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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다 때가 있다!

 전에는 저의 두 팔을 뒤에서 맞잡을 수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때밀이 수건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중에서 팔고 있는 손바닥만 한 일명 ‘이태리타월’은 등을 밀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로 수건으로 등을 밀었습니다만 지금은 머플러처럼 나온 이태리타월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길을 가다가 ‘다 때가 있다’는 목욕탕의 광고문을 보았습니다. 광고문의 ‘때’라는 말에는‘ 몸의 때’라는 의미도 있지만 ‘기회’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저는 이 광고문은 모든 사람에게는 몸의 때가 있고 기회도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재치 있는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때’ 하면 저는 때밀이 수건과 목욕탕이 떠오릅니다. 제가 목욕탕에 가면 먼저 반달 모양의 유리문이 보이고, 돈을 내면 입장표를 내줍니다. 저는 ‘맡기지 않는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주인 백’ 이라는 안내문을 갈 때마다 보았습니다.       제가 어린 때는 이 말을 읽을 수는 있었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보니, 커서 보게 된 이 안내 글처럼 맡기지 않는 귀중한 내 생명은 하나님도 책임지지 않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몸의 때를 밀기 위해 목욕탕에 가는 것처럼 영혼의 때를 밀기 위해 교회에 오라고 전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들 교회’는 ‘회개는 영혼의 때를 벗깁니다!’라는 복음광고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서 가장 큰 차이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시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이루어지는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인간을 비웃으며 하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불행이 닥쳤다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불행이 권리의 침해로 느껴질 때 분노한단다.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을 느닷없이 빼앗겨 버리는 것만큼 화내기 쉬운 상황은 없지. 한적한 저녁 시간을 보내길 고대했는데 뜻하지 않는 사람이 불쑥 찾아오거나 하면 인간은 화를 쉽게 내지. 왜? 자기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 것인데 억울하게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는 열심을 다해 인간이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 생각하도록 하려무나.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니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그들은 그걸 몰라. 만약 시간이 인간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저희 소지품이게. 인간이 시간을 자기를 만든 이의 뜻에 따라 써야 할 처지라는 걸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악마들이 할 일이지.”       저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신앙인 입장에서 시간의 주인인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고 또한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찬송가 523장 또는 통합찬송가 262장의 “어둔 죄악 길에서” 후렴에 보면, “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 받을 때가 이때라” 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짧은 가사에 ‘때’가 4번이나 나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는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2번이나 ‘때’가 나옵니다. 솔로몬이 노년에 썼다는 전도서 3장에도 ‘모든 기한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예수님도 30년의 ‘때가 차매’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때가 찼을 때 부르셨고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고, 기회가 왔을 때 주님께 맡기는 결단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칼럼 / 에콰도르 임동섭 선교사에콰도르 임동섭 때밀이 수건과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 나라

2024-03-1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워싱턴지역원로목사회(회장 김영숙 목사)가 13일, 비엔나 소재 올네이션스 교회(담임목사 전진석)에서 월례회를 개최했다.     예배는 한정길 목사의 인도로 대표기도 방혜식 목사, 원로목사회 임역원들의 특송, 반주 김영란 사모, 봉헌인도 이현숙, 오옥희 사모, 광고 유흥태 목사, 축도 임종길(32대 회장) 목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시편 23편 1-6장 말씀을 인용해 설교한 전진석 목사는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를 주제로 “다윗은 목동시절부터 하나님의 계획 아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면서 “지친 영혼들을 푸른 물가로 인도하신 원로목사님들의 목회활동에 존경을 표하며 수고에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전 목사는 “‘목회는 살얼음을 걷는 것이고, 성도는 하나님의 귀하고 영광스런 양’이라고 했던 한 원로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면서 “교회, 삶, 가정에 위기가 찾아올 때 내 생각, 내 뜻이 아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신실함으로 눈물의 목양을 해 나갈수 있도록 저를 위한 선배 원로목사님들의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김영숙 목사는 “4년전,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원로목사들을 초청해 준 전 목사님의 따뜻함에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며 이날 초청에 감사를 전했다.   한편 원로목사회는 다음달 12일(화), 애난데일 소재 메시야장로교회(담임목사 한세영)에서 개최하는 월례회때 34대 총회를 진행한다. 이날 2023-2024년 주소록을 배포할 예정이다. 김영숙 목사(33대 회장)는 이날 회원들에게 고추장, 고춧가루, 깨소금 등의 선물을 전달하며 그간의 감사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문의: 301-752-5200 유흥태 목사 (총무)  주소: 4313 Markham St. Annandale, VA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여호와 목자 목사 원로목사회 선배 원로목사님들 담임목사 전진석

