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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The secret dare to dream’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There are only two way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어지는 단어는 a miracle임에 틀림없음에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기적 같은 삶을 꿈꾸어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럼에도 매일 다가오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가 일수인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주는 영화였다. 〈〈〈기적은 거짓 없는 따뜻한 마음과 이웃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일상을 사랑의 마음으로 돕고 자신을 희생할 때 어려움에 빠진 한 가족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훈훈한 스토리였다.〉〉〉   대부분 처음 몇 장면을 보면 뒤에 전개될 내용들이 어렴풋이 읽혀지기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영화보기를 포기하기 다반수였다. 시사나 다큐, 탐사 프로그램을 즐기는 편이어서 영화 한편 골라 진득하니 스토리에 몰입하기가 드물었다. 시화집 ‘물소리 같았던 하루’ 북콘서트 마치고, 세번째 시문 행사를 어제 마치고, 시카고 디카시연구회 총회를 오늘 마친 후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 한편을 마주한다.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생선가게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Marenda와 대학교수 Bray의 만남은 기적 같은 일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서로의 마음 속에는 행복이라는 꽃 한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Marenda는 순수했던 Bray의 도움과 친절을 오해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길로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Marenda는 Bray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Bray도 Marenda를 추억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를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을 꿈꾸게 되었다. 서로의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늘 마음에 담아두었던 만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서로의 집으로 찿아가는 길 위에서 둘은 만나게 된다. 처음으로 Marenda는 Bray에게 손을 내어주고 서로를 포옹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화를 내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블레임하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모든 문제가 클리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 기적 같은 사랑은 내 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Bray의 대사 한 토막이 마음에 울림으로 남는다.   바람은 아직 차지만 매서운 겨울 문턱을 넘어가기 전 어쩌면 포근히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언덕길 바로 옆으로 누렇게 물든 갈대와 고개 숙인 억새가 줄지어 나를 반기는 듯 미풍에 살랑거린다. 작은 stream을 따라 오리 가족이 유유히 흐른다. 사실 우리는 순간 순간 기적 같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길지는 몰라도 우리 눈에 비쳐 오는 풍경과 사람들은 참으로 경이롭다. 파도같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들풀의 춤사위도, 발 밑에 펼쳐 있는 낙엽들의 색과 모양도, 하늘로 뻗은 나무 가지들의 말없는 기도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오늘의 기적이고 축복이다.   어둠이 내린 highway를 달리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 하나는 매일 매일 기적 없는 밋밋한 길을 살아가는 것과 순간마다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우린 오늘 하루도 가슴 뛰는 기적 같은 축복의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의 밭을 기경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겨둘 것만 남겨두어야 한다. 오늘 눈에 비쳐오는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긍휼함으로, 진실함으로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기적 같은 그 길을 내 발로 걸어야 한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대학교수 bray 영화 한편 다람쥐 쳇바퀴

