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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민주주의 위기와 정치 실종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한 시민혁명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아 사회나 국가를 통치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만들었다. 시민은 선거를 통해 사회를 다스릴 권한을 통치자에게 위임하고 통치자는 견제와 균형의 국가 시스템 안에서 민주적 통치를 하게 된다.   이런 민주주의 사회 질서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삼권분립과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에서조차 선거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난입 사태까지 벌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극단주의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입법·행정·사법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상호존중의 민주주의 질서가 도전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지켜야 할 정당에서조차 유리하지 않은 사법부 판결이 나오면 강한 비난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행정과 입법 사이에도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장관과 국회의원의 입씨름이 도를 지나쳐 정책토론이 아니라 감정적 상호비방으로 일관한다. 미국도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하고 나자 하원의장이 그 자리에서 연설문을 찢어버릴 정도로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정치는 서로 다름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지혜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혜를 갖춘 정치와 정치가는 실종되고 있다. 정치적 갈등의 심화는 극단적 강경파의 활약을 부추기게 된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의 예산안을 강경파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서서 연방정부 셧다운을 몇 시간 남겨 놓고 임시 예산안이 간신히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이런 합의를 끌어낸 자기 당 하원의장에 대해 불신임안을 상정했고 통과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여명에 불과한 친트럼프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공화당 하원의원 221석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주 민주주의문화재단(Democracy and Culture Foundation)과 뉴욕타임스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에 참석했다. 전 세계 지성인들이 모여 민주주의의 위기와 해법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최근 독재적 지도자들의 권력이 확장되고, 인공지능이 인간 노력의 가치를 침해하고,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기후변화는 더욱 심각해지고, 표현의 자유는 공격을 받고, 유럽에서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포럼에서는 21세기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의 극명한 현실로 보았다. 지난 20세기 후반 누려왔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는 오늘 과연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있는가를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포럼에서는 민주주의 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급격한 사회변화에 있다고 분석했다. 디지털 혁명으로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사람들은 이에 적응하지 못해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기술의 발전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이에 따라 돈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정부의 힘도 커지지만, 시민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한다고 느껴서 불안감이 커진다고 한다. 불안감과 무력감은 모든 문제를 자신이 아니라 사회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이것이 정치 선동과 연결될 때 극단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개인의 사회적 불신뿐 아니라 정치권도 상대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문제를 풀려고 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사회문제를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상대편의 과거 잘못에 대한 비난이 우선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나 윤석열 정부의 카르텔 철폐를 보면 모두 상대편을 탓하는 닮은꼴이다. 정부의 역할은 남의 탓보다는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책설계를 하는 일이 우선이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Fritz Heider)는 일찍이 이런 현상을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으로 분석했다. 인간은 종종 문제의 본질보다는 이를 외부적 상황이나 개인적 특질의 탓으로 돌려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도 상대편 집권세력의 과거를 청산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 불신을 가중하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정치선동가들이 사회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사회 불신과 개인의 불안감이 언론의 편향보도와 개인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정치 선동으로 인해 극단주의 세력의 역량을 더욱 키워주고 있다. 극단주의 세력의 득세는 기존 정당의 정치질서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쉽게 무너뜨린다. 극단적 팬덤 현상은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국회의원의 소신을 쉽게 마녀사냥감으로 만들고 정당의 기본 이념이나 가치보다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게 한다.   우리 인류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세계대전을 일으켜 몰락한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극단적 세력이 득세할 때 합리적 사고는 길을 잃는다. 정치는 치열하게 대립하더라도 결국은 화합을 끌어내는 예술이다. 정치권에서 내로남불이 일상화되어가는 오늘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신 “내 탓이오”라는 말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염재호 /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중앙시평 민주주의 위기 민주주의 사회 극단주의 정치지도자들 민주주의 질서

2023-10-06

[중앙시평] 과학이 보여주는 진취적 기상

옛날 인간들은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었다. 국지적으로는 산과 계곡 등 여러 가지 지형이 있지만 큰 그림을 볼 때는 거대한 평지에 약간 울룩불룩한 정도이지 않은가. 그리 멀리 어디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그래도 꽤 오래전부터 지구는 둥글고 그것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천체는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땅덩이가 공 모양이라는 ‘지구’ 개념을 강력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중국이 글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있는 국가여야 하는데, 구형의 표면에는 중심이 있을 수 없다는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새도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하게 선진국에는 더 많다. 과학자처럼 그 지구평면설(또는 지평설)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정기적 학회를 열고 서로 연구결과 발표도 활발히 한다. 소위 ‘지평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도리어 자기들을 깔보고 비웃는 ‘지구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맹신하도록 세뇌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평인들은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증거를 아주 선별적으로 취급하며 특이하게 해석한다. 지구가 명백히 동그랗게 보이는 사진도 나사(NASA)와 같은 정부기관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아니, 당신이 직접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서 본 적은 없지 않은가.) 한편 자기들 주장에 도움이 되는 증거가 어쩌다 나오면 그것을 다들 인용하며 되풀이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어떤 배가 굉장히 먼 거리에 나갔는데도 해안에서 그 모습이 보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면 그 굽어 있는 물의 표면을 따라 나간 배가 어느 정도 멀어지면 시야에서 수평선 밑으로 들어가므로 모습이 사라져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이상한 관찰결과를 일시적인 대기현상 때문에 일어난 빛의 굴절이 빚은 착시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지평인들은 지구인들이야말로 편한 대로 증거를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는 이런 식으로 과학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하는 학자 중 하나다. 그는 그들을 우리가 무조건 무시하고 짓눌러서는 안 되고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평인들이 정말 어떤 생각과 주장을 하는지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2018년도 국제 지평설 학술대회에 참석하였고 거기서 지평인들과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다. 지평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한 관측과 실험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고, 그것을 같이 시험해 보자고 권했다. 한 예로, 현재 주류 지평설에 의하면 납작한 원형으로 생긴 세상의 중심은 북극이다. 남극이란 것은 없고, 그 대신 엄청난 길이의 바깥쪽 원주에 얼음벽이 쳐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엔 깃발을 보라. 거기에 나온 세계지도는 바로 이런 형태이다.) 지평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지구인들이 ‘남반구’라고 말하는 외곽지역에서 동서의 거리는 지구인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길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에서 뉴질랜드까지 가는 거리는 너무 멀어서 직행 항공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항로가 있지 않은가? 매킨타이어는 지평인 한명과 거기에 대한 내기를 하게 되었다. 매킨타이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비행기를 타 보기로. 그런데 그 약속을 했던 지평인은 결국 시험장에 나오지 않았다.   매킨타이어는 과학적 태도의 정수는 증거에 따라 기꺼이 이론을 바꿀 용의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포퍼(Karl Popper)의 그러한 주장에서 영감을 얻는다. 과학적 태도가 안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장 아끼는 믿음이 흔들리게 될까 봐 진짜로 새로운 경험은 피한다. 그와 정반대인 것은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려는 과학자의 욕망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과학자라 하는 사람들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론만 계속 믿고 입증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특정한 과학이론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런 잘못된 과학자 집단은 파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과학적 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하는 과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참 어려운 것은 과학을 공격하는 사람들까지도 과학적 태도로 대해주는 일이다. 과학도 틀릴 수 있고 과학지식은 항상 개선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지식이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진취적 기상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많이들 하는 이야기다. 옛날 학교에서 도덕 시간에도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전통이 서양과학의 정신과 제대로 통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만 방어하는 소극적이고 침체된 태도를 벗어나서, 자신의 현재 믿음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자는 과학의 정신이 정말 진취적 기상이 아닐까. 장하석 /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중앙시평 과학 진취 과학자 집단 과학적 태도 진취적 기상

