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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갑진(甲辰) 인사

‘문밖에는 함박눈 길이 막히고   한 시절 안타까운 사랑도 재가 되었다.   뉘라서 이런 날 잠들 수가 있으랴   홀로 등불 가에서 먹을 가노니   내 그리워 한 모든 이름들   진한 눈물 끝에 매화로 피어나라.’   -이외수, 〈매화 삼경(三更)〉       가난한 선비의 집일망정 방안에는 거문고가 있고, 창밖에는 매화 몇 그루가 심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100평 밭이 넓지는 않으나 그 반은 꽃을 심으려는(三頃 無多反種花) 선비의 마음입니다.   겨울의 한가운데 날인 동짓날 선비는 먹을 갈아 81송이 매화를 그려 창가에 걸어 놓습니다. 이를 이름하여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 합니다. 그리고는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 칠을 해 나갑니다. 이렇게 81일이 되는 날은 대략 양력 3월 10일경, 절기로는 개구리가 기지개를 켠다는 경칩 무렵이 됩니다. 외로운 선비의 방에 81송이의 매화가 붉은 칠을 마친 날, 선비는 창문을 열어젖힙니다. 뒤뜰에 심어놓은 홍매가 바람결에 향기를 전합니다. 선비의 가슴 가득 봄이 만개합니다.       ‘오동나무는 천 년이 지나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조선 중기 시인 상촌 신흠의 시입니다.   ‘桐千年老恒裝曲 梅一生寒不賣香, ’ 이 대련은 그냥 글씨로도 좋지만. 매화 한그루가 피어 있는 양지바른 방, 오동나무 거문고를 타는 선비가 있는 그림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일 겁니다. 매화는 세한삼우, 송죽매(松竹梅)의 표상이며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의 절개,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지조를 지닌 꽃이기에 이 땅의 선비인 양 많은 사람이 사랑한 꽃입니다.   옛날 선비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 몇 그루를 심었습니다. 오동나무는, 심고 다음 해가 되면 아이들 키만큼 자랍니다. 그러면 밑동을 잘라줍니다. 다음 해 다시 아이들 키만큼 자란 나무를 또 베어냅니다. 이렇게 몇 년을 뿌리가 땅속 깊이 퍼져 나갈 때까지 베어내야 자라서 속이 꽉 찬 나무가 됩니다. 나무는 제 키만큼 뿌리를 내릴 줄 압니다.   10년이 훌쩍 지나 딸이 시집갈 때 그 오동나무를 베어 옷장을 만들어 혼수로 보냅니다. 남은 나무로 거문고를 만듭니다. 천 년이 지나도 제 곡을 지닌 명기가 됩니다.   여수 향일암이나 남해 보리암 양지 녘으로는 지금쯤 뜨겁게 동백이 피어 있을 겁니다. 바닷가로 우리나라에는 유별나게 관음 사찰이 많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한 번만 외치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우리의 영혼을 제도해 주시는 고마운 부처님도 그곳에 계실 텐데. 거기 가면 그냥 바다 냄새도 뭉클, 파도 소리로 반기면서 벌써 겨울은 다 물러갔노라 춘신을 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 여기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의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 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중략)    그대 여기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다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 김종해,〈이 봄의 축제〉       매화의 향기와 오동의 지조가 빛나는 새해, 돼지꿈 위에 있다는 용꿈 꾸소서.         약력: 서울문학 수필등단. 한국문협 미주지회 회원. 성균관대학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과 석사. 중국 옌타 이대학 교수역임.     저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외 다수 김붕래 / 수필가문예 마당 갑진 인사 오동나무 거문고 매화 삼경 옛날 선비들

2024-03-14

[시조가 있는 아침] 개세가(慨世歌)

  ━   개세가(慨世歌)     이색(1328∼1396)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예전에 대중목욕탕 건물이었다고 한다.   - 청구영언     ━   오늘도 우리는 갈 곳을 모른다     흰 눈이 내리기를 그친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한다.   백설과 구름, 매화를 찾아 붉게 물든 노을 앞에 서 있는 선비. 한 폭의 그림 같은 대춘(待春)의 시다. 그러나 이색이 활동하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 시조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구름’은 역성(易姓)혁명을 하려는 신흥 세력을, ‘매화’는 고려를 지키려는 우국지사로 치환하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한 지식인의 고민으로 읽을 수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말 3은의 하나로 불린다. 익제 이제현에게 정주학을 배워 불교 사회이던 고려에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제시하였다. 정몽주·정도전·권근·이숭인·하륜 등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그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뉘어졌다. 정몽주 피살 후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를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고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권유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며 고사하였다.     여주로 가던 배 안에서 급사해 사인(死因)에 의혹을 남겼다.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가 그의 증손이며 토정 이지함이 6대손, 선조 때의 재상 이산해는 7대손이다. 유자효·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개세 정몽주 피살 전령사 매화 6대손 선조