2023-12-0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The secret dare to dream’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There are only two way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어지는 단어는 a miracle임에 틀림없음에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기적 같은 삶을 꿈꾸어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럼에도 매일 다가오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가 일수인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주는 영화였다. 기적은 거짓 없는 따뜻한 마음과 이웃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일상을 사랑의 마음으로 돕고 자신을 희생할 때 어려움에 빠진 한 가족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훈훈한 스토리였다.   대부분 처음 몇 장면을 보면 뒤에 전개될 내용들이 어렴풋이 읽혀지기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영화보기를 포기하기 다반수였다. 시사나 다큐, 탐사 프로그램을 즐기는 편이어서 영화 한편 골라 진득하니 스토리에 몰입하기가 드물었다. 시화집 ‘물소리 같았던 하루’ 북콘서트 마치고, 세번째 시문 행사를 어제 마치고, 시카고 디카시연구회 총회를 오늘 마친 후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 한편을 마주한다.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생선가게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Marenda와 대학교수 Bray의 만남은 기적 같은 일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서로의 마음 속에는 행복이라는 꽃 한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Marenda는 순수했던 Bray의 도움과 친절을 오해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길로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Marenda는 Bray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Bray도 Marenda를 추억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를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을 꿈꾸게 되었다. 서로의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늘 마음에 담아두었던 만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서로의 집으로 찿아가는 길 위에서 둘은 만나게 된다. 처음으로 Marenda는 Bray에게 손을 내어주고 서로를 포옹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화를 내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블레임하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모든 문제가 클리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 기적 같은 사랑은 내 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Bray의 대사 한 토막이 마음에 울림으로 남는다.   바람은 아직 차지만 매서운 겨울 문턱을 넘어가기 전 어쩌면 포근히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언덕길 바로 옆으로 누렇게 물든 갈대와 고개 숙인 억새가 줄지어 나를 반기는 듯 미풍에 살랑거린다. 작은 stream을 따라 오리 가족이 유유히 흐른다. 사실 우리는 순간 순간 기적 같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길지는 몰라도 우리 눈에 비쳐 오는 풍경과 사람들은 참으로 경이롭다. 파도같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들풀의 춤사위도, 발 밑에 펼쳐 있는 낙엽들의 색과 모양도, 하늘로 뻗은 나무 가지들의 말없는 기도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오늘의 기적이고 축복이다.   어둠이 내린 highway를 달리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 하나는 매일 매일 기적 없는 밋밋한 길을 살아가는 것과 순간마다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우린 오늘 하루도 가슴 뛰는 기적 같은 축복의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의 밭을 기경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겨둘 것만 남겨두어야 한다. 오늘 눈에 비쳐오는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긍휼함으로, 진실함으로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기적 같은 그 길을 내 발로 걸어야 한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대학교수 bray 영화 한편 다람쥐 쳇바퀴

2023-12-04

유대인 살해 용의자는 현직 대학교수…이-팔 시위 현장서 사건 발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지난 5일 60대 유대인 남성이 숨진 것과 관련, 16일 용의자가 체포됐다.   이날 벤투라카운티셰리프국은 팔레스타인 지지자로 무어파크 칼리지 컴퓨터 공학과 교수인 로아이 압델파타 알나지(50.사진)를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알나지에게는 100만 달러의 보석금이 책정됐고, 오는 20일 벤투라카운티수피리어법원에 출두할 예정이다.   당시 시위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에 따르면 유대인 지지자로 시위를 진행하던 폴 케슬러(69)가 친팔레스타인 지지가 휘두른 메가폰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후 케슬러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다음 날 숨졌다.   LA유대인연맹(JFLA)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번 체포는 폭력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우리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이 사건을 계속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무어파크 칼리지 측은 이날 해당 교수의 약력을 비공개로 전환하는가 하면, 성명을 통해 “알나지 교수는 행정 휴직 처분을 받았고, 우리는 법집행기관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장열 기자대학교수 유대인 현직 대학교수 유대인 살해 시위 현장서

