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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칼럼] 조상 땅 찾기와 상속 분쟁

    조상땅 찾아주기 서비스를 한국 정부가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이다.    자신의 조상이 어디엔가 토지를 소유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신청인이 그 존재 여부를 정부에 의뢰할 경우 정부는 지적전산망을 이용하여 토지대장과 임야대장 전산기록을 검토하여 조상 땅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 준다.    대상 토지 소유자와 후손인 신청인이 피상속인과 상속인의 관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검색하여 그것이 일치하면 그 토지의 소재, 지번, 지목, 면적 등을 신청인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제적등본 및 주소 등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관계 지방정부에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려 보는 것이 일차 수순이다. 대부분 토지 일 경우는 1910년부터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토지의 경계 측량에 따라 지번이 부여되었고, 1924년까지 마무리됐다. 이 기록들을 '토지조사부' 및 '임야조사부'라 이름 지었다. 이를 소위 사정(査定)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사정이 이루어졌던 당시의 사정인 성함을 알게 되면 일은 조금 더 쉬워진다. 조부 또는 증조부, 어떤 경우에는 고조부의 성함을 알아야 한다. 족보를 통해 증조부와 고조부의 함자를 확인한 후 전산작업 등을 통해 사정인의 이름과 일치하는 증조부와 고조부의 땅이 찾아진다면 엄청난 행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일하고 있는 팀은 250건 이상의 조상 땅을 전산작업을 통해 찾아낸 후 소송에 착수했고 거의 90% 가까운 승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경제적인 이익을 선사해 왔다.  만약 국가에서 운영하는 지적전산망에 의뢰하여 찾은 조상의 땅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그 보다 더 많은 지적전산망에 나타나지 않는 땅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지적전산망에서는 조상의 땅을 후손들이 모르고 있는 경우 지번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하지만 조사해 보면 국가나 제3자가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하여 강제로 귀속을 시켜놓은 땅들이 더 많다.    사실 '무주부동산공고'를 통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에서는 지금도 후손을 찾으려는 추가의 노력 없이 강제로 국가에 귀속을 시키고 있다. 또한 제3자(그 당시 마을주민 또는 이장, 종친 등)가 특별조치법으로 인해 인우보증(법률적인 개인의 지위)을 통한 증인들을 내세워 조상의 땅을 가로채 간 경우도 상당히 흔하다.    조상 땅 찾기를 하다보면 국가나 제3자가 무주부동산이나 특별조치법으로 인하여 가지고 간 땅들이 국가에서 찾아주는 땅보다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후손들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조상의 토지를 찾는 작업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지를 되찾아 오는 것이 판례상 더 힘들어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의 조상이 어딘가에 감히 땅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행운은 왕왕 존재해 왔다.    따라서 적은 가능성이지만 막연하게나마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옛 선산의 기억이 혹시 있다면 용기를 내서 문의해 보기 바란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한 문의는 e메일(mchoi@joowonlaw.com) 또는 전화(929-375-2919).마이크 최 변호사 법무법인 주원 조상 땅 찾기와 상속 분쟁 뉴욕중앙일보 법률칼럼

2023-03-08

"120년 전 선조 이민자들의 꿈, 이루어졌다"

        한인이민 120주년과 제18주년 미주한인의날을 기념하는 미주한인재단-워싱턴(회장 박로사) 주최의 기념축전이 지난 8일 버지니아 페어팩스 고교 대강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300여명이 참석한 행사는 기념식과 공연 순서로 이어졌다. 정세권 초대 회장의 개회선언에 이어서 이은애 대회장은 "하와이로 첫 이민 왔던 선조들 이후로 120년이 지난 지금, 미국 주류사회의 당당한 한축을 이룬 한인들의 저력이 놀랍고 자랑스럽다"며 "한인들의 개천절인 미주한인의 날을 다함께 축하하자"고 이야기 했다. 박로사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미주한인재단-워싱턴의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권세중 총영사가 대독한 축하 메시지를 통해 "한미혈맹의 버팀목인 미국내 한인 이민자들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제리 코널리 연방하원의원은 "200만 미주 한인 중 4만2천여명을 대표하는 지역 의원으로서 한인들께 감사하며, 102명 선조 이민자들의 꿈이 실현됐음에 같은 이민자 조상을 둔 미국인으로서 축하를 전한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기념축전에서 로사 박 회장은 해롤드 변 버지니아주 노동산업부 부국장과 제임스 피셔 추모의 벽 기념재단 진 회장 및 송 존슨 페어팩스 카운티 교사 등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아울러 해롤드 변 부국장과 박충기 메릴랜드 수석 행정판사는 각각 버지니아주 글렌 영킨 주지사와 메릴랜드주 래리 호건 주지사의 미주한인의날 선포문을 미주한인재단-워싱턴 측에 전달했다. 이어서 열린 공연은 이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열린 가장 큰 규모의 공연으로 기록될 이날 무대는 국가 무형문화재 김묘선 선생과 정수경 씨의 '승무', 이가원-이석원 씨가 선보인 매화잠 저 꽃에 물을 주어라', 프레센스 트리오(삼 신, 이봉희, 케니 백)의 색소폰-피아노 연주 등으로 화려했다. USTMA(최응길 관장)의  태권도 시범부대, 이광규(베이스), 권기선(소프라노) 씨의 성악공연과 이희경 무용단, 수지토마스 라인댄스, 케이팝 댄스그룹 '1픽'의 공연도 환호를 받았다. '스토리가 있는 공연'을 목표로 했던 주최측의 바람대로, 한국문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향하는 모습을 공연으로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이민자 선조 선조 이민자들 한인 이민자들께 이민자 조상

