 살피면 스승은 우리 인생 도처에 계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유홍준 그림 이야기 신영복 선생 백기완 선생

2024-11-28

[문화산책] 아빠, 오빠, 자기야

‘오빠’라는 낱말이 한동안 한국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었다. 논쟁의 핵심은 오빠라는 호칭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냐, 친오빠냐 남편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웠다. 우리말에 부부 사이의 호칭이 참으로 애매하고 느슨해서 생긴 희비극이었다.   지난 시절에는 남편을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한동안 유행했었는데, 이는 자신의 친정아버지를 부르는 것인지 남편을 부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일본식 어법으로 알려진 말이므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우리말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아빠’가 ‘자기’를 거쳐 ‘오빠’로 진화(?)한 모양이다. 요새 젊은 아내들 사이에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연애 시절에 부르던 호칭을 결혼 후에도 그냥 자연스럽게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호하게 말해서, 아빠건 오빠건 그건 명백한 ‘근친상간’이다. 그러니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세상이 된 셈이다.   보통은 ‘여보’, ‘당신’이 일반적 호칭이지만, 어쩐 일인지 안 쓰는 부부가 많은 모양이다. 특히, 신혼의 젊은 부부들은 매우 어색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개 씨, 아무개 아빠, 저기요, 이봐요, 나 좀 봐요 등으로 얼버무린다.   남편을 부르는 가장 보편적인 호칭어가 ‘여보’인데, 이 말이 부부간의 호칭어로 정착된 것은 뜻밖에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세기 초, 중반에도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다.   한편, ‘오빠’라는 호칭은 조용필, 나훈아, 남진 같은 가수들을 열광적으로 따르는 ‘오빠부대’에서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을 K-팝 열풍 덕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국제어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오빠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럽게 알맞은 호칭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에 대해 우리말 전문가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궁금해서, 전문가가 권하는 표준안 하나를 예로 살펴본다. (출처: 한국다문화사회연구소)   남편을 부르는 호칭 △신혼 초- 여보, ○○씨, 여봐요 △자녀가 있을 때- 여보, ○○ 아버지, ○○아빠 △장년, 노년- 여보, 영감, ○○할아버지   아내를 부르는 호칭 △신혼 초- 여보, ○○씨, 여봐요 △자녀가 있을 때- 여보, ○○엄마, ○○어머니 △장년, 노년- 여보, 임자, ○○엄마, ○○할머니   아무튼, 흔히 쓰는 자기, 오빠, 아저씨 등은 안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하나같은 주장이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자기 아내를 ‘와이프’라고 부르는 것을 흔히 보는데, 이런 호칭도 어딘가 어색하다.   이런 식의 문제에 부딪힐 때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말을 지극히 사랑한 선구자들이다. 백기완, 이어령, 소설가 김동성 같은 분들….   이어령 선생은 자신이 이룬 숱한 업적 중에서 가장 보람있게 여기는 일로 ‘갓길’이라는 낱말을 정착시킨 것을 꼽은 바 있다. 백기완 선생의 우리말 사랑은 참으로 지극하여,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도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등의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우리말 사랑은 김지하, 김민기, 전인권 등 많은 문화예술인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다.   우리 한글은 매우 과학적이어서 배우기 쉽다고 하는데, 사실은 깊이 들어갈수록 정말 어렵고 속 깊은 언어다. 호칭이나 존댓말 등도 그렇다. 잘 찾아보면, 부부간의 호칭도 아름답고 정겨운 순우리말이 있을 것 같은데….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아빠 오빠 아빠 오빠 아무개 아빠 우리말 전문가들

2024-11-21

[문화산책] 문학상 이야기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계기로, 책이 부쩍 많이 팔리고, 문학상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상이란 아무튼 좋은 것이다. 받는 이에게는 영광스러운 격려가 되고, 독자들에게는 믿고 읽을 기회를 제공한다. 상금도 물론 고맙고, 사회 전체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도 보람찬 덤이다. 그래서 누구나 받고 싶어 한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상 싫어하는 사람 없을 것이다.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상도 너무 흔하면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지금 우리 세상에는 크고 작은 문학상이 참 많다. 종류도 다양하다. 너무 많은 거 아니냐는 걱정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한국의 경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주요 문학상 숫자가 35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10년이면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무려 3500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문학상 하나 못 받으면 작가 대접받기도 어렵다는 말도 될 것 같다.   남가주 한인 사회에도 열 개가 넘는 문학상이 있고, 한국의 문학상들도 해외작가상 부문을 따로 만들어 디아스포라 문인을 대접하는 예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문인들의 약력을 보면, 무슨무슨 문학상을 받았다는 항목이 빠지지 않는데,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고 여러 개의 문학상으로 빛나는 작가들이 많다. 신기하기도 하고, 은근히 부럽기도 하다.   사소한 일이지만, 미주 지역의 문학상은 대부분이 문인 스스로 응모하는 형식이다. “상 받고 싶으니, 나에게 주시오”라는 식인 것이다. 평론 분야가 거의 황무지 수준이고, 발표된 작품을 모두 꼼꼼하게 챙겨 읽을 여유도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이건 도무지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염치없이 문학상을 받은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예 문학상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 올곧은 문인도 적지 않다. 문학상이란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누구인가? 라는 근본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예술상이 다 그렇겠지만, 문학상이란 올림픽 메달 같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운동경기처럼 등수를 판가름할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예술에 등수를 매긴다는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매우 다양한 기능과 성격을 가진 문학작품을 한두 가지 단세포적 기준과 규범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잔인한 행위다.   그러다 보니, 상을 둘러싼 말도 많아지게 마련이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문학상도 구설에 시달리곤 한다. 정치적 계산, 지역 안배, 성별에 대한 배려 등등….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작가를 선정하기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3분지 1은 ‘최선의 선정’이 아닌 ‘이상한 선정’이었다는 악담도 나온다.   인류 문학사를 빛낸 문호들 가운데도 노벨문학상과 연이 없는 작가가 많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 아일랜드의 윌리엄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독일 문학의 거장 라이나 마리아 릴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마크 트웨인, 존 업다이크 등등이다. 사르트르는 노벨상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런가 하면, 전혀 뜻밖의 인물을 선정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2016년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건(?)은 아직도 이런저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무려나, 오랜 세월 노벨문학상을 구걸하듯 선망해온 한국 문단의 구차함을 통쾌하게 날려준 한강 작가에게 머리 숙여 감사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다음번 한국 작가는 누구일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문학상 이야기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요 문학상 문학상 하나