2023-09-29

[중앙시평] 왜 이제 와서 ‘오펜하이머 신드롬’인가

세계적 오펜하이머 신드롬에다 1980년대부터 과학사 강의를 했던 터라 간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흑백과 천연색의 비선형적 스토리 전개에서 휙휙 바뀌는 화면을 따라잡느라 3시간 내내 긴장했다.   과학사에서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넘어가던 전환기, 정치·경제적으로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며 파시즘에 대항할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었던 격동기, 그 시대를 산 비범한 과학자가 제2차 세계대전의 신무기 개발 주역으로 이룩한 성취, 이후 세상의 파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냉전시대 마녀사냥에 희생된 비극의 역정은 인간성의 이중성과 과학기술문명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각본의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06년 퓰리처상)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역사상 가장 모험적인 산학연군관 프로젝트로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원자도시’를 비롯해 테네시주 오크리지 우라늄235 생산시설, 워싱턴주 핸포드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와 분리공장,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60만 명이 참여했다. 원자도시에 모여든 6000여 명 중 90%는 자신의 임무가 원자탄 제조의 일부인지도 모르는 채 수수께끼 풀이에 몰두했다. 투입 예산은 22억 달러(현재 가치 330억 달러)였다.   개발 과정은 고전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과학기술계는 자율성을 중시하고, 군은 보안 위주의 관료주의를 고수했다. 기업의 경영진과 기술진, 과학자와 엔지니어 간의 긴장도 증폭됐다. 불확실성과 혼돈의 현장을 통합으로 이끈 ‘진정한 지도자’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오피)였다. 프로젝트의 총책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자신이 가장 잘한 결정이 오피를 과학 총괄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으로 발탁한 것이라 했다.   영화는 1954년 오피의 안보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상무장관 후보의 청문회를 긴박하게 오간다. 관련 인물의 성격과 신념 차이, 수소폭탄 개발을 둘러싼 이견, FBI 기밀문서 등 정치 상황이 얽혀 모두 패자가 된다. 오피는 공산주의와 엮인 배신자로 망가졌고, 스트로스는 상원 표결에서 46대 49로 상무장관 대행으로 그쳤다. 부결표를 던진 케네디 상원의원은 1963년 4월 대통령으로 오피에게 미국 과학자 최고의 영예인 페르미상을 수여하기로 서명한다. 그러나 그는 암살되고 2주일 뒤 존슨 대통령이 시상한다.   1944년 연합군이 독일 원자탄 개발이 초보 단계임을 확인하게 되자, 과학계의 핵무기 반대 움직임이 가시화한다. 그때 로스앨러모스를 떠난 과학자는 영국의 조셉 로트블랫경 한 명이었다. 닐스 보어는 원자탄 개발 이후의 세계의 분열상을 경고하며 원자력의 국제적 관리를 주장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신에 서명을 받았던 시카고 그룹의 레오 실라르드도 원자탄 투하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투하 결정은 군부와 트루먼 대통령의 몫이었다.   프로젝트 초기에 제기된 질문 중 하나는 원자폭탄 폭발이 대기 중에서 계속 연쇄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었다. 영화에는 오피가 그 계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은 아인슈타인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픽션으로 실제로 만난 것은 시카고 그룹의 아서 H 콤프턴이었다. 놀런 감독은 일부러 관중이 잘 아는 아인슈타인을 택했다고 했다.   2022년 12월 제니퍼 그랜홀름 미 에너지부 장관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편견과 불공정의 증거가 밝혀졌고, 그의 애국심을 확인해 스파이 혐의를 철회한다”고 했다. 핵무기 과학사학자 알렉스 웰러스타인은 이제 와서 정부가 스스로 과실을 인정하는 게 놀랍다고 했다. 이전에 출간된 책들도 다시 화제다. 냉전시대 핵무기 경쟁까지 다룬 리처드 로즈의 『원자폭탄 만들기』(1988년 퓰리처상),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미국이 과학으로 세계 강국이 되는 정치·사회적 배경까지 그린 데이비드 캐시디의 『J. R. 오펜하이머와 미국의 세기』(2004년) 등이다.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한 애국심으로 원자탄 개발을 지휘했으되 수소폭탄 개발과 핵확산을 반대했던 오피,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의도치 않게’ 대량살상무기 개발 경쟁이 세상을 파멸시키는 연쇄반응, 핵 홀로코스트였다. 힌두교와 인도문학에도 심취했던 그는 1965년 NBC 인터뷰에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를 인용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술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언급되고, 가장 빈곤한 국가에 속하는 북한이, 오피의 예측대로, 개발 비용이 낮아진 핵무기를 소유하게 된 상황은 그의 공포를 긴박하게 현실화하고 있다. 1962년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핵전쟁 종말의 공포를 경험한 세대라서 핵전쟁을 피해갔다. 그 역사적 기억은 날로 흐려지고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진화가 어디까지 가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빚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그 잠재적 공포가 오펜하이머 신드롬의 배경이란 생각이 든다. 김명자 / 카이스트 이사장·전 환경부장관중앙시평 오펜하이머 신드롬 세계적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 산학연군관 프로젝트

2023-09-08

[중앙시평] 미국 대학이 스스로 참여한 ‘적극적 조치’

지난달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학 입학 전형에서 소수인종 우대 정책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같은 성적이라면 백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보다 아프리카나 중남미계 미국인이 명문대에 진학하기 쉽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게 백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을 역차별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어디라고 보는지, 그리고 무엇을 정당하다고 보는지에 따라 판단은 첨예하게 갈린다.   반대자들은 이 조치가 다수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희생시키면서 소수에게 특권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이 제도가 공정(fairness)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역차별을 없애고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평가해야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지지자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거나 차별과 억압을 받아 온 계층에게 이 조치가 필요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하위 계층은 이 조치가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었을 사회적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공평(equity)하다고 판단한다.   잠시 시각을 돌려 격투기를 생각해 보자. 격투기는 그 성격상 얼마나 잘 싸우는지를 평가할 수밖에 없다. 체중이 60㎏과 100㎏인 유도 선수 둘이 대결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게 정당한 대결일 수 있겠는가? 누가 이기는지만 보려고 한다면 아무 조건 없이 두 선수가 맞대결해야 한다. 그런 싸움이라면 60㎏ 선수가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해도 비슷한 기량의 100㎏ 선수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신체조건은 타고난 것이어서 자신의 노력으로 바꾸기 어렵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므로, 격투기에서는 체급을 나눠 경기를 벌인다. 싸움의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정당한 경쟁이 목적이므로 이게 가능하다. 이는 체급이 다른 모든 선수에게 기회를 공평하게 주려는 것이다. 선수들이 쏟은 노력과 그 결과로 얻는 성과를 타고난 신체적 조건과 상관없이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것이다.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격투기는 승리가 중요한 치고받기 싸움에서 정당함이 중요한 현대 스포츠로 격상할 수 있게 된다.   올림픽 출전 선수의 기량은 대부분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을 전후해 정점에 이른다. 이 시점에 서로의 기량을 겨루고 이를 평가하면 된다. 현재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입사 시험이나 자격시험도 마찬가지다. 응시자가 임무 수행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그 시점에서 평가하면 된다. 대입 전형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본격적인 공부를 이제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대입 전형은 교육의 한 과정이다. 부모의 영향이 큰 현재의 능력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므로, 발전 가능성 내지는 잠재력을 중점 평가해야 한다. 미래의 능력을 평가하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현재의 능력을 평가하더라도, 이는 현재의 능력보다는 잠재력을 가늠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을 평가하려 한다면, 체급 경기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공평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부모의 학력, 가정의 사회경제적 위치, 거주 지역, 성, 인종 등이 학생의 현재 능력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체급 경기에서의 체중처럼 학생 본인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없는 요인이다. 이런 외부 여건이 불리한 학생이라면 현재 갖춘 능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미래 성장 가능성은 클 수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 positive action)를 연방정부 임용에 도입했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해 미국의 명문대학은 자발적으로 이 조치를 입시에 반영했다. 공평성의 문제를 교육이 왜 이처럼 고민해야 하는가? 대학 입학이 고등학교 시절까지 기울인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은 교육으로 자신을 계발해 나갈 출발점이고 기회이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이 보장돼야 한다면, 모든 사람은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 부모나 가정 등, 자기 외적인 요인에 의해 이 권리가 침해되지 않게 하려면 공평성을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구성원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질 때, 사회구성원은 개인이 노력한 결과로 형성된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질 때, 결과에 대한 차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존경하는 건강한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   아무 조건 없이 상대와 싸워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검투사의 로마 시대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평가하는 현대 스포츠의 시대가 우리 교육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성숙한 사회에선 무조건적 평등(equality)이 아니라 공평성의 원칙이 작동돼야 한다. 이는 기회 평등의 원칙을 지키려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으로만 이뤄질 수 있다. 양형진 / 고려대 명예교수중앙시평 미국 대학 적극적 조치 대학 입학 사회적 기회

