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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그녀가 넘어야 할 사선의 언덕

원을 그리는 날갯짓들이 겨울 산 위에서     꺼이꺼이 허공을 비집고 돌며 울부짖는다   먹구름을 쥐어뜯으며 사나운 바다로 나간다     어둠을 벗기려고 두 손을 세운다         손이 없이도 가지를 잡고 춤을 추는 바람이여   그대 내 창을 두들기기 전     아프고 애달픈 그 창 앞에서 경이로운 춤을 춰다오     잔인한 것들이 녹아내리고 발걸음에 힘이 솟도록   니콰라과의 휘파람이여 기적을 불어주오   깊고 푸른 자원의 온전한 숨을 위하여     세모의 묵도도 네모의 묵도도 하나로 승화하리니     원을 그리는 손등 위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해다오       봄을 아는 나목의 분신이여 이 겨울의 잎맥을 깨워   사선의 언덕에서 피어날 봄꽃을 지켜주오     그녀가 누워있는 창안에 검은 그림자 지워지고     푸른 자원의 빛이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머지않은 날   겨울새 울음 쫓아 눈 녹는 들판을 달리고 뛰어     한가득 별꽃도 담아 오리오 부풀은 정 훈훈한데   얼지 않은 이 겨울이 잔인하도록 시리구나   소중한 인연이여 그대 가슴에 사랑 가득하니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ㅡ)     기적을 잡고 일어서다오 발걸음 가볍게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사선 언덕 겨울새 울음 묵도도 네모의 소망 사랑

2023-12-22

[이 아침에] 바다의 빛, 바다의 울음

고향은 두메지만 나이 들면서 바다가 곁으로 자꾸 다가왔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바닷가에 나갔고, 여름 휴가철에는 어김없이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방송사 특파원으로 장기 체류한 곳도 두 군데나 해안 도시였다.     홍콩은 빅토리아 해를 해자로 두르고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태평양의 배꼽 같은 로스앤젤레스도 길고 아름다운 해안선을 끼고 융성하고 있었다. 바다는 늘 거대한 수정체로 시야를 가득가득 채웠고, 살가운 바람은 살갗을 문지르고 폐와 뇌를 청소해 지친 심신의 생기를 살려내 주었다. 태양이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여명에는 심부로부터 파토스가 치솟았고, 낙조가 현란한 수채화를 그려내면 그 예술에 홀려 무아의 지경에 잠기곤 했다.   방송사를 사직하고 자영업을 시작하면서는 아예 바닷가로 이사해 바다와 밀월기를 보냈다.  남 캘리포니아의 뉴포트코스트, 배산임수(背山臨水) 언덕의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바닷가 경관은 대형 화폭이었다. 하늘이 코발트색이면 바다도 짙푸르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면 덩달아 거무스름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 회색으로 변해 물장구를 쳤고, 해무(海霧)가 짙게 드리우면 바다는 희뿌연 이불을 덮고 숨었다.                해변의 바위 턱에 걸터앉아 있으면 여기가 오늘에 재현된 ‘에덴’의 서쪽이라는 착각에 취하기도 했다. 뭍 쪽으로는 해송(海松)과 삼나무들이 촘촘히 도열해 있고, 아래로는 모래밭이 곡선으로 휘어지며 끝없이 달리고 있었으며, 육지의 가장자리는 바다의 혀가 부단히 핥아서 보얗게 씻어주었다. 그 위의 광활한 창공을 사다새와 가마우지, 갈매기, 비둘기, 제비들이 무정형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녔다. 큰 떼를 지어 군무를 춰도 서로 부딪지 않으니 자유와 질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관이었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파도 부딪는 소리와 물결 이는 소리,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정교한 교향곡이거나, 불협화음이 뒤섞여 이루는 웅장한 화음처럼 들렸다. “신의 작품이다” 라는 탄성이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샌디에이고 쪽에서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순양함급의 군함 한 척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검고 큰 선체에 여러 개의 포신을 사방으로 겨누고 있어서 괴물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망막에 닿자 시야는 급변해 군함색으로 물들고, 푸르던 바다의 색깔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하늘에서는 빛의 향연이, 바다에서는 검은 해신의 유령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거실로 돌아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흉측한 어둠 속에서 띄엄띄엄 작은 불빛들이 가물거렸다. 밤바다의 풍랑과 무서움을 이겨내는 인간들의 의지가 아닌가. 그 형상 위에 동방에서 바다를 건너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존재, 그 삶의 궤적이 겹쳐졌다. 내면에 잠재해 있는 나의 작은 세상은 바다의 빛깔과 바닷소리의 변주 속에서 흔들리는 작은 조각배였다.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이 아침에 바다 울음 뉴포트코스트 배산임수 바닷가 경관 방송사 특파원