2024-11-14

[문화산책] 시인 도산, 좋은 인간 도산

매해 11월 9일은 ‘도산 안창호의 날’이다.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생일인 11월 9일을 가주 기념일로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날을 무심하게 그냥 지나치곤 한다.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   민족 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자 도산 선생은 우리 민족과 미주 한인 사회의 큰 정신적 스승이시다. 선생께서는 가주에서 민족 지도자로 활동하며, 대한인국민회 창립 등 한인 사회 기틀을 다지셨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 좋은 어른, 좋은 남편, 좋은 부모로서의 도산이 솔선수범 보여준 인간적 면모를 새롭게 인식하고 배우는 일이다. 방향을 잃고 허둥대는 오늘의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 삶의 바른 길잡이로 삼아야 할 덕목이다.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산은 좋은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도산이 지은 창가(唱歌) 작품은 거국가, 점진가, 흥사단 입단가, 격검가 등 25편이 전해지는데, 이 창가들은 선구적 면모를 갖추고 있어서, 우리 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문학사적 의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평가다.     문학평론가 이형권 교수는 시인 도산을 이렇게 평가한다. “도산의 창가는 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애국 계몽기 혹은 근대계몽기였던 당시의 시대적 흐름과도 밀접히 관련을 맺는다. 그의 창가 작품은 당대의 문단 상황에 견주어볼 때 상당한 수준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는 명민한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역사의식 혹은 시대 감각을 노래한 선구적 시인이었다.”   이처럼 도산은 구한말의 신지식인으로서의 지적인 능력과 시대 감각, 출중한 연설 능력에 더해 시인으로서의 창작 능력도 갖춘 인물이었다. 또한, ‘애국가’ 가사도 도산의 작품이라는 설이 아직도 유효하다. ‘애국가’의 원작자이든 아니든 도산은 ‘애국가’가 오늘날의 가사로 정착되는 데에는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은 창가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많은 작품을 창작했고, 독립협회와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애국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매개로 창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창가가 지니는 강한 호소력과 동화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노랫말도 뛰어나지만, 더 소중하고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인간 도산의 삶 밑바닥에 진하게 깔려있는 시정신이다. 그 시정신의 바탕은 사랑의 마음이다. 도산의 편지 몇 구절만 읽어보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부인과 아들,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절절한 사랑과 시심(詩心)이 가득하다. 그가 얼마나 정이 많고 자상한 사람인지 느껴져 옷깃을 여미게 된다.     눈물 나는 구절도 많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나라 위한 일을 하느라 가족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는 구절, “식구들의 사진이라도 보내어 주시오”라는 부탁, “내년 봄이나 여름에는 집에 다니어 오려고 하는데 그때에 힘없는 남편이라고 괄시나 하지 마소서”라는 당부의 말, 맏아들에게는 아비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딸들에게는 화초에 물 잘 주라고 이르는 자상함 등등, 참으로 애틋한 시인의 마음이다.   도산 사상의 바탕은 사랑이다. 넓게 보면 도산의 치열한 독립운동의 바탕을 이루는 것도 겨레 사랑, 사람 사랑으로 뭉쳐진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혜련, (…) 사랑 이것이 인생의 밟아나갈 최고 진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 간의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는 때문입니다.” -도산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더 상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문학평론가 이형권 교수(충남대)의 논문 ‘도산 안창호 창가의 문학사적 의미’를 참조하기 바란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도산 도산 안창호 교육자 도산 도산 사상

2024-11-07

[문화산책] 남가주 한인연극 초창기와 ‘모임극회’