2023-06-22

[이 아침에] 봄을 맞으며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梅梢月上正團團)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自有淸香滿院間)   퇴계 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6수 중〈首一,〉   봄이다. 다시 또 봄이 왔다. 분명 봄은 어느 사이엔가 왔지만 여느 때처럼 간 것 같지 않게 가버릴 것이다. “아무리 환경을 오염시켜도 도시에 돌아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는 ‘부활’의 첫 문장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꼭 오고야 마는 봄은 꽃을 피워냄으로 봄을 알린다. 그중에서도 매화는 동백과 함께 가장 먼저 오는 봄의 전령사다.     만물이 아직 겨울잠에서 깨기도 전에 눈 속에서 홀연히 피는 꽃이 설중매다. 청초하고 그윽한 향기를 품은 매화는 아무 나비나 와서 멋대로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고상하고 우아한 꽃이다. 그런 매화의 곧은 절개에 반한 중국 송나라 시인 임포는 매화를 아내처럼 사랑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임포는 추운 눈 속에서도 꽃망울을 올려내는 매화의 고결한 정신을 사랑한 것이다.     매화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력했던 이황 선생의 매화 사랑은 남달라서 임종 직전 제자에게 “매화에 물을 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유언을 지켜 물을 준 수제자는 바로 옆에서 간병을 돕던 간재 이덕홍이다.     퇴계는 죽을 때까지 92제 107수의 매화시를 썼는데 그중에서 62제 71수를 모아 ‘매회시첩’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보면 그의 매화 사랑은 참으로 유별나다. 매화 핀 가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기를 즐겼다는 그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그토록 매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걸까? 분명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청아한 매화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함도 있었겠으나 그 배경엔 기생 두향이가 있었다는 것도 소문만은 아니다. 정비석의 ‘명기열전’에는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이 분명히 적혀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이 48세의 나이에 단양군수로 갔을 때 두향은 19세의 관기였다. 그때의 관기는 사또를 보살피는 현지처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연산군 폭정시절에 태어난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란 데다 훗날 수많은 당파싸움을 겪으며 두 번째 부인까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다. 이처럼 불운한 생활 속에서 대학자가 된 퇴계는 마땅히 정을 줄 곳이 없었던 터라 충분히 두향에게 정을 주고도 남을 만한 처지에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절세가인이었던 두향은 퇴계를 사모하여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가 매화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잔칫날 선생에게 손수 기른 매분을 바치고 나서야 뻣뻣한 어른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퇴계는 새 임지인 도산에 까지 매화를 옮겨서 지금껏 그 명맥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어른을 떠나보내고 단양에 홀로 머물던 두향은 퇴계의 부음을 듣고 호수에 몸을 던져 자진했으며 현재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 산자락에 무덤이 있어 아직도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편 ‘퇴계 언행록’이나 ‘퇴계문집’에 의하면 퇴계는 기생과의 접촉을 끝까지 거부한 선비였다고도 전해진다. 그가 왕명으로 평안도에 갔을 때 평안감사가 기생을 안겨주었으나 끝내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옮은지는 알 수 없으나 퇴계가 “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과 매화를 여인 대하듯 다루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까치와 참새가 봄을 맞아 즐겁게 둥지를 만들기 시작하고 풀도, 나무도, 새도, 벌레도, 아이들도 모두 즐거워 보인다”는 ‘부활’의 문장처럼 온갖 초목에 물이 흐르고 싹이 트고 있다. 퇴계 선생이 매화의 향기를 아끼듯 봄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국희 / 시인이 아침에 매화 사랑 매화나무 가지 퇴계 선생

2023-03-10

[시조가 있는 아침] 매화 옛 등걸에

  ━   매화 옛 등걸에     매화(생몰연대 미상)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   자존감 높았던 조선 기생들     매화는 명기(名妓) 구인(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란 사람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重義法)이다. 또한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라는 이중의 뜻을 실은 중의법이기도 하다.   춘절(봄철)과 연적(戀敵) 춘설의 이름을 초장과 종장에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이 시조는 또한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한동안 안 오던 정든 이들이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듯 세상이 어지러우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뜻으로도 풀이된다.   조선의 기생들은 신분 규제에서 벗어나 시인을 비롯해 뛰어난 예인(藝人)이 많았다. 명기의 자존심 또한 높았다.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역시 자신의 이름에 빗대 쓴 시조 한 수를 읽는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의 낙락장송이니 나무꾼의 낫 같은 것으로는 걸어볼 생각도 말라는 기개가 고고하기만 하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千尋)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매화 조선 기생들 자기 이름 신분 규제

2022-12-22

매화 옛 등걸에 - 매화(생몰연대 미상)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자존감 높았던 조선 기생들   매화는 명기(名妓) 구인(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란 사람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이다. 또한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라는 이중의 뜻을 실은 중의법이기도 하다.   춘절(봄철)과 연적(戀敵) 춘설의 이름을 초장과 종장에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이 시조는 또한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한동안 안 오던 정든 이들이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듯 세상이 어지러우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뜻으로도 풀이된다.   조선의 기생들은 신분 규제에서 벗어나 시인을 비롯해 뛰어난 예인이 많았다. 명기의 자존심 또한 높았다.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역시 자신의 이름에 빗대 쓴 시조 한 수를 읽는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의 낙락장송이니 나무꾼의 낫 같은 것으로는 걸어볼 생각도 말라는 기개가 고고하기만 하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千尋)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 유자효 / 시인매화 미상 조선 기생들 자기 이름 신분 규제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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