2023-07-11

[시조가 있는 아침] 매아미 맵다하고

매아미 맵다하고   이정신(생몰연대 미상)   매아미 맵다하고 쓰르라미 쓰다하네   산채(山菜)를 맵다더냐 박주(薄酒)를 쓰다더냐   우리는 초야(草野)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 『청구영언』 육당본(六堂本)   숨어 사는 즐거움   매미는 맵다고 울고 쓰르라미는 쓰다고 운다. 산나물이 맵다는 거냐? 술이 쓰다는 거냐? 우리는 시골에 묻혀 있으니 맵고 쓴 줄을 모르는데·······.   이 시조는 ‘매미’에서 ‘맵다’는 감각을, ‘쓰르라미’에서 ‘쓰다’는 감각을 가져왔다. 어감을 살린 절묘한 대구(對句)라고 하겠다.   그리고 산채·박주를 연결해 맵고 쓴맛의 의미를 확장했다. 결론은 세상의 시비를 떠난 은둔거사의 안빈낙도. 숨어 사는 이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훗날 조지훈(1920~1968)은 1946년에 발표한 시 ‘낙화’에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고 노래했으니 은둔에 대한 동경은 한국인의 오랜 심성이라고도 하겠다.   이 시조를 지은 이정신(李廷藎)의 호는 백회재. 조선 영조 때의 가객이다. 현감 벼슬을 지냈고 시조와 창에 능했다 한다.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에 시조 13수가 전하고 있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시조 13수 훗날 조지훈 귀촉도 울음

2022-09-15

[이 아침에] 라면을 끓이며…

 가끔 먹는 라면은 별식이다. 라면을 끓이면서 달걀 한 개를 풀어 넣었다. 계란을 깨면서 옛 생각이 피어올랐다.   내 어릴 적, 시골집에서 닭을 길렀다. 스무 마리 정도를 밖에 놓아 먹였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요란스레 소리를 질렀다. “꼬꼬댁 꼭 꼬꼬댁 꼭꼭…” 동네방네 다 듣도록 숨넘어가는 듯 요란을 떨었다. 알을 낳았으니 챙겨가라는 신호였다. 녀석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부산했다. 앞뒤 재면서 울음을 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정직한 고백이자 본능적인 몸짓일 터였다.   울음소리를 찾아가면 달걀이 있었다. 따뜻했다. 방금 낳은 달걀을 젓가락으로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쪼옥 빨아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혀끝에 감겨오는 맛이 고소했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달걀을 몰래 꺼내 먹는 어린 나를 암탉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 허락도 없이? 하는 표정이었다. 무참했다. 어머니에게 들켰을 때 보다 훨씬 더 미안했다.     새벽을 알리는 수탉 울음은 “꼬끼요오~ 꼬오~ㄱ” 길고 깊은 여운을 남기며 우렁찼다. 온 힘을 다해 운 다음, 가볍게 홰를 쳤다. 울음소리는 창끝처럼 새벽 하늘을 뚫고 멀리 멀리 날아가 세상을 흔들어 깨웠다. 기상나팔처럼 잠들어 있는 만물을 일으켜 세웠다. 외양간 송아지도 돼지 새끼도 온몸을 부르르 털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수탉은 새벽을 몰고 왔지만 암탉은 돈을 물어왔다. 지푸라기를 다듬어 달걀을 열 개씩 담아 한 줄을 만들었다. 계란 한 줄이면 제법 돈이 되었다. 선생님이나 어려운 분께 드릴 선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토종닭이 낳은 달걀은 양계장 알보다 비싸게 쳐주었다. 5일에 한 번 장이 섰는데 그 기간에 모은 달걀이 여러 줄이 되었다.     그렇게 모은 계란을 장에 내다 팔면 우리들 학용품 값은 물론 살림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암탉들은 대체로 지정된 장소에 알을 낳았다. 하지만 아무 데나 제멋대로 퍼질러 대는 놈도 있었다. 짚 더미나 갈퀴나무 더미, 혹은 헛간 으슥한 곳에 알을 낳아 놓은 경우였다. 심지어 알 낳은 장소를 오랫동안 알지 못해 알이 수북이 쌓여있기도 했다. 그건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 집 닭이 이웃집에 가서 알을 낳은 경우가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가 일을 저질렀다고 닭을 나무라거나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10년 전쯤 일이다. 오렌지글사랑에서 오랜 동안 함께 공부하던 한 아주머니가 다른 문학단체로 옮겨가더니 머잖아 등단을 했다. 마침 그 단체 송년모임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축사를 요청받았다. 마이크를 잡은 김에 한마디 언급했다. “옛날 시골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이 담장을 넘어가 남의 집에 알을 낳아버렸다. 닭이 한 일을 주인이 어찌하면 좋겠는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눈치 채고 박장대소했다. 딱 한 사람, 고개를 갸우뚱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분이 있었다.     라면이 다 끓었다. 냄비 뚜껑 위에 라면을 건져 묵은 김치 한 가닥을 걸쳐 먹는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갈퀴나무 더미 수탉 울음 새벽 하늘