남가주 한인사회 연극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면 첫 부분에서 ‘모임극회’라는 단체를 만나게 된다. 젊은이들이 모인 순수한 극단이다. ‘모임극회’의 첫 공연작품은 이근삼 작, 김석만 연출, 박무영 박준성 기획의 ‘유랑극단’으로 1978년 7월29일-30일, LA에서 공연되었다. 백광호, 장태한, 박대영, 김낙인 등 30여명이 열연한 이 연극은 유랑극단의 떠돌이 삶이 고달픈 이민생활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 공연 이전의 연극으로는, 남가주 한인연극동인회(회장 이평재)가 유치진 작, 황영애 각색, 이평재 연출 ‘처용의 노래’와 김시몬 작, 이평재 연출 ‘우수의 계절’을 1976년 9월30일, 공연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내가 이민 오기 전의 일이라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남가주 한인연극동인회’의 공연은 이 한편으로 그친 것 같다. 이에 비해 ‘모임극회’는 창단 공연 이후 해마다 공연을 이어가면서, 김지하 작 ‘금관의 예수’, 황석영 작 ‘돼지꿈’ 등을 공연했다. 이어서 80년대에 들어서, 한국에서 연극을 했던 전문연극인들의 ‘재미한인연극인협회’나 젊은 연극인들의 단체인 ‘극단 1981’ 등을 창단하고, 소극장들도 생기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남가주 한인 연극의 기초는 젊은이들의 자생적 극단에 의해 다져진 셈이다. 그 중심에는 연출가 김석만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온 김석만은 당시 LA커뮤니티칼리지(LACC)에 다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어 함께 세상 공부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국의 학생들을 돕고, 절친 김민기가 한국에서 하는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결속을 다졌다. 그렇게 몇 년간 바닥을 다진 뒤에 자연스럽게 극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모임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그 풋풋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서로 건강 걱정을 하고 손주 자랑을 하며 낄낄거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 먹은 젊은이’들이 모여 50주년 기념 잔치를 열어 추억의 꽃을 피우고,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른다. 참 보기 좋다.   그리고, 연극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석만은 한국의 대표 연출가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대학교수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임극회’는 젊은이들의 극단답게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연극을 공연했다. 예를 들어, 두 번째 공연작인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는 당시 미주한인사회의 큰 관심사였던 이철수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이철수 구명운동에도 적극 동참했고, 손튼 와일더 작, 정호영 연출 ‘우리 읍내’는 백광흠 구명운동을 위한 공연이었다.   또한, 사이구 LA폭동 다음 해인 1993년에 공연된 ‘민들레 아리랑’은 폭동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생각과 바람을 분명하게 보여준 연극으로 화제를 모았다. 영어 제목은 〈LosT Angeles〉로 매우 상징적이고 날카로운 풍자다.   장소현 원작, 김석만 연출로 무대화된 이 작품은 LA시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우리말과 영어 이중언어로 공연되어 매우 바람직한 공연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극 제작과정에서도 연극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폭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실제로 폭동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공동창작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해서, 절실한 현실감각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강렬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장면, 출연자들이 모두 나와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를 합창하던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 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모임극회’의 다음 공연을 기다린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인연극 초창기와 남가주 한인연극동인회 남가주 한인사회 연출가 김석만

2024-10-31

[문화산책] 우리 사회의 시각적 표정

남가주 한인사회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인 이상모 씨가 ‘Logo LA+plus’라는 제목의 흥미롭고 의미도 깊은 책을 발간했다. 그가 지난 50여년간 디자인한 수없이 많은 기업체, 회사의 로고, 심볼 마크 디자인 중 234점을 엄선해서 실제 사용사례와 함께 소개한 아담한 책이다.   이상모 씨는 남가주 한인사회 광고와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터줏대감이자 산 증인이다. 50년도 넘는 긴 세월을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감탄스럽고 존경스럽다.   이 책은 한 디자이너의 작품집이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서, 남가주 한인사회의 성장 과정, 특히 경제 발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를 갖는다. 기업체와 회사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를 구체적인 조형을 통해 실감 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책에 실린 작품들을 보노라면 “아, 옛날에 이런 회사가 있었지…로고를 보니 생생하게 기억나네”라고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디자인의 힘이다.   한 사회의 미의식이나 품격을 보여주는 시각적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생활 속의 미술들이다. 크게는 도시계획부터 작게는 점포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광고나 다양한 인쇄물에 이르는 그래픽 디자인들….그런 시각적 요소들은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기업을 위한 그래픽 디자인이나 광고 디자인은 그 사회의 역사, 특히 경제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의 역사를 살펴보고 갈무리하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히 상업적 광고 디자인 작품은 소비되어버리고 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회, 한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다.   미국 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LA코리아타운은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민의 활성화로 한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한국 대기업이 지사를 개설하고, 언론사도 문을 열고, 한인 은행 같은 규모가 큰 업체들이 설립되면서, 수준 높은 디자인에 대한 요구도 생겨났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광고기획사들이 문을 열고,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활발해졌다. 대부분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이민 온 전문가들이 사무실을 열고 활동했는데,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준 높은 디자인 작품을 남겼다. 디자이너 이상모 씨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초창기부터 활약하던 디자이너 중 아직도 현역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이상모 씨가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한인사회 초창기의 그래픽 디자인 자료들은 별로 남아있지도 않고,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 특히 컴퓨터를 사용하기 이전의 자료들은 없어져 버린 것이 많다.   이런 현실에서 이상모 씨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을 깐깐하게 갈무리하고 정리해 놓아서, 그 작품들을 통해 한인사회 디자인 역사의 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흔히 남가주 한인사회를 평할 때, ‘서울시 나성구’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사회의 판박이, 그것도 변두리 수준의 베끼기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많은데, 그것은 그릇된 편견이다. 실제로 살펴보면 그 시대 우리 사회의 특성이 잘 녹아 있고, 한국의 장점과 미국사회의 좋은 점이 조화 융합을 이루거나, 한국적 가치관에 미국적 정신세계를 더한 바람직한 예들도 적지 않다.   이상모 씨의 그래픽 디자인 작품들도 그런 긍정적 사례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사회 시각 그래픽 디자인들 한인사회 디자인 남가주 한인사회