2023-01-09

[수필] 조상님의 문집

올 여름 유난히 날씨가 덥다. 코로나 탓일까? 3년째 코로나 팬데믹의 극한 상황 속에 살고 있으니 안좋은 일은 모두 코로나 때문이라고 돌리고 산다.     외출하면 마스크를 써야하고 거리두기도 해야하니 마켓에 가는 것 말고는 거의 집에서 소일을 하고 있다.  요즘은 중요한 뉴스도 많아 텔레비젼 보는 시간도 많지만 주로 책을 읽는다. 미국에서는 한국 책값도 만만치 않아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져보는데 이런 좋은 책을 언제 구입했는지 남편도 나도 모를 책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책들은 다양하다. 종교 서적 그리고 수필집들, 젊었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거기다가 나이들어 읽을 만한 책들도 있었다.     이제는 책을 읽어도 그때는 재밌고 감동을 받지만 읽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하루는 문득 남편의 책상 옆 책꽂이에 묵직하게 모셔져 있는 자주색 문집에 생각이 미쳤다. 책이 너무 무거워 남편에게 그 문집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남편은 좀 의아한듯 하면서도 아랫층 내가 책상으로 사용하는 식탁에 문집 두권을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가져다 주었다. 시댁 고조부님과 할아버님의 문집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 문집을 열어 보았다. 세상에! 거기에는 수많은 시와 편지와 글들이 적혀 있었다.   50년 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수학공 고조할아버지, 아버지 이름으로 진사 시험을 봐(그때는 효도 차원에서 허용) 효도를 한 분, 호남 일대에서 학문이 출중하여 순종의 사부로 추천까지 받은 허 섭 고조할아버지, 그리고 꿈에 주자를 뵈었다는 그분의 손자인  몽회 할아버지, 제실을 짓고 영호남의 젊은이에게 공자 맹자 주자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시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친구인 이석용 독립투사가 이끄는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해 활동한 독립 유공자인 허 업 할아버지, 이렇게 두 분의 문집이다.     두 분이 남기신 문집은 순 한문 문집이었다. 20여년 전에 문중에서 자손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 한글로 번역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시당숙과 사촌시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의를 해야하니 모이자고 하였다. 남편이 대전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다. 우리 부부는 고속버스를 타고 친척들이 모인 곳으로 부랴부랴 갔다. 그런데 회의는 커녕 이미 번역을 하기로 정하고 집집마다 할당액을 통고하며 우리 의견은 한번도 묻지 않았다.     할당금액이 엄청났다. 그때 우리 생각은 자손들 중에서 한문을 전공하는 자손이 나오면 그때 번역을 하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고  또 한가지는 몇 부분만 선별하여 번역하면 어떨까하는 의견을 말하려고 남편과 올라갔는데 말 할 기회도 주지않았다.     덕이 높으신 큰 시숙이 종손인데 살림이 어렵고 연로해서인지 의견 한번 묻지 않고 두 분이 결정해서 할당하고 따르라는 그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때 우리집만 빼고 큰집과 둘째 형님댁 모두 생활이 빈곤했다. 형님들은 불평도 못하고 나에게 반대만 하라고 부추겼다. 하나같이 명문 대학을 나온 조카들도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어느 날 큰집 제삿날에 나는 드디어 총대를 메었다. 제사가 끝나고 식사가 끝나니 자연 문집 번역 얘기가 나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와 큰집 식구는 모두 반대며 그 많은 돈을 들이느니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고 했다. 주선한 시당숙과 사촌시숙이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며 난리가 났다. 시당숙모는 평소 나와 사이가 남달랐다. 당숙이 남편과 동갑이고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런데 그런 당숙모까지 소리를 지르며 나더러 여편네가 감히 어디를 나서느냐며 화를 참지 못했다. 사촌형님은 나를 달래며 자기 남편이 퇴직 후에 당숙회사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고 있으니 당숙 의사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큰형님의 호통으로 사촌 시숙님은 곧바로 내게 사과하시고 시 당숙님은 며칠 후 긴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부치셨다. 자신의 짧은 학벌때문에 내가 업신여겼다고 쓰셨다. 사범학교를 나오고 평생대학원까지 다닌 분이 그런 문제가 아니었는데 순전히 오해였다. 남편은 두 분의 의견을 이미 받아들이고 할당금 350만원을 보냈다. 나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시 당숙께 사과의 편지를 드렸다. 나중에 추가금으로 또 150만원을 더 냈다. 이렇게 해서 만든 두 분 조상님의 문집이다. 책이 배달되니 남편은 틈만 나면 자주색 그 비싼 문집을 읽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동안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옛날 한학 하신분들의 글이 뻔하지 않겠느냐는 선입견으로.   내 선입견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많은 글들이 한문 용어로 되어 남편에게 물어보고 구글에서 찾아 근근이 볼 수 있지만 자연을 보고 세상을 보며 지은 시들은 지금 사람들에 비해 손색이 없었으며 순수함은 더 뛰어났다. 그중 ‘달 밤에 친구와 작별하면서’라는 시를 소개한다.     달과 친구와 함께 있을 적에는/ 정겨운 그림자가 처마 끝에 가득하더니/ 사람은 가고 달빛만 남아있어/ 쓸쓸한 고독이 가슴속에 이네.  또  ‘오막살이 집’이라는 시도 있다. 나 엣날엔 절반쯤 손님으로 살았는데 /나이들어 무슨일로 늙은 아내와 벗이라니/ 산야 누비던 호기 남아있어/ 깊은 밤에 닭이 날개 털 듯 일어난다네.   나는 이런 시들을 자식들에게 보내주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자랑스레 보냈다고한다. 그 많은 돈을 들여 번역한 일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20년 후에야  들었다. 눈 앞에 일만 생각하고 반대했던 내가 생각이 짧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분들의 훌륭한 인격에 감탄하고 예리한 감성에 탄복이 절로 나왔다. 늦게나마 조상님들의 문집을 보며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가보임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두 문집은 뜨거운 햇볕이 되어  나를 허씨 가문의 며느리로 영글게 하였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조상 문집 자주색 문집 자연 문집 수학공 고조할아버지

