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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용양호박(龍攘虎搏)의 세상

아주 시끄럽던 8월이 지나갔다. 2024년 파리올림픽 때문에도 시끄러웠고 폭우와 광풍 때문에도 시끄러웠다. 미국에선 대선 후보가 바뀌는 일 때문에도 또한 시끄러웠다.   8월이 지나고 9월엔 조용할 줄 알았는데 첫 주부터 노동절 연휴로 북적였다. 역사적으로 9월을 살펴보면 첫날에 진짜 시끄러운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39년 9월 1일 나치의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용양호박(龍攘虎搏)의 참상이었다. 용양호박은 비슷한 상대끼리 서로 맹렬히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용은 옛날 중국 사람들이 생각한 ‘신령한 짐승’이다. 머리에 뿔이 있고 몸통은 뱀과 같으며 네 다리에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그리고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는 짐승이다. 그래서 ‘용’이라는 글자는 신령한 뜻을 지녀 우수하고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나 사물을 일컫는 데 쓰이는 용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좋든 싫든 용양호박의 싸움터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자매끼리도 갈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용양호박의 양상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문제는 한국과의 관계가 슬기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 북한과의 접촉이 용이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생각해야만 한다.    ‘용’이라는 글자는 강하거나 슬기로운 사람뿐만 아니라 특이한 사건을 기술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그 좋은 보기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들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지은 최초의 문헌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1445년(세종 27년)에 권지, 안지, 정인지에게 명하여 조선 건국의 위업과 선대 육조의 덕을 칭송한 서사시다.  한글로 된 서사시의 이름이 한문으로 된 것이 매우 이채롭다.   ‘용’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낱말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 맛이 썩 좋은 음식이란 뜻의 용미봉탕(龍味鳳湯)이란 말도 있다.      아무튼 한문 ‘용’자가 주는 교훈은 참으로 놀랍다. 한국에서 아직 한자의 영향력은 크다. 모든 사람의 성(姓)을 비롯해 중요한 문서에도 한자가 많이 사용된다. 한자는 글자마다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용반호거(龍盤虎距, 산세가 웅장하고 경치가 아름다움)의 환경에 건국된 미국은 1787년 9월 17일 헌법이 반포됐다. 용양호박의 싸움터에서 승리한 결과다. 올해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가 미국의 헌법기념일과 일치하니 이 또한 묘경(妙境)이 아닐 수 없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 광장 용양호박 대통령 선거전 조선 건국 대선 후보

2024-09-16

‘소설 이존창’ 출간…조선천주교 실존 인물 이야기

조선시대 천주교사를 새롭게 조명한 정대영 작가의 ‘인간의 길-소설 이존창(도서출판 실반트리·사진)’이 출간됐다.   정작가는 조선 천주교사에서 최대 미스터리로 꼽히는 이존창(세례명 루도비꼬)이라는 실존 인물을 지난 5년 동안 자료 수집과 답사를 통해 소설 속으로 불러들였다.     이존창의 삶은 18세기 정조(재위기간 1776~1800년) 연간을 관통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던 정조 재위기에 조선은 선교사 파송 없이 스스로 노력과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인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주인공 이존창은 실존 인물인데도 신분이나 출신지, 가족관계, 출생시기 등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조선 천주교사의 주요 장면마다 이름을 올리고 있음에도 구체적인 행적이나 주변을 둘러싼 사건들이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이 책의 기획부터 출판까지 전 과정을 지휘한 캘스테이트(CSU) 롱비치 박선욱 교수는 “한국 천주교사가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간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천주교 신자였던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종교서적 출판 작업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박교수는 ‘퀘이커 350년사’, ‘윌리엄펜 전기’ 등 종교 분야 번역서를 출간했다. 이은영 기자소설 조선천주교 조선 천주교사 한국 천주교사 종교서적 작업

