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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망국의 기로에 선 고종

어떤 나라든 망국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애상(pathos)이 따른다. 일본은 조선 병합을 앞두고 러·일전쟁에서 영국 외교의 힘을 빌렸지만, 군사와 병기 그리고 조선의 향배에 대해서는 ‘하버드대 일본유학생회(Japan Club of Harvard)’를 동원해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조선은 어차피 일본에 병합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루스벨트는 극동 전문가 조지 케넌을 조선에 두 차례 파견해 현지 정황을 탐색하도록 했다.
 
케넌은 고종(1852~1919) 황제를 비롯해 조선에 파견된 외교관과 미국 선교사들을 만났다. 조선의 예산을 살펴보니 이건 도무지 나라 살림이 아니었다. 당시 케넌은 일본의 상륙(침략)에 대한 조선의 대응책이 어떤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왕실이 무당을 불러 물이 펄펄 끓는 솥에 일본 지도를 집어넣고 삶아 일본을 ‘뱅이’했기 때문에 일본은 곧 멸망할 것이라는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G Kennan, The Outlook, October 22, 1904)
 
방어(防禦)의 변음으로 알려진 뱅이란 적군이나 원한 맺힌 원수의 허수아비나 초상화 등을 걸어 놓고 무당이 이를 겨냥해 활을 쏘거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다. 때로는 그 화상(?像)을 끓는 물에 삶아 저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던 주술의 한 방법이다. 당시 일본은 이미 군함을 건조하던 시대인데, 조선 왕실은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무녀(巫女)를 앞세워 푸닥거리하고 있었다.
 
나라가 멸망할 때면 군주와 대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 하는데 조선의 망국 무렵에는 그럴 결기가 없었다. 이런 주군 아래에서는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이기기 어렵다. 맹자의 말처럼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종이 개명 군주였고 애국자였다는 주장을 들을 때면 마음이 스산하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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