2022-09-01

[이 아침에] ‘조상님, 그냥 편히 쉬세요’

 이번에도 엉터리 제사를 지냈다. 우리 집 제사는 가족의 사정에 따라 날짜와 시간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 맞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저녁으로 미루는 식이다.    제사상을 아무리 간단하게 차린다 해도 일 요령이 없는 나에게는 쉽지 않다. 명절 며칠 전 청소를 시작하고 거울도 말갛게 닦아 놓는다.   마켓은 전날부터 조금씩 본다. 누군가는 만들어진 것 사서 놓기만 하는 요즈음 제사가 무어 그리 힘드냐고 눈치 없는 소리를 한다. 물론 떡하고, 술 빚던 옛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다. 고기와 생선, 과일은 두세 군데 마켓을 돌아 좋은 것을 고른다.     음식은 몇 가지 생략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몇 가지는 사오기도 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집에서 한다. 갈비찜을 하고 조기를 굽고 전 한 가지를 부쳤다. 밥을 하고 탕국도 끓였다. 떡은 금방 해놓은 따끈한 것으로 골라왔다.         제상에 올릴 그릇은 제기는 아니지만 흰 도자기 그릇으로 꺼내 음식을 푸짐히 담았다.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것은 무시하고 내가 놓고 싶은 대로 보기 좋게 놓았다. 밤은 까기 힘들어 생략하고 북어와 곶감도 먹을 사람이 없어 뺐다. 음식을 차린 후 해마다 재탕해서 쓰는 지방을 붙이고 촛불을 켰다. 향 몇 가닥에 불을 붙이니 온 집안에 향내가 퍼진다.     처음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 때, 조금은 피곤하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러 해 지나면서 꼭 해야 할 것만 골라 하는 요령이 생겼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가족들 먹일 생각으로 준비하니 마음도 편하고 인색하지도 않게 되었다. 조상님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나물을 그득히 담고 생선 위에 젓가락 올려놓고 자식들 잘 보살펴 달라고 해마다 빌었다. 조상님 위한 제사가 아니라 내 욕심 차리자고 지내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식구 잘 봐 달라는 뇌물성 제사이다.   제사상 앞에서 삶과 죽음의 길 중간 어디쯤 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 날 부모의 죽음을 마주하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늙어 갈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힘을 얻고 그렇게 세상은 이어지겠지. 죽은 자를 위한 음식을 상 가득 쌓아 놓고 산 자는 천 년을 살 것처럼 다투며 산다.     어린 시절 하느님은 그 많은 사람들 기도를 어떻게 다 들어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느님 자리는 너무 피곤하겠다는 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승 떠나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늘 자식 걱정에 시달릴 부모님이 애잔하다. 말하지 않는다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모르실까 싶기도 했다.     이번에는 절을 하면서 조상님께 더 이상 내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자식들 걱정 말고 “그냥 편히 쉬세요” 하며 절을 했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조상 조상님 덕분 엉터리 제사 자식들 걱정

