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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불협화음의 합창

4월 초인데도 바람은 차다. 첼시에 있는 휘트니 미술관 앞은 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패딩에 모자까지 쓰고 줄에 서 있다.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이 전시회를 협찬한 기관들의 이름이 쭉 씌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 대기업의 로고 H자가 고딕체로 제일 크게 보였다. 한국이 문화 선진국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시 제목이 ‘불협화음의 합창(Dissonant Chorus)’이다. 이번 전시를 맡은 큐레이터는 미국 방방곡곡에 소규모 갤러리를 찾아다녔다. 신예 작가들이 현시대 상황에 반응하는 목소리를 모았다고 한다. 인디언 아메리칸, 뉴욕에 거주하는 홍콩인, 남부에 사는 흑인 여자 작가 등 배경이 다양했다.   복도 벽에 AI가 그린 작품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만화의 캐릭터 같은 소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머리카락과 옷소매를 누르면 작품이 변한다고 한다. 이것도 작품이 될까 하고 의아했다. 구상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니, 작품으로 여기는 요즘의 추세다. 벽을 돌아가니, 인공지능에 반대라도 하듯이 손으로 정성껏 그린 추상화가 매달려 있다. 찌그러진 세포 모양의 불규칙한 형체가 여기저기 빨래처럼 드리워져 있다. 천에 아크릴을 바르고 모아온 재활용품, 채취한 씨앗들을 붙였다. 그 위에 또 색을 바르는 몇 겹의 작업을 공들여서 했다. 수전 잭슨(Suzanne Jackson)은 평생 작업을 해왔지만, 80세가 된 지금에야 전시회에 초대받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추상화는 고급 예술로 여겨졌고 더구나 백인 남자 작가의 전유물이었다. 지금은 흑인 할머니가 그려서 보란 듯이 내 걸고 있다.     4층으로 내려갔다. 노란 네온 빛이 방 전체에 흐르고 있다. 천정에는 전기 망이 못처럼 가득 박혀있다. 전기선과 네온 빛이 사람에게 투과되어, 모든 행동이 기록되고 감시된다. 몸과 뇌에 충격이 가해지지만,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한다. 어느 날 내가 버섯을 샀더니 버섯 요리 정보가 유튜브에 떴다. 내가 피검사를 했더니 특정 수치를 올리는 방법이 떴다.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내 이메일로 오기도 한다. 누군가 나의 일상을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불편해진다.     저쪽 방에서 꼬불꼬불한 천 조각이 보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티피가 거꾸로 세워져 있었다. 요즘 세상이 거꾸로 간다는 은유다. 그 옆에서는 지금 문을 닫은 낙태업소의 사진과 전화와 이메일 기록, 폭력에 시달린 여자들의 사진 등 수천 개가 빼곡히 벽에 걸려있다. 낙태권이 허용된 것이 50년도 되지 않는데 최근 로대웨이드 판결 후 미국은 다시 낙태권 분란에 휩싸여있다. 몸은 고유한 개인의 영역인데, 여자의 몸은 항상 정치적 문제에 휘말린다.     마지막으로 작은 밀실 같은 어두운 방에 들어갔다. 상처 자국(site of wounding)이란 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3D 컴퓨터로 자기 몸의 입체 모형을 만들고, 메탈과 유리로 만들어 샌딩을 했다. 뒤틀린 육체의 내부 모형이 작가의 고향인 홍콩에서 자라는 나무와 비슷하다고 한다. Aquilaria sinensis 라는 나무는 고급 향을 만들기 위해 쓰이는 나무다. 어린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비틀고 사이사이에 곰팡이를 심는다. 상처가 감염되면서 트라우마를 받은 나무는 수액인 레진(resin)을 뿜어낸다. 이 과정에서 향기가 방출된다. 스트레스를 받은 나무가 향을 뿜어내듯이, 인간도 상처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나온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런 에너지가 모여서 불협화음 같은 신음을 내는 전시가 맨해튼 한가운데서 열리기도 한다. 미술관을 나오니 해가 올라가 있다. 허드슨 강에서 부는 바람이 훈훈해졌다. 만물이 화협하는 봄은 이미 와 있었다. 김미연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불협화음 합창 이메일 기록 낙태권 분란 휘트니 미술관

