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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그 천사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날 누가 나는 어느 소학교를 졸업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거제도에 있는 장승포 국민학교요”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소학교 5학년 때 터진 6·25 전쟁 때문이다. 피난민들과 함께 우리도 고생 끝에 남쪽으로 피난을 간 것은 사실이지만 덕분에 남해에 다다르자 나는 난생처음으로 눈 앞에 펼쳐진 넓고 넓은 바다를 만났고 너무도 황홀해서 우리가 피난 온 신세인 것도 망각한 채 바다로 뛰어들어가 바다와 곧 친구가 되었다.     나는 제법 깊은 바닷물을 헤엄치면서 양쪽에 선 방파제 사이를 오가며 개구리 수영도 하고 때론 바위에 붙어 있는 굴도 따고 갯벌에서 조개를 주어서 구워 먹기도 하며 전쟁을 피해서 피난 내려온 나의 철없는 삶은 마냥 즐거움뿐이었다.   이렇게 철없이 피난살이를 즐기며 지내던 내가 다음 해에는 6학년이 되고 마침내 소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나보다 앞서 상경한 우리 집 식구들과 합세하기 위해 혼자서 기차로 상경해야 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기차 편으로 부산을 떠나서 서울로 향해 왔다.   내가 타고 온 기차가 서울에 가까워지자 기차 안이 웅성거리면서 돌아보니 승객들이 일일이 도강증을 조사받는 시간이 된 것이었다. 미 8군 한 명이 한국인 통역관을 동반하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보내준 도강증을 별생각 없이 꺼내 보여주었다. 아- 그런데 미 병사가 내 나이가 이 도강증에 기록된 나이와 일치하지 않음으로 즉시 하차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기차에서 쫓기다시피 내려서 그 시간에 서울역에서 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할 터인데 전화도 셀폰도 없는 시절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 순간 기차는 조금씩 움직이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다급히 내게 다가와서 나의 몸을 기차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돌아보니 미 8군이 대동했던 그 한국인 통역관이었다. “너 혼자 혼났지? 이제 괜찮아. 이제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 앉아있어”라고 말하고 그는 내 곁을 떠났다.   다음은 시편 91편 중에 있는 말씀이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오늘도 가끔마음속으로 나는 그 천사를 찾고 있다. 물론 그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 모습도 기억에 없는 그 천사를 말이다.   그리고 나도 오늘 누구에겐가 천사가 되어줄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황진수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천사 기차 안이 한국인 통역관 소학교 5학년

2023-02-12

'두순자 사건' 통역관 책 펴냈다

30여년 전 '두순자 사건'의 통역관으로 활동한 폴 이(한국명 이호재·60·사진)씨가 4·29 LA폭동 관련 책을 발간한다.   통·번역 경력 40여년인 이씨는 올해 4·29폭동 30주년을 맞아 집필한 영문책 'L.A. Riot 4-29-92: Prayers of The Forgotten(4·29폭동:잊혀진 자들의 기도)'을 낸다.   영문으로 집필된 이 책은 한인들의 시각에서 본 1992년 LA폭동과 그 당시 피해를 기록하고 폭동의 도화선이 된 인종 문제도 파헤친다.   이씨는 "역사적인 입장이나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감정 없이 4·29폭동을 기술한 책들은 많지만 한인 피해자들의 시각을 담은 영문 책은 거의 없다"며 "매년 4·29폭동이 회자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 한인들이 겪은 폭동의 피해를 주류사회에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했다"고 계기를 전했다.   책에는 LA폭동의 씨앗이 된 1991년 두순자 사건의 통역을 맡았던 당시 상황도 담겼다. 한인 1호 공인 법정 통역관이었던 이씨는 부담감을 못 이겨 포기한 동료 통역관을 뒤로하고 단독으로 이 사건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사회와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압박감이 심했다"며 "특히 두순자씨가 살해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을 통역할 땐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기 위해 초긴장 상태였다"고 전했다.   두순자 재판을 계기로 형사법원 사건을 맡기 시작한 이씨는 로드니 킹 연방 법원 재판에서도 한인 증인 통역관을 맡았고, 4·29폭동 피해자들의 스몰 클레임 통역을 맡았다.   1996년에는 당시 통역관으로 보고들은 법정 일화를 담은 책 '나, 샤-워한 김치는 싫습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씨는 "나도 4·29폭동 피해자다. 당시 한인타운에 거주했지만, 난리 통에 포모나 지역 부모님댁으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을 갔다"고 전했다.     또 그는 "길거리는 화재로 다 탔고 흑인들은 한인들이 보이면 물건을 던지고 때렸다"며 "아직도 그때의 악몽을 꾼다. 여전히 그들의 절규가 생생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씨는 "4·29폭동은 백인과 흑인들의 갈등 속 한인들의 등이 터진 사건"이라며 "인종차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제2의, 제3의 LA 폭동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씨의 저서는 2~3개월 안에 전자책(e-book) 형태로 발간될 예정이며 온라인 서점들을 통해 살 수 있다. 장수아 기자통역관 la폭동 통역관 la폭동 la폭동 관련 동료 통역관