2021-12-08

[이 아침에] 라면을 끓이며…

 가끔 먹는 라면은 별식이다. 라면을 끓이면서 달걀 한 개를 풀어 넣었다. 계란을 깨면서 옛 생각이 피어올랐다.   내 어릴 적, 시골집에서 닭을 길렀다. 스무 마리 정도를 밖에 놓아 먹였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요란스레 소리를 질렀다. “꼬꼬댁 꼭 꼬꼬댁 꼭꼭…” 동네방네 다 듣도록 숨넘어가는 듯 요란을 떨었다. 알을 낳았으니 챙겨가라는 신호였다. 녀석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부산했다. 앞뒤 재면서 울음을 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정직한 고백이자 본능적인 몸짓일 터였다.   울음소리를 찾아가면 달걀이 있었다. 따뜻했다. 방금 낳은 달걀을 젓가락으로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쪼옥 빨아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혀끝에 감겨오는 맛이 고소했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달걀을 몰래 꺼내 먹는 어린 나를 암탉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 허락도 없이? 하는 표정이었다. 무참했다. 어머니에게 들켰을 때 보다 훨씬 더 미안했다.     새벽을 알리는 수탉 울음은 “꼬끼요오~ 꼬오~ㄱ” 길고 깊은 여운을 남기며 우렁찼다. 온 힘을 다해 운 다음, 가볍게 홰를 쳤다. 울음소리는 창끝처럼 새벽 하늘을 뚫고 멀리 멀리 날아가 세상을 흔들어 깨웠다. 기상나팔처럼 잠들어 있는 만물을 일으켜 세웠다. 외양간 송아지도 돼지 새끼도 온몸을 부르르 털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수탉은 새벽을 몰고 왔지만 암탉은 돈을 물어왔다. 지푸라기를 다듬어 달걀을 열 개씩 담아 한 줄을 만들었다. 계란 한 줄이면 제법 돈이 되었다. 선생님이나 어려운 분께 드릴 선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토종닭이 낳은 달걀은 양계장 알보다 비싸게 쳐주었다. 5일에 한 번 장이 섰는데 그 기간에 모은 달걀이 여러 줄이 되었다.     그렇게 모은 계란을 장에 내다 팔면 우리들 학용품 값은 물론 살림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암탉들은 대체로 지정된 장소에 알을 낳았다. 하지만 아무 데나 제멋대로 퍼질러 대는 놈도 있었다. 짚 더미나 갈퀴나무 더미, 혹은 헛간 으슥한 곳에 알을 낳아 놓은 경우였다. 심지어 알 낳은 장소를 오랫동안 알지 못해 알이 수북이 쌓여있기도 했다. 그건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 집 닭이 이웃집에 가서 알을 낳은 경우가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가 일을 저질렀다고 닭을 나무라거나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10년 전쯤 일이다. 오렌지글사랑에서 오랜 동안 함께 공부하던 한 아주머니가 다른 문학단체로 옮겨가더니 머잖아 등단을 했다. 마침 그 단체 송년모임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축사를 요청받았다. 마이크를 잡은 김에 한마디 언급했다. “옛날 시골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이 담장을 넘어가 남의 집에 알을 낳아버렸다. 닭이 한 일을 주인이 어찌하면 좋겠는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눈치 채고 박장대소했다. 딱 한 사람, 고개를 갸우뚱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분이 있었다.     라면이 다 끓었다. 냄비 뚜껑 위에 라면을 건져 묵은 김치 한 가닥을 걸쳐 먹는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갈퀴나무 더미 수탉 울음 새벽 하늘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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