2023-11-16

[신 영웅전] 애덤 스미스의 행복론

평생 누린 명성에 비춰보면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관리였던 아버지가 유복자인 그를 남기고 세상을 뜨자 어머니와 큰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그는 개구리 눈과 주먹코에 입술이 처진 얼굴로 청혼도 못 해 보고 독신으로 살았다. 말더듬이에 어리바리해 집시들에게 납치됐다가 돈도 안 주고 그냥 풀려났다. 몽유병이 심해 잠옷 차림으로 30㎞를 헤매다 성당 종소리에 잠이 깨어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있는 글래스고대학에 입학해 도덕철학을 공부했다. 거기서 평생 사표(師表)가 된 프랜시스 허치슨 교수를 만났다. 옥스퍼드 대학에 전학했으나 학풍이 싫어 고향으로 돌아와 스승의 자리를 물려받아 교수가 됐고, 나중에 총장이 됐는데 취임사가 명문이다. 그 무렵 이웃에 제임스 와트라는 청년이 증기기관차를 만드는 것을 보고 대량 생산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했다.   인생은 인연이다. 이웃에 찰스 타운젠드라는 전직 재무부 장관이 살았는데 스미스의 능력을 인정해 대학교수 봉급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가정교사로 데려갔다. 그 덕분에 스미스는 아들과 함께 대륙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때 프랑스 부르봉 왕조 4대 왕인 루이 15세를 알현하고, 볼테르·튀르고·케네 등 대학자들과 교유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1759)과 『국부론』(1776)을 썼는데, 자기가 아꼈던 『도덕감정론』은 인기가 없고, 『국부론』에서 별 뜻 없이 말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떠들썩한 데 놀랐다.   그는 『도덕감정론』(1부 3편 1장)에서 “인간이 건강한 육신을 갖고, 빚 없이 살며, 양심에 걸리는 일이 없으면 뭘 더 바라겠나”라고 말했다. 이렇게 산다면 행복이란 얼마나 쉽고 소박한가. 물론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죽음이 임박하자 친구들을 불러 식사하고 작별했다. 원고를 모두 태우라고 유언했지만,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행복론 애덤 대학교수 봉급 애덤 스미스 프랜시스 허치슨

2023-08-06

대학교수, 보통 강사~정교수 5단계…50%는 월 급여 3500달러보다 적어

대학교수는 2023년을 기준으로 얼마나 벌까?     테뉴어(tenure)를 보유한 정교수(full professor)와 부교수(associate professor),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는 각각 얼마를 벌까? 강사(lecturer)나 겸임교수(adjunct professor) 교수는 어떨까? 이처럼 교수의 세계에는 직급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가장 먼저 겸임 교수는 파트타임으로 1개 또는 몇 개의 다른 대학에서 일한다.     보통 이들은 대학별로 1~2개의 수업을 맡아 가르친다. 많은 겸임 교수들은 1개의 대학에서만 일할 경우 받는 월급만으로는 생계를 충당하기 어렵다. 겸임 교수는 가르치는 것 외에도 학생들이 찾아오는 오피스 아워(office hour)를 운영하고, 성적을 주는 임무까지 맡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강사이다. 이들은 한 대학에서 풀타임으로 강의를 맡아 가르친다.     그러나 종신직인 테뉴어 계약을 하지 않고 보통 매년 갱신하는 단기 계약을 맺는다.     강사는 수업의 개요를 디자인하고 강의와 세미나, 워크숍 등을 진행한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보통 추가적인 임무를 맡지는 않는다.     세 번째는 조교수로, 테뉴어 트랙의 첫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때론 종신 교수가 될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고, 부교수가 된다면 종신 교수가 될 수도 있다. 조교수는 대학의 필요에 따라 파트타임 또는 풀타임으로 일한다. 이들은 종종 개론 수업이나 기존에 디자인된 커리큘럼을 가르친다. 또한 오피스 아워와 성적을 주는 임무를 맡는다.     네 번째는 조교수와 정교수의 중간 단계에 있는 부교수다. 부교수는 보통 테뉴어를 가지며, 업무는 조교수와 많이 겹친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피스 아워를 지키며, 성적을 준다. 그러나 부교수는 어떤 수업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등 수업에 대해 조교수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다. 또한 종신직 정교수처럼 7년마다 안식년을 가는 옵션도 가진다.     다섯 번째, 정교수는 가장 상위의 단계다.     부교수와 마찬가지로 정교수는 테뉴어를 가지며 안식년 옵션도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지속하는 한편 이들은 연구를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정교수는 보통 더 유동적인 스케줄을 가지고, 어떻게 또는 언제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더 큰 권한을 갖게 된다.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수업을 창조해서 가르칠 수도 있다.     미국대학협회(AAUP)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2~2023학년도 현재 미국 내 대학들의 풀타임 정교수 평균연봉은 14만9629달러, 부교수 평균연봉은 10만1941달러, 조교수 평균연봉은 8만8597달러, 강사 평균연봉은 7만2995달러이다. 사립대 교수들의 평균연봉이 공립대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미국 교사연맹’(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의 보고서에 따르면 겸임 교수 중 겨우 20%만 자신이 대학에서 강의를 통해 버는 수입으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25%는 연간 2만 5000달러보다 적은 봉급을 받는다고 답변했는데, 이는 4인 가족 기준으로 연방 빈곤선보다도 낮은 금액이다. 같은 조사에서 겸임 교수의 33%는 연간 5만 달러 미만의 봉급을 받는다고 밝혔다. 38%는 정부의 보조금을 수령한다고 답변했다.     많은 겸임 교수들은 복수의 대학에서 스케줄을 맞춰 일한다.     조사에 응한 겸임 교수의 약 50%는 자신이 가르치는 전체 수업에 대해 3500달러보다 적은 급여를 받는다고 답했다. 이 말은 얼마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든지에 상관없이 고정된 적은 봉급을 받는다는 뜻이다.     매년 대학에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은 인상되고 대학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그러나 대학교수에 대한 대우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2020~2021년, 그리고 2022~2023학년도에 대학교수 연봉은 겨우 4%가량 인상됐다.     그러나 ‘도시 소비자를 위한 소비자 가격지수’(CPI-U)에 따르면 이 기간 물가는 평균 6.5% 상승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대학교수 연봉은 오히려 2.4%가 하락한 셈이다.   ▶문의:(855)466-2783   www.theadmissionmasters.com 빈센트 김 카운슬러 / 어드미션 매스터즈대학교수 정교수 대학교수 연봉 겸임 교수들 종신직 정교수