2024-04-14

[시조가 있는 아침] 짚방석 내지마라 - 한호(1543∼1605)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병와가곡집   도덕성의 힘   짚으로 만든 방석을 내지 말아라. 낙엽에 앉으면 된다. 관솔불을 켜지 말아라. 어제 졌던 밝은 달이 또다시 뜬다. 가을밤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이리. 얘야, 변변치 않은 술과 나물일지라도 좋으니 없다 말고 내려무나.   옛 선비들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생활은 안빈낙도였다. 가난함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생활이었다. 여기서 도(道)라함은 학문이나 수양의 세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검소한 생활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것이 지식인 사회의 도덕성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 금전(金錢)이 부르는 유혹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고관대작들을 보며 전통사회의 청빈 사상을 생각한다. 고도 산업사회로 치달으며 사라져간 선인의 엄격했던 자기관리가 그립다.   한호(韓濩)는 조선 선조 때의 명필이다. 호는 석봉(石峯)으로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행서와 초서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의 쌍벽을 이룬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짚방석 한호 고도 산업사회 조선 선조 조선 서예

2023-10-06

[시조가 있는 아침]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이이 (1537-1584)

제2곡 화암(花巖)   이곡(貳曲)은 어디메오 화암에 춘만(春晩)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한들 어떠리   - 율곡전서(栗谷全書)   천재도 극복하지 못한 난세(亂世)   이이(李珥)가 43세 때 해주 석담(石潭)에 은거하며 지은 10수의 연시조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이다. 서시에 이어 관암(冠巖)의 아침을 즐기는 제1곡, 그리고 꽃바위의 늦봄 경치를 읊은 것이 제2곡이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알게 하면 어떻겠는가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는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지었다고 하나 율곡의 미의식은 주희와 달랐다. 율곡은 “시는 담백하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는 시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주희의 시가 수채화라면 율곡의 시는 묵화라고 하겠다.   이이는 13세에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 치른 과거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매일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기도했으며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와병하자 칼로 자신의 팔을 찔러 흐르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리며 울었다 한다.     통일 일본의 조선 침공 대비를 주장했으며 붕당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로로 병을 얻어 48세로 사망하였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고산구곡가 제2곡 화암 연시조 가운데 조선 침공

2023-10-05

[이 아침에] ‘찾아주어 고맙소!’

한국이나 타주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연락이 교회 사무실로 종종 온다. 친척을 찾는다는 이들도 있고, 미국으로 갔다는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끊어진 인연을 이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름만으로 사람을 찾는 것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만큼 막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이들의 애틋한 사연을 들을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몇 달 전에도 그런 전화를 받았다.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그것도 죽은 사람이다. 더구나 한국 사람도 아니고 로버트 맥클레이라는 미국 사람의 묘소를 찾는다고 했다. 로버트 맥클레이는 중국을 거쳐 일본에서 사역하던 선교사였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 볼티모어에서 목회하던 가우처 목사로부터 급히 조선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가우처 목사는 조선에서 온 ‘보빙사절단’을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하던 중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가우처 목사의 부탁으로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 선교사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선교의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1884년 7월 2일, 고종 황제로부터 병원과 학교를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선교 윤허를 통해 1885년 부활절 오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디므로 조선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 선교의 문을 연 로버트 맥클레이 선교사야말로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이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인물이다. 그런 선교사의 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일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LA한인타운 인근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있는 그의 묘소 위치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이에게 맥클레이 선교사의 묘소를 왜 찾느냐고 물었다. 한국의 선교유적지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단체에서 왔다는 일행은 미국에 있는 선교사 유적지 탐방을 하면서 맥클레이 선교사의 묘소도 찾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공원묘지 관리 사무소에 연락을 취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혹시나 해서 교회로 전화했단다.     언제 방문을 원하냐고 물었더니 지금 막 공항에 도착했는데 짐 찾는 대로 곧 출발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을 안내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로즈데일 공원묘지로 갔다.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니 십여 명의 순례객을 태운 대형버스가 들어왔다. 이들은 장거리 여행의 고단함도 잊은 채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은 꽃바구니를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맥클레이 선교사의 묘소는 오랫동안 깎지 않아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적갈색 묘비에 쓰인 ‘Missionary to Korea 1884 (한국 선교사 1884)’라는 글씨만큼은 판연히 빛나고 있었다.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감사하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몇 년 만에 찾아온 나를 부끄럽게 만들 때, ‘찾아주어 고맙소!’라는 맥클레이 선교사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순간 나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자주 찾지 못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뵐게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맥클레이 선교사 조선 선교가 한국 선교사