2024-10-24

[문화산책] 미술의 다양한 기능

한국에 사는 내 친구는 출석하는 성당에 미술반을 만들어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할머니 병아리 화가’들인데 그림이라는 걸 난생 처음 그려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어찌나 정성껏 가르치는지 인기가 대단한 모양이다. 지도하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보람을 느낀다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재능기부인 셈인데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 “이왕이면 무작정 그리지 말고, 생각을 담아 그리도록 지도하면 더 좋지 않겠나?”라고 어줍잖은 훈수를 두었다. 그랬더니 곧바로 친구의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골치 아픈 생각하지 않고, 편안해지고 싶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권하겠나?”   과연 명답이다. 나의 좁은 생각을 꾸짖는 죽비 같은 명답이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의 기능은 매우 다양하고, 모든 쓰임새가 다 소중하다. 어느 하나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평론을 하는 이른바 전문가의 처지이므로, 화가들의 작품과 미술의 쓰임새를 이야기할 때, 예술성이나 작가의 세계관, 사회적 역할 등을 중심으로 언급한다. 그래서 미술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에게 무작정 그리지 말고 생각을 하면서 그려야 하고, 보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학생이나 취미 화가, 감상자들이 생각하는 미술의 기능은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실제로 많은 취미 화가들은 골치 아픈 세상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자기 내면에 잠자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고, 아름다움과 만나는 희열을 위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그래서, 그려진 작품보다 그리는 동안의 충만한 행복감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잡념 없이 순수하고 착해질 수 있다. 단순한 정신적 사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 자체를 행복으로 느낀다. 이것은 미술의 소중한 기능 중의 하나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림이 구원이 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죽을 병을 이겨내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예는 우리 주위에 너무도 많다. 미술치료 같은 치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또한 미술의 소중한 기능 중의 하나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림이 정신세계를 영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들에게는 그림 그리기가 곧 도(道) 닦기인 셈이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 예술세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갖는 힘은 매우 다양하고 막강하다.   미술을 좋아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이들로부터 “현대미술은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프다. 미술작품을 이해하고 좋아하고 싶은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라는 질문을 받는 일이 더러 있다. 나의 대답은 늘 비슷하다. “자주 보세요. 자주 보면 보입니다. 그리고 직접 그림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가장 좋은 미술 감상법입니다.”   직접 그리면서 그림에 흠뻑 빠져보면, 다른 사람의 그림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작가와 공감하며 느끼는 동질감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장점도 많다. 마음을 닦고, 정서적 정신적으로 풍성해지는 등 여러 면에서 권하고 싶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림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많은 분이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아 즐기기 바라는 마음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미술 기능 취미 화가들 그림 그리기 세상 생각

2024-10-17

[문화산책] 한글 서명의 상징적 의미

그림 한구석에 적혀있는 화가의 서명은 문장으로 치면 마침표 같은 것이다. 완성된 작품이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위작 소동이 벌어지면 가짜냐 진짜냐를 가리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서양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대개 영어로 멋지게 일필휘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작가는 한글로 서명한다. 정겨운 느낌이 전해진다. 박수근 그림에 등장하는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이나 아이들의 모습 한구석에 쓰여 있는 ‘수근’이라는 한글 서명을 보면 그림 안의 인물들이 정겹게 수군수군 대는 것 같다.   좀 지나친 생각인지도 모르겠는데, 한글 서명을 보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민족적 긍지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부 작가들이 한글 서명을 고집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영어로 서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한글 서명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그림의 기법은 서양의 것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내용과 정신은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글 서명은 그런 바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 사회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주체성을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대립, 6·25 한국전쟁, 미국 문화의 홍수….격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한국의 현대화는 곧 서구화였고, 서구 문화를 비판적으로 골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신 차려보니 서구 문화가 이미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가령, 어린 시절 아무런 생각 없이 뜻도 모르고 미국에서 들어온 노래 팝송을 부르며 놀았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미국의 화려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헬로 헬로쪼코레또기브미, 헬로 헬로 먹던 것도 좋아요.” 같은 비굴한 노래에 그런 상황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상황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민족정신 회복, 우리 것 찾기 운동 등이 중요하게 대두하기 전까지 서양 흉내 내기가 주류를 이룬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한글 서명이 한결 더 반가운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드러낸 예술가들은 한국 이름을 고집한다. 백남준, 윤이상, 이응로, 오순택, 정명훈, 정경화, 서도호, 강익중, 손열음 등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부르기 쉬운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보다는 이름이 갖는 자기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 편리성을 앞세워 영어 이름을 만들고 보는 한인들과는 크게 다르다.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쉽다는 편리성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다. 특히, 결혼해서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딴 여자가 미국 이름을 만든다면, 이름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 우리 주위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영어 이름을 갖는 것이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인기가수가 영어 이름을 가지고 영어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상품명이나 가게 이름이 영어 범벅인 일들은 좀 당황스럽다.   이 같은 자존감, 자기애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기본자세가 작품이나 예술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눈여겨보는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글 서명 한글 서명 영어 이름 한국 이름

