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 전담 한국어 통역관 이연향 박사…"역사 현장 지키는 게 외교통역의 매력"
이명박 대통령 국빈방문 때 미국측 담당
클린턴 국무장관 등에 '닥터 리'로 통해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왔음에도 "오래 기다린 것 아니냐"며 인사를 건네고, 사진 촬영에도 "맨 얼굴이라서 별론데요…"라면서도 요청하는 대로 기꺼이 포즈를 취하는 그에게서 까칠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붙어 다니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다.
'닥터 리(Dr. Lee).'
조지 W부시 전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고 김대중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등 한미 전·현직 수장들과 고위 지도자들에게도 그는 '닥터 리'로 통한다.
그 주인공은 연방 국무부(DOS)에 소속된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국무장관의 전담 통역관 이연향 박사다
지난 12~14일에 걸친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방문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의 통역을 전
담했다. 양국 수장의 소통이 그의 혀에 달렸던 셈이다.
"지난 3일을 홍삼 약발로 버틴 거 같아요. (웃음) 극도의 긴장 속에서 일했기 때문에 피곤한 게 당연한데 피곤할 틈이 없더군요. 국빈만찬 덕분에 저도 처음으로 정장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통역도 해보고요."
프로긴 프로다, 살인적인 일정과 피 말리는 긴장 속에 3일을 보냈을 터, 생생한 기운이 넘쳤다.
그에 대해 들어 온 '명성'을 줄줄 읊어대자 쑥스러운 듯 웃음을 '뻥' 터뜨리지만 그런 여유와 부드러움이 그를 한결 자신만만해 보이게 했다.
이 박사는 권위와 명성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한 긍정의 힘에서 도출된 당당함과 성실함이 그를 '도전'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노력가이자 행동가로 만든 듯 했다.
먼저 이번 국빈방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보안상 가벼운 내용의 질문만 허락됐다.
-이 대통령이 빡빡한 일정을 거침 없이 소화한 것에 오바마 대통령이 "역시 불도저"라고 했었죠. 박사님 일정도 만만치 않은 강행군이었던데요.
"국빈방문기간 3일이 어떻게 지났나 싶을 정도로 정신 없었죠. 첫날(12일) 국방부 탱크룸 방문과 오바마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위해 '깜짝' 준비한 한식당 저녁 회동, 둘째 날(13일) 환영식과 정상회담, 합동 기자회견, 국빈 만찬까지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측 관계자들의 통역을 맡았으니까요. 마지막 날(14일) 두 대통령의 디트로이트 방문도 제가 통역을 했어요."
-한미 양국 관계가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이번 국빈방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이 박사님은 어떤 생각이신가요.
"맞아요. 오바마 대통령이 얼마나 이 대통령을 배려했는지는 여러 면에서 나타났죠. 국빈방문이라는 가장 높은 격의 예우를 한 것부터 일부러 한식당에서 대접한 것도 이 대통령을 위해서죠."
-이날 한식 메뉴는 뭐였나요.
"불고기가 메인 이었어요. 안전상 고기는 미리 주방에서 구워서 나오고요."
-미 대통령이 외국정상과 지방도시를 함께 방문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데, 이번 두 대통령의 디트로이트 방문도 함께 가셨죠. 재미난 일화는 없었나요.
"이 대통령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모자를 쓰고 연설한 것은 두고두고 이슈가 될 정도로 큰 인기였어요. 오바마 대통령은 시카고 출신이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잖아요. 오바마 대통령이 이 대통령이 주저 없이 디트로이트 모자를 쓰는 걸 보고 '타고난 정치인'이라고 부추겨 세웠죠."
이 박사는 자신의 외교 통역 중 이번 국빈방문과 2008년 조지 W부시 전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을 일이라고 했다.
"우연히 지원한 통번역 대학원이 인생 바꿨다"
이연향 국무부 통번역국 일반어과 수장
이 작은 체구의 '거인'이 걸어온 삶의 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변화무쌍'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한국어 통역관의 학부 전공이 문과나 이과도 아닌 성악이었다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서울예고와 연세대 성악과를 나온 것만으로도 그가 예술에 진지한 뜻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막상 예술을 해보니 끝이 없더라고요. 뭔가 끝이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방송 프로듀서에 도전할까 했지만 당시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인식 때문에 원서 접수는커녕 방송국 경비실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결혼 뒤에는 두 아이의 평범한 엄마였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가장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때 찾아왔다.