2023-07-28

[중앙시평] 한미동맹 70주년의 의미

동부에 여행 중인 여동생이 큰오빠를 위한 사진이라며 사진 한장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버지니아의 한국전 기념관에 있는 미군 동상들이었다. 1950년 발발한 6·25한국전쟁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은 3만6000여명에 달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전을 제외하고 미국이 치른 국지전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 피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자유와 번영이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미국이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당시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을 유지하려면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남진을 저지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을 빼앗겨서는 안됐고 완충지대인 한반도의 공산화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 가운데는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명령에 따라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좀 냉정하게 말을 하면 미국은 국익이, 미군 병사는 생존이 우선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은 불리하던 한국전쟁의 판도를 단번에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그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여러 군사전문가가 지적하듯 맥아더 장군은 중공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 거라 오판했고 결국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전쟁 양상은 뒤바뀌고 급기야 1·4후퇴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맥아더 장군에게 고마움을 잊자는 것도 아니고 미군 병사들의 희생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 맥아더 장군, 미군 병사들 덕에 한국은 적화통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비극을 가져왔다. 남북한 합쳐 최소 200만 명이란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했다. 많은 사람이 가족과 지인을 잃었다.   살아남았었어도 가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많다. 1000만 이산가족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숫자는 많고 그들의 아픔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한국전쟁이 오히려 경제적 부흥에는 도움이 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리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살게 됐어도 전쟁은 우리에겐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정작 36년간 우리를 수탈했던 일본은 한국전쟁 덕에 다시 기사회생했으니 화가 나는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6·25 한국전쟁에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UN군 병사들도 희생했다.  그 가족들의 슬픔 역시 외면하기 어렵다. 또한 비록 우리의 적이었지만 한국전에 참전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중공군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은 자국 사정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항미원조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수많은 젊은이를 한반도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세계의 많은 젊은이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도 김일성이 저지른 불장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새삼 한국전쟁을 뒤돌아본다.  한미동맹 70주년은 값지고 축하할 일이다. 그리고 이 동맹관계는 앞으로 다시는 한반도에서 6·25 한국전쟁과 같은 세계적, 민족적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든든한 억제 장치가 되어야 한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평 한미동맹 의미 한미동맹 70주년 올해 한미동맹 한국전 기념관

2023-06-11

[중앙시평] 재외동포청 출범에 기대한다

1997년 설립된 재외동포재단이 해체되고 재외동포청이 드디어 5일 출범한다. 그동안 재외동포청 본부 유치를 위해 서울, 인천, 대전, 그리고 제주 등이 경합을 했으나 외교부는 서울과 인천으로 압축했다가 결국 재외동포청 본부는 인천에, 서비스 지원센터는 서울 광화문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인천은 대한민국의 관문이며 송도 국제도시가 있고 서울과도 근접한 거리에 있다. 재외동포청 본부가 위치할 최적지로 평가된다.   인천은 1902년 한국 최초로 미국 이민자들이 출발한 역사적인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관문인 국제공항이 있는 곳으로 일단 접근성 면에서 최적이다. 개인적으로도 인천은 고향이며 현재 인천광역시 국제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인천이 최종 선정된 데는 편의성과 접근성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우선 지방균형발전이라는 정부 정책에 합당하고 월미도에는 한인 이민사 박물관이 있다. 또 제물포(인천)에 있던 내리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하와이 이민이 이뤄졌고, 하와이 한인들이 기금을 모아 인하대학교(인천과 하와이) 설립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배경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국을 방문한 한인 대부분이 서울에서 업무를 보기 때문에 서울에 서비스 지원센터를 설립한 것도 업무 효율성 면에서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동포 업무를 관장했던 재외동포재단이 제주로 이전하는 바람에 매우 불편했었다. 필자는 거의 매년 세미나와 특강 차 한국을 방문하는데 제주도에 위치한 재외동포재단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빡빡한 한국 방문 일정 탓에 제주까지 방문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재외동포재단 본부의 제주 이전으로 직원들 사기도 매우 저하된 것으로 알고 있다.     5일 출범하는 재외동포청은 730여만 명의 재외 한인과 관련된 정책과 사업들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이를 집행하는 새로운 정부 기관이다. 그동안 해외 한인 업무는 부처별로 나누어져 효율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교육부, 문체부, 외교부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업무를 재외동포청으로 모두 이관하고 포괄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시행한다면 재외동포청 설립의 취지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초대 청장에 이기철 전 LA총영사가 임명됐다니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직업 외교관 출신인 이 청장은 재외동포영사국 조약 국장과 법률국장,네덜란드 대사, LA총영사 등을 역임했고 청장 임명 직전까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직을 맡았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각 지역 해외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신임 청장에게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재외 한인 정책 수립과 함께 주요 현안들의 신속한 처리도 기대한다.       재외동포청은 재외 한인들의 정체성 함양 및 대한민국과의 유대 강화 정책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주 업무라고 생각한다. 재외동포재단에서 했던 재외 한인 대상 초청, 연수, 교육, 문화 그리고 홍보 사업도 지속해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재외 한인 이주 역사와 연구 사업은 현지 학자들과 한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을 장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은 현지 상황을 잘 알고 있어 국내 학자들과 공동 연구 작업을 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다.   2023년 6월 인천광역시에서 출범한 재외동포청은 해외 한인이 대한민국의 자산이 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고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해외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 배려, 그리고 효율적인 정책 수립이 중요하다. 동시에 해외 한인들이 긍지를 갖고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발판도 구축해 주길 기대해 본다.   장태한 /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평 재외동포청 출범 재외동포청 본부 재외동포청 설립 그동안 재외동포청

2023-06-04

[중앙시평] 확장억제 합의의 함의와 할 일

한미 정상이 확장억제에 관한 워싱턴 선언을 내놓았다. 이로써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이 더 확실해졌다. 한국의 의견을 반영할 협의체도 설립됐다. 핵 억제력에 도움이 될 성과다.   선언의 배경에는 전술 핵과 전략 핵으로 한미를 동시에 위협하며 유사시 미국의 한국 지원을 견제하려 한 북한이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의 대결 심리에 따라 북한을 두둔했다. 그 결과 유엔은 북한의 도발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자연히 한국에서는 핵무장, 전술 핵 재배치, 확장억제 강화, 전략자산 상시 배치 등 다양한 대안이 제기되었다. 이제 윤석열 정부는 확장억제 강화와 전략자산 빈번 배치로 방향을 정하고, 이를 워싱턴 선언에 반영한 것이다.   선언의 함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정확한 평가를 하려면 미국의 의중부터 냉정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할 일을 변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취감 속에서 정작 해야 할 일을 놓칠 수 있다.   본디 미국은 핵무기 운용을 타국과 깊게 논의하는 데 소극적이다. 그러한 미국이 나토와는 핵 기획그룹(Nuclear Planning Group, NPG)을 운용하며 상대적으로 많은 논의를 한다. 한국과는 초보적 수준의 확장억제 전략협의그룹(EDSCG)을 운용해왔다. 그러다가 북핵 위협이 고조되고 한국에서 핵무장에 대한 지지가 70%를 넘자 미국도 대처를 고심하게 되었다. 마침 윤석열 정부가 확장억제 강화를 제기하자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되 핵무장 가능성을 차단하는 접근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핵협의그룹(Nuclear Consultative Group, NCG) 설치와 핵 확산금지조약(NPT) 재확인이 담긴 워싱턴 선언이 나오기에 이른다.   그러면 NCG의 효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혹자는 NCG가 NPG 보다 낫다고 하고, 혹자는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유추해 보면, 미국은 EDSCG보다 비중을 갖되 NPG에는 못 미치는 조직으로 NCG를 구상한 것 같다. NPG와 NCG는 이름부터 유사하다. P와 C만이 다르다. 문자 그대로 NPG는 기획(Planning)에, NCG는 협의(Consultative)에 방점이 있다. NPG는 장관급이고, NCG는 차관보급이다. 한국과는 EDSCG보다 높은 수준에서 일단 ‘협의’를 더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이런 정황을 애써 부인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NCG를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하면 된다. 종래 한미는 재래식 전력에 국한하여 함께 준비하고 훈련해왔다. EDSCG를 통해 핵 전력에 대해 협의한 지는 일천하다. 지금 한국이 핵무기 운용에 대해 본격 협의할 태세를 갖췄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첫째로 할 일은 NCG에 실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다. 치밀하게 연구하고 인력도 양성해야 한다. 자칫하면 핵무기 운용을 주도하려는 미국의 관성에 끌려가게 된다.   한편, 워싱턴 선언은 한국의 NPT 준수를 재확인했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핵무장론을 배제했음을 의미한다. 보수 일각에서 핵카드를 버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이 또한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북핵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이 핵무장 여론을 추동하고 있지만, 전문적인 입장에서 볼 때, 핵무장은 현실적인 대안이 못 된다.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높고 보수 진보 대립이 심한 나라는 제재를 견디기 어렵다. 핵무장은 국제고립과 국내 분열을 심화시켜 나라의 명운을 위태롭게 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둘째로 할 일은 차제에 핵무장의 문제점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제기하고, 강화된 확장억제가 대안이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인식시켜 핵무장 여론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워싱턴 선언을 만든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마침 국방부 장관이 이러한 노력에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한다. 더 나아가 범 정부 차원의 강력한 노력을 요망한다. 비핵 평화를 중시하는 진보 진영도 이 작업에 힘을 보태야 한다. 그리하여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논의가 포퓰리즘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편 강화된 확장억제는 억제 효과와 함께 북한의 강성 대응을 유발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이에 대처하려면 외교가 작동할 공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셋째로 할 일이다. 이 맥락에서 북한과 대증적으로 치고 받는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러와의 협력 여지도 보존해야 한다. 미·중·러가 경쟁하면서도 공통의 이해인 한반도 비핵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협력을 하도록 사안을 분리해 내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이 대화로 국면을 전환할 때 상황을 역활용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워싱턴 선언은 그 자체로 우리의 억제력을 강화한 문건이다. 거기에는 후속 대응에 따라서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내포되어 있다. 내실 있는 확장억제 협의, 핵무장 여론 완화, 북·중·러와의 외교공간 확보 분야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위성락 /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중앙시평 확장억제 합의 확장억제 전략협의그룹 확장억제 강화 재배치 확장억제