2022-09-08

외교 통역사 되고 싶다면, 주제 따라 끊임 없이 공부해야

국가 원수들의 대화가 자신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면.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는 상상이다. 연방 국무부의 베테랑 한영 통역사인 이연향 박사는 “외교 통역은 어떤 주제도 해당 언어로 옮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 외교 통역사가 되려면 국무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 교수는 재능이 있다면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통역에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어와 한국어를 한다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문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상식에 대한 견문과 시야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평소에 뉴스를 꼼꼼히 읽고 언어에 최대한 노출시키도록 노력한다. 긴장의 연속에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내공'도 필요하다. 외교 통역의 경우 예민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일반 통역보다 긴장과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또 일에 대한 이야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입은 무겁게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외교 통역사의 조건으로 '건강'을 꼽았다. 잦은 해외 출장에 긴장감과 부담감이 이어지다 보면 체력이 쉽게 바닥날 수 있다며 자신의 건강은 알아서 챙길 수 있어야 설명했다. 이성은 기자

2011-10-27

영어는 발음보다는 강세·억양이 먼저…독서와 듣기, 영어 기본기의 밑천

영어는 미국에 사는 이민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기에 자신만의 영어습득 노하우는 한 두 개씩은 있을 터. ‘영어정복’을 위해 기발하다는 학습교재 등에 투자하며 공을 들여도 별효과가 없다면 국무부의 한국어 전담 통역사인 이연향 박사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대통령과 장관 등 통역을 전담하는 그는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원어민처럼 완벽한 발음을 구사하느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알아 듣고 이해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한국식 발음이 영어에 섞인 것은 한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자 큰 문제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대신 발음 따라잡기에 힘을 뺄 것이 아니라 '진짜' 영어 실력을 쌓는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조언했다. 이 박사가 추천하는 영어습득 노하우를 소개한다. ▷읽기와 듣기, 영어 기본기의 핵심=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중 말하기와 쓰기에 능숙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듣기와 읽기는 수동적인 작업이지만 충분히 쌓이면 나머지 두 가지가 따라온 다는 것을 기억하자.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으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언어를 배우는데 가장 큰 밑천이 된다. 듣기의 경우 운전이나 집안일 등 다른 일을 할 때에도 CNN 등 영어 방송을 틀어 놓고 귀가 영어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한다. ▷발음은 나빠도 되지만 억양과 강세는 반드시 지킨다=억양과 강세를 지키지 않으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음악에서 끊기와 쉼표가 중요하듯 영어도 문장을 적절하게 끊어줘야 상대방의 귀에 쏙쏙 들어가게 된다. ▷웅얼거리는 습관을 버린다=한국어는 소리가 입 안으로 들어가는 음이 많은 반면 영어는 밖으로 내뱉어야 한다. 입 앞에 종이를 두고 말할 때 종이가 움직이도록 소리를 뱉는 연습을 한다. 이성은 기자

2011-10-27

오바마 대통령 전담 한국어 통역관 이연향 박사…"역사 현장 지키는 게 외교통역의 매력"

