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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쥬얼그룹 한국 자선행사서 완판

미주 한인 여성들 사이에서 유명한 진주보석비드 목걸이 브랜드 ‘고베쥬얼그룹’이 최근 한국 서초구에서 열린 ‘원로 가수 장미화의 아름다운 손길’ 자선 바자회에 참가해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이 자선 행사는 다수의 유명 연예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많은 기업들의 협찬으로 성황리에 개최됐는데, 고베쥬얼그룹은 50여 점의 진주 보석을 협찬해 단 이틀 만에 완판하는 성공을 이뤄냈다.   이 자선 바자회에는 강부자·조항조·김혜연 등 많은 탤런트와 가수들이 참석해 행사를 빛냈다.   고베쥬얼그룹은 미국에서 한국에 직접 직원들을 파견해 진주 비드 목걸이와 귀걸이 등 다양한 보석을 협찬, 많은 호평을 받았다.   고베쥬얼그룹은 “자선 바자회는 이미 16년 동안 이어져온 행사로, 가수 장미화 씨가 매년 한 달 동안 자선 물품을 협찬받아 진행하고 있다”며 “이러한 선한 행사에 동참하는 후배 연예인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편 22년된 진주 보석 전문 업체인 고베쥬얼그룹은 LA에 이어 뉴욕에도 매장을 늘리는 등 다양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고베쥬얼그룹은 최근 뉴욕 플러싱 코리아빌리지에 상설 매장을 개장했다.   고베쥬얼그룹은 “당사는 미주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높은 인지도와 평판을 쌓아가며, 다양한 자선 활동과 사업 확장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고객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을 요청했다.   고베쥬얼그룹 뉴욕 플러싱매장: 코리아 빌리지 1층 젬코(GEMKO), 150-24 Northern Blvd. Flushing. New York 11354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고베쥬얼그룹 고베쥬얼그룹 진주 목걸이 고베쥬얼그룹 장미화 자선 바자회 고베쥬얼그룹 바자회 완판 고베쥬얼그룹 뉴욕 매장 장미화의 아람다운 손길

2023-10-11

[독자 마당] 75년 전 하나님의 손길

작은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무조건 피난길에 나섰다. 산보라도 가는 줄 알고 좋아하던 동생들도 이제 다 노인이 되었다.     피난길에 찾은 감자밭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아버지도 밭에 들어가 감자 몇 가마니를 사면서 감자밭 주인과 이야기를 하시더니 밭 주인의 문간방을 빌렸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온 식구가 방 한 칸에서 마치 뗏목같이 누워 자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곧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어느새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불이 필요했지만 오빠는 입대했고 동생들은 어리다 보니 내가 집에 이불을 가지러 갈 수 밖에 없었다.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었으니 용산구 서계동에 있던 우리 집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할 형편이었다. 집에 들려 부랴부랴 이불 보따리를 꾸려 집을 나섰다. 서둘러 한강가에 왔지만 벌써 해가 저물어 내가 타야 할 나룻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언덕 밑에 보이는 배가 마지막 배라고 누군가가 일러 주었다. 죽을 힘을 다해 가까워 보이는 비탈길을 택해 배 가까이에 이르니  사람을 가득 태운 배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배를 못 타면 여기서 죽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은 방망이질을 했다.   ‘하나님 저 배를 타게 해 주세요’라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불 보따리를 배에 힘껏 던졌다. 배는 마구 요동쳤다. 그러자 배에 탄 사람들은 내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내 행동을 본 그들이 큰 소리로 웃더니 내 자리를 마련하고는 어서 올라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광야에서 절박한 순간에 드렸던 나의 짧은 기도를 들어 주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을 90줄에 들어선 지금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감사하곤 한다.   이영순·샌타클라리타독자 마당 하나님 손길 이불 보따리 감자밭 주인 용산구 서계동