"친구가 한국외대 통번역 대학원 입학 시험장에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어요. 얼떨결에 같이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을 해버린 거죠. 중학교 때 무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란에서 3년 동안 국제학교를 다녔고, 대학에서는 영자신문사에서 활동했으니까 영어에 '기본'은 있었어도 통역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한국 정서상 늦깍이 학도였던 그는 졸업반 때 이미 3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다소 늦게 사회 첫 발을 디뎠지만 통역사로서 성공적인 데뷔로 빠르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졸업하던 해에 걸프전이 터졌어요. 저와 몇몇 소수정예들이 통역을 했죠. 졸업하고 나서는 소위 '잘 나간다'고 하잖아요?(웃음) 이렇게 바빠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들어왔어요."
한국 무대에서 통역사로 종횡 무진하던 그가 미국행을 택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일하면서 두 아이에게 신경을 쓸 틈이 많이 없었고,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 때 마침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몬트레이 통번역 대학원에서 한영과를 만든다며 도와달라고 했고요."
그렇게 강단에 서게 된 그는 이 대학원에서 10년간 교수로 제자들을 배출했다. 제네바를 오가며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이 때였다.
몬트레이대 교수 시절 맺은 국무부와의 인연은 그를 미국 최고의 한국어 외교 통역관으로 만들었다.
"과거 한미 양국간 문화적 차이로 본뜻과 다르게 오역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어요. 언론에 자주 나올 만큼 문제가 많았죠. 그랬던 상황 때문에 한국과 미국 문화를 모두 경험하고 양국 정서를 이해하고 있는 저한테 일이 들어 온 거에요."
2004년 이화여대 통번역과 교수를 맡으면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도 국무부와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한미 관계에서 그 만한 베테랑 외교 통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국무부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했던 두 아이의 엄마 '늦깎이 학도' 로
졸업반 때 걸프전 통역으로 성공적인 데뷔
"이대 강단서 전문 통역사 배출에 힘쓸 터"
이 박사는 결국 3년 전 국무부로 둥지를 옮겼다. 돈도 명예도 아닌 이유는 하나. "한미 관계에 기여를 해야겠다는 사명감"때문이었다.
미국 공무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서열로 국무부 생활을 시작한 그의 활약상은 빠르게 나타났다. 얼마 안돼 국무부 산하 통번역국 일반어과(비유럽어)의 총괄 책임자(General Branch Chief, Interpreting Division)로 단숨에 올라섰다.
한미 양국의 대통령도 이 박사를 '닥터 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 호칭이 대우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잘 알던 그였다.
"옳다고 믿으면 주저하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이에요. 국무부에 들어왔을 때 다들 저를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어봤죠. '닥터 리'라고 답했죠. 제가 여자인데다 아시안이고 덩치도 크지 않은데 여기 문화대로 이름을 부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이 박사는 외교 통역의 매력에 대해 "역사가 만들어 지는 현장에 있는 것"이라고 단숨에 요약했다.
"특히 비공개 회담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그 현장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국가 원수들과 저만 아는 비밀이니까요. 단, 그만큼 입은 무거워야 해요. 이 세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직업 윤리에요."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것도 외교 통역의 매력이자 통역을 잘 하는 '비법'이라고 귀띰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다른 국가를 방문할 때는 항상 몇 일 먼저 그 나라에 갑니다. 시장 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 나라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당연히 통역할 때도 도움이 돼요."
인터뷰 말미에 던진 그의 폭탄 발언에 깜짝 놀랐다. 그는 다시 ‘깜짝’ 변신을 준비 중이었다.
"다음 달 하와이에서 열리는 APEC정상회담 통역을 끝으로 당분간 국무부를 떠날 계획입니다."
오랜 경험으로 전문화된 통역사 배출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몸 담았던 이화여대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제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통역은 요청이나 기회가 있을 때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동안 미뤄왔던 집필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그의 계획 중 하나다.
그가 구상한 프로젝트는 한미문화사전과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영어 교육 관련 책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좋은 회사 취직이요, 아니면 외국인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요? 우리의 갇힌 시야와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언어를 통해서 접근하겠다는 마음이 선행돼야 해요."
그는 또한 북미 외교 정상화를 위해 보탬이 되는 것도 그의 바람 중 하나라고 했다.
듣고 보니 모두 일에 대한 거다. 일 말고는 도전하고 싶은 새로운 것이 있을까.
"아! 무용이요! 정적인 것들만 해와서 동적인 것을 해보고 싶어요. 춤을 배워볼까 하는데 발레는 어떨까 해요. 할 수만 있다면 농사도 지어보고 싶고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줄줄이다. 당연히 '은퇴'는 먼 나라 이야기다.
"지금은 한창 일할 때죠. 언젠가는 (은퇴)하겠지만 아직은 제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평범한 두 아이의 엄마에서 미 대통령을 전담하는 통역관으로 우뚝 선 그. 늦깎이 학도로 출발해 종횡무진 필드를 주름잡고 있는 그는 당당한 50대였다. 도전 앞에서는 언제든 '스텝다운'대신 '스텝업'을 택할 그였다.
이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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