전 세계를 내 집 안방처럼 다니는 '원더우먼'. 그를 만나기 전 그에 대해 들어온 수식어 중 하나다. 지난 15일 비엔나 쇼핑몰 한 귀퉁이의 커피숍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강하고 기가 세게 보이는 억척스러운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렸건만, 아담하고 마른 체격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뚜렷한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왔음에도 "오래 기다린 것 아니냐"며 인사를 건네고, 사진 촬영에도 "맨 얼굴이라서 별론데요…"라면서도 요청하는 대로 기꺼이 포즈를 취하는 그에게서 까칠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붙어 다니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다. '닥터 리(Dr. Lee).' 조지 W부시 전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고 김대중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등 한미 전·현직 수장들과 고위 지도자들에게도 그는 '닥터 리'로 통한다. 그 주인공은 연방 국무부(DOS)에 소속된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국무장관의 전담 통역관 이연향 박사다 지난 12~14일에 걸친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방문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의 통역을 전 담했다. 양국 수장의 소통이 그의 혀에 달렸던 셈이다. "지난 3일을 홍삼 약발로 버틴 거 같아요. (웃음) 극도의 긴장 속에서 일했기 때문에 피곤한 게 당연한데 피곤할 틈이 없더군요. 국빈만찬 덕분에 저도 처음으로 정장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통역도 해보고요." 프로긴 프로다, 살인적인 일정과 피 말리는 긴장 속에 3일을 보냈을 터, 생생한 기운이 넘쳤다. 그에 대해 들어 온 '명성'을 줄줄 읊어대자 쑥스러운 듯 웃음을 '뻥' 터뜨리지만 그런 여유와 부드러움이 그를 한결 자신만만해 보이게 했다. 이 박사는 권위와 명성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한 긍정의 힘에서 도출된 당당함과 성실함이 그를 '도전'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노력가이자 행동가로 만든 듯 했다. 먼저 이번 국빈방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보안상 가벼운 내용의 질문만 허락됐다. -이 대통령이 빡빡한 일정을 거침 없이 소화한 것에 오바마 대통령이 "역시 불도저"라고 했었죠. 박사님 일정도 만만치 않은 강행군이었던데요. "국빈방문기간 3일이 어떻게 지났나 싶을 정도로 정신 없었죠. 첫날(12일) 국방부 탱크룸 방문과 오바마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위해 '깜짝' 준비한 한식당 저녁 회동, 둘째 날(13일) 환영식과 정상회담, 합동 기자회견, 국빈 만찬까지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측 관계자들의 통역을 맡았으니까요. 마지막 날(14일) 두 대통령의 디트로이트 방문도 제가 통역을 했어요." -한미 양국 관계가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이번 국빈방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이 박사님은 어떤 생각이신가요. "맞아요. 오바마 대통령이 얼마나 이 대통령을 배려했는지는 여러 면에서 나타났죠. 국빈방문이라는 가장 높은 격의 예우를 한 것부터 일부러 한식당에서 대접한 것도 이 대통령을 위해서죠." -이날 한식 메뉴는 뭐였나요. "불고기가 메인 이었어요. 안전상 고기는 미리 주방에서 구워서 나오고요." -미 대통령이 외국정상과 지방도시를 함께 방문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데, 이번 두 대통령의 디트로이트 방문도 함께 가셨죠. 재미난 일화는 없었나요. "이 대통령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모자를 쓰고 연설한 것은 두고두고 이슈가 될 정도로 큰 인기였어요. 오바마 대통령은 시카고 출신이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잖아요. 오바마 대통령이 이 대통령이 주저 없이 디트로이트 모자를 쓰는 걸 보고 '타고난 정치인'이라고 부추겨 세웠죠." 이 박사는 자신의 외교 통역 중 이번 국빈방문과 2008년 조지 W부시 전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을 일이라고 했다. "우연히 지원한 통번역 대학원이 인생 바꿨다" 이연향 국무부 통번역국 일반어과 수장 이 작은 체구의 '거인'이 걸어온 삶의 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변화무쌍'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한국어 통역관의 학부 전공이 문과나 이과도 아닌 성악이었다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서울예고와 연세대 성악과를 나온 것만으로도 그가 예술에 진지한 뜻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막상 예술을 해보니 끝이 없더라고요. 뭔가 끝이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방송 프로듀서에 도전할까 했지만 당시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인식 때문에 원서 접수는커녕 방송국 경비실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결혼 뒤에는 두 아이의 평범한 엄마였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가장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때 찾아왔다. "친구가 한국외대 통번역 대학원 입학 시험장에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어요. 얼떨결에 같이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을 해버린 거죠. 중학교 때 무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란에서 3년 동안 국제학교를 다녔고, 대학에서는 영자신문사에서 활동했으니까 영어에 '기본'은 있었어도 통역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한국 정서상 늦깍이 학도였던 그는 졸업반 때 이미 3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다소 늦게 사회 첫 발을 디뎠지만 통역사로서 성공적인 데뷔로 빠르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졸업하던 해에 걸프전이 터졌어요. 