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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호랑이도 풀을 뜯는다

‘호랑이는 굶어도 풀을 뜯지 않는다’. 호랑이가 용맹하고 위엄이 있지만, 과시적이며 허세를 부리지 않기에 아무리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는 고고함을 뜻하는 교훈이다. 그런데, 러시아 연해주에서 27년 동안 야생 시베리아호랑이를 관찰하고 연구한 박수용 자연 다큐멘터리스트가 쓴 ‘꼬리’를 읽고 호랑이도 풀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꼬리’를 읽은 후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 호랑이가 동물을 잡아먹다 보면 동물의 털을 조금씩 삼키게 된다. 그 털은 대부분 배설되지만 일부는 체내의 위와 장에 쌓인다. 그래서 털이 많이 쌓이면 호랑이는 거북함을 느껴 장 속을 청소할 수 있는 길쭉한 풀을 먹는다. 그러면 풀과 함께 털들이 몸 밖으로 배출된다. 호랑이는 이런 식으로 내장을 깨끗이 청소할 뿐 아니라 모자란 식물성 영양소도 보충할 수 있다. 호랑이가 풀을 뜯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깨닫게 한다.     우리도 가끔 호랑이처럼 풀을 뜯을 필요가 있다. 풀을 뜯는다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공통의 이해와 대립하는 이해가 있을 때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호랑이처럼 풀을 뜯어야 한다. 상호 간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교섭술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문제의 상황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는 능력이야말로 교섭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좋은 예로, 이스라엘은 1967년에 있었던 6일 전쟁 이후,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한 교섭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주장은 도저히 양립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주장했고, 이집트 역시 시나이 반도 전역이 이집트에 반환되어야 할 뿐 아니라 단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며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주장에서 배후에 있는 이해관계로 눈을 돌렸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스라엘의 최대 관심사는 국가의 안전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국경선 일대에 이집트 탱크 부대가 언제라도 진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집트의 최대 관심사는 시나이 반도의 주권에 있었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 빼앗긴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회담한 결과는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의 주권 아래에 두는 대신에 그 지역을 비무장화하여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의 국기는 볼 수 있어도 이집트의 탱크 부대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호랑이의 위와 장에 쌓인 털이 이스라엘에는 시나이 반도 국경선 일대에 주둔한 이집트 탱크 부대였으며, 이집트에는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나이 반도의 주권이었다. 결국, 양국 정상들은 자신들의 위와 장에 쌓인 털을 청소하기 위해 호랑이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 그러자 몸속에 쌓여있던 털이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그렇다. 자기 입장만을 염두에 두게 되면 그 배후에 있는 당사자의 관심사는 소홀히 하게 되어 합의는 어렵게 된다. 그러나 대립해 있는 입장의 배후에 깔린 본래의 이해관계를 살펴보면, 양쪽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대립하는 입장의 배후에는 상충하는 이해보다 더 많은 공통적인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열린광장 호랑이 시나이 반도 이집트 탱크 탱크 부대