2024-10-03

[문화산책] 요절한 천재 예술가들의 교훈

인류 역사에는 안타깝게 요절한 천재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돋보인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비감이 더해지고, 신화·전설이 극적으로 부풀려지기도 한다. ‘늙은 모차르트’란 상상하기 어렵다.   모차르트 35세, 쇼팽 39세, 슈베르트 31세   고흐 37세, 로트레크 36세, 모딜리아니 35세   윤동주 27세, 이상 26세, 나도향 24세, 김소월 32세.   요절한 천재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안타깝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런 굉장한 천재들이 오래 살아서 활동했더라면 역사가 얼마나 더 풍성하고 멋있어졌을까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고, 나는 이만큼이나 살았는데 도대체 이룬 것이 뭔가 되돌아보면 염치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자료를 살펴보면, 실제로 역사에 빛나는 성취는 나이에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특히 문화 예술에서는 더 그렇다. 물론 원로들의 농익은 예술세계도 소중하지만, 싱그럽고 젊은 예술가들도 별처럼 빛나며, 신화 전설은 연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방정환 32세, 이효석 35세, 심훈 35세, 기형도 29세, 이육사 39세, 김유정 29세, 일본 작가 아쿠다카와류노스케 35세, 푸시킨 38세….   화가 이중섭 39세, 오윤 40세, 이인성 38세, 손상기 38세, 미술사학자 고유섭 39세, 에곤 실레 28세, 바스키아 27세, 키스 해링 31세….   가수 김광석 31세, 김현식 32세, 차중락 26세, 배호 29세, 윤심덕 29세, 빅토르 초이 28세, 지미핸드릭스 27세….   영화감독 나운규 34세, 하길종 37세, 배우 제임스 딘 24세, 마릴린 먼로 36세, 최진실 39세, 이소룡 32세, 역도산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이 이룬 업적은 참으로 크고 아름답고 의미 깊다. 보통 사람이 평생 한 일을 훌쩍 뛰어넘는다.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창조적 예술가는 내부에 있는 생명의 시계가 멈추는 것을 투시력을 통해 아는 것 같다. …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넘쳐흐르는 생산력, 그리고 미친 듯이 가속을 붙여 창작해나간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시간이 많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재는 아니지만, 나라와 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 열사 중에도 젊은이들이 많다. 유관순 17세, 논개 18세, 잔 다르크 19세, 안중근 30세, 윤봉길 24세, 전태일 22세, 강경대 19세, 이한열 20세 등….   그런가 하면,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온갖 좋은 것만 골라 먹으면서 살았을 텐데도 장수를 누리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네로 황제 31세, 양귀비 37세, 마리 앙투아네트 38세, 클레오파트라 39세, 안평대군 35세, 에바 페론 33세….   종교를 위해 순교한 성인 중에도 많은 이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김대건 신부 25세, 최제우 39세…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이 33세에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요절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역사를 바꿔놓는 엄청난 업적을 이룬 경우도 하나하나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분들을 보면, 요새 젊은이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낮잡아 대하는 꼰대 짓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무턱대고 나이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도 생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   이상으로 꼰대의 푸념 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예술가 요절 천재 예술가들 창조적 예술가 인류 역사