2023-06-27

[문화산책] 아름답고 따스한 손의 표정

한동안 예술가의 손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적이 있다.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니 보면 볼수록 풍부하고 아름다운 손의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손이 말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춘다.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소통한다. 수화의 세계는 한층 깊다.   젊은 시절 연극에 미쳐 지낼 때도 손의 다채로운 표정이 보여주는 표현력과 설득력에 감탄하며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손이 건네는 말과 표정은 정말 넓고 깊고 그윽하다.   예술세계에서는 거의 절대적이다. 음악가의 손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오케스트라를 통솔하여 조화로운 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손도, 악기를 애무하는 연주자들의 손도, 가수의 손놀림도 깊고 그윽하다. 황제 카라얀의 손짓은 철학적이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손은 음악과 하나로 어우러지며 춤춘다. 지휘자마다 추구하듯 음향이 다르듯 손짓도 그렇게 다르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손놀림, 바이올린 연주자의 섬세한 손 움직임, 하프 어루만지는 우아한 손길, 기타 고수의 현란한 손길…. 가야금 튕기는 손, 대금 연주자의 운지, 타악기 두드리는 신명의 손….   미술작품에 그려진 손들도 다양한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한다. 볼수록 정겹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과 인간이 서로 마주하며 소통하는 손, 알프레드 뒤러의 기도하는 손, 로댕이 조각한 손… 그 수많은 명작…. 명화에서 손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감상해도 감동적이다. 정말 많은 것을 속삭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흙 묻은 손, 붓을 잡은 서예가의 손, 허공을 가르는 춤꾼의 손짓….   예술작품에서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도 손은 아름답다. 돈벌이를 위해 마지못해 컴퓨터 자판 위를 정처 없이 헤매는 손, 습관적으로 무표정하게 휴대전화를 두드리는 손, 돈을 세는 손…. 그런 고달픈 손 말고 아름다운 손이 많다. 열심히 일하다가 구슬땀 닦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손, 정성껏 손글씨로 편지 쓰는 손, 화초에 물 주는 손, 아내의 젖은 손 같은 고맙고 거룩한 손…. 그중 으뜸은 아무래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직립보행의 삶을 시작하면서 손은 신체에서 가장 요긴한 부분으로 진화했다. 문명 발전의 가장 효율적 연장으로 아름답고 편리하게 진화했다. 그렇게 진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은 ‘손’전화(휴대폰)의 시대다. 그러다 보니, 영화 ET의 손가락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린 손도 점점 많아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네 현실에는 나쁜 손, 더러운 손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매우 어지럽고 아슬아슬하다. 무섭다. 방아쇠를 당기는 피 묻은 손,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을 찔러대는 정치가의 검은 손,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에 바빠서 정의라는 말조차 잊어버린 기자의 창백한 손, 같은 반 친구의 인생을 폭력으로 뭉개버리는 젊은 청춘의 잔인한 손, 무슨 판결문이라는 걸 읽으며 공허하게 방망이 두드리는 손, 똑같은 말을 꼭 세 번씩 되풀이하며 내 질러대는 시위대의 손, 훔치는 손, 걸핏하면 파이팅 외치며 흔들어대는 주먹손, 때려 부수는 파괴의 손….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두운 손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아름다운 손, 착한 손이 건네는 다정한 말이 그리워진다. 손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나는 엄마의 손맛, 엄마손은 약손 같은 근원적 사랑의 손길, 진정성과 체온이 그득 담긴 예술가의 손길, 인공지능에는 없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표정 손길 인공지능 손길 진정성 대금 연주자