2023-10-16

[기고]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필자는 군 생활을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했다. 소위 말하는 ‘카투사(KATUSA)’ 병사였다. 카투사 하면 대부분 서울 용산 미 8군에서 근무하며 매주 외박을 나오는 엘리트 행정병들을 생각하겠지만, 실제는 절반 이상이 전방에서 미군들과 함께 전투병으로 생활한다. 필자 역시 보병부대에 박격포병으로 배치받았다.     한국군의 박격포는 81mm라고 해서 4명이 1조가 되어 어깨에 메고 이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미군의 그것은 더 크다. 사람이 들 수 없기에 장갑차에 실어 나른다. 박격포는 포물선으로 포탄을 떨어뜨리는 곡사화기다. 어른 팔뚝만 한 포탄을 양손으로 쥐고, 포신 입구에 살짝 떨어뜨리면, 포신 안에 있는 뾰족한 ‘격침’이 바닥을 세게 때려 폭발을 일으키고 그 힘으로 적진으로까지 날아간다.   그런데 가끔 불발탄이 나았다. 비가 오거나, 흐리고 습한 날에는 신관이 제대로 폭발하지 않아 포신 안에 포탄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럴 때는 규범(Field Manual)에 따라 “불발!(Misfire!)”이라고 크게 외치고 포가 있는 위치에서 50미터 후방으로 부리나케 도망갔다. 포신 안에서 폭발할 경우 반경 50미터 내에 있는 것들은 쑥대밭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간을 기다려도 폭발이 없으면 원위치하여 연탄집게처럼 생긴 기구를 포신 안으로 집어넣어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처음에는 무척 떨렸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자 뒤로 도망갈 때도 걸어갔고, 한 손으로 집게를 잡고 꺼내기도 했다.     동기가 근무하던 옆 부대는 미사일을 쏘는 부대였다. 한번은 이 부대에서 훈련 도중 조준을 잘못하여 민가로 포를 날려 보낸 일이 있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돼지우리에 있던 돼지들이 폭사하는 바람에 바비큐 냄새가 온 동네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여성들이 싫어하는 군대 얘기를 길게 한 것은 군대에서 그만큼 오발탄 사고가 잦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 한국의 강릉 부대에서 쏜 미사일이 목표 지점으로 날아가지 않고, 부대 안에서 폭발했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것이다.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그 포가 강릉 시내 민가에 떨어졌다면….     더 끔찍한 경우는 그 미사일이 북쪽으로 날아가 휴전선을 넘어갔을 경우이다. 그렇게 되면 휴전상태인 남북관계는 순식간에 전쟁상황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박격포든, 미사일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정확하게 조준하여 목표물에 제대로 떨어뜨리느냐 하는 것인데, 발사대에서 1밀리미터 혹은 1도만 잘못 조준해도 낙하지점은 목표물에서 수백 미터는 물론 수십 킬로 미터까지 멀어지기 마련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하듯 상대방이 먼저 군사 도발을 한다는 이유로 훈련용이긴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미사일을 쏘고 있다. 이러다 실수로 미사일이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위험한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보면 오영수 할아버지가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하며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남북관계가 딱 그런 형국이다.  지금은 ‘이러다 다 죽을 수 있는’ 상황이다. 문자 그대로 ‘일촉즉발(一觸卽發·한 번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같이 몹시 위급한 상태)’의 위기다. 남북 모두 상대를 탓하기 전에, 상황의 위험성을 알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함께 해결책을 모색할 때이다. 전쟁보다 나쁜 평화는 없기 때문이다.    정대용 / 레몬법 변호사기고 강릉 부대 포신 입구 동두천 미군

2022-10-2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다시 뛰는 가슴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기억하고 싶은 것뿐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지난 이년 동안 병마와 가난, 고통과 슬픔을 견디며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왔다. 배 만 고프고 허기진 게 아니라 심장이 오그라드는 불안과 절망으로 영혼이 지치고 어둠 속에 갇혔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기억 속 아름다운 날들과 사랑의 추억마저 멍들게 했다. 꿈 희망 소망 믿음 기쁨 행복이란 단어들이 사라졌다. 불안과 공포의 장막 속에서 고삐 물린 소처럼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 아름다운 날들이 슬픈 기억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얀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이 가고 ‘검은 호랑이 해’ 임인년(壬寅年)이 밝았다. 검은 호랑이는 명예욕이 강하고 큰 야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희망을 유보한 사람들은 더 이상 명예와 야망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살고 싶을 뿐이다. 죽을 때까지는 안 죽는다. 살아있는 동안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 가족들 무탈하고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고, 친구들과 맛난 음식 나눠먹고, 이웃 만나면 함박꽃처럼 웃으며 손 흔들고, 별사탕처럼 빛나는 애들 눈동자에 달콤한 꿈의 단어들을 새기며 그대 눈 속에 남아있는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고 싶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마태복음 9:17절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지 못한다. 맑고 깨끗한 새물로 새날을 채우는 사람은 희망의 문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 동안 육신만 지치고 고달픈 게 아니라 영혼이 배고프고 메말랐다.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되지만 영혼이 갈급하면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까. 마음이 허허로워지면 불안과 공포, 의심이 생기고 우울증에 걸린다. 믿음과 사랑이 사라지고 만남을 기피하고 자신을 어둔 방에 가둔다.     어제는 흘러갔다. 어제가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내일은 내일의 시간이 온다. 오늘을 참고 견디면 기적처럼 내일은 반드시 온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중략)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김수영의 ‘풀’ 중에서   마지노선도 무너진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육군장관 마지노는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140킬로미터에 걸쳐 두께 30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벽을 구축했지만 독일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마지노선은 ‘최후의 방어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인생의 마지노선은 없다. 선택이 있을 뿐이다. 죽는 것 빼곤 못할 것이 없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백번 천번 더 일어났었다. 기억의 창고를 열고 사랑과 희망이 담긴 날들을 기억하겠다. 하얀 손수건 가슴에 달고 꿈이 뭉게구름처럼 번지던 유년의 입학식. 늘 푸른 측백나무는 둥글게 다진 황토빛 운동장을 감싸 안았다. 하얀 이 드러내고 웃던 소년과 동그란 눈망울의 계집아이도 기억해 낼 테다.   심장이 뛴다. 밝음으로 어둠을 덮고 희망으로 절망을 이기는 날들 위해 바람보다 태양보다 먼저 일어나 웃고 속삭이는 날들을 간구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가슴 손수건 가슴 가죽 부대 희망 소망

