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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격세지감(隔世之感)

 하룻밤 지내고 나면 여태껏 경험하여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산다. 2만여 개의 부품으로 조립된 휘발유 자동차가 200여 개의 부품으로 줄어든 전기차로 바뀌면 정비소는 앞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지인이 보내준 글이 너무 마음에 닿기에 간추려 몇 가지만 소개한다.
 
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풍습이나 풍속이 크게 바뀌어 딴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60이 노인 대접을 못 받지만 반세기 전 평균수명은 45~48세 정도였다. 그러니 환갑을 맞은 사람은 오복을 갖춘 행운의 노인 어른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최대 수명을 120세로 보고 있다. 신문에 게재되는 부고를 보면 대부분이 90세 이후에 별세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오래 사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인가.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현재 거의 모든 가정이 외동이다. 셋 정도 되면 원시인 소리를 듣는다. 내가 어렸을 때는 셋은 보통이고 다섯, 많게는 일곱인 집도 흔했다.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게 그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저출산의 가장 큰 요인은 아이 기르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애 하나 대학 입학시키고 나면 그 에미는 폭삭 늙는 세상이다.
 
지금은 레이디 퍼스트 시대이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길을 가다 교차하는 지점에서 남녀가 만나면 여자 쪽이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길을 가다 여자가 남자 앞을 먼저 지나가면 ‘재수 없다’고 했다. 남자아이가 나면 돈을 주고 작명소에서 작명했지만, 여자애는 제대로 된 이름 갖는 것도 어려웠다. 불과 두 세대 전까지 그랬다.
 


혹자는 박정희의 집권시대를 군부독재라고 부르면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자랑한다. 그 시절을 살았던 나는 심리적으로는 지금이 더 불편하다. 딱하나 불편했던 것은 자정에서 새벽 4시까지의 통행금지였다. 조선 백성이 단군 이래 하루 세끼 쌀밥을 배부르게 먹은 것도 박정희의 통일벼 덕이었다. 그것을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병원 의사 한 분이 거의 모든 과목을 다 봤다. 글자 그대로 만병통치 선생님이었다. 어른 앞에서는 안경을 벗어야 했고(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로) 술잔을 받아도 돌아앉아 마셔야 했다. 담배도 어른 앞에서는 피울 수 없었다. 어른과 아이 사이의 ‘차례’는 아주 엄격했으며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었다.
 
그때 고위 관료들은 미군에서 불하된 지프를 개조, 검은색을 칠한 뒤 타고 다녔다. 좌석 앞 손잡이 옆에 걸개가 있었고 미군 부대에서 유출된 흰색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걸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아직 화장지가 없었다) 거의 모든 차가 그랬고, 그게 자랑이었다. 여름이면 집 앞에 평상을 내다 놓고 저녁때면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걸터앉아 모기를 쫓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때 파자마가 있는 사람은 그걸 입고 나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파자마는 귀했기 때문에 충분히 구경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상이었던 옛날얘기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서구 기준으로도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잘살고 있다. 그래서 격세지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는 오늘도 내일이면 다음 세대들에겐 격세지감이 될 것이다. 변화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윤봉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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