2024-04-12

[아름다운 우리말]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법

몇 년 전에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저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쳐 주시는 전헌 선생님과 걸은 적이 있습니다. 걷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특히나 좋은 분과 걷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날은 그래서 더 행복했습니다. 걷는 동안 삶이 더 밝아지고, 행복한 스스로를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정확히는 두 군데에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큰 스피커로 쿵쿵 울려대는 신나는 음악이었고, 다른 쪽은 합창단이 부르는 고요한 노래였습니다. 합창단의 노래가 방해를 받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저희의 발길은 합창단 쪽으로 향했습니다. 저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합창단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합창 소리에 저마다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반대쪽의 음악 소리가 커질수록 합창의 소리는 더 작아졌습니다. 실제로도 더 작게 부르는 듯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더 귀 기울이며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 합창 소리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떤 노래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조용하게 노래 부르던 그 모습은 아마 잊히지 않을 듯합니다.   세상이 점점 거칠어집니다. 거친 세상의 증거는 말소리가 커지는 겁니다.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하며 더 크게 말합니다. 소리 높여 말한다는 표현에서 소리가 감정을 북돋는 느낌을 받습니다. 친구와 대화에서도 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심지어 가족 간의 대화에서도 목소리는 커집니다. 그러다 보니 싸우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스스로는 싸우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벌써 우리의 마음속은 싸움이 일어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할 때 소리를 치는 것은 두 사람이 이미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 우리 사이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표현을 씁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다가간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기울고, 어깨가 다가갑니다. 소리가 커지면 다가갈 리 없습니다. 거리를 두게 되죠. 당연히 귀 기울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리가 작고 부드러워야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를 사람들이 잊고 산다고 봅니다. 자신의 주장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떠들어 대면 소음이 됩니다. 떠든다는 말도 소리가 ‘뜨고, 들려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라앉지 않은 겁니다. 차분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수다는 떤다고 합니다. 이 말도 재미있습니다. 떠드는 것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있습니다.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떨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떨리는 것은 파동을 보입니다. 서로에게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지요. 수다야말로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수다가 곧 위로이기도 합니다. 같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요. 떠는 정도는 괜찮은데 떠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삼가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비법은 소리를 작게 내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수록 나에게 다가올 겁니다. 두 사람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내 말이 듣고 싶도록 내용을 충실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기껏 들었는데 알맹이가 없으면 허무할 테니 말입니다. 오늘도 저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합창 소리 음악 소리 합창단 주변

2024-03-17

[J네트워크] ‘좀비’ 학교의 합창곡

 좀비로 폐허가 된 ‘효산 고등학교’에서 이 합창 음악은 좀 낯설었다. 그레고리오 알레그리(1582~1652)가 작곡한 ‘미제레레(Miserere)’다. 조금 긴 원래 제목은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넷플릭스가 지난달 28일 공개한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7화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생존자들이 수많은 좀비를 음악실로 유인하고 뒷문으로 탈출하려고 틀었던 노래다. 피범벅이 된 음악실에 참으로 대조적이었고 그래서 적절했던 음악이다.   거의 400년 전 이 음악이 울렸던 곳은 로마의 시스티나 대성당. 라파엘로, 보티첼리,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경이로운 그림으로 둘러싸인 이 성당에서만 연주될 수 있었다. 교황은 이 곡의 단 한 페이지도 교회 밖으로 나갈 수 없게 금했고 규칙을 어기면 파문했다. 작곡가 알레그리가 교황청 소속이었고, ‘미제레레’는 음악이기 이전에 예배 의식이었으며 교회에서 해야만 하는 기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교황의 독점욕을 해석하곤 한다.   죽음과 비극으로 뒤덮인 고등학교에서 울려 퍼진 소절은 ‘미제레레’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높은 ‘도(C)’ 음의 부분이었다. 솔로 소프라노는 높으면서도 마음을 찌르는 듯한 이 음을 부른다. 무엇보다 17세기의 음악 어법에 맞도록 거의 아무 기교 없이 부르는 점이 중요하다.   드라마에서 나온 부분의 라틴어 가사를 번역하면 이렇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다.’ 시편 51편 중 한 구절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신의 용서를 처절히 구하는 내용이다.   ‘미제레레’는 별다른 장치가 없어서 아름답다. 장엄한 오르간 반주도 없고, 복잡한 멜로디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9개의 서로 다른 성부로 된 사람의 목소리가 각각 오르내리며 교차하거나 분리된다. 인간의 소박한 목소리일 뿐인데도 ‘미제레레’는 특별하게 강한 힘을 가진다. 17세기 이 곡이 부활절 직전 성 금요일에 연주될 때는 곡에 맞춰 촛불을 하나씩 껐다. 나지막한 합창에 따라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면서 인간은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게 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가장 비극적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골랐다. 2020년 12월에도 비슷한 선택이 있었는데, 바로 넷플릭스 ‘스위트홈’이 오프닝 음악으로 쓴 모차르트 레퀴엠이었다. 여기에서도 죽은 후 신의 심판 앞에 선 인간이 용서와 구원을 간절히 구한다. 수백 년 전부터 절실히 자비를 요청해왔던 인간들의 음악이 인기 드라마에 잇따라  쓰이고 있다. 종교와 상관없이, 어디엔가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다. 김호정 / 한국 중앙일보 기자J네트워크 합창곡 좀비 효산 고등학교 미제레레 메이 합창 음악

