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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봄을 맞으며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梅梢月上正團團)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自有淸香滿院間)
 
퇴계 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6수 중〈首一,〉
 
봄이다. 다시 또 봄이 왔다. 분명 봄은 어느 사이엔가 왔지만 여느 때처럼 간 것 같지 않게 가버릴 것이다. “아무리 환경을 오염시켜도 도시에 돌아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는 ‘부활’의 첫 문장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꼭 오고야 마는 봄은 꽃을 피워냄으로 봄을 알린다. 그중에서도 매화는 동백과 함께 가장 먼저 오는 봄의 전령사다.  
 
만물이 아직 겨울잠에서 깨기도 전에 눈 속에서 홀연히 피는 꽃이 설중매다. 청초하고 그윽한 향기를 품은 매화는 아무 나비나 와서 멋대로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고상하고 우아한 꽃이다. 그런 매화의 곧은 절개에 반한 중국 송나라 시인 임포는 매화를 아내처럼 사랑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임포는 추운 눈 속에서도 꽃망울을 올려내는 매화의 고결한 정신을 사랑한 것이다.  
 
매화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력했던 이황 선생의 매화 사랑은 남달라서 임종 직전 제자에게 “매화에 물을 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유언을 지켜 물을 준 수제자는 바로 옆에서 간병을 돕던 간재 이덕홍이다.  
 
퇴계는 죽을 때까지 92제 107수의 매화시를 썼는데 그중에서 62제 71수를 모아 ‘매회시첩’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보면 그의 매화 사랑은 참으로 유별나다. 매화 핀 가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기를 즐겼다는 그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그토록 매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걸까? 분명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청아한 매화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함도 있었겠으나 그 배경엔 기생 두향이가 있었다는 것도 소문만은 아니다. 정비석의 ‘명기열전’에는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이 분명히 적혀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이 48세의 나이에 단양군수로 갔을 때 두향은 19세의 관기였다. 그때의 관기는 사또를 보살피는 현지처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연산군 폭정시절에 태어난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란 데다 훗날 수많은 당파싸움을 겪으며 두 번째 부인까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다. 이처럼 불운한 생활 속에서 대학자가 된 퇴계는 마땅히 정을 줄 곳이 없었던 터라 충분히 두향에게 정을 주고도 남을 만한 처지에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절세가인이었던 두향은 퇴계를 사모하여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가 매화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잔칫날 선생에게 손수 기른 매분을 바치고 나서야 뻣뻣한 어른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퇴계는 새 임지인 도산에 까지 매화를 옮겨서 지금껏 그 명맥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어른을 떠나보내고 단양에 홀로 머물던 두향은 퇴계의 부음을 듣고 호수에 몸을 던져 자진했으며 현재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 산자락에 무덤이 있어 아직도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편 ‘퇴계 언행록’이나 ‘퇴계문집’에 의하면 퇴계는 기생과의 접촉을 끝까지 거부한 선비였다고도 전해진다. 그가 왕명으로 평안도에 갔을 때 평안감사가 기생을 안겨주었으나 끝내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옮은지는 알 수 없으나 퇴계가 “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과 매화를 여인 대하듯 다루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까치와 참새가 봄을 맞아 즐겁게 둥지를 만들기 시작하고 풀도, 나무도, 새도, 벌레도, 아이들도 모두 즐거워 보인다”는 ‘부활’의 문장처럼 온갖 초목에 물이 흐르고 싹이 트고 있다. 퇴계 선생이 매화의 향기를 아끼듯 봄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국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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