2023-05-22

[중앙시평] 내년초 ‘소비절벽’ 오나

소매상들은 경기변동을 가장 일선에서 느낀다. 고객들이 상품을 구매한 후 지출하는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기가 좋으면 웬만한 손님들도 고액권으로 결제하는 빈도가 높은 반면,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잔돈을 들고 오는 손님들이 늘어난다.  실제 한 소매상의 경우 지난 상반기만 해도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은 잔돈을 바꾸느라 거래은행을 들러야 했다. 하지만 지난 9월부터 은행방문 횟수가 줄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거의 1달에 한번 꼴이다. 잔돈결제가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생활이 팍팍해지자 쌈짓돈까지 소비지출에 동원하고 있는 형국이다.     소비자들은 최근 외식비도 크게 줄였다. 소비지출에 부담을 느낀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에 민감한 제과점의 경우 최근 매출이 크게 줄었다. 한인들이 많이 운영하는 식당들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하소연이다. 이처럼 실물경기는 최근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     그럼에도 연방준비제도(Fed)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에 ‘올인’하는 모습이다. 미국경제는 통계 수치상 아직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우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던 소비자 물가가 지난달 한풀 꺾인 모습을 보였으나, 2% 목표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게다가 올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 증가, 세 분기 만에 플러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난달 소비자 판매도 전월보다 1.3% 증가해 예상치를 웃돌았다.   고용시장도 수치상으로는 아직 양호하다.     연준은 이에 따라 조만간 빅 스텝 규모의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의 자이언트 스텝보다는 다소 완화됐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계속 아우성이다. 고금리에 따른 이자 부담은 차치하고라도, 장바구니 물가, 에너지와 주거비용 등은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어려운 상황은 마찬가지다. 실제 아마존, 애플, 구글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앞다퉈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황이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공급망 붕괴 등이 겹치며 글로벌 경기가 얼어붙은 탓이다. 그나마 소비의 주축인 중산층이 아직까지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저축한 여유자금으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곧 한계에 달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소비절벽이 일어날 경우 빠르면 내년 초 불황의 늪에 빠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실제 중산층의 소비지출은 예년 같지 않다. 연말 쇼핑시즌임에도 불구, 소비는 다소 부진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국소매협회는 미국의 11∼12월 소매 매출은 지난해보다 6∼8% 증가한 9426억∼9604억 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수치상으로는 늘어나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실제 소비는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선행지수로 불리는 주택시장은 지난 10년 이래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전방위적 경제 위기가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중간선거도 거의 막을 내렸으니, 백악관과 워싱턴은 민생으로 눈을 돌리기를 기대한다. 권영일 / 애틀랜타 중앙일보 객원 논설위원중앙시평 소비절벽 내년 소비자 물가 지난달 소비자 금리 인상

2022-12-05

[중앙시평] 내년초 ‘소비절벽’ 오나

소매상들은 경기변동을 가장 일선에서 느낀다. 고객들이 상품을 구매한 후 지출하는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기가 좋으면 웬만한 손님들도 고액권으로 결제하는 빈도가 높은 반면,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잔돈을 들고 오는 손님들이 늘어난다.  실제 한 소매상의 경우 지난 상반기만 해도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은 잔돈을 바꾸느라 거래은행을 들러야 했다. 하지만 지난 9월부터 은행방문 횟수가 줄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거의 1달에 한번 꼴이다. 잔돈결제가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생활이 팍팍해지자 쌈짓돈까지 소비지출에 동원하고 있는 형국이다.     소비자들은 최근 외식비도 크게 줄였다. 소비지출에 부담을 느낀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에 민감한 제과점의 경우 최근 매출이 크게 줄었다. 한인들이 많이 운영하는 식당들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하소연이다. 이처럼 실물경기는 최근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     그럼에도 연방준비제도(Fed)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에 ‘올인’하는 모습이다. 미국경제는 통계 수치상 아직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우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던 소비자 물가가 지난달 한풀 꺾인 모습을 보였으나, 2% 목표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게다가 올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 증가, 세 분기 만에 플러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난달 소비자 판매도 전월보다 1.3% 증가해 예상치를 웃돌았다.   고용시장도 수치상으로는 아직 양호하다.     연준은 이에 따라 조만간 빅 스텝 규모의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의 자이언트 스텝보다는 다소 완화됐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계속 아우성이다. 고금리에 따른 이자 부담은 차치하고라도, 장바구니 물가, 에너지와 주거비용 등은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어려운 상황은 마찬가지다. 실제 아마존, 애플, 구글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앞다퉈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황이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공급망 붕괴 등이 겹치며 글로벌 경기가 얼어붙은 탓이다. 그나마 소비의 주축인 중산층이 아직까지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저축한 여유자금으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곧 한계에 달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소비절벽이 일어날 경우 빠르면 내년 초 불황의 늪에 빠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실제 중산층의 소비지출은 예년 같지 않다. 연말 쇼핑시즌임에도 불구, 소비는 다소 부진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국소매협회는 미국의 11∼12월 소매 매출은 지난해보다 6∼8% 증가한 9426억∼9604억 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수치상으로는 늘어나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실제 소비는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선행지수로 불리는 주택시장은 지난 10년 이래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전방위적 경제 위기가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중간선거도 거의 막을 내렸으니, 백악관과 워싱턴 정가는 민생으로 눈을 돌리기를 기대한다. 더 늦기 전에 경기 경착륙에 대비하는 게 마땅하다. ‘아차’하는 순간 골든 타임은 지나간다.     권영일 / 애틀랜타 중앙일보 객원 논설위원중앙시평 소비절벽 내년 소비자 물가 지난달 소비자 글로벌 경기