2023-11-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는 축복’

          워싱턴지역원로목사회(회장 김영숙목사)가 지난 24일 와싱톤중앙장로교회(담임 류응렬목사)에서 새해 첫 월례회를 개최했다. 예배는 김영숙 회장의 인도로 대표기도 이덕균(부회장)목사, 원로목사회 33대 임역원들과 교회협의회 임역원들의 특송, 반주 김영란 사모, 봉헌인도 방국희, 박능복 사모, 광고 유흥태(총무)목사, 축도 박덕준(13대 회장)목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시편 25편 12-13장 말씀을 인용해 설교한 류응렬 목사는 “ 자손들이 잘 되고 땅을 상속하는 은혜, 심령이 평강을 누리는 은혜가 삶속에 일어나기를 축복한다”며 “ 하나님을 경외할 때 만면에 미소가 넘치고 말 할때마다 감사함이 흘러 넘쳐 가정에도 천국이 임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평강을 선물하는 원로목사회 어르신들이 되어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말했다.   김영숙 회장은 “ 원로목사회의 100여명 회원들 중 대다수가 80세 이상 어르신들이다”며 “ 많은 분들의 봉사로 원로목사회가 33대까지 유지돼 온 것에 감사를 전하며 앞으로도 증경회장 및 회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참여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예배 후 이어진 2부 순서에서는 식사기도(방해식 목사) 후,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제공한 선물과 오찬을 함께하며 새해 덕담을 주고 받는 훈훈한 시간을 가졌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여호와 경외 회장 김영숙목사 원로목사회 어르신들 목사 원로목사회

2023-01-24

[시로 읽는 삶] 숨비소리

그림자를 다시 돌려놓으며// 광장은// 좋은 오후가 뭔지 알아// 이파리/ 떠가는// 새 날아간 만큼 번지는 하늘// 나무가 더 자라도 될까/ 둘러보는 동안// 모든 어깨를 찾으려고 부는 바람// 누군가는 누군가의 젊음으로 서 있고   -유이우 시인의 ‘숨’ 부분       신록은 우거지고 하늘은 맑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새들은 지저귄다. 작약은 피어 함박웃음을 짓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해지는 오월이 아름답다. 눈부시게 황홀한 날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될까. 계절과 날씨는 물론이거니와 삶이 기대치에 다다라 흡족한 날은 그리 많지는 않다.     바람도 나무도 긴장을 풀고 평화롭기만 한 주말 오후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쉬어본다. ‘숨’이라고 말해보기도 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숨을 쉰다. 숨이란 살아있다는 증거, 견뎌온 자가 누리는 호흡이고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라고 성경은 말한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맨 처음 하신 일이 숨을 주신 것이다. 숨이란 하나님의 절대 권한이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이야말로 누구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숨을 쉴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축복임은 자명하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격려와 감사가 절로 나온다. 아흔다섯 해 봄을 맞고 계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몇 달 사이 뛰기도 하는 손자에게 감사하다. 어김없이 피어나는 앞뜰의 패랭이꽃도 대견하고 끝도 없이 손길을 요구하는 잡초들도 그리 밉지 않다.   느낌만으로 살아지는 건 아니다. 생활의 조건들인 물적 필요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필요들의 여하에 따라 우리는 행복해하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낌이라는 섬세하고 여린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크게 작용하는 때도 있다. 숨이라는 말 앞에, 숨이라는 명제 앞에 서 있을 때, 살아 있음이 느낌이 되어 전율하게 되곤 한다.     해녀들이 잠수를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서 내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산소를 들이마시기 위한 생존의 소리라고도 한다.     숨은 쉬기도 해야 하지만 고르기도 해야 한다. 숨을 고르는 일은 나아갈 방향을 놓고 고민할 때나 장애물을 건너야 할 때 힘의 안배를 의미한다. 충분한 숨 고르기로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기록을 경신하기도 한다. 삶이 파도처럼 흔들릴 때, 좌초하지 않으려면 평형을 유지해야 하듯 숨 고르기를 통해 평정심을 얻기도 한다.     ‘숨을 거두다’라는 말은 ‘죽음’의 다른 말이다. 숨이라는 말은 이렇게 서늘함을 거느리고도 있다. 숨이야말로 생명의 마지노선이다. 들숨과 날숨의 짧은 요동 사이로 존재와 부재가 엇갈리는 순간을 맞곤 한다.       오월이 눈 시리게 환하지만 뒤편엔 그늘이 있을 것이다. 생활에서 오는 피로감은 우리의 느낌을 망쳐놓기 일쑤다. 초록에 취해 얼큰해진 기분조차 긁어놓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숨을 쉴 수 있어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심호흡하고 숨을 고르기도 하는 봄의 막바지, 초록에 편승해 한껏 푸르러지는 마음만으로 족하다. 살아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바라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이 벅차오르는 이 느낌이 좋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숨비소리 여호와 하나님 숨이란 하나님 막바지 초록