2023-05-18

[문화산책] 아름답고 따스한 손의 표정

한동안 예술가의 손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적이 있다.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니 보면 볼수록 풍부하고 아름다운 손의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손이 말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춘다.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소통한다. 수화의 세계는 한층 깊다.   젊은 시절 연극에 미쳐 지낼 때도 손의 다채로운 표정이 보여주는 표현력과 설득력에 감탄하며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손이 건네는 말과 표정은 정말 넓고 깊고 그윽하다.   예술세계에서는 거의 절대적이다. 음악가의 손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오케스트라를 통솔하여 조화로운 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손도, 악기를 애무하는 연주자들의 손도, 가수의 손놀림도 깊고 그윽하다. 황제 카라얀의 손짓은 철학적이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손은 음악과 하나로 어우러지며 춤춘다. 지휘자마다 추구하듯 음향이 다르듯 손짓도 그렇게 다르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손놀림, 바이올린 연주자의 섬세한 손 움직임, 하프 어루만지는 우아한 손길, 기타 고수의 현란한 손길…. 가야금 튕기는 손, 대금 연주자의 운지, 타악기 두드리는 신명의 손….   미술작품에 그려진 손들도 다양한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한다. 볼수록 정겹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과 인간이 서로 마주하며 소통하는 손, 알프레드 뒤러의 기도하는 손, 로댕이 조각한 손… 그 수많은 명작…. 명화에서 손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감상해도 감동적이다. 정말 많은 것을 속삭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흙 묻은 손, 붓을 잡은 서예가의 손, 허공을 가르는 춤꾼의 손짓….   예술작품에서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도 손은 아름답다. 돈벌이를 위해 마지못해 컴퓨터 자판 위를 정처 없이 헤매는 손, 습관적으로 무표정하게 휴대전화를 두드리는 손, 돈을 세는 손…. 그런 고달픈 손 말고 아름다운 손이 많다. 열심히 일하다가 구슬땀 닦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손, 정성껏 손글씨로 편지 쓰는 손, 화초에 물 주는 손, 아내의 젖은 손 같은 고맙고 거룩한 손…. 그중 으뜸은 아무래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직립보행의 삶을 시작하면서 손은 신체에서 가장 요긴한 부분으로 진화했다. 문명 발전의 가장 효율적 연장으로 아름답고 편리하게 진화했다. 그렇게 진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은 ‘손’전화(휴대폰)의 시대다. 그러다 보니, 영화 ET의 손가락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린 손도 점점 많아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네 현실에는 나쁜 손, 더러운 손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매우 어지럽고 아슬아슬하다. 무섭다. 방아쇠를 당기는 피 묻은 손,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을 찔러대는 정치가의 검은 손,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에 바빠서 정의라는 말조차 잊어버린 기자의 창백한 손, 같은 반 친구의 인생을 폭력으로 뭉개버리는 젊은 청춘의 잔인한 손, 무슨 판결문이라는 걸 읽으며 공허하게 방망이 두드리는 손, 똑같은 말을 꼭 세 번씩 되풀이하며 내 질러대는 시위대의 손, 훔치는 손, 걸핏하면 파이팅 외치며 흔들어대는 주먹손, 때려 부수는 파괴의 손….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두운 손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아름다운 손, 착한 손이 건네는 다정한 말이 그리워진다. 손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나는 엄마의 손맛, 엄마손은 약손 같은 근원적 사랑의 손길, 진정성과 체온이 그득 담긴 예술가의 손길, 인공지능에는 없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표정 손길 인공지능 손길 진정성 대금 연주자

2023-05-11

[삶의 뜨락에서] 돌아와 앉다

“돌아와 앉다”라는 말이 2개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이” 시구가 주는 이야기와 “탕아 돌아오다”라는 성경 속 이야기다. 따뜻하게 지내던 집을 떠나 낯선 고장에서 살아내던 세월을 겪고 달라진 모습이 되어 떠났던 집으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다. 출가외인이라는 보내어진 인생이 되어 그때까지 살아오던 매일과 다른 생소한 하루에서 시작하여 일 년 이년 다른 생활의 그림을 그려나가며 산다는 것의 슬픔과 기쁨을 쌓아가던 시간을 뒤로 하고 외인이라 불리던 처지에서 다시 내인이 되어 가만히 앉아 거울을 보는 뒷모습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옷깃이 되어 방 안에 있다. 그 마음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 것도 같고 혹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얼굴로 떠오른다.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아야지 하는 욕심으로 잘 보살핌을 받던 집을 떠나는 의기양양한 발걸음이 시작한다. 아무도 그렇게 살펴주지 않는 세상에서 모두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맨몸이 되어 돌아보는 주변에는 어떤 따스한 손길도 없다. 그제야 따뜻했던 집을 떠올리고 “돌아가자” 마음먹는 어떤 인생의 처연한 얼굴이 떠오른다.   한국을 떠나올 때 어느 화가가 산수화 하나 그려 선물했다. 산과 강과 바다가 어우러진 그림에 작은 배 하나 있어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 글귀가 좀 이상했다. “고향으로 가는 뱃길.” 이제 고향이라는 데를 떠나 나름 다른 소원을 가지고 발걸음 떼는 사람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떠나와 살면서 그 그림은 뒤에놓이고 바라볼 기회가 없었다. 어느 만큼 세월이 지난 지금 가끔 생각나던 그 그림을 꺼내보며 “고향으로 가는…”이라는 글귀를 가만히 읽어보며 또 다른 의미로 그 글을 열어보게 되었다. 별로 사무치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도 아닌데 고향으로 간다는 심정이 색다르게 젖어온다. 돌아간다는 의미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며 그냥 살아내던 어느 시간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다.     떠나온 곳으로 혹은 첫발을 내딛던 시간으로, 시작하던 시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분위기를 만든다. 한 해의 끝자락에 들어서면 그래서 세파에 뛰어놀던 가슴이 진정되고 무엇을 바라보고 뛰어왔을까 살펴보게 된다. 혹은 상처받았던 심령이 위로를 찾아 고향 집에 들어서는 발걸음처럼 주저되기도 하고 기대에 가득하기도 하고 어떤 대접이 기다릴까 두려워하는 시선이 되기도 한다. 돌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은 다행이다.   앞길은 보이지 않고 돌아갈 길도 없다면 돌아와 앉는 행복은 가질 수 없다. 그렇게 마음 놓고 앉을 수 있는 아랫목이 있다면 어떤 비바람 속에 놓여도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다. 돌아와 앉는 기분이 드는 시간, 돌아와 앉는 기분이 들게 하는 음악, 그렇게 만드는 언어, 그림, 풍경, 공기, 향기 어떤 사람 등 우리를 돌아가게 하는 귀한 것들이 있어 돌아가야 할 시간에 발길을 돌리게 한다.   돌아와서 거울을 본다는 것이 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돌아온 탕아를 기다리는 따스한 눈길과 손길이 있었다는 것이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거울 속에 얼굴은 어떤 얼굴인가. 그 얼굴이 무슨 이야기를 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오래도록 거울을 마주하게 한다. 돌아온 자의 손을 잡아주는 이는 누구인가. 저만치에서 비웃는 표정은 누구인가. 다가오며 웃음으로 반기는 이는 누구인가. 세상의 때를 잔뜩 붙이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돌아온 용기를 받아주는 이는 누구인가. 지금 돌아와 앉는 마지막 달 마지막 날짜를 맞이하며 일기 끝장을 적는 심정이 되어 많이 겪고 많이 던져버린 사람의 몸짓으로 단정하게 앉아본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시간 사이 눈길과 손길 풍경 공기