2023-08-03

[시조가 있는 아침]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황(1501∼1570)   제11곡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 도산육곡판본(陶山六曲板本)     ━   정치의 기반은 철학     조선 유학의 대종(大宗)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에 돌아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63세 때 지은 연시조 12수 가운데 열한 번째 작품이다.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저 물같이 그치는 일 없이 저 산처럼 언제나 푸르게 살겠다는 학문 도야와 수양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고상청’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이상으로, 진리가 내면화된 경지라고 하겠다. 도산12곡은 전6곡과 후6곡으로 구성됐는데 전6곡은 사물에 접하는 감흥을 노래한 언지(言志), 후6곡은 학문 수양에 임하는 심경을 노래한 언학(言學)이라고 명명하였다.   퇴계는 우주의 현상을 이(理)와 기(氣)의 이원(二元)으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르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도학 정치라는 지향점이 있었다. 정치의 기반은 철학이다. 철학이 없는 정치는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역사의 지향점을 오도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어떤 철학에 바탕하고 있는가?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도산 학문 수양 조선 유학 오늘날 한국

2023-07-27

[시조가 있는 아침] 권주가(勸酒歌)

  ━   권주가(勸酒歌)     소춘풍(1467∼?)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제 설데 역력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 해동가요     ━   작은 나라가 사는 법     조선 성종이 문무백관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기생 소춘풍에게 술잔을 돌리게 했다.     무관 출신의 병조판서가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예조판서 앞에 앉은 것을 보고 예판에게 먼저 잔을 권하며 한 노래(唱)다. 태평성세에 고금의 사리에 통달한 문신을 두고 어찌 제 자리도 모르는 무인을 따르겠느냐고 한다. 병판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그에게 잔을 권하며 한 노래.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마오/문무일체(文武一體)인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좇고 어이리”   먼저 한 말은 듣고 웃으시라고 한 것이고 문무가 하나인 줄 나도 아는데 헌헌장부 무인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다. 예판이 언짢아하자 이번에는, “제(齊)도 대국(大國)이요 초(楚) 역시 대국이라/조그만 등국(謄國)이 간어제초 하였으니/두어라 하사비군(何事非君)가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제나라도 대국이고 초 역시 대국인데 조그만 등나라가 그사이에 끼어 있으니 누군들 주인이 아니겠는가? 다 모시겠다고 한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권주가 기생 소춘풍 조선 성종 무관 출신

2023-06-29

[신 영웅전] 위안스카이의 그림자

도봉산에 올라가면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탁 트인 풍광도 좋지만, 구한말 청국 공사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의 대웅전 현판도 볼만하다. 1891년 가을에 썼으니 32세 때다. 악명과는 달리 위안스카이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袁紹)의 명문가 출신이다. 본디 무사 출신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1882)을 진압하러 온 오장경(吳長慶)의 하급 무사였는데, 그때 나이 23세였다.   위안스카이가 거친 성격으로 조선 왕실을 휘어잡자 그를 기특하게 여긴 이홍장(李鴻章)이 25세이던 그를 조선 공사로 발탁했다. 말이 공사였지 ‘총독’과 같았다. 하마비(下馬碑) 앞에서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대전까지 들어갔다.   1882년 조·미 수교로 1887년 전권 공사 박정양(朴定陽)이 미국으로 출발할 때 위안스카이는 속국의 사신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 즉 영약삼단(?約三端)을 지시했다. ①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관을 방문해 안내를 받아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②외교 모임에서 조선 공사는 중국 공사보다 아랫자리에 앉으며 ③외교 업무를 청국 공사와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인삼을 밀수했고, 인사에도 개입했다.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의 미녀를 첩으로 들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야반도주하면서 데리고 간 그 여인이 시인 위안커원(袁克文)을 낳았다. 손자가 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인데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우젠슝(吳健雄)의 남편이다.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청과 조선의 종속 관계가 사라진 지 14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은 한국을 함부로 하대한다. 중국을 등지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바람직한지는 더 고민해야겠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주한 중국 대사의 얼굴에는 아직도 위안스카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위안스카이 그림자 조선 공사 청국 공사관 청과 조선

2023-06-18

[이 아침에] ‘어부바!’