2023-06-18

[김형석의 100년 산책]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왜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나

나는 직장이나 공동체 내 인간관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초등학교 교사로 1년간 일했으나 그 학교는 교사가 셋뿐인 가정적 분위기였다. 중학교 선생님들과 초등학교 교사인 나 사이엔 직책과 인격의 차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보다 한 차원 낮은 선생 같은 아쉬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런 느낌이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뒷받침했을지 모른다.   대학을 끝내고 해방이 되면서 고향에 있는 중등학교를 운영했다. 고향 주변의 청소년들에게 중등교육까지는 책임지자는 뜻에서였다. 함께한 교사들은 중학교와 대학 동기들이었다. 역시 가족 분위기였고, 학생들은 순박한 시골의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가르치는 것은 빙판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생존 자체가 위험한 처지가 되었다.   이승만과 김성수, 무엇이 달랐나   2년 후에 탈북하고 서울 중앙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직장다운 일터에 들어선 셈이다. 자연히 공동체 안의 내 위상과 대인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정치계 현실이 끼친 영향도 있었다. 그즈음 터득한 몇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첫째, 상사에게 아첨하는 일은 하지 말자. 내가 상사나 지도자가 되면 절대로 아첨을 일삼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첨 분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했다. 인촌 김성수는 함께한 사람들과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눴기에 모범적인 인간관계를 남겼다.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동료와 선의의 경쟁은 좋으나 상대를 비방하거나 나보다 안 되기를 바라는 반(反)인격적인 행위는 하지 말자. 내 인품과 인격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선한 사회생활에서 밀려날 뿐이다.   셋째, 같은 직장이나 공동체서 편 가르기를 하는 어리석은 과오를 범하지 말자. 윗사람이나 동료를 대할 때 서로 존중하며 공생의 미덕을 높여야 한다. 정치계의 편 가르기가 국사를 망치는 사례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연세대에 오면서 두 가지 기대를 품었다. 중고등교사보다 인격과 학문의 수준이 높은 선배들과 함께하기에 인격함양과 학문발전의 희망을 안고 출발했다. 내 대학동료들은 먼저 교수가 되었고 나는 10년 정도 학문을 소홀히 했으므로 나 자신의 부족을 인정했다. 그러나 5~6년 후에는 그 거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교수의 수준과 학문적 열정이 기대보다 높지 못했던 것 같았다.   도산·인촌 등 사회 지도자와 교류     내가 중앙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 신인 교사에게 당부했다. “우리 학교에 있는 동안에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의 길을 걷든지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간직해 주세요. 둘 다 놓치고 60세가 되면 후회하게 되고 인생의 공허감과 낙후감을 갖게 됩니다”라고 했다.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도 모범이 될 만큼 인격과 품위를 갖춘 선배나 동료는 많지 않았다. 내가 대학 다닐 때의 교수들과 차이가 있어 보였다. 학문적 열정과 인격적 소양에서는 나도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해 늦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 오기 전부터 도산·인촌을 비롯해 여러 종교계 지도자나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교류는 다른 교수들보다 앞서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운동권 학생들의 활동이 표면화하면서 같은 계통의 일부 교수들이 편 가르기에 앞장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은 물론 대학교육의 전통과도 어긋나는 태도였다. 기독교교육이 폐쇄적이 되면 인문학의 우수성과 창조적 가치창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대학을 떠날 때쯤 되어서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내가 존경하는 김태길·안병욱을 비롯한 친구들이 대학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학문적 열성과 높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배와 제자들이 그런 소중한 친구들을 사표로 삼으면서 대학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들의 애국심과 지성사회를 위한 성의 있는 노력이 새 역사를 이끌어 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큰 소가 떠나면 작은 소가 지켜     큰 소가 떠나면 작은 소가 자라 그 뒤를 계승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요사이 나는 후배 교수들에게 “총장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되라”고 권고한다. 그런 교수는 대학의 운영을 책임 진 총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협조하게 된다. 세계를 이끌어 가는 대학이 모두 그렇다.   내가 교육계로 진출한 때는 교육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있을 때는 훌륭한 대학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떠난 뒤부터는 넓은 사회와 유구한 역사의 고장에 다시 동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그만큼 성장했거나 지도력을 갖추었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나무는 홀로일 때는 영향이 크지 않다가 같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게 되면 그 공동체는 역사의 주체가 된다. 그 숲이 한 산을 차지하면 위대한 유산을 남길 수 있다. 지성인의 사명이 그런 것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초등학교 대학교수 고향 초등학교 신인 교사 중학교 선생님들

