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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위안스카이의 그림자

도봉산에 올라가면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탁 트인 풍광도 좋지만, 구한말 청국 공사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의 대웅전 현판도 볼만하다. 1891년 가을에 썼으니 32세 때다. 악명과는 달리 위안스카이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袁紹)의 명문가 출신이다. 본디 무사 출신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1882)을 진압하러 온 오장경(吳長慶)의 하급 무사였는데, 그때 나이 23세였다.
 
위안스카이가 거친 성격으로 조선 왕실을 휘어잡자 그를 기특하게 여긴 이홍장(李鴻章)이 25세이던 그를 조선 공사로 발탁했다. 말이 공사였지 ‘총독’과 같았다. 하마비(下馬碑) 앞에서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대전까지 들어갔다.
 
1882년 조·미 수교로 1887년 전권 공사 박정양(朴定陽)이 미국으로 출발할 때 위안스카이는 속국의 사신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 즉 영약삼단(?約三端)을 지시했다. ①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관을 방문해 안내를 받아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②외교 모임에서 조선 공사는 중국 공사보다 아랫자리에 앉으며 ③외교 업무를 청국 공사와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인삼을 밀수했고, 인사에도 개입했다.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의 미녀를 첩으로 들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야반도주하면서 데리고 간 그 여인이 시인 위안커원(袁克文)을 낳았다. 손자가 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인데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우젠슝(吳健雄)의 남편이다.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청과 조선의 종속 관계가 사라진 지 14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은 한국을 함부로 하대한다. 중국을 등지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바람직한지는 더 고민해야겠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주한 중국 대사의 얼굴에는 아직도 위안스카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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