1970년대 말, 보수 공사를 하던 독일의 한 수도원 지하실에서 낡은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다. 수북이 쌓인 먼지가 험악한 세월을 오랫동안 견뎌왔음을 보여주는 그 상자 안에는 1만5000미터에 달하는 35mm 흑백영화 필름이 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필름에는 오래전 조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필름의 주인공은 조선에 선교사로 나갔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였다. 베버 신부는 1911년 조선을 방문해 4개월간 머물며 조선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가 일본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조선 사람들의 일상과 풍습, 명절과 전통 예식에 이르기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조선을 방문하고 와서 낸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조선 사람들의 특징을 품앗이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신적 가치와 조상과 부모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는 ‘효’ 문화라고 정리했다.   조선을 향한 그의 사랑은 10여 년 후인 1925년, 두 번째 조선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독일에서 영상 촬영 장비를 가져가 조선 최초의 기획 영상을 제작했다. 그가 찍은 영상은 조선의 전통과 문화, 풍경,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115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유럽 전역에서 상영됐다.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베버 신부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부모를 유난히 공경하는 ’효‘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베버 신부는 그 질문의 답을 자신이 찍은 필름에서 찾았다. 그가 찍은 영상에 나오는 조선 아이들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업히거나 안겨 있었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는 할머니의 등을 거쳐 또 다른 어른의 품으로 옮겨갔다.     부모에 대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업어 키우면서 베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 베버 신부는 조선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름과 함께 ‘아이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나라’라는 또 하나의 별명을 붙였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아이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안고 업어서 키우는 민족이었다. 예전에 자주 쓰던 말인데 요즘은 듣기 힘든 ‘어부바’라는 말이 있다. 그때는 엄마가 아기를 업으면서 ‘어부바!’라고 했다.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는 아빠에게 업어달라고 매달리면서 ‘어부바!’를 외쳤다.     학교를 졸업하는 자식들은 그동안 키워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업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결혼식을 올릴 때면 신랑이 신부를 업는 것은 물론이고, 짓궂은 친구들은 신부에게 신랑을 업으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어부바!’는 생명을 향한 배려이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제는 자녀 세대에게 ‘효도’를 기대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자녀 세대도 문제겠지만, 자식을 업으면서 했던 ‘어부바!’라는 말이 먼저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어부바!’ 하면서 업어보자. 등에 업힌 사람의 무게가 낯설게 느껴지는 만큼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 감사도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조선 방문 오래전 조선 베버 신부

2023-06-07

[신 영웅전] 망국의 기로에 선 고종

어떤 나라든 망국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애상(pathos)이 따른다. 일본은 조선 병합을 앞두고 러·일전쟁에서 영국 외교의 힘을 빌렸지만, 군사와 병기 그리고 조선의 향배에 대해서는 ‘하버드대 일본유학생회(Japan Club of Harvard)’를 동원해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조선은 어차피 일본에 병합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루스벨트는 극동 전문가 조지 케넌을 조선에 두 차례 파견해 현지 정황을 탐색하도록 했다.   케넌은 고종(1852~1919) 황제를 비롯해 조선에 파견된 외교관과 미국 선교사들을 만났다. 조선의 예산을 살펴보니 이건 도무지 나라 살림이 아니었다. 당시 케넌은 일본의 상륙(침략)에 대한 조선의 대응책이 어떤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왕실이 무당을 불러 물이 펄펄 끓는 솥에 일본 지도를 집어넣고 삶아 일본을 ‘뱅이’했기 때문에 일본은 곧 멸망할 것이라는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G Kennan, The Outlook, October 22, 1904)   방어(防禦)의 변음으로 알려진 뱅이란 적군이나 원한 맺힌 원수의 허수아비나 초상화 등을 걸어 놓고 무당이 이를 겨냥해 활을 쏘거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다. 때로는 그 화상(?像)을 끓는 물에 삶아 저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던 주술의 한 방법이다. 당시 일본은 이미 군함을 건조하던 시대인데, 조선 왕실은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무녀(巫女)를 앞세워 푸닥거리하고 있었다.   나라가 멸망할 때면 군주와 대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 하는데 조선의 망국 무렵에는 그럴 결기가 없었다. 이런 주군 아래에서는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이기기 어렵다. 맹자의 말처럼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종이 개명 군주였고 애국자였다는 주장을 들을 때면 마음이 스산하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망국 고종 조선 왕실 망국 무렵 조선 병합

2023-06-04

[시조가 있는 아침] 회고가(懷古歌)