2022-11-30

[중앙시평] 텃세가 더 문제다

텃세는 인간군상의 부정적인 모습 중 대표적인 것이다. 시대와 장소는 물론 심지어는 연령대를 불문하고 인간이 모이는 곳엔 텃세가 존재한다. 종교적 모임에서조차 텃세로 인해 상처 받았다는 지인을 만나볼 정도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조차 텃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직장은 물론이다. 먼저 온 사람이 뒤에 온 사람에 대해 일종의 군기 잡기나 밀어내기의 형태를 띠는 게 흔한 텃세의 부작용이다.  심할 경우 텃세는 소위 ‘왕따’, 더 심하면 학대로도 이어진다.  물론 텃세, 왕따, 학대가 반드시 서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왕따와 학대는 텃세와 달리 반드시 뒤에 온 사람이 피해자이고 먼저 있던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텃세를 부리는 직원 때문에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고용주를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직원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이 못 견디고 나가게 되고 심지어는 왕따 문제로 커져 자칫 직장 내 소송의 빌미도 되기 때문에 고용주들로선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축구팀에 들어간 아들이 연습이 끝나고 툴툴거렸다. 팀원 한 명이 자기에게 시비를 건다는 거다. 직감적으로 ‘텃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팀원들도 그러냐고 했더니 유독 한 명만 그런다고 해 다행히 왕따 상황은 아니었다. 텃세는 앞으로 어디를 가나 극복해야 할 과제이니 심하지 않은 이상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지켜만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봐도 어디를 가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텃세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같은 팀이 된 걸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사람이 많고 나의 맨탈이 어느 정도 강하다면 그런 텃세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데 텃세의 희생자가 어느 시점엔 텃세를 부리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게 슬픈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을 항상 뒤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추종자들의 ‘트럼피즘’을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트럼피즘은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보단 미국식 집단 텃세 (영어표현으로 nativism)의 발현이다. 네이티비즘 문제는 사실 트럼피즘뿐만 아니라 이를 비난하는 민주당과 진보쪽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선거 기간 한인여성후보의 영어발음을 민주당 후보가 비아냥거린 것도 크게 보면 네이티비즘의 한 모습이다.     미국의 역사는 잘 알다시피 이민의 역사이고 먼저 온 이민자그룹에 의한 텃세가 역사 저변에 흐른다. 백인 사이에도 이 텃세는 아주 심했다. 미국에는 17세기와 18세기 영국과 북서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19세기에 온 아일랜드, 이탈리아,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극도로 차별한 흑역사가 있다.  트럼프 지지층의 상당수가 백인인데 지금은 백인이란 하나의 이유로 하나가 되어 배타적 장벽을 같이 쌓고 있지만 이들의 조상들 사이엔 텃새의 가해자와 피해가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세기 중국인 이민자에 대한 차별은 텃세와 왕따, 학대가 어우러진 삼종세트였다.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갱스 오브 뉴욕’이란 영화를 보면 네이티비즘에 대해 어느 정도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뉴욕에 먼저 정작한 백인들과 다른 종교,문화를 가진 새 백인 이민자들과의 충돌을 배경으로 한다.     트럼프에 열광하는 지지자 가운데는 흑인, 히스패닉도 있다는 사실이 이 네이티비즘 문제를 설명해 준다.     트럼프를 통해 다시 표면으로 드러난 네이티비즘이 트럼프와 함께 종말을 고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트럼프가 사라져도 강도만 다를 뿐 네이티비즘은 계속될 것이다.     이민자 커뮤니티인 한인사회는 문화, 종교가 다른 이민 후배들에게 배타적 감정으로 텃세를 부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평 텃세가 문제 텃세가 역사 텃세 문제 왕따 문제

2022-11-28

[중앙시평] 텃세가 더 문제다

텃세는 인간군상의 부정적인 모습 중 대표적인 것이다. 시대와 장소는 물론 심지어는 연령대를 불문하고 인간이 모이는 곳엔 텃세가 존재한다. 종교적 모임에서조차 텃세로 인해 상처 받았다는 지인을 만나볼 정도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조차 텃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직장은 물론이다. 먼저 온 사람이 뒤에 온 사람에 대해 일종의 군기 잡기나 밀어내기의 형태를 띠는 게 흔한 텃세의 부작용이다.  심할 경우 텃세는 소위 ‘왕따’, 더 심하면 학대로도 이어진다.  물론 텃세, 왕따, 학대가 반드시 서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왕따와 학대는 텃세와 달리 반드시 뒤에 온 사람이 피해자이고 먼저 있던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텃세를 부리는 직원 때문에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고용주를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직원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이 못 견디고 나가게 되고 심지어는 왕따 문제로 커져 자칫 직장 내 소송의 빌미도 되기 때문에 고용주들로선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축구팀에 들어간 아들이 연습이 끝나고 툴툴거렸다. 팀원 한 명이 자기에게 시비를 건다는 거다. 직감적으로 ‘텃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팀원들도 그러냐고 했더니 유독 한 명만 그런다고 해 다행히 왕따 상황은 아니었다. 텃세는 앞으로 어디를 가나 극복해야 할 과제이니 심하지 않은 이상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지켜만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봐도 어디를 가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텃세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같은 팀이 된 걸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사람이 많고 나의 맨탈이 어느 정도 강하다면 그런 텃세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데 텃세의 희생자가 어느 시점엔 텃세를 부리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게 슬픈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을 항상 뒤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추종자들의 ‘트럼피즘’을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트럼피즘은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보단 미국식 집단 텃세 (영어표현으로 nativism)의 발현이다. 네이티비즘 문제는 사실 트럼피즘뿐만 아니라 이를 비난하는 민주당과 진보쪽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선거 기간 한인여성후보의 영어발음을 민주당 후보가 비아냥거린 것도 크게 보면 네이티비즘의 한 모습이다.     미국의 역사는 잘 알다시피 이민의 역사이고 먼저 온 이민자그룹에 의한 텃세가 역사 저변에 흐른다. 백인 사이에도 이 텃세는 아주 심했다. 미국에는 17세기와 18세기 영국과 북서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19세기에 온 아일랜드, 이탈리아,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극도로 차별한 흑역사가 있다.  트럼프 지지층의 상당수가 백인인데 지금은 백인이란 하나의 이유로 하나가 되어 배타적 장벽을 같이 쌓고 있지만 이들의 조상들 사이엔 텃새의 가해자와 피해가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세기 중국인 이민자에 대한 차별은 텃세와 왕따, 학대가 어우러진 삼종세트였다.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갱스 오브 뉴욕’이란 영화를 보면 네이티비즘에 대해 어느 정도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뉴욕에 먼저 정작한 백인들과 다른 종교,문화를 가진 새 백인 이민자들과의 충돌을 배경으로 한다.     트럼프에 열광하는 지지자 가운데는 흑인, 히스패닉도 있다는 사실이 이 네이티비즘 문제를 설명해 준다.     트럼프를 통해 다시 표면으로 드러난 네이티비즘이 트럼프와 함께 종말을 고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트럼프가 사라져도 강도만 다를 뿐 네이티비즘은 계속될 것이다.     이민자 커뮤니티인 한인사회는 문화,종교가 다른 이민 후배들에게 배타적 감정으로 텃세를 부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평 텃세가 문제 텃세가 역사 텃세 문제 텃세 왕따