2023-03-31

[이 작품과 만났다] 남과 북을 사랑한 지창보 선생 회고록 ‘고독과 자유’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시대의 역사적 주변 사건과 연관되어 계속되는 역사의 거울이다.”     “한 인간은 모든 인간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자연, 우주는 서로 엉키어 있다. 나는 그러한 각도에서 나의 존재와 삶을 인식하고 싶다.”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기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 가감 없이 보여주는 회고록, ‘고독과 자유’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뉴욕의 박중련 회계사가 100세 어른, 지창보 교수의 삶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드리고자 엮어 지난해 9월, 세상에 나온 책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3년, 평양 근처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에 징집되었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국대안 반대, 보도연맹 등에 참여한 것 때문에 좌익으로 몰려, 우익 서북청년단과의 위험한 운명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상과 정치이념의 대립으로 폭력, 살인, 공갈, 협박이 난무하던 조국을 할 수 없이 등진 채, 1953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와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혈혈단신 미국에 와서, 두 미국인 교수의 아낌없는 배려와 사랑 덕분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몇 학교를 거친 끝에 롱아일랜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시대정신도 함께 하는 일생을 보냈다. 반전운동과 인권해방운동이 고조됐던 1960년대 중반, 그 중심지였던 뉴욕 동부에서, 월남전 반대 운동, 1973년 재미민주한인협회창설 멤버로 활동,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고문 역임 등, 누구보다 앞장서서 통일 운동견인차 구실을 했다. 1971년, 북미 교포 최초로 알제리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으나, 원했던 부모·형제는 못 만나고, 그로 인해 군사정부의 혹독한 감시를 받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 무려 40년 만에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남녘땅 조국을 밟게 되었다.   이 모든 일상이 드라마틱했을 뿐 아니라, 이응로, 김보현, 김환기, 김창렬, 윤이상, 황석영 등 동시대의 문화인사들과 만나며 접했던 그림, 책, 영화 등 문화적 도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면모를 잘 알게 해주는 일화는 단연 이것이었다.   일제 말, 탄압과 압력에 항거치 못하고, 학병지원 독려로 친일행위를 하던 육당 최남선에게 “총독부에 매수당해 왔으면 솔직하게 나가 죽으라고 하지, 왜 빙빙 돌려서 말을 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겠소!”라고 대중들 앞에서 돌직구를 날린 일화였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 하는 그 성품이 한 사람을 시대적 회오리 속으로 치닫게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절로 되는 일화였다.   책은 내게, 우리 조국의 근대사가 단숨에 정리되는 기쁨을 주었지만, 남다른 남과 북에 대한 사랑으로 통일에 대한 갈망이 더없이 크셨을 한 사람이 이제 노쇠하여, 우리 세대 최대 과제인 통일의 문제에서 멀찍이 물러나 계심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건국 이래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극심한 인구감소를 겪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오롯이 통일을 통해서만 성장 동력을 받을 텐데 말이다.     지난 1월, 큼직큼직한 창문으로 무심한 겨울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지 교수 댁을 방문할 기회가 되어, 평생 소상하게 그려온 그림 수십 점도 만나보게 되었다. 노구를 이끌고, 아직도 아현동 언덕길을 떠올리며 사랑을 이야기하시는 그 모습에서 나의 100세가 그려졌다. 그 나이까지 생존한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인류를 위해 내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할 텐데….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회고록 사랑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사랑 덕분 롱아일랜드 대학교수

