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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운명’을 달리하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엄숙하다.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교계에선 승려가 죽었을 때 ‘입적(入寂)’이라 한다. ‘고요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 ‘번뇌나 고뇌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란 표현을 쓴다. 가톨릭에선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란 의미로 ‘선종(善終)’이라 한다. 천도교에선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환원(還元)’이라 부른다.     언론 매체의 부음 기사에서는 ‘사망’ 외에 ‘별세(別世)’ ‘타계(他界)’ ‘서거(逝去)’ 같은 말들이 흔히 보인다. 이 가운데 ‘사망’을 빼면 다 죽음을 높인다. ‘별세’의 사전적 의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다. ‘타계’는 “인간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서거’는 “죽어서 세상을 떠남”이란 말이지만, 대통령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만 쓴다. 언론 매체는 마음대로 이 말들에 서열을 정해 놓았다. 사망, 별세, 타계, 서거 순으로 높아진다.   일상에서는‘숨지다’ ‘돌아가시다’ ‘작고(作故)하다(고인이 되다)’ ‘영면(永眠)하다(영원히 잠든다)’라고 한다. ‘운명(殞命)하다’도 ‘목숨이 끊어지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운명을 달리하다’는 어색하다. ‘달리하다’는 ‘유명(幽明)’과 어울린다. ‘유명’은 저승과 이승을 가리킨다.우리말 바루기 운명 사망 별세 언론 매체 사전적 의미

2024-11-07

영화 거장 김수용 감독 별세…‘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 연출

19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거장 김수용(사진) 감독이 3일(한국시간) 별세했다. 향년 94세.   영화계에 따르면 김 감독은 이날 오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한 김 감독은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갯마을(1965)’을 비롯해 ‘안개(1967)’ ‘산불(1967)’ 등의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며 1960년대 신상옥, 유현목 감독과 함께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데뷔 후주로 코미디물을 내놓다가 ‘굴비(1963)’ ‘혈맥(1963)’ ‘갯마을(1965)’ ‘안개(1967)’ ‘만선(1967)’ ‘토지(1974)’ ‘산불(1977)’ ‘화려한 외출(1977)’ ‘만추(1981)’ 등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를 잇달아 내놓으며 주목 받았다.   1960년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히는 고인의 작품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는 당시 대만 등으로 수출돼 해외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고인은 다작으로 유명하다. 1999년 ‘침향’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109편의 영화를 내놨다.   고인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조명한 리얼리즘으로 주목받았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외에도 ‘갯마을’ ‘만선’ ‘산불’ ‘사격장의 아이들(1967)’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이 대표적이다.   고인의 장례식은 영화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고인의 문하생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지영 감독과 이장호 감독, 배우 안성기, 장미희 등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5일 오후 1시다.김수용 영화 감독 별세 영화 거장 거장 김수용

2023-12-03

오코너 전 연방대법관 별세…첫 여성 연방대법관 기록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연방대법관직을 맡았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사진)가 별세했다. 향년 93세.   1일 연방대법원은 오코너가 애리조나의 자택에서 알츠하이머와 연관된 노인성 치매 등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오코너는 지난 1981년부터 판사 경력을 시작해 시작해 2006년 은퇴했다.   그가 일을 시작한 1981년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로, 여성으로 사법부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코너는 유리천장을 깬 후 중도 성향으로 버티며 민감한 판결마다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30년에 태어나 16세에 스탠퍼드대학교에 입학, 19세에 동대학 로스쿨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했다. 로스쿨 최고 성적에도 로펌 취업이 힘들자 그는 캘리포니아주 검찰 사무실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3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애리조나 주상원을 이끌었고, 다음 해에 주 판사가 됐다.   보수 성향이라고 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여성과 소수인종 보호 등 미국의 핵심 가치를 수호했다. 특히 낙태권을 보장한 판결 ‘로 대 웨이드’ 당시에는 중도 역할을 자임했다. 2003년엔 대학 입시에서 소수 인종을 배려하는 ‘어퍼머티브 액션’을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강민혜 기자연방대법관 오코너 여성 연방대법관 연방대법관 별세 데이 오코너