2022-11-22

[중앙시평] 트럼프보다 무서운 자가 온다

“로마가 불타는 게 보고 싶다.”   21세기 로마인 미국에 대해 마치 빈 라덴인양 증오를 표출하는 자가 있다. 아마 미 대사관에서 비자 받기 힘든 자일테다. 하지만 독일계 미국인인 그는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가장 혁신적인 투자가이다. 그의 이름은 피터 티엘이다. 혹시 주식 투자 좀 해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거물이다. 온라인 지불 시스템 혁신을 일으킨 소위 페이팔 마피아의 리더이자 『제로 투 원』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말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름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도 스타일과 행보는 다르지만 이 마피아의 일원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인 그가 왜 미국이 불타는 걸 원할까?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티엘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기득권 체제(딥 스테이트)를 불태우려 한다. 그는 구글 독점 기업, 바이든 민주당, 아이비리그 대학 등을 기득권의 진앙지로 지목한다. 이들 리버럴 기득권이 중국과의 패권 싸움이 아니라 중국과 결탁해 미국의 국익을 배신했다고 고발한다. 심지어 그는 바이든을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인 페탱에 비유한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르네 지라르 등 서구 비주류 사상계보에 대한 극우적 해석을 통해 자유주의와 여성주의를 극히 혐오하는 일베 스타일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아직도 트럼프 현상을 단지 러스트벨트 백인 노동자의 반란이고 실리콘밸리는 이를 견제하는 민주당의 기반이라고만 생각하는 분들은 좀 더 넓은 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때 실리콘밸리는 68 혁명의 유산 속에서 군산복합체 이미지보다는 더 쿨한 세상에 대한 혁신의 열기로 기억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시대정신은 맥스 채프킨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기자의 2021년 책 『Contrarian-티엘처럼 관습적 견해와 반대로 베팅하는 자』에 따르면 티엘 식의 정보 감시 기업 이미지와 좀 더 닮아 있다. 티엘이 만든 벤처 기업 팔란티어는 미국 국방부와 경찰 등에 이어 전 세계에 정보 감시 기술을 팔며 천문학적 돈을 벌고 있다. 더구나 이제 그는 스티브 배넌 등 워싱턴 정가의 극우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걸 넘어 자기 사도들을 선거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번 중간 선거에서 최고의 화제 인물인 오하이오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인 밴스는 당선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티엘 추종자이다.   트럼프가 다시 대선에 도전하는 건 상대적으로 덜 두렵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와 규범은 그래도 트럼프와 같은 즉흥적인 마피아 보스 스타일과는 싸울 체력이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도구로 미국과 전 세계를 자신의 사기업 팔란티어의 이윤과 극우 세계관의 실험장으로 바꾸고자 하는 티엘과 같은 세력은 매우 두렵다. 왜냐하면 그는 다가올 혼돈의 세상과 기술을 미리 꿰뚫어 보는 천재적 안목과 천문학적 자본, 그리고 일관된 파시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주류가 경제 펀더멘탈이 튼튼하다고 헛소리를 할 때 이미 2007년에 1년 후 다가올 경제위기를 예견했다. 그리고 이미 2010년경부터 트럼피즘의 시대를 예고해 왔다. 정작 티엘을 비웃던 실리콘밸리의 저명한 리버럴 기업가들은 그가 백악관 회의에서 트럼프 바로 옆자리에 앉는 현실을 씁쓸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무능하기보다는 차라리 사악해지자.’ 티엘의 인생 좌우명이다. 사실 그는 민주당의 큰 정부론을 혐오하고 자유지상주의를 설파하면서도 자신의 사기업과 국가의 거대한 결탁은 자랑할 만큼 얼굴이 두껍다. 그리고 상대를 끝까지 파멸시키는 음험한 계략의 귀재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민주당에게 대선을 몇 번 헌납해 결국 무리한 정책을 추구하게 하다가 이를 핑계로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사석에서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는 ‘반지의 제왕’ 광팬이자 파시스트인 멜로나가 총선에서 승리했다. 피터 티엘도 반지의 제왕 덕후라서 그의 팔란티어 기업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온갖 기행과 모험을 거듭하는 그가 향후 베팅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자신의 통제를 받는 대선후보와 정치세력을 만들 경우 우리는 진짜 두려운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티엘 유형의 ‘감시 자본주의’ 기업 제국 대 시진핑 유형의 디지털 스탈린주의가 대결하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보호주의나 트럼프의 재집권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분들은 사실은 너무 낙관주의자들이다. 바이든은 그래도 좋은 인품을 가진 분이고 트럼프는 마초인척 해도 사실은 겁쟁이다. 미국의 진짜 위험성은 사악해지는 걸 두려하지 않으면서 보호주의와 기술 디스토피아에 대한 천재적 본능을 결합한 티엘 같은 이들이다. 이들 군산복합체의 거대한 욕망과 냉혹한 계산 속에서 한반도는 지금 더 위험한 구렁텅이로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과연 미국과 한국은 이 국수주의와 감시자본주의 제국, 그리고 극우 세계관이 기묘하게 결합한 괴물의 성장을 제어할 수 있을까? 안병진 /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중앙시평 트럼프 트럼프 현상 한때 실리콘밸리 오늘날 자본주의

2022-10-17

[중앙시평] 이민의 역사는 반복된다

불법이민자들을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자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우리 조상들은 미국에 합법적으로 이민 왔는데, 너희들도 법을 지켜라”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 특히 이민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이 100, 200년 전 미국에 이민 왔을 때는 ‘이민법’이라는 게 아예 없었고, 따라서 합법 이민, 불법이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이민: 미국의 역사(Immigration: An American History)’라는 책은 현재 미국의 이민 문제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은 여러 차례 되풀이된 일임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미국 건국 직후만 하더라도 이민법은커녕, 미국 시민에 대한 법률 규정도 없었다. 건국 5년 후에 제정된 시민권법(Naturalization Act of 1790)은 일단 미국에 도착해 2년을 살면 시민권을 주었다. 물론 ‘도덕적인 품성을 갖춘 자유민 백인’에게만 시민권을 준다는 인종차별적 조건도 빼놓지 않았다.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을 위해 제정된 1866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866)은 흑인에게 시민권 부여를 허가했지만, 중국인 등 아시아계는 거주할 권리만 주어졌을 뿐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는 없었다. 중국계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898년 연방대법원의 ‘United States v. Wong Kim Ark’ 판례부터였다. 이렇게 백인이 아닌 이민자들은 ‘합법적 미국인’이 될 길이 원천봉쇄됐던 것이 미국 이민법의 역사다.   이 책의 저자인 하샤 다이너 뉴욕대 역사학 교수에 따르면,  1차대전 직후 몰려드는 중국, 일본, 한국계 이민자들을 노란색 위험(yellow peril)이라며 경계했다. 결국 미 의회는 잇단 반이민법을 통과시킨다. 1920년 긴급 이민쿼터법(Emergency Quota Act)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민 쿼터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1924년 아시안 배제법(Asian Exclusion Act)은 이들 국가의 이민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동 7개 국가 입국 금지 명령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미국 영사가 이민 희망자를 인터뷰하고 비자와 영주권을 발급하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부터다. 미국 입국 전부터 법적 장벽이 생긴 것이다. 다이너 교수는 “비자와 인터뷰가 생기면서 1930년대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 출국한 유대인들의 미국 입국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며 “그런 유대인들이몇 년 후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지 상상해보라”고 지적했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알바니 대학 칼 본 템포 교수에 따르면, 멕시코 국경 문제도 원래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만 해도 미국-멕시코 국경 경비는 동네 경찰이 했고 예산도 충분치 않았다. 국경 경비가 강화된 것은 9·11을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 등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경제난으로 인한 이민자들의 캐러밴 행렬도 미국 역사에 몇 번이나 반복되던 일이다. 19세기 중반 아이리시 이민자들은 감자 전염병 창궐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이민을 시도했고, 1890년대에는 이탈리아 북부 흉작으로, 1850년에는 리투아니아의 기아로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왔다. 오늘날 경제난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중남미 국민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 국가의 출신 조상을 둔 백인들이 멕시코 국경 캐러밴을 ‘밀입국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때 모르는 꼴’이다.   템포 교수는 “미국의 이민제도는 절대 불변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이며 우리가 고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한인을 포함한 이민자들의 의지를 모으면 투표와 정치 참여로 더욱 좋은 이민법과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종원 / 변호사중앙시평 이민 역사 동아시아계 이민자들 한국계 이민자들 긴급 이민쿼터법

2022-10-05

[중앙시평] 이민의 역사는 반복된다

불법이민자들을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자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우리 조상들은 미국에 합법적으로 이민 왔는데, 너희들도 법을 지켜라”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 특히 이민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이 100, 200년 전 미국에 이민 왔을 때는 ‘이민법’이라는 게 아예 없었고, 따라서 합법 이민, 불법이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이민: 미국의 역사(Immigration: An American History)’라는 책은 현재 미국의 이민 문제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은 여러 차례 되풀이된 일임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미국 건국 직후만 하더라도 이민법은커녕, 미국 시민에 대한 법률 규정도 없었다. 건국 5년 후에 제정된 시민권법(Naturalization Act of 1790)은 일단 미국에 도착해 2년을 살면 시민권을 주었다. 물론 ‘도덕적인 품성을 갖춘 자유민 백인’에게만 시민권을 준다는 인종차별적 조건도 빼놓지 않았다.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을 위해 제정된 1866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866)은 흑인에게 시민권 부여를 허가했지만, 중국인 등 아시아계는 거주할 권리만 주어졌을 뿐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는 없었다. 중국계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898년 연방대법원의 ‘United States v. Wong Kim Ark’ 판례부터였다. 이렇게 백인이 아닌 이민자들은 ‘합법적 미국인’이 될 길이 원천봉쇄됐던 것이 미국 이민법의 역사다.   이 책의 저자인 하샤 다이너 뉴욕대 역사학 교수에 따르면,  1차대전 직후 몰려드는 중국, 일본, 한국계 이민자들을 노란색 위험(yellow peril)이라며 경계했다. 결국 미 의회는 잇단 반이민법을 통과시킨다. 1920년 긴급 이민쿼터법(Emergency Quota Act)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민 쿼터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1924년 아시안 배제법(Asian Exclusion Act)은 이들 국가의 이민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동 7개 국가 입국 금지 명령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미국 영사가 이민 희망자를 인터뷰하고 비자와 영주권을 발급하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부터다. 미국 입국 전부터 법적 장벽이 생긴 것이다. 다이너 교수는 “비자와 인터뷰가 생기면서 1930년대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 출국한 유대인들의 미국 입국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며 “그런 유대인들이몇 년 후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지 상상해보라”고 지적했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알바니 대학 칼 본 템포 교수에 따르면, 멕시코 국경 문제도 원래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만 해도 미국-멕시코 국경 경비는 동네 경찰이 했고 예산도 충분치 않았다. 국경 경비가 강화된 것은 9·11을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 등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경제난으로 인한 이민자들의 캐러밴 행렬도 미국 역사에 몇 번이나 반복되던 일이다. 19세기 중반 아이리시 이민자들은 감자 전염병 창궐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이민을 시도했고, 1890년대에는 이탈리아 북부 흉작으로, 1850년에는 리투아니아의 기아로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왔다. 오늘날 경제난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중남미 국민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 국가의 출신 조상을 둔 백인들이 멕시코 국경 캐러밴을 ‘밀입국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때 모르는 꼴’이다.   템포 교수는 “미국의 이민제도는 절대 불변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이며 우리가 고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한인을 포함한 이민자들의 의지를 모으면 투표와 정치 참여로 더욱 좋은 이민법과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종원 / 변호사중앙시평 이민 역사 동아시아계 이민자들 한국계 이민자들 긴급 이민쿼터법