2023-03-27

[살며 생각하며] 계묘년의 참담했던 기억

2023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검은 토끼의 해다. 특별히 올해 계묘년이 흑색의 속성을 지닌 천간 ‘계’와 토끼 ‘묘’가 붙여지면서 ‘검은 토끼’의 해가 된다고 한다.   지난해 말,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괴이불개(過而不改)다. 전국 대학교수 935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50%가 선택했다는데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들이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음은 14% 교수가 선택한 욕개미창(欲蓋彌彰)으로 ‘무엇이든지 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라는 의미다. 둘 다 현재의 정치권을 향한 질타성 표현으로 특히 지난해 연말 이태원에서 158명의 젊은 생명이 후진국성 참변인 ‘길거리 압사’로 목숨을 잃었지만 누구 하나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인물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 아닌가 싶다.   2023년 계묘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성경 말씀에 따라 ‘괴이불개’ 하지 말고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 새것을 안다’는 의미의 온고지신(溫故知新) 하는 정치권을 소원해 본다.     성경 창세기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노아에게 찾아와 엄청나게 큰 배를 짓게 하신 뒤 40일 주야로 비를 쏟아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리셨다는 이야기다. 그와는 비견할 수 없을지라도 필자에게 1963년 계묘년 장마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대하소설 ‘신불산’에 의하면 당시 장마가 두 달여 동안 단 하루, 아니 한나절도 빵긋해본 적이 없었다고 적혀 있음을 볼 때 나의 기억은 당시를 살았던 모든 사람의 아픔이 아닌가 싶다.   당시 라디오 소리는 읍내에 나가야 들을 수 있었다. 가끔 도시로 나간 동네 한량들이 고향을 찾을 때 성공의 표식으로 라디오를 들고 왔는데 이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뭐꼬? 저 작은 통속에 사람이 들어 있단 말이가?” 하셔 좌중을 박장대소케 했을 정도니 일기예보라는 말이 존재나 했겠는가?   장마는 원래 비가 쉬엄쉬엄 온다는 의미다. 그러나 1963년 계묘년의 장마는 달랐다. 계속된 비로 겨우내 땀 흘려 심고 여름내 가꾼 황금알 생명체 보리가 입도한 채파란 싹을 틔우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장맛비가 의미를 상실한 채 눈앞에서 가족의 호구수단을 앗아가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탈진한 채 빗속을 뚫고 들판으로 뛰쳐나가보리 이삭들을미친 듯이 베어 나르기 시작했고 식구들은 손으로 이삭을 훑어, 아랫목에 말리거나 가마솥에 찐 뒤 맷돌로 갈아 보리죽을 쑤었다. 이때 우리 아이들도 힘을 보탰는데 아무래도 힘이 약하다 보니 손대신 입을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 아니었다. 물에 퉁퉁 부어 반쯤 썩어 먹물이 자르러 한보리 이삭을 이빨로 잘랐으니 금새맹구잇빨에 얼굴은 각 모양의 검은 토끼 모습으로 변신하지 않았겠는가? 이 모습을 본 어른들은 “저런!” 하시며 작은 미소로 애잔함을 달래기도 하셨던 것 같다.   그때 우리 가족의 생명을 지켜준 보리죽! 잊을 수 없다. 더 안타까움은 어머니다. 한 번도잡수시는 모습을 삼간 채 늘 “나는 괜찮다. 나는 배 안 고프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으라”였다. 그때는 정말 괜찮으신 줄 알았다. 어머니는 굶으셔도 정말 배 안 고프신 줄 알았다. 그래놓고 돌아서셔서 찬물로 허기를 달래신 모습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너무 송구하고 그립고 가슴 아프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참담 기억 황금알 생명체 한보리 이삭 전국 대학교수