2022-01-04

[이 아침에] 격세지감(隔世之感)

 하룻밤 지내고 나면 여태껏 경험하여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산다. 2만여 개의 부품으로 조립된 휘발유 자동차가 200여 개의 부품으로 줄어든 전기차로 바뀌면 정비소는 앞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지인이 보내준 글이 너무 마음에 닿기에 간추려 몇 가지만 소개한다.   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풍습이나 풍속이 크게 바뀌어 딴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60이 노인 대접을 못 받지만 반세기 전 평균수명은 45~48세 정도였다. 그러니 환갑을 맞은 사람은 오복을 갖춘 행운의 노인 어른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최대 수명을 120세로 보고 있다. 신문에 게재되는 부고를 보면 대부분이 90세 이후에 별세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오래 사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인가.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현재 거의 모든 가정이 외동이다. 셋 정도 되면 원시인 소리를 듣는다. 내가 어렸을 때는 셋은 보통이고 다섯, 많게는 일곱인 집도 흔했다.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게 그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저출산의 가장 큰 요인은 아이 기르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애 하나 대학 입학시키고 나면 그 에미는 폭삭 늙는 세상이다.   지금은 레이디 퍼스트 시대이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길을 가다 교차하는 지점에서 남녀가 만나면 여자 쪽이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길을 가다 여자가 남자 앞을 먼저 지나가면 ‘재수 없다’고 했다. 남자아이가 나면 돈을 주고 작명소에서 작명했지만, 여자애는 제대로 된 이름 갖는 것도 어려웠다. 불과 두 세대 전까지 그랬다.   혹자는 박정희의 집권시대를 군부독재라고 부르면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자랑한다. 그 시절을 살았던 나는 심리적으로는 지금이 더 불편하다. 딱하나 불편했던 것은 자정에서 새벽 4시까지의 통행금지였다. 조선 백성이 단군 이래 하루 세끼 쌀밥을 배부르게 먹은 것도 박정희의 통일벼 덕이었다. 그것을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병원 의사 한 분이 거의 모든 과목을 다 봤다. 글자 그대로 만병통치 선생님이었다. 어른 앞에서는 안경을 벗어야 했고(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로) 술잔을 받아도 돌아앉아 마셔야 했다. 담배도 어른 앞에서는 피울 수 없었다. 어른과 아이 사이의 ‘차례’는 아주 엄격했으며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었다.   그때 고위 관료들은 미군에서 불하된 지프를 개조, 검은색을 칠한 뒤 타고 다녔다. 좌석 앞 손잡이 옆에 걸개가 있었고 미군 부대에서 유출된 흰색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걸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아직 화장지가 없었다) 거의 모든 차가 그랬고, 그게 자랑이었다. 여름이면 집 앞에 평상을 내다 놓고 저녁때면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걸터앉아 모기를 쫓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때 파자마가 있는 사람은 그걸 입고 나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파자마는 귀했기 때문에 충분히 구경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상이었던 옛날얘기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서구 기준으로도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잘살고 있다. 그래서 격세지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는 오늘도 내일이면 다음 세대들에겐 격세지감이 될 것이다. 변화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윤봉춘 / 수필가이 아침에 격세지감 두루마리 화장지 미군 부대 노인 대접

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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