2024-09-26

[문화산책] 동화 읽는 늙은이

동화작가 김태영 님이 얼마 전에 발간한 동화집 ‘할리우드 불러바드의 별’을 반갑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동네 아동문학이 시름시름 빈사 상태(?)인 것으로 보여 매우 안타깝던 참이어서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책에 실린 12편의 작품마다 흥미진진하고 시원하게 펼쳐지는 꿈과 상상의 세계에 함께 하는 동안, 고달프게 살면서 속절없이 삭막해진 마음 밭에 단비가 내린 듯 촉촉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련한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며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이런 것이 동화의 힘이다. 나이 든 늙은이가 동화를 읽으며 기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태영의 동화는 우리를 신바람 나는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할리우드 배우가 되고픈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춤 연습을 하는 강아지와 미남 거지, 밤이면 공룡으로 변신해서 흥겹게 나들이 가는 팜트리, 작은 배만큼이나 커진 물고기와 휠체어를 탄 소년의 만남, 데스밸리에 사는 짱구돌맹이와 화석이 된 분홍 새우의 사랑, 갑자기 내린 비를 맞아 잔디밭에 떨어진 별 가족 이야기, 인디언 마을의 인형과 당나귀의 우정 등등….   막연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라서 한층 친근감이 느껴진다. 현재 할리우드 불러바드의 한 아파트에 사는 작가가 그 거리에서 살면서 만나고 느낀 이야기를 동심의 세계에서 새롭게 엮어 쓴 창작동화들로, 작가의 상상력은 그 할리우드 불러바드에서 어릴 적 놀던 영산강을 오가며 펼쳐진다. 작가 자신이 직접 그림까지 그려 실감을 더 했다.   김태영의 동화에서는 사람과 동물, 식물, 바위, 별 등이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돕고 의지하는 우주적 사랑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러면서 인생을 곱씹게 하는 힘을 가진 ‘어른을 위한 동화’다.   미주 이민사회에서 아동문학이 설 자리가 마땅치 않은 것은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우리 2세들은 한글 문학작품을 자유롭게 읽고 공감할만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동화책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짜릿한 것이 주위에 널려 있다. 그러니 어른들이라도 읽어주면 좋으련만,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엄마가 아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동화를 읽어주는 장면은 정말 꿈과 같다.   이렇게 척박한 현실에서도 미주 아동문학계는 한동안 활발하게 움직였다. 좋은 작품도 상당히 나왔다. 1980년대 초반 고(故) 오영민 선생을 비롯해 남소희, 황영애 같은 분들이 활발하게 의미있는 작품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 ‘미주 한국아동문학가협회’가 발족하여 회원작품집 ‘미주아동문학’을 10호까지 발간했다. 김사빈, 김정숙, 박사라, 박심성, 백리디아, 이송희, 이희숙, 한혜영 같은 여러 작가들의 개인작품집도 활발하게 출간되었다.   내 개인적인 소견을 말한다면, 이민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작품으로 오영민 선생의 ‘이민 간 아이’, 남소희의 ‘보석상자’, 황영애의 ‘내가 누구예요’, 홍영순의 ‘팬케이크 굽는 아이들’, 한혜영의 ‘뉴욕으로 가는 기차’, 신정순의 ‘착한 갱 아가씨’, 정해정의 ‘빛이 내리는 집’ 등을 빼놓을 수 없겠다. (물론 그 밖에도 내가 모르는 중요한 작품들이 더 있을 것이다.)   아동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어린이는 어른의 선생이고, 어릴 적 기억은 평생을 가기 때문이다. 삶이 팍팍하고 답답할 때면 나는 동화를 찾아 읽는다. 톨스토이의 우화나 알퐁스 도데, 마해송의 동화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새로운 힘이 솟는다. 어린이 마음, 꿈의 힘을 믿는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늙은이 동화 동화작가 김태영 미주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미주 아동문학계

2024-09-19

[문화산책] 한가위 보름달, 나그네 젖은 눈

9월17일이 민족의 명절 추석이란다.   둥밝은 보름달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그리운 고향 찾아가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푸짐하고 맛있는 잔치 음식과 송편 배불리 먹고….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윗날만 같아라”는 말이 어울리는 명절.   한국에서는 해마다 추석이면 대단한 귀향 전쟁이 벌어지는 모양인데, 뉴스를 보니 올해는 의료분쟁 때문에 그렇게 흥겹지 못할 것 같다. 이번 추석에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 바쁘다는 소식이다.   우리 타향살이 나그네에게는 추석 같은 명절이 반갑기보다 그저 강 건너 불 보기, 남의 일 같기만 하다. 한국에 부모님이 살아계신 이들은 전화로라도 안부를 여쭐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젖은 눈으로 멍하니 보름달 올려다보며 부모님 생각에 잠긴다. 디아스포라의 서글픔이다.   나처럼 삼팔따라지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렇다 할 고향도 없는 무향민(無鄕民)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저, 떠나온 나라의 친구들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달을 보고 있겠구나, 그런 막연한 그리움… 나그네의 젖은 눈.   “나는 오나가나 나그네다. 이 길손의 눈은 늘 젖어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 먼 데 있는 친구들 혹은 나그네들의 손을 잡고 서로 껴안고, 글썽한 눈끼리 눈으로만 얘기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그리움의 달무리에 정이 번지면, 시와 시인을 또 자극하는 시간의 바다가 출렁거린다.” -고원 시집 ‘나그네 젖은 눈’ 머리글의 한 구절   시인은 ‘달 둘이 떠서...’라고 노래한다. 고향에도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도 같은 달이 뜬다는 표현, 고국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달이 어디 둘 뿐이랴? 하나의 달이 천(千)개의 강을 고루 비춘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다. 온 세상을 고루 비춘다. 그러니까, 지구 구석구석에 사는 나그네 모두가 같은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요새는 떠돌이 나그네, 이방인, 경계인, 유랑민 같은 말 대신에 ‘디아스포라’라는 멋쟁이 서양말이 널리 쓰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디아스포라 정신’ ‘디아스포라 문학’ 같은 식으로….   이 말은 본디 제 나라에서 핍박받고 쫓겨난 사람들, 난민을 뜻하는 정치성 강한 용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떠나온 곳은 있는데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은 이주민을 뜻하는 말로 폭넓게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디아스포라인 셈인데, 어쩐지 어색하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볼 필요는 충분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문화예술에서는 디아스포라가 창작의 큰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유대인 예술가들의 막강한 업적과 영향력이 대표적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변방의 힘’ 같은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어 ‘-너머’를 뜻하는 dia와 ‘씨를 뿌리다’는 뜻의 spero의 합성어라고 한다. 즉, 뿌리 뽑힌 떠돌이 나그네 삶의 고달픔과 슬픔을 뜻하는 이산(離散)과 새로운 세계의 개척이라는 적극적인 뜻의 파종(播種)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씨를 뿌린다’는 말이 매우 매력적이다. 새로운 땅에 뿌리내린 우리 이민자들의 존재 의미를 말해준다. 고향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말, 간절한 그리움을 창조적 힘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한가위 보름달을 우러르며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지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 땅에 뿌린 씨앗인 우리 2세들을 잘 가꾸고 보살펴,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그러기 위해서 정신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도록 이끌어 주십사….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가위 보름달 한가위 보름달 떠돌이 나그네 나그네 모두