2023-01-06

대학 랭킹, 유용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ASK미국 교육/대학입시-지나김 대표]

▶문= 요즘 대학 랭킹을 절대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여러 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발표하는 대학 랭킹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좋은가?       ▶답= 많은 고교생들은 대학에 지원할 때 학교의 '명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갖춘 대학에 지원하지 않고 무조건 명성이 높은 학교만 골라서 원서를 제출하는 실수를 범한다. 학생 및 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참고하는 대학 랭킹은 'US 뉴스&월드리포트' 랭킹이다. 1983년 시작된 이 랭킹은 지금도 어느 대학에 지원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고교 시니어들에게 소중한 참고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US 뉴스 랭킹은 결과(35%) 교수 자원(20%) 전문가 의견(20%) 재정 자원(10%) 학생 우수성(10%) 동문 기부금(5%) 등 6가지 카테고리를 분석해 대학 랭킹을 매긴다. 이를 보면 랭킹의 20%만이 대학교수 학자 고등학교 카운슬러 등 아카데믹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대학 랭킹을 발표하는 모든 기관들이 동일한 카테고리를 토대로 자료를 내놓는 것은 아니다. 한인 학생 및 학부모들에게도 잘 알려진 니치 및 프린스턴 리뷰 대학 랭킹의 경우 재학생들의 의견을 더 중요시한다. 이들 기관은 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대학 보수적 성향을 가진 학생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대학 랭킹도 따로 발표하지만 이런 종류의 랭킹은 '마이너'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관별로 대학들의 랭킹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학생 및 학부모들은 정신이 없다. 하지만 대학 랭킹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게 보면서도 랭킹 하나만을 토대로 특정 대학의 우수성이나 가치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랭킹에만 집중하면 대학을 다니는데 드는 비용 클래스 사이즈 아카데믹 프로그램의 질 학생들이 행복을 느끼는지 등 다른 중요한 요소들을 간과할 수 있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될 학교 '핏'이 맞는 학교에 지원하라고 조언한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캠퍼스 라이프 학교가 제공하는 프로그램 졸업생들의 취업률 학사학위 취득 후 학생이 생활하기 원하는 지역 내 고용주들의 해당 대학에 대한 평가 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의: (855)466-2783 지나김 대표미국 대학입시 대학 랭킹들 대학교수 학자 대학 보수적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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