  ━   회고가(懷古歌)     원천석(1330∼?)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 청구영언       ━   왕이 찾아 헤맨 스승     1392년, 고려가 망했다. 유신(遺臣)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고려의 궁궐터 만월대(滿月臺)를 찾았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운수에 달려 있으니 마치 가을 풀잎과 같다. 오백 년 고려의 왕업이 목동의 피리 소리에 담겨 있구나. 때는 석양, 지나는 길손이 눈물겨워 한다.   운곡은 고려말 정치의 어지러움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며 숨어 살았다. 이방원을 가르쳐 18세 때 고려조의 과거에 장원 급제하자 당시 변방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가문의 위상을 세웠다’며 기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왕으로는 조선 태종이 유일하다. 그가 즉위하고 스승을 찾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주로 몸소 거동했으나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사흘 동안 머물며 앉아 쉬었다는 섬돌을 후세 사람들이 ‘태종대(太宗臺)’라 일컬었는데 지금의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이 일대에는 3백 리 길을 내려온 태종이 스승을 찾아 헤맨 것과 관련한 지명이 많다. ‘대왕재’ ‘원통재’ ‘수레너미’ 등이 그러하다. 운곡은 만년에 고려 말, 조선 초의 야사 6권을 저술해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했으나 내용과 관련된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회고가 조선 태종 궁궐터 만월대 가을 풀잎과

2023-05-11

퀸즈YWCA 어린이날 전통문화 체험 행사

퀸즈YWCA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뉴욕시 플러싱에 있는 PS32 초등학교에서 이원언어 학생들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 배우기 프로그램의 하나로  ‘모자의 나라 조선: 전통모자-갓 만들기’ 체험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PS32 초등학교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 중 이원언어 프로그램을 선택한 약 120명의 어린이들이 참석해, 한국(조선시대)의 전통 모자의 여러 종류를 실물과 영상을 통해 배우고, 갓 중에서 흑립을 직접 만들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퀸즈YWCA는 “어린이들은 설명과 영상에 집중해 듣기도 하고, 서로 도와주며 만들면서 완성된 갓을 머리에 써 보기도 하고, 노리개를 꾸미기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며 “오늘 행사를 위해 퀸즈YWCA ‘핸드 투게더(Hands Together)’ 한인 봉사자회, 이사회 그리고 스태프 등 20여 명의 봉사했고, 행사 선물 후원과 프로그램 봉사는 퍼시픽시티뱅크(Pacific City Bank)가 동참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특히 PS32 초등학교 데보라 에리코스 교장 선생은 “이원언어 학생들을 위해 좋은 프로그램으로 체험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 퀸즈YWCA와의 더 많은 협력을 바란다”고 밝혔다.   김은경 사무총장은 “한국에서 만든 ‘어린이 날’이 올해 101회째로 맞는데 이곳 미국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이날을 기념하고 시간을 함께한 것이 참 기쁘다”며 “앞으로도 한국 문화 체험을 원하는 학교나 단체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문화를 알리고 체험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봉사자들도 “오랜만에 어린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행복했다”며 아침 일찍부터 나와야 했던 수고는 잊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퀸즈YWCA 어린이날 전통문화 체험 모자의 나라 조선: 전통모자-갓 만들기 김은경 사무총장

2023-05-07

[시조가 있는 아침] 대조 볼 붉은 골에

  ━   대조 볼 붉은 골에     황희 (1363∼1452)   대조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뜻드리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 청구영언     ━   오늘에 생각해보는 청백리     대추의 볼이 빨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은 어찌 떨어지며, 벼 베어낸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내려오는고. 술이 익자 때마침 체 장사가 지나가니 걸러서 아니 먹고 어찌하겠는가.   늦가을 추수가 끝난 농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그리고 있다. 대추와 밤이 익고, 게도 기어 내려오니 술안주가 기가 막히게 마련됐는데, 술은 익고 체 장사마저 지나간다.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절로 군침이 돈다.   방촌(?村) 황희(黃喜)는 공민왕 12년에 개성에서 태어나 성균관 학록으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72인의 선비들과 두문동에 들어갔으니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주인공이다. 새 왕조의 요청과 두문동 선비들의 권유로 태조 3년에 입조해 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세종 재위 32년 중 18년을 영의정으로 지냈다.   그는 청렴하여 비가 새는 방에 멍석을 깔고 지냈으며, 보리밥에 된장, 나물로 식사했다고 한다. 관복도 단벌이었다. 1인지하 만인지상이었던 그는 많은 녹봉과 노비를 받았으나 자신의 몸가짐을 청렴하게 지켰다. 아들이 큰 집을 마련하자 발길을 끊어 작은 집으로 옮겼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 왕조가 5백 년을 이어온 것은 이런 청백리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산 임진강변의 반구정은 그가 은퇴 후 지낸 곳이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대조 두문동 선비들 조선 왕조 청백리 정신

