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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조상님의 문집

올 여름 유난히 날씨가 덥다. 코로나 탓일까? 3년째 코로나 팬데믹의 극한 상황 속에 살고 있으니 안좋은 일은 모두 코로나 때문이라고 돌리고 산다.  
 
외출하면 마스크를 써야하고 거리두기도 해야하니 마켓에 가는 것 말고는 거의 집에서 소일을 하고 있다.  요즘은 중요한 뉴스도 많아 텔레비젼 보는 시간도 많지만 주로 책을 읽는다. 미국에서는 한국 책값도 만만치 않아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져보는데 이런 좋은 책을 언제 구입했는지 남편도 나도 모를 책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책들은 다양하다. 종교 서적 그리고 수필집들, 젊었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거기다가 나이들어 읽을 만한 책들도 있었다.  
 
이제는 책을 읽어도 그때는 재밌고 감동을 받지만 읽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하루는 문득 남편의 책상 옆 책꽂이에 묵직하게 모셔져 있는 자주색 문집에 생각이 미쳤다. 책이 너무 무거워 남편에게 그 문집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남편은 좀 의아한듯 하면서도 아랫층 내가 책상으로 사용하는 식탁에 문집 두권을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가져다 주었다. 시댁 고조부님과 할아버님의 문집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 문집을 열어 보았다. 세상에! 거기에는 수많은 시와 편지와 글들이 적혀 있었다.
 
50년 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수학공 고조할아버지, 아버지 이름으로 진사 시험을 봐(그때는 효도 차원에서 허용) 효도를 한 분, 호남 일대에서 학문이 출중하여 순종의 사부로 추천까지 받은 허 섭 고조할아버지, 그리고 꿈에 주자를 뵈었다는 그분의 손자인  몽회 할아버지, 제실을 짓고 영호남의 젊은이에게 공자 맹자 주자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시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친구인 이석용 독립투사가 이끄는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해 활동한 독립 유공자인 허 업 할아버지, 이렇게 두 분의 문집이다.  
 


두 분이 남기신 문집은 순 한문 문집이었다. 20여년 전에 문중에서 자손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 한글로 번역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시당숙과 사촌시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의를 해야하니 모이자고 하였다. 남편이 대전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다. 우리 부부는 고속버스를 타고 친척들이 모인 곳으로 부랴부랴 갔다. 그런데 회의는 커녕 이미 번역을 하기로 정하고 집집마다 할당액을 통고하며 우리 의견은 한번도 묻지 않았다.  
 
할당금액이 엄청났다. 그때 우리 생각은 자손들 중에서 한문을 전공하는 자손이 나오면 그때 번역을 하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고  또 한가지는 몇 부분만 선별하여 번역하면 어떨까하는 의견을 말하려고 남편과 올라갔는데 말 할 기회도 주지않았다.  
 
덕이 높으신 큰 시숙이 종손인데 살림이 어렵고 연로해서인지 의견 한번 묻지 않고 두 분이 결정해서 할당하고 따르라는 그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때 우리집만 빼고 큰집과 둘째 형님댁 모두 생활이 빈곤했다. 형님들은 불평도 못하고 나에게 반대만 하라고 부추겼다. 하나같이 명문 대학을 나온 조카들도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어느 날 큰집 제삿날에 나는 드디어 총대를 메었다. 제사가 끝나고 식사가 끝나니 자연 문집 번역 얘기가 나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와 큰집 식구는 모두 반대며 그 많은 돈을 들이느니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고 했다. 주선한 시당숙과 사촌시숙이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며 난리가 났다. 시당숙모는 평소 나와 사이가 남달랐다. 당숙이 남편과 동갑이고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런데 그런 당숙모까지 소리를 지르며 나더러 여편네가 감히 어디를 나서느냐며 화를 참지 못했다. 사촌형님은 나를 달래며 자기 남편이 퇴직 후에 당숙회사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고 있으니 당숙 의사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큰형님의 호통으로 사촌 시숙님은 곧바로 내게 사과하시고 시 당숙님은 며칠 후 긴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부치셨다. 자신의 짧은 학벌때문에 내가 업신여겼다고 쓰셨다. 사범학교를 나오고 평생대학원까지 다닌 분이 그런 문제가 아니었는데 순전히 오해였다. 남편은 두 분의 의견을 이미 받아들이고 할당금 350만원을 보냈다. 나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시 당숙께 사과의 편지를 드렸다. 나중에 추가금으로 또 150만원을 더 냈다. 이렇게 해서 만든 두 분 조상님의 문집이다. 책이 배달되니 남편은 틈만 나면 자주색 그 비싼 문집을 읽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동안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옛날 한학 하신분들의 글이 뻔하지 않겠느냐는 선입견으로.
 
내 선입견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많은 글들이 한문 용어로 되어 남편에게 물어보고 구글에서 찾아 근근이 볼 수 있지만 자연을 보고 세상을 보며 지은 시들은 지금 사람들에 비해 손색이 없었으며 순수함은 더 뛰어났다. 그중 ‘달 밤에 친구와 작별하면서’라는 시를 소개한다.  
 
달과 친구와 함께 있을 적에는/ 정겨운 그림자가 처마 끝에 가득하더니/ 사람은 가고 달빛만 남아있어/ 쓸쓸한 고독이 가슴속에 이네.  또  ‘오막살이 집’이라는 시도 있다. 나 엣날엔 절반쯤 손님으로 살았는데 /나이들어 무슨일로 늙은 아내와 벗이라니/ 산야 누비던 호기 남아있어/ 깊은 밤에 닭이 날개 털 듯 일어난다네.
 
나는 이런 시들을 자식들에게 보내주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자랑스레 보냈다고한다. 그 많은 돈을 들여 번역한 일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20년 후에야  들었다. 눈 앞에 일만 생각하고 반대했던 내가 생각이 짧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분들의 훌륭한 인격에 감탄하고 예리한 감성에 탄복이 절로 나왔다. 늦게나마 조상님들의 문집을 보며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가보임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두 문집은 뜨거운 햇볕이 되어  나를 허씨 가문의 며느리로 영글게 하였다.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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