2024-09-12

[문화산책] 졸작, 졸필이라는 겸손함

문인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글쓰기는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이다”라는 말, 이 말이 정말이라면 문인 중에는 살찐 사람이 없어야 한다. 계속 깎아대는데 언제 살찔 새가 있나….   졸작, 졸필, 졸저(拙著)라는 낱말도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졸작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턱없이 모자라는 졸필로 책을 내려니 부끄러움이….”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 겸양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멋지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읽어도 그저 습관적인 멋 부리기 관용어로만 읽힌다. 왜냐하면 정말로 졸작, 졸필이라고 생각한다면 발표하지 않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졸작, 졸필, 졸저를 내놓아 세상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은 죄악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냉엄하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라고 말하고 싶다. 글쓴이가 자신 없이 주저주저 머뭇거리면, 읽는 이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자신 없이 우물거리는 말에 설득당할 독자는 없다. 그야말로, 영혼을 불태운 글인지 대충대충 설렁설렁 쓴 글인지 독자는 금방 알아챈다. 믿음 없이 미사여구만 나열하는 기도나 마음 없이 대충 부르는 노래는 맥없이 허공을 맴돌다 스러진다.   그래서 나는 졸저, 졸필, 졸저 같은 낱말은 되도록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물건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나 같은 ‘생계형 글쟁이’는 쓰임새에 맞는 글을 마감 날짜 넘기지 않고 쓰면 그만이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끝도 없고 완성도 없다. 천하의 피카소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완성된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림이라도,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이제 완성이다’ 하고 중얼거렸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작품을 완성한다, 그림을 마무리 짓는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가.”   피카소 선생의 말씀대로 완성이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에게 남는 것은,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는가, 스스로에게 참으로 정직했는가와 같은 자기 내면의 문제들일 것이다.   졸작이냐 걸작이냐,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이고, 작가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평가는 독자나 평론가, 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니, 작가가 나서서 미리부터 졸작, 졸필이라서 부끄럽다고 고개 숙이며 접고 들어갈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다고 졸작이 명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발표하면서 더 잘 쓰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문인도 많다. ‘광장’의 최인훈처럼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줄기차게 다시 읽고 고치는 작가도 있고, 카프카처럼 세상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자기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부탁한 작가도 있다.   한편,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평생 책을 내지 않은 문인도 있다. 김병현 시인이 그런 분이었다. 안타깝게 여긴 후배들이 뜻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드렸다. 우리 남가주 문단에도 벌써 책을 내야 했는데, 아직 안 내는 실력파 중견 문인들이 적지 않다. 저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는 엄격함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겸손을 대하면 겁 없이 책을 많이 낸 내가 면구스러워지곤 한다.   나의 스승 김희창 선생님께서 주신 말씀을 되새긴다. “예술 앞에는 가장 겸손해야 하고, 사람 앞에는 가장 오만해야 합니다. 오만해야 붓을 들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해야 좋은 예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졸필’ 끝!!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졸작 졸필 졸작 졸필 졸저 졸필 피카소 선생