2023-05-04

[필향만리] 공근어례(恭近於禮)

공자는 “공경함이 예(禮)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라고 했다. 모실 사람에게 집중하여 정성을 다하는 것이 공경인데, 자신이 하는 공경이 예에 부합하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스스로 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면 치욕은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벗어난 공경은 추한 ‘아부(阿附)’로 전락한다. 공경과 아부의 차이는 행하는 사람 본인이 이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굳이 객관적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찬물이지 더운물인지는 손을 담가본 사람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도연명은 “내가 다섯 말의 쌀을 얻기 위해 아무에게나 허리를 굽실거리랴”라고 하며 부패한 시대의 관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갔다. 자신에 대해 아름다운 예우를 한 것이다. 조선 말기 항일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선생은 바른 삶을 “대안(大眼·깊고 넓은 안목), 활흉(活胸·살아있는 가슴), 경척(硬脊·꼿꼿한 허리), 건각(健脚·튼튼한 다리) 등 촌철살인의 네 단어로 요약했는데, 그중 경척이 바로 예에 근접한 공경의 태도이다. 경척은 힘 좋은 튼튼한 허리가 아니라, 아무에게나 굽실대지 않은 꼿꼿한 허리를 말한다.   예에서 멀어진, 공경 아닌 공경인 ‘아부’는 하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문제다. 썩은 고기에 쉬파리가 꾀는 법!필향만리 공경과 아부 의병장 유인석 조선 말기

2023-05-03

[열린광장] 노벨문학상 속의 조선인들

오래전 일본항공(JAL)을 타고 도쿄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도중에 어린 딸이 “엄마 일본은 나쁜 나라지?” 하고 물었다. 순간 난감했다. 그 비행기 안은 한국인 같기도 하고 일본인 같기도 한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집에서와는 달리 “아니야, 친구의 나라야”라고 대답했지만 개운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개인이라면 입장이 있고, 국가와 민족에게는 역사가 있기 때문일까?   지난 3월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작고했다. 그는 일본의 전쟁 범죄를 비판한 양심적 지성인으로 불렸다. 그렇지만 나는 1994년 노벨상을 받은 그의 소설 ‘만년 원년의 풋볼’을 읽고 마음이 불편했다. 내용은 일본 산골 시코쿠 마을로 돌아온 주인공 미츠와 동생 다카시가 중심이 되어 펼쳐 나가는 이야기다. 100년 전 주인공의 증조할아버지 동생이 ‘만년(막부시대의 말기에 한 해만 쓰인 연호)’ 원년에 일으켰던 농민봉기와 주인공의 동생이 주도하고 있는 조선인 상점 습격과의 연관성으로 이야기는 모아진다.     소설에는 ‘수퍼마켓 천황이라고 해봐야 조선인 삼림 채벌 노동자가 약간의 재력을 갖춘 것일 뿐이었다고…. 수퍼마켓 천황이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지….’라는 대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작가의 창의력이지만 글을 읽고 어떻게 느끼는가는 독자의 영역이다. 15년 전 이 소설을 읽고 일본인의 외곽에 어두침침한 언덕처럼 존재했을 조선인의 입지에 씁쓸함을 느꼈다.     마을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퍼마켓 천황인 조선인은 공분의 대상이 되고, 마을 사람들은 수퍼마켓을 습격하기 위해 풋볼팀을 만들어 힘을 규합한다. 골짜기에 모여 사는 조선인들은 천민, 빈곤, 수치심, 더러움, 침묵 등의 비호감적 언어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일본에서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역사적 인과에 관해서는 기술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인격이 없는 비천한 무리로 부각될 뿐이었다.     이 소설이 노벨상을 받은 이유는 일본인의 우월감을 고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주인공이 장애인 자녀와 아내의 불륜이라는 현실적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구원을 찾는 과정이 높게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속죄를 끊임없이 주장했던 작가의 태도와는 달라 지금까지 개운하지 못한 감정으로 남아있다. 소설은 초장부터 죽음의 분위기가 감돌더니 강간과 자살로 사건을 펼쳐나가 더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일본의 문호라는 미시마 유키오는 우익 집안의 금수저 출신으로 천황의 절대 권력을 꿈꾸고 자위대 부활을 주장하며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오키나와 원주민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와 만행을 수치로 여겼으며,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 왔다.     국제사회 평화 운동에 기여해 온 오에 겐자부로는 떠났지만 국가 이익 우선보다는 인류의 양심을 지켜내는 일본인은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들의 진실과 우리의 진실이 시대를 관통할 만큼 일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권정순/ 전직 교사열린광장 노벨문학상 조선 조선인 노동자들 조선인 상점 조선인 삼림