2023-12-01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사진)가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카터 센터는 성명을 통해 로잘린 여사가 지난 19일 오후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했다고 밝혔다. 성명에 따르면 지난 5월 치매 진단을 받은 로잘린 여사는 지난 18일 호스피스 케어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월부터 자택에서 호스피스 케어에 들어간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로잘린은 내가 성취한 모든 일에서 동등한 파트너로 필요할 때 현명한 조언과 격려를 해줬다. 로잘린이 세상에 있는 한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지지한다는 사실을 항상 알았다”고 말했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결혼 77주년을 맞은 지난해 9월 고향 플레인스에서 열린 연례 땅콩 축제였다.     직설화법으로 유명한 로잘린 여사는 카터 대통령 재임(1977~1981년) 동안 각료 회의에 참석하고 해외 순방을 다니는 등 가장 활동적인 영부인 중 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퇴임 후 부부는 애틀랜타에 비영리 싱크탱크인 카터 센터를 설립했으며 아프리카 등 수십 개국의 의료 및 농업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생전에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인식 제고와 개혁을 위해 힘쓴 로잘린 여사는 1991년 남편과 함께 예방접종 프로그램인 ECBT(Every Child By Two)를 창립하기도 했다.대통령 카터 카터 대통령 대통령 부인 여사 별세

2023-11-19

[부고] '엄혜은(도로테아)씨'외

엄혜은(도로테아)씨    엄혜은(도로테아)씨가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장례 미사는 오는 14일(목) 오전 9시 30분에 The 103 Saints Korean Catholic Center(2701 W 237th St Torrance CA 90505)에서 장지 예절은 같은 날 오후 1시에 Holy Cross Cemetery(5835 West Slauson Ave. Culver City CA 90230)에서 열린다. 유족으로는 2녀(제니.조이)가 있다.     ▶연락처:(310)619-8586   김동일씨 별세   Expo Dyeing의 김 Eduard(동일) 회장이 지난 4일 별세했다. 장례 미사는 오는 14일(목) 오후 1시에 Rose Hills SkyRose Chapel(3888 Workman Mill Rd Whittier CA 90601)에서 열린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사라씨와 2남(성인.성호씨) 1녀(성아씨)가 있다.     ▶연락처:(714)656-6858   이병향 장로 별세   이병항(Ben H. Lee) 장로가 지난달 29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천국환송예배 및 하관예배는 오는 16일(토) 오전 11시에 Rose Hills Memorial Park Memorial Chapel(3888 Workman Rd Whittier CA 90601)에서 이기영 목사와 샘 K 박 목사가 집례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은주씨와 1남(Leonard) 2녀(Lorna Kim.Linda Park)가 있다.     ▶연락처:(213)268-6865   두홍기 집사 별세   두홍기(Billy) 집사가 지난 1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장례식은 오는 16일(토) 오전 11시에 Rose Hills Cemetery Hillside Chapel 게이트 17(3888 Workman Mill Rd Whittier CA 90601)에서 정삼용 담임목사(샌디에고 연합감리교회)가 집례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순자씨와 2남(Joseph.Mike) 1녀(Sandy Song)가 있다.     ▶연락처: (213)215-6393부고 도로테아 엄혜은 hillside chapel 집사 별세 별세 expo

2023-09-11

삭발 여가수 시네이드 오코너 별세…회고록서 “나는 저항하는 가수”