2022-10-03

[중앙시평] 잘못된 가주의 ‘성전환 피난처’

캘리포니아주가 어린이 및 미성년자의 성전환(transgender) 피난처 주가 될 조짐이다. 부모 허락 없이는 성전환수술을 못하는 타주 미성년자들의 성전환 수술을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 캘리포니아주 상하원을 모두 통과했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오는 30일까지 서명 혹은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서명할 확률이 거부권을 행사할 확률보다 높다.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모두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됐을까. 민주당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정당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과 존슨 대통령의 가난과의 전쟁이 떠오르는 당, 19세기 가난한 백인 남성을 시작으로  20세기 들어와 도시 이민자, 흑인과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며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낸 당,  비록 각종 추문과 부패 스캔들에 휩싸이고 패션좌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써도 그들이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만은 외면하지 않았던 당이 민주당이다.  민주당의 이런 투쟁 덕에 지금 한인들도 백인들이 북적거리는 쇼핑몰, 해변, 식당, 골프장에 가서 한국말로 크게 떠들며 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게 된 것이다. 기업과 비즈니스에 친화적이라고 해도 태생이 이민자인 한인 비즈니스 업주들 역시 이민자 친화적인 민주당에 더 많은 표를 찍어줬다.     처음 내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아시아계 민권단체인 아태법률센터에선 저소득층 이민자, 유색인종, 노인, 여성을 위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민주당의 철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 빛을 비춘다는 민주당이 어느 때부터인가 이상한 곳으로 주파수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게이,레즈비언이라고 불리는 동성애자에 대한 평등권을 사회적 이슈로 크게 부각할 때 보수적인 한인문화에서 성장한 나로선 약간의 거부감도 있었지만 단순히 동성애자란 이유로 그들이 사회적 차별을 받고 그 차별을 허용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데에 동의했다.  기독교계의 반발 속에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금지는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갔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지인도 이 부분에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은 단순히 동성애자에 대한 평등권을 넘어 성전환에 대한 이슈를 사회적으로 부각하면서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정책들을 짜고 있다.  동성애자, 성전환자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해주는 부분과 동성애와 성전환을 권장하는 건 완전 다른 문제이다. 앞에 부분은 인권, 민권의 문제지만 뒷부분은 사회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의 문제다.       캘리포니아주의 공립학교 성교육이 이상하게 흐른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단순히 남녀 간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동성애, 성전환과 관련한 성행위 부분도 교과과정 속에 들어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할 정도의 충격적인 예기까지 들린다.  논란이 된 책자들을 직접 읽어보지 못해 사실 여부를 판단하긴 어렵지만 민주당이 성전환자 문제를 밥 먹는 문제, 사회안전 문제보다 앞에 내세우는 건 사실로 보인다.     사람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하고 경제적으로 배가 부르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이 법을 만들고 찬성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들, 이해를 해보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성년자가 성전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과연 제정신으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추진한 건지 캘리포니아주와 미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차라리 하던 데로 노동자를 위한답시고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노동법을 만들어 통과시키는 것까진 애교로 봐줄 수 있겠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평 가주의 성전화 동성애자 성전환자 피난처 주가 동성애 성전환

2022-09-21

[중앙시평] 맥주가 일으켜 준 덴마크의 과학 전통

세계 각국에는 즐겨 마시는 고유의 맥주가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특유한 맥주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 한예가 덴마크의 칼스버그(Carlsberg)이다. 그런데 이 칼스버그는 단순한 맥주 회사가 아니다. 창업자 야콥슨(Jacob Jacobsen)이 1876년에 설립한 칼스버그 재단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의 연구를 지원하는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민영재단으로 꼽힌다. 칼스버그에서 지원해 온 굵직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재정이 풍부한 것은 매년 칼스버그 회사에서 내는 이익의 일정 비율이 재단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덴마크가 낳은 가장 중요한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다년간 철저히 칼스버그 재단의 뒷받침을 받았다. 양자역학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보어는 덴마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칼스버그 재단에서 받은 연구비를 가지고 2년간 영국 케임브리지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그 연구 내용은 1913년에 발표되어 물리학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양자역학적 원자 구조 모델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취임한 보어는 그 후 매년 칼스버그 재단에서 크고 작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이 코펜하겐에 와서 보어의 지도 하에 연구할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은 지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초대 소장으로 있었던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양자역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공동 연구의 결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도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은 닐스 보어 연구소로 명명된 이 연구소가 더 커지고 실험 시설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에서는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콥슨은 그렇게 재단을 설립하여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을 뿐 아니라 맥주를 과학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칼스버그 연구소도 동시에 설립하였다. 19세기 당시의 양조업은 전수받은 전통 기술로 잘 하다가도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맥주가 망쳐져서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야콥슨은 과학적 맥주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그 효과는 1880년대에 크게 나타났다.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칼스버그 맥주의 맛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 투입된 칼스버그 연구소의 헨슨(Emil Hansen)은 맥주를 발효시키는 이스트에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 특별한 한 종류의 이스트만이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헨슨의 공로로 그 특종 이스트를 순수하게 배양하고 다른 종류의 이스트가 들어와서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공정을 개발한 칼스버그 회사에서는 그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각국의 양조장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하였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과업은 맥주의 산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잘 안되면 발효 과정에도 문제가 있고 맛도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를 과학적으로 조절하려면 우선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다. 20세기초 까지만 해도 물질이 얼마나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지를 간편하게 수치로 표현하는 방법이 없었다. 칼스버그 연구소의 화학부 부장으로 1901년에 취임한 사른슨(Søren Sørensen)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소이온 농도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다들 배우는 pH(피에이치, 또는 독일어 발음으로 페하)이다. 중성이면 pH 7도이고, 산성일수록 그 숫자가 낮아진다. 사른슨은 원액의 pH가 5.5도일 때 칼스버그 맥주가 가장 잘 빚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칼스버그 회사의 맥주 생산공정이 개선된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닌 기초 화학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의 베크만(Arnold Beckman)은 오렌지 쥬스로 유명한 썬키스트(Sunkist)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pH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를 발명하였다. 화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모든 실험실에서는 pH측정이 거의 필수적으로 되어있다.   칼스버그 연구소와 재단의 역사를 잘 뜯어 보면 아직도 부러운 것이 많다. 소박한 일상생활의 일부인 맥주를 만드는 것부터 그 옛날부터 오랫동안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에 기반했다는 점. 거기서 나온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를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는 점. 재단에서는 자회사의 업종에 직접 관련된 분야를 훌쩍 넘어서 모든 학문분야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또 그러한 좋은 일을 하는 재단과 연구소가 이미 150년 가까이 창업자의 정신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계속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하석 /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과학철학중앙시평 덴마크 맥주 과학적 맥주 맥주 회사 역사상 덴마크