저와 몇몇 소수정예들이 통역을 했죠. 졸업하고 나서는 소위 '잘 나간다'고 하잖아요?(웃음) 이렇게 바빠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들어왔어요." 한국 무대에서 통역사로 종횡 무진하던 그가 미국행을 택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일하면서 두 아이에게 신경을 쓸 틈이 많이 없었고,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 때 마침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몬트레이 통번역 대학원에서 한영과를 만든다며 도와달라고 했고요." 그렇게 강단에 서게 된 그는 이 대학원에서 10년간 교수로 제자들을 배출했다. 제네바를 오가며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이 때였다. 몬트레이대 교수 시절 맺은 국무부와의 인연은 그를 미국 최고의 한국어 외교 통역관으로 만들었다. "과거 한미 양국간 문화적 차이로 본뜻과 다르게 오역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어요. 언론에 자주 나올 만큼 문제가 많았죠. 그랬던 상황 때문에 한국과 미국 문화를 모두 경험하고 양국 정서를 이해하고 있는 저한테 일이 들어 온 거에요." 2004년 이화여대 통번역과 교수를 맡으면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도 국무부와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한미 관계에서 그 만한 베테랑 외교 통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국무부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했던 두 아이의 엄마 '늦깎이 학도' 로 졸업반 때 걸프전 통역으로 성공적인 데뷔 "이대 강단서 전문 통역사 배출에 힘쓸 터" 이 박사는 결국 3년 전 국무부로 둥지를 옮겼다. 돈도 명예도 아닌 이유는 하나. "한미 관계에 기여를 해야겠다는 사명감"때문이었다. 미국 공무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서열로 국무부 생활을 시작한 그의 활약상은 빠르게 나타났다. 얼마 안돼 국무부 산하 통번역국 일반어과(비유럽어)의 총괄 책임자(General Branch Chief, Interpreting Division)로 단숨에 올라섰다. 한미 양국의 대통령도 이 박사를 '닥터 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 호칭이 대우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잘 알던 그였다. "옳다고 믿으면 주저하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이에요. 국무부에 들어왔을 때 다들 저를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어봤죠. '닥터 리'라고 답했죠. 제가 여자인데다 아시안이고 덩치도 크지 않은데 여기 문화대로 이름을 부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이 박사는 외교 통역의 매력에 대해 "역사가 만들어 지는 현장에 있는 것"이라고 단숨에 요약했다. "특히 비공개 회담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그 현장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국가 원수들과 저만 아는 비밀이니까요. 단, 그만큼 입은 무거워야 해요. 이 세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직업 윤리에요."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것도 외교 통역의 매력이자 통역을 잘 하는 '비법'이라고 귀띰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다른 국가를 방문할 때는 항상 몇 일 먼저 그 나라에 갑니다. 시장 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 나라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당연히 통역할 때도 도움이 돼요." 인터뷰 말미에 던진 그의 폭탄 발언에 깜짝 놀랐다. 그는 다시 ‘깜짝’ 변신을 준비 중이었다. "다음 달 하와이에서 열리는 APEC정상회담 통역을 끝으로 당분간 국무부를 떠날 계획입니다." 오랜 경험으로 전문화된 통역사 배출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몸 담았던 이화여대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제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통역은 요청이나 기회가 있을 때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동안 미뤄왔던 집필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그의 계획 중 하나다. 그가 구상한 프로젝트는 한미문화사전과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영어 교육 관련 책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좋은 회사 취직이요, 아니면 외국인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요? 우리의 갇힌 시야와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언어를 통해서 접근하겠다는 마음이 선행돼야 해요." 그는 또한 북미 외교 정상화를 위해 보탬이 되는 것도 그의 바람 중 하나라고 했다. 듣고 보니 모두 일에 대한 거다. 일 말고는 도전하고 싶은 새로운 것이 있을까. "아! 무용이요! 정적인 것들만 해와서 동적인 것을 해보고 싶어요. 춤을 배워볼까 하는데 발레는 어떨까 해요. 할 수만 있다면 농사도 지어보고 싶고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줄줄이다. 당연히 '은퇴'는 먼 나라 이야기다. "지금은 한창 일할 때죠. 언젠가는 (은퇴)하겠지만 아직은 제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평범한 두 아이의 엄마에서 미 대통령을 전담하는 통역관으로 우뚝 선 그. 늦깎이 학도로 출발해 종횡무진 필드를 주름잡고 있는 그는 당당한 50대였다. 도전 앞에서는 언제든 '스텝다운'대신 '스텝업'을 택할 그였다. 이성은 기자

20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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