2022-05-24

인정받고 싶은 욕망

 저의 'Face-Book 친구(페친)‘ 중 한 분은 Face-Book에 많은 글과 사진을 올립니다. 그녀는 ’페친‘을 통해서 회사의 영업직을 얻었고, 집을 구했고, 식당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저도 매일 습관적으로 ‘Face-Book'에 들어갑니다.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해 봅니다. 그 분들이 저를 인정해주는 것이 고맙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이 게시한 글이나 사진이 좋으면 ’좋아요!‘를 누릅니다.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 욕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마케팅 업체가 인정 욕구를 이용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데이터 분석업체는 어떤 개인이 SNS상에서 어디에 ‘좋아요’(likes)를 눌렀는지 68개만 알면 그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그의 피부색과 가정사, 마약·술 중독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70개를 알면 그와 잘 아는 ‘절친’처럼 될 수 있고, 300개를 알면 그의 아내나 남편보다 그를 더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300개를 넘어서면 그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전지자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좋아요’가 기업들에 소중한 마케팅 자료로 쓰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상업적 가치가 1조 달러를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꽃/김영자’ 시인의 ‘사랑받고 싶으신 하나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무엇이 부족하셔서 / 하찮은 나의 사랑이 필요하시리 / 다만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 내 사랑도 받고 싶으신게지 /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 그 사람도 나의 사랑을 원하지 않을까? /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 왜냐하면 나는 너를 그 만큼 사랑하니까" /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 그 사람의 사랑이 진실일까? / 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좋다 / 나를 그만큼 사랑해 주신다는 게 좋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 나를 황홀하게 만든다 / 부족한 이 모습 이대로 / 나 이제 / 나의 하나님을 내 온 맘 다해 사랑하오리 / 그 분이 원하시는 사랑은 / 당신의 가슴 크기 만큼이 아니라 / 쪽박만큼이나 작고 좁은 / 내 가슴 크기 만큼일 테니까 /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출20:5) /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인정 욕구’가 사람을 성장시키고 일의 성과를 올리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동시에 인정 욕구의 문제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인정 욕구에 대한 강박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정 욕구의 늪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정 욕구에 좌우됩니다. 인정받으면 변화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인정이 필요합니다. 인정해 주면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사람은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거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노력해서 만든 몸을 자랑하고 싶어 SNS에 사진을 올렸다가 ‘좋아요’를 꽤 많이 받자,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운동하고 체중 감량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SNS를 시작하지만 어느새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게 됩니다. SNS에 혹은 카페 게시판에 게시물을 올린 뒤 조회 수가 얼마인지, ‘좋아요’가 얼마나 눌려졌는지 수시로 확인하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든 무의식적으로 든 타인에게 ‘잘했다!’, ‘멋지네!, ‘괜찮아’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인정 욕구입니다. 인정 욕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과해지면 오히려 스트레스에 잠식되거나 번 아웃에 빠져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이어 가기 힘들게 됩니다.         인정은 거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타인과 주위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이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애초에 인정은 상대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인정받고 싶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인정 욕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이 있어도 힘을 써서 인정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타인이 존재해야 하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가운데 충족되는 욕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지금 이렇게 괴로운 것이 ‘완벽하지 못해서’, ‘예쁘지 않아서’, ‘연봉이 높지 않아서’, ‘실적을 채우지 못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남의 인정에 목말라 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칼럼욕망 목회칼럼 인정 욕구 하나님 여호와 데이터 분석업체