2022-12-26

[삶의 뜨락에서] 손길이 닿은 작품

 잘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다. 좋은 그림이라 칭찬하면서도 그림의 값을 말할 때는 그다지 좋게 불러주지 않는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표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자체의 훌륭한 점은 인정하지만 어떤 작가의 손길이 닿은 것인가에 따르는 값을 정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작품 한구석에 조그맣게 올려진 서명이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다. 때로는 유명인 사인만을 백지에 받아내는 일도 상당한 가치를 지니며 그 유명인을 바라보는 행위에도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바라보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뜻을 지니므로 큰 자부심으로 남는다. 서명이 없는 잘 그린 그림이 서명 있는 보통 그림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냥 잘 그린 그림은 많이 만들어질 수 있지만, 서명 있는 그림은 한정적이고 그 작가의 체취가 있어 누군지 알 수 없는 작가의 알 수 없는 체취보다 생명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친구를 두고 있다. 아주 친한 친구도 있다. 친한 친구와는 남다른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 길을 걷다 방금 지나친 저 사람이 그 친한 친구보다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한 친구는 될 수 없다. 그림에서의 서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익히 알고 있는 체취가 없다. 함께 지내온 많은 시간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의 공감 세계를 다른 무엇도 대체할 수는 없다. 월등한 실력 뛰어난 능력 등이 두 사람 사이에 구축된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것이 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친구를 위하여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산업 발달 이전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도구 등을 몇몇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내게 필요한 나에게 꼭 적합한 것을 만들어 나에게 전해지는 가내공업의 사회에서는 내 물건이 언제나 특별한 것이었다. 만든이가 나를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손질하여 만들어낸 나만을 위한 것이어서 나름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제작 기술이 발달하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나만을 위한 나에게 맞추어진 물건은 사라졌다. 내가 가진 책상이나 옆 사람이 가진 책상이나 똑같이 생겼고 특별한 의미도 없어지고 그에 따른 특별한 가치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나한테만 의미 있던 여러 가지들이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만들어지는 것으로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생활의 안팎에서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던 소소한 이야기와 가치들이 없어져 버렸다. 사람들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불가 자산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뜻을 가지며 비즈니스 세계에서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특별한 과정으로 만들어져 “오직 당신에게만”과 같은 경로로 전달되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는 현상처럼 들린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음이다. 여기서도 볼 수 있고 저기서도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작품” 같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우리들의 심리가 꼭 어느 장소 어느 시간 어느 사람의 손에 의하여 전해지는 그런 것을 굳이 찾아다니며 만나려 하고 있다. 친구에게 제일 친한 친구가 되고 싶고 나의 마음이 담긴 못생긴 그림이지만 선물하고 싶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야” 하며 울퉁불퉁 목각인형을 주고 싶어 한다. “손길이 닿은 작품”을 받고 싶고 “손길이 닿은 작품”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손길이 닿아 세상에 나왔는지 그 또한 알고 싶어지는 대체불가 자산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손길 작품 작품 한구석 대체불가 자산 유명인 사인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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