2024-09-05

[문화산책] 문밖 서성이는 음악공부

나의 클래식 음악 첫사랑은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듣는 음악이기도 하다. 바암∼ 바암∼ 밤 바아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들을 정도로 넉넉하지 못했다. 작고 조악한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방송 프로그램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공부를 하면서 흘려들었고, 다른 식구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들었으니 음악을 제대로 감상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잘 알겠지만,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대체로 가볍고 짤막하고 달콤하고 유명한 곡들이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택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는 대로 감사하며 받아먹어야 한다. 나도 별수 없이 그런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예를 들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하이든의 종달새, 지고이네르바이젠, 유모레스크, 로망스, 사랑의 인사, 비발디의 사계 등등 이른바 ‘세미클래식’이라 불리는 음악들, 그것도 멜로디는 그런대로 익숙한데 작곡가나 곡명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클래식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그러다가, 나이 조금 들어서 음악감상실이라는 별세계에 가서 커다란 스피커에서 웅장하게 울려 나와 실내를 가득 채우는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감탄하며 빠져든 음악이 바로 ‘핀란디아’였다.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힘찬 소리에 압도되고 말았다. 바암∼ 바암∼ 밤 바아암∼ 밤바라밤바   그리고 항상 좋은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학림다방’의 단골손님이 되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 봤자, 들려오는 음악의 작곡가와 곡명을 겨우 아는 곡이 몇 개 생긴 정도이고, 라디오로만 듣던 때보다는 긴 곡을 들으며 참을성을 시험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과 공부 의욕은 한층 커졌다. 음악가에 대한 책이나 글을 찾아 읽기도 하고, 어쩌다 아주 어쩌다 음악회라는 엄숙한 자리에 가보기도 하고….   하지만 공부는 생각과는 달리 지지부진했고, 지금도 여전히 문간에서 안타깝게 어슬렁거리는 초보자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음악공부라는 게 참 어렵다. 열심히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고 더 넓은 공부를 해야 할 텐데, 귀에 익은 편안한 곡만 거듭 듣게 된다. 문학작품은 여러 번 읽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음악은 반복해서 듣는 것이 기본이다. 그것도 취향에 맞는 곡만 듣는 편식이니 진도가 잘 나갈 리 없다. 늘 제자리걸음이다. 뚜렷한 한계를 느낀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하면서 공부를 한 것이 큰 다행이었다. 특히, 평생 클래식 음악과 함께 살아오신 위진록 선생님을 모시고 방송을 진행하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음악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내가 제대로 알고 감상한 부분은 지극히 작은 한 귀퉁이였다. 음악 감상은 세미클래식에 그쳤고, 문학은 세계 명작을 다이제스트 판으로 읽은 수준이었다. 그저 깊이보다는 넓이에 집착하여, 이것저것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짓만 되풀이해왔다. 무엇 하나 목숨을 걸고 제대로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니 ‘문화잡화상’이라는 별명이 제격인 것 같다. 인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파보자. 이어령 선생처럼 일단 파기 시작했으면 물이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파는 끈기가 필요하다. 좋은 격언을 주문처럼 외운다. “백 권의 책을 읽으려 애쓰기보다 좋은 책 하나를 백번 읽으라.”   그렇다, 첫사랑 ‘핀란디아’를 백 번 진지하게 들어보자. 같은 음악이라도 다르게 들리며 물이 콸콸 쏟아질지도 모르지! 엄숙한 표정으로 듣는다. 바암∼ 바암∼ 밤 바아암∼ 밤바라밤바밤바!   그런데 왜 자꾸 밤을 보라는지 그걸 모르겠다. 밤 봐라! 밤 봐, 밤 봐!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음악공부 문밖 클래식 음악 음악 감상 음악들 그것

2024-08-29

[문화산책]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지킴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이런 거창한 말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는 누구나 안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우리 미주 한인 사회도 이민 연륜이 길어지면서, 정리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가 쌓였다. 많은 주요 단체들이 반세기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지만, 역사로 제대로 정리되고 기록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시절을 빛냈던 주인공들은 세상을 떠나고, 기억은 가물가물해지고, 자료들은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급하다.   그런데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를 갈무리하고 기록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알기로는, 남가주에서는 한인역사박물관의 민병용 관장, UC리버사이드 교수이며 김영옥연구소 소장인 장태한 교수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민병용 관장의 역작 '대한인국민회 100년사'가 발간되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대한인국민회가 어떤 곳인가? 미주 땅에 독립운동의 씨를 뿌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과 숨결이 배어 있는 미주 최고의 독립운동기관,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미주의 임시정부임을 선언하고 미국과 멕시코, 쿠바 동포들의 독립운동 총본부 역할을 감당한 곳,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계속 후원해온 곳, 독립운동에 앞장선 언론 '신한민보'를 발행한 곳…. 그야말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곳이 아닌가. 그 100년의 역사가 이제야 한 권으로 책으로 발간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이민역사 자료를 전시해 놓은 유일한 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가볼 곳이 거기밖에 없다.   지난 2003년에는 건물 복원공사 중 천장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던 다량의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귀한 자료들은 USC에서 디지털화해서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고, 원본은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대여 조건으로 보관되어 있다. 미주에 한인역사박물관이 세워지면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민병용 관장이 2년여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한 100년사 책에는 대한인국민회와 기념재단의 역사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의 역사 등 다양하고 폭넓은 내용이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실려 있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학생들에게 이민사와 독립운동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참고서가 되도록 교육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편집했다는 설명이다.   저자 민병용 관장은 1976년 신문기자로 독립운동가를 인터뷰하면서 한인 미주이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초기 이민의 현장인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중가주, 멕시코 등 현지를 발로 뛰어 취재하며 많은 기사를 썼다. 첫 책인 '미주이민 100년, 초기 이민을 캐다' 이후 지금까지 48년 동안 18권의 역사서를 집필, 발간했다.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같은 독립운동사를 비롯하여, 미주 지역 주요 한인 단체의 역사,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주한인의 기본 자료인 '한인인명록' 등 내용도 다양하다.   민 관장이 집필한 미주한인 100년사, 동양선교교회 30년사, 남가주한국학원 40년사, 민주평통 LA 30년사, LA한인회 50년사(전자책으로 발간 예정) 등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한인역사 세일즈맨’이라 칭하며, 22년째 LA한인역사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고, 2002년부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한 지식인이 어려운 여건에서 이민사회의 역사를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쓰는 일에 반세기를 바쳤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해내면서 늘 ‘행복하고 감사하다’며 밝게 웃는 민 관장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지킴이 역사 이민역사 자료 미주지역 독립운동 한인 미주이민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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