2022-02-15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예수클럽

삶이 어려워지면 신앙인들은 흔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반문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질병이나 실직, 실패의 고통 가운데 있게 될 때나 불의를 경험할 때, 또 무종교의 사람들이 윤택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을 볼 때도 막연한 회의에 빠진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삶 가운데서 겪는 고난이나 고통, 실의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신실한 신앙생활이 부와 권력, 명예나 건강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꿈꾸는 집이나 이상적인 배우자나 바람직한 자녀나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어떤 행로로 이어지는 인생길이건 설사 폭풍 속을 헤치고 가는 길이라 해도 함께 동행하시다가 다음 세상에 갈 때 있을 곳을 마련해주신다는 내용이다. 다음세상에서 홈리스 될 일은 없다는 한가지 보장 뿐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음에도 왜 어떤 연유로 대다수의 교인들 그리고 교인을 판단하는 세상 사람들은 근거 없는 오해 가운데서 수시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타박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아직 그의 어머니의 태내에 착상되기 전부터 그를 알았고,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하시면서 예레미야에게 평생의 사명을 주셨다.     성경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삶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살해 위협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스스로 죽기를 자청할만큼 험한 역경 속에 있던 예레미야에게 성공적인 사역이나 평탄한 앞날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와 함께 해주신다는 내용 한가지였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뿐이다.     예레미야의 예가 증명하듯이 신앙인은 사기가 저하될 때 함께 해주시고 고난을 이기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고난을 피하거나 면제시켜 주시는 분이 아님도 분명하게 기억할 일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이 땅에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예는 수없이 많다.     쌍동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을 봐도, 선택 받지 못한 에서는 인생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안락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던 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챈 행적 태문에 야반도주를 하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야곱의 인생은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들을 견뎌내고 수많은 해를 낯선 땅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살아낸 행로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적인 개념인 개인의 행복과 성공의 가치관을 기준한 게 아니고, 궁극적인 영혼의 처소 및 몇 세대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을 지닌다. 예레미야는 비록 하나님을 의심하고, 마음이 상하고, 갈등해야 했지만 “주님이 환난날에 나의 힘이요 요새요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하며 신실함을 지켰다.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하고 끝내 소유하는 집요함을 보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삶 가운데 계신 것을 고백하는 생을 살았다.     밤이슬을 맞으며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한 야곱은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보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두려워하며 그 자리를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전이라고 명했다. 이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일용할 양식과 입을 옷을 주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주신 축복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예수는 요한복음1장에서 야곱이 본 환상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야곱이 본 사다리 대신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인자라는 단어로 바꾸고 사람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사다리의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르치셨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수용하고, 문제에 대한 해답 대신, 하나님의 존재를 구하고,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직 멤버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클럽이다”고 했다. 근거 없는 오해일 랑 떨쳐내고 더 늦기 전에 예수 클럽에 가입하기를 권한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예수클럽 여호와 하나님 반면 하나님 예수 클럽

2021-12-10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교회의 성전은 주님이 성령으로 자리하신 곳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하늘문이 열린 곳이다. 영적인 영역을 인정하고 영적인 전쟁에 대비하고 사는 것은 인간 본성에서 원하는 것을 자각하여 근신하고 절제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그리고 삶의 향방까지도 독자적인 판단 이전에 자기 존재와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해드린 주님이 인도하는대로 나아가기를 작정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인이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당연히 마음의 갈등이 더 민감하게 감지되고 그때마다 결단이 요구되는 신앙생활은 그럼으로 용기와 의리가 없이는 가능치 않다.     신앙 여정은 결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이 아닌 교회내의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어서 교회에만 출석하면 교인이 되는 현실에서 몇몇 교인들을 보고 기독교 신앙을 매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신앙인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먼저 감사하며 주께 의지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십수년 전 교회를 개척한다고 했을 때 단 한 사람의 이해나 지지를 얻기도 어려웠다.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일이며 칭찬보다는 욕을 먹고 도마 위에 올린 생선토막처럼 온갖 수모를 당할 것이다고 점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새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사람이 만말을 하며 개척사역이 어렵다고 해도 주께서 사명을 주셨으면 그 가는 길에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수 있는, 소명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온 나라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던 골리앗에 맞선 단아한 미소년 다윗이 멋진 말을 외쳤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개척사역은 아무 자원 없이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수년간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해온 목사님의 이름을 듣고, 자청하여 그 분을 만났다. 우리 성전에서 교회를 시작하도록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조건 없는 제안에 한 가정 성도를 두고 기도하고 있던 목사님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받아들였다. 젊은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면서 주께서 종려나무교회를 기억하시고, 그 사역자인 내게 감동을 주셔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기도문을 위한 문구가 아니고 진정한 고백이어야 한다.     설립예배를 하는 축사에서 진심으로 전한 개척교회 선배로서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내 믿음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가 그 동안 꿈꾸며 기도한 사역의 내용들을 이미 성취된 것과 똑같은 기쁨으로 받으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눈으로 하는 평가는 앞으로도 아무 의미도 없음이다. 격려하기 위해 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서다. 목회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 지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상황에서나 기대감이 생겨나고 부동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 지붕 두가족 살림이 쉬운 일만은 아닐지 모르나, “형제의 연합하고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씀을 실제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동역자로 본이 되는 사역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종려나무교회와 새소망교회의 찬송과 기도가 함께 주의 보좌에 상달되어 주를 기쁘게 하는 두 교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Kevin Rho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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