2022-02-07

[독자 기고] 주숙녀 권사합창단

권사합창단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일단 마음이 따뜻해지지요. 금방 마음자리가 환해지기까지 합니다. 인간은 늘 부족하고 자랑할 것 없는 존재라지만 기도하는 인간이라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어도 무방하리라 믿습니다. 천부당만부당 권사 직함이 대단한 직분이라든가 신앙적으로 성숙해 있다든가 인간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직 조금은 더 자기를 닦아보려고 노력하며 기도 횟수가 더 많으리라 믿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싶은 분들이 모여서 찬양 드리고 있는 단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합창은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는 뜻으로 연습부터 은혜롭습니다. 영혼의 심지를 태우며 노래하고 싶은 갈구함과 읊조림이 있습니다. 젊은 날처럼 목청껏 음이 올라갈 수 없다 해도 윤기 흐른 목소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복음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이라 합니다. 크리스천은 복음을 노래하며 중심에서부터 믿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합니다. 부름 받은 자의 사명으로 우리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카고 권사합창단은 팬데믹 기간에도 영상으로 연습을 쉬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비대면 연습을 통해서도 나름으로 반가웠고 즐거웠습니다. 노랫소리를 상오 들을 수 도 없고 소리가 합해질 수도 없으니 줄 끊어진 거문고를 타고 있는 듯 답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습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소리를 혼자 듣고 마는 연습이었지만 충분한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요. 지휘자님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은혜스러워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습했습니다. 여럿이 어울려 빚어내는 값있는 통일성을 간절히 믿었습니다. 지휘자님은 소프라노를 부르다 멧조를 부르다 알토를 부르다 합창을 이끌어가는 주자로서 목이 부을 만큼 성의를 다하여 주셨습니다. 젊은 박사님의 넘치는 에너지였습니다. 권사합창단에는 콘닥터의 젊은 열정이 발산하는 신선함이 넘치고 있습니다. 전단원이 그 열정의 여세를 좇아 노래하고 있으니까요. 찬양이 있는 곳에서 신앙은 자라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Zoom을 통하여 연습하는 동안에는 큰 성과를 욕심 부리지도 않았고 활기차다 할 수는 없었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찬양에는 또 하나의 하늘나라가 있으니까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노래하듯 말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휘두르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유일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구원의 신이라 합니다. 노래하는 순간에는 각자의 마음자리에 빛나는 기도가 각인되기도 하고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도 합니다. 팬데믹에 위축된 나날에 대한 강렬한 함성이기도 했습니다. 희망을 부르는 상징적 몸부림이라 해석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벌출송(Virtual Song)을 선보였습니다.     권사 합창단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래가 선곡되지요, 늘 웃음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천사의 땅을 거처로 하듯 축복이 넘칩니다. 중보기도가 있고 튼실한 은혜와 단합과 배려가 있습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구가하는 찬양의 가락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7월부터 여수론 교회에서 대면으로 합창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자랑스러운 권사합창단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수필가)     주숙녀독자 기고 권사합창단 주숙녀 주숙녀 권사합창단 합창 연습 권사 합창단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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