2023-05-03

[부동산 이야기] 조선의 신도시 수원

경기도에서 제일 큰 도시인 수원은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고 경기도청 소재지다. 삼국시대부터 경기도가 있는 한강 유역은 치열한 영역 다툼의 현장이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특히 수원시는 경기도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는 자족도시다. 역사적으로 봐도 신석기 시대인 2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거라고 추정되며, 백제, 고구려를 거쳐 신라 시대에는 ‘물골’이라 불리었다. 그 후로 수성, 수주를 거쳐 조선 시대에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이렇게 지명의 변천 과정에서 ‘물’의 의미가 그대로 내려져 온 것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광교산, 칠보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지역 하천으로 잘게 쪼개져 흐르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대대로 수원시는 ‘물의 도시’답게 수해 예방 및 방어에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수원 지역의 경우 수해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다.   수원은 정조가 계획하고 조성한 ‘조선의 신도시’다. 왕권 강화와 조선개혁을 목표로 정조는 작은 고을이었던 수원에 새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약용을 포함한 실학자들과 함께 수원화성이라는 성곽건축물을 건설했다.     그리고 화성을 중심으로 수원을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수원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조의 압도적인 지원으로 당시 평양을 넘어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도 어깨를 견줄만한 도시로 성장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전시키고, 틈만 나면 도성인 한양에서 수원으로 행차하였는데 이 정조의 행차에 유래하여 아직도 ‘정조 행차축제’라는 수원의 문화 축제로 남아 있다.     정조는 화성 행군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늘리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 수원을 상왕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했다. 정조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수원을 자신의 개혁 터전으로 삼아 조선 전체를 개혁하는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들고자 원대한 꿈을 품고 화성을 축성한 것이다. 이때 정조가 건설한 수원화성은, 서양의 건축법과 조선의 미를 적절하게 융합한, 조선 건축의 꽃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원을 상징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한편 화성이 지어지기 전인 1789년, 정조 13년에 현재 수원시의 중심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에 수원화성의 행궁이 건립되었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인데, 화성 행궁은 567칸으로 다른 행궁의 2배 정도 규모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크다. 또 행군이지만 정궁 형태를 갖추어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어 조선 시대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인구 120만 명의 수원시는 면적 대비 시가지가 상당히 넓은 편이며, 현재는 광교 신도시가 수원의 경제, 교통, 산업, 행정 및 교육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수원시 경제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본사인 삼성디지털시티가 이곳에 있으며, SK 산업이 수원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성균관 대학교, 아주대학교, 경기대학교 등, 여러 학교가 이곳에 있어 교육 인프라도 좋다.   ▶문의: (818)497-8949 미셸 원 / BEE부동산 부사장부동산 이야기 신도시 조선 도시인 수원 수원 지역 조선 건축

2023-04-26

[시조가 있는 아침] 매화 옛 등걸에

  ━   매화 옛 등걸에     매화(생몰연대 미상)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   자존감 높았던 조선 기생들     매화는 명기(名妓) 구인(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란 사람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重義法)이다. 또한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라는 이중의 뜻을 실은 중의법이기도 하다.   춘절(봄철)과 연적(戀敵) 춘설의 이름을 초장과 종장에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이 시조는 또한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한동안 안 오던 정든 이들이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듯 세상이 어지러우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뜻으로도 풀이된다.   조선의 기생들은 신분 규제에서 벗어나 시인을 비롯해 뛰어난 예인(藝人)이 많았다. 명기의 자존심 또한 높았다.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역시 자신의 이름에 빗대 쓴 시조 한 수를 읽는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의 낙락장송이니 나무꾼의 낫 같은 것으로는 걸어볼 생각도 말라는 기개가 고고하기만 하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千尋)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매화 조선 기생들 자기 이름 신분 규제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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