아일랜드 여성 싱어송라이터 시네이드 오코너(사진)가 56세로 별세했다고 26일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아일랜드 공영방송 RTE와 영국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오코너의 가족은 성명에서 “사랑하는 시네이드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라고 밝혔다.   오코너는 1990년에 팝스타 프린스의 곡 ‘낫씽컴페어즈 투 유’(Nothing Compares 2 U)를 불러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고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1987년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스튜디오 앨범을 총 10장 발매했다.   머리를 삭발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는 1990년대 초 음악계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바꿨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그는 종교, 성, 페미니즘, 전쟁 등에 관한 견해를 뚜렷이 밝히고 순응하지 않는 태도로 음악 외적으로도 눈길을 끄는 인물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연 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는 행위도 했다.   그는 2021년 발표한 회고록에서 “나는 저항하는 가수”라며 “유명해지고 싶은 열망은 없다”고 말했다.   더블린 출신의 오코너는 2018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을 바꿨지만, 활동명은 그대로 유지했다.   지난해 17세 아들이 사망한 뒤 세 자녀가 남았다.시네이드 오코너 시네이드 오코너 오코너 별세 아일랜드 공영방송

2023-07-26

전설적 가수 토니 베넷, 96세로 별세

장르와 세대를 넘나들며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사랑을 받은 전설적 가수 토니 베넷(사진)이 고향인 뉴욕시에서 별세했다. 향년 96세.   홍보담당인 실비아 웨이너가 21일 베넷의 별세 사실을 확인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정확한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고인은 지난 2016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고 5년 뒤인 2021년 공개한 바 있다.   ‘아이 레프트 마이하트 인 샌프란시스코’로 잘 알려진 그는 20세기 중반부터 70년 넘게 활동하며 팝과 재즈 보컬로 명성을 떨쳤다.     평생공로상을 합쳐 수상한 그래미만 20개에 이른다.1932년 8월 3일 뉴욕시 퀸스의 아스토리아에서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앤서니 도미닉 베네데토다.   엘리베이터 운전원, 세탁소 직원, AP통신 원고 심부름꾼, 노래 부르는 웨이터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1944년 육군에 징집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후에도 가수의 꿈을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던 베넷은 가수 펄 베일리의 요청으로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한 클럽에서 그와 같이 공연하면서 일생의 기회를 잡았다. 우연히 무대를 본 코미디언 밥 호프의 눈에 들면서 호프의 무대에서 오프닝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1962년 곡 ‘아이 레프트 마이하트 인 샌프란시스코’는 빌보드 차트 19위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나중에 큰 인기를 끌며 그와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베넷은 1995년 MTV 언플러그드 앨범으로 ‘올해의 앨범상’ 등 2개의 그래미를 받는 등 평생공로상을 제외한 19개 그래미상 중 17개를 60대 이후에 수상했다.   특히 레이디 가가와 2014년 앨범을 내고 이듬해 콘서트 투어를 함께하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생전에 낸 음반만 70장이 넘는다.   지난 2021년 초 ‘2016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고 고백한 후에도 음반 녹음을 멈추지 않았으나, 결국 같은 해 8월 뉴욕 라디오시티 공연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전설 가수 전설적 가수 베넷 96세 별세 사실

2023-07-21

[부고] 아시아 전문 언론인 플레이트 별세

아시아와 미중관계 전문가로 알려진 톰 플레이트(사진) 전 LA타임스 편집장이 지난달 23일 별세했다. 항년 79세.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앰허스트대에서 학내 신문 제작에 참여하며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뉴스위크, 워싱턴 포스트 인턴을 거쳐 1967년 국무부 연설문 작성자로도 일했다. 뉴욕 매거진, LA 헤럴드 이그제미너, 타임 등을 거친 그는 1989년부터 LA타임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존 메이어, 토니 블레어 등 리더들을 인터뷰했으며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동시에 미국 언론인 중 가장 오래 아시아 문제에 대한 칼럼을 게재한 인물로도 기록됐다.   특히 그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 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지속적인 대화 통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언론을 떠난 후에 그는 로욜라메리마운트대 등 남가주 주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는 연세대 학생들을 화상으로 지도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안드레아, 딸 애리 키스가 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부고 김대중 플레이트 플레이트 별세 아시아 전문 아시아 문제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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