2022-02-20

[이 아침에] ‘조상님, 그냥 편히 쉬세요’

이번에도 엉터리 제사를 지냈다. 우리 집 제사는 가족의 사정에 따라 날짜와 시간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 맞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저녁으로 미루는 식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주말에 지내고, 대학교나 직장으로 떠나고 나서는 아이들이 오는 날에 맞춰 지낸다.   제사상을 아무리 간단하게 차린다 해도 일 요령이 없는 나에게는 쉽지 않다. 하루 이틀은 종종걸음을 치게 된다. 명절 며칠 전 청소를 시작하고 거울도 말갛게 닦아 놓는다.   마켓은 전날부터 조금씩 본다. 누군가는 만들어진 것 사서 놓기만 하는 요즈음 제사가 무어 그리 힘드냐고 눈치 없는 소리를 한다. 물론 떡하고, 술 빚던 옛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다. 고기와 생선, 과일은 두세 군데 마켓을 돌아 좋은 것을 고른다.     음식은 몇 가지 생략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몇 가지는 사오기도 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집에서 한다. 갈비찜을 하고 조기를 굽고 전 한 가지를 부쳤다. 밥을 하고 탕국도 끓였다. 떡은 금방 해놓은 따끈한 것으로 골라왔다.         제상에 올릴 그릇은 제기는 아니지만 흰 도자기 그릇으로 꺼내 음식을 푸짐히 담았다.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것은 무시하고 내가 놓고 싶은 대로 보기 좋게 놓았다. 밤은 까기 힘들어 생략하고 북어와 곶감도 먹을 사람이 없어 뺐다. 음식을 차린 후 해마다 재탕해서 쓰는 지방을 붙이고 촛불을 켰다. 향 몇 가닥에 불을 붙이니 온 집안에 향내가 퍼진다.     처음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 때, 조금은 피곤하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러 해 지나면서 꼭 해야 할 것만 골라 하는 요령이 생겼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가족들 먹일 생각으로 준비하니 마음도 편하고 인색하지도 않게 되었다. 조상님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나물을 그득히 담고 생선 위에 젓가락 올려놓고 자식들 잘 보살펴 달라고 해마다 빌었다. 조상님 위한 제사가 아니라 내 욕심 차리자고 지내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식구 잘 봐 달라는 뇌물성 제사이다.   제사상 앞에서 삶과 죽음의 길 중간 어디쯤 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 날 부모의 죽음을 마주하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늙어 갈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힘을 얻고 그렇게 세상은 이어지겠지. 죽은 자를 위한 음식을 상 가득 쌓아 놓고 산 자는 천 년을 살 것처럼 다투며 산다.      어린 시절 하느님은 그 많은 사람들 기도를 어떻게 다 들어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느님 자리는 너무 피곤하겠다는 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승 떠나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늘 자식 걱정에 시달릴 부모님이 애잔하다. 말하지 않는다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모르실까 싶기도 했다.     이번에는 절을 하면서 조상님께 더 이상 내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자식들 걱정 말고 “그냥 편히 쉬세요” 하며 절을 했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조상 조상님 덕분 엉터리 제사 자식들 걱정

20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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