2022-08-22

[중앙시평] 맥주가 일으켜 준 덴마크의 과학 전통

세계 각국에는 즐겨 마시는 고유의 맥주가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특유한 맥주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 한예가 덴마크의 칼스버그(Carlsberg)이다. 그런데 이 칼스버그는 단순한 맥주 회사가 아니다. 창업자 야콥슨(Jacob Jacobsen)이 1876년에 설립한 칼스버그 재단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의 연구를 지원하는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민영재단으로 꼽힌다. 칼스버그에서 지원해 온 굵직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재정이 풍부한 것은 매년 칼스버그 회사에서 내는 이익의 일정 비율이 재단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덴마크가 낳은 가장 중요한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다년간 철저히 칼스버그 재단의 뒷받침을 받았다. 양자역학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보어는 덴마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칼스버그 재단에서 받은 연구비를 가지고 2년간 영국 케임브리지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그 연구 내용은 1913년에 발표되어 물리학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양자역학적 원자 구조 모델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취임한 보어는 그 후 매년 칼스버그 재단에서 크고 작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이 코펜하겐에 와서 보어의 지도 하에 연구할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은 지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초대 소장으로 있었던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양자역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공동 연구의 결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도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은 닐스 보어 연구소로 명명된 이 연구소가 더 커지고 실험 시설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칼스버그 재단에서는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콥슨은 그렇게 재단을 설립하여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을 뿐 아니라 맥주를 과학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칼스버그 연구소도 동시에 설립하였다. 19세기 당시의 양조업은 전수받은 전통 기술로 잘 하다가도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맥주가 망쳐져서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야콥슨은 과학적 맥주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그 효과는 1880년대에 크게 나타났다.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칼스버그 맥주의 맛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 투입된 칼스버그 연구소의 헨슨(Emil Hansen)은 맥주를 발효시키는 이스트에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 특별한 한 종류의 이스트만이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헨슨의 공로로 그 특종 이스트를 순수하게 배양하고 다른 종류의 이스트가 들어와서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공정을 개발한 칼스버그 회사에서는 그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각국의 양조장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하였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과업은 맥주의 산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잘 안되면 발효 과정에도 문제가 있고 맛도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를 과학적으로 조절하려면 우선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다. 20세기초 까지만 해도 물질이 얼마나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지를 간편하게 수치로 표현하는 방법이 없었다. 칼스버그 연구소의 화학부 부장으로 1901년에 취임한 사른슨(Søren Sørensen)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소이온 농도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다들 배우는 pH(피에이치, 또는 독일어 발음으로 페하)이다. 중성이면 pH 7도이고, 산성일수록 그 숫자가 낮아진다. 사른슨은 원액의 pH가 5.5도일 때 칼스버그 맥주가 가장 잘 빚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칼스버그 회사의 맥주 생산공정이 개선된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닌 기초 화학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의 베크만(Arnold Beckman)은 오렌지 쥬스로 유명한 썬키스트(Sunkist)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pH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정기를 발명하였다. 화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모든 실험실에서는 pH측정이 거의 필수적으로 되어있다.   칼스버그 연구소와 재단의 역사를 잘 뜯어 보면 아직도 부러운 것이 많다. 소박한 일상생활의 일부인 맥주를 만드는 것부터 그 옛날부터 오랫동안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에 기반했다는 점. 거기서 나온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를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는 점. 재단에서는 자회사의 업종에 직접 관련된 분야를 훌쩍 넘어서 모든 학문분야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또 그러한 좋은 일을 하는 재단과 연구소가 이미 150년 가까이 창업자의 정신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계속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하석 /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과학철학중앙시평 덴마크 맥주 과학적 맥주 맥주 회사 연구비 지원

2022-08-12

[중앙시평] 부활절, 무신론자의 십자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말일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은 어느 성직자의 단언이었다. 오래전 미국 유학 시절의 부활절 아침이었다. 2022년의 금요일이라는 달력 표기는 선명한 기독교 영향의 증명이다. 우리의 도시 풍경에도 기독교의 흔적은 충만하다. 석양이면 교회 첨탑의 십자가들이 빨갛게 떠오른다. 그런데 십자가들 아래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건축전공의 무신론자도 묻혀 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십자가를 물리적 구조물로 해석하는 건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   십자가라는 단어에는 형태가 선명하나 막상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 모양이 아니고 ‘T’ 형태였다는 주장, 그냥 수직 막대기였다는 의견도 있다.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stauros’가 굳이 십자가 형태를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의 형벌이니 라틴어가 중요할 텐데 ‘crux’ 역시 형태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건축적 관점에서 이들의 공통 문제는 불안정 구조체라는 점이다.   일단 재료부터 살펴보자. 이 지방은 목재수급이 좋지 않은 건조기후대다. 성서에는 고급건물 시공 목재로 레바논 삼나무를 수입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고난 성화에 등장하는 깔끔한 목재는 사형장에 쓰기 아까운 사치재다. 더구나 사람의 하중을 버텨야 할 구조재면 한 사람의 운반 중량을 초과한다. 올리브나무라고 가정해서 20㎝ 각재로 개략 계산해도 200㎏을 넘나든다. 수평부재만 형장까지 지고 갔으리라는 짐작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십자가를 세우려면 기초를 확보해야 한다. 탁자 위의 젓가락이 그렇듯이 십자가를 맨땅 위에 세워 놓을 수는 없다. 고정하려면 땅을 파야 한다. 십자가는 하중상 가분수 구조체다. 무게중심이 높을수록 구조 깊이가 깊어져야 한다. 어림잡아 지상 노출 길이의 절반 정도는 지반에 묻어야 고정이 가능하겠다. 그 깊이면 사람이 들어갈 너비로 작업공간을 확보하며 파나가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골고다는 바위 지형이다. 석회암이 무르다 해도 바위다. 물론 처형장의 상설 구덩이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십자가형은 수백 명 단위로 이루어진 기록도 있다.   시공이 본격적 문제다. 못 박은 사실은 명시되어 있다. 합리적 순서는 일단 십자가를 눕혀놓고 못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확보한 구덩이에 하단부를 넣고 십자가를 세운다. 이때 십자가를 임시 고정할 가설장치가 필요하다. 넓게 파야 했던 구덩이는 흙으로 메우려면 엄청나게 잘 다져야 하고 돌로 채우려면 필요량이 너무 많다. 수직부재가 이미 설치되어 있다고 가정해도 거기 수평부재를 걸어 연결하는 것은 어렵다. 두 부재는 확실한 고정, 구조역학 전문용어로 ‘모멘트컨넥션’을 이뤄야 하는데 고난도 기술이다. 더구나 매달린 사형수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테니 이 방법은 선택 가능성이 낮다.   십자가라는 구조물은 집행 이후 철거해야 한다. 십자가를 눕히려면 기초를 해체해야 하니 이때 기초는 연약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십자가를 세워두고 사다리로 예수를 내리는 성화가 많다. 그러나 허공에서 못을 빼고 인체 무게를 부담하는 공정은 건축적으로는 난공사다. 역학·시공 지식보다 신앙·열정이 앞선 화가들은 물리적 현실을 초월하곤 했다. 그 신심에 따라 십자가는 길고 높아졌다.   건축적 상상력으로 처형자 입장에서 재구성하면 십자가 형태는 ‘+’보다 ‘x’가 훨씬 합리적이다. 우선 역학적 안정구조이므로 얇고 굽은 목재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별도의 기초·가설공사도 필요 없다. 문제는 지게처럼 뒤를 받치는 부재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지고 간 것은 바로 이 부재가 아니었을까.   1968년에 예수 시대의 유태인 유골 무덤에서 대못 박힌 발뼈 조각이 발견되었다. 어느 쪽 발뼈인지 이견이 있으나 못이 복숭아뼈 뒤를 관통한 상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모습처럼 다리를 벌리면 가능해지는 자세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치욕적 모습이다. 그러기에 처형장치로는 더 적합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처형을 자원했다는데 ‘x’ 모양이었다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왜 십자가는 ‘x’ 아닌 ‘+’ 모양으로 알려졌을까. 우선 기독교 전파로 부활의 상징이 필요했는데 그게 텅 빈 무덤이기는 어려웠겠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메시아가 갑옷의 전사가 아니고 무력하게 처형된 죄수였다는 걸 설명하는데 곤혹스러워하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덜 치욕적이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 모양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십자가는 다만 고난의 표현이되 굳이 수모의 재현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곧 부활절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큰 십자가는 건물이다. 직사각형으로 시작된 대성당의 평면이 중세를 지나며 십자가 모양으로 변모해갔다. 부활이 없었다면 건축사도 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건축전공 무신론자 입장에서도 ‘x’가 아닌 ‘+’ 모양의 십자가가 다행스럽기는 하다. 도시 야경 곳곳에 빨간 ‘x’가 떠있다고 상상해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서현 /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중앙시평 무신론자 부활절 이때 십자가 십자가들 아래 고정 구조역학

20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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