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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과 만났다] 남과 북을 사랑한 지창보 선생 회고록 ‘고독과 자유’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시대의 역사적 주변 사건과 연관되어 계속되는 역사의 거울이다.”  
 
“한 인간은 모든 인간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자연, 우주는 서로 엉키어 있다. 나는 그러한 각도에서 나의 존재와 삶을 인식하고 싶다.”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기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 가감 없이 보여주는 회고록, ‘고독과 자유’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뉴욕의 박중련 회계사가 100세 어른, 지창보 교수의 삶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드리고자 엮어 지난해 9월, 세상에 나온 책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3년, 평양 근처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에 징집되었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국대안 반대, 보도연맹 등에 참여한 것 때문에 좌익으로 몰려, 우익 서북청년단과의 위험한 운명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상과 정치이념의 대립으로 폭력, 살인, 공갈, 협박이 난무하던 조국을 할 수 없이 등진 채, 1953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와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혈혈단신 미국에 와서, 두 미국인 교수의 아낌없는 배려와 사랑 덕분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몇 학교를 거친 끝에 롱아일랜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시대정신도 함께 하는 일생을 보냈다. 반전운동과 인권해방운동이 고조됐던 1960년대 중반, 그 중심지였던 뉴욕 동부에서, 월남전 반대 운동, 1973년 재미민주한인협회창설 멤버로 활동,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고문 역임 등, 누구보다 앞장서서 통일 운동견인차 구실을 했다. 1971년, 북미 교포 최초로 알제리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으나, 원했던 부모·형제는 못 만나고, 그로 인해 군사정부의 혹독한 감시를 받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 무려 40년 만에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남녘땅 조국을 밟게 되었다.
 
이 모든 일상이 드라마틱했을 뿐 아니라, 이응로, 김보현, 김환기, 김창렬, 윤이상, 황석영 등 동시대의 문화인사들과 만나며 접했던 그림, 책, 영화 등 문화적 도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면모를 잘 알게 해주는 일화는 단연 이것이었다.
 
일제 말, 탄압과 압력에 항거치 못하고, 학병지원 독려로 친일행위를 하던 육당 최남선에게 “총독부에 매수당해 왔으면 솔직하게 나가 죽으라고 하지, 왜 빙빙 돌려서 말을 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겠소!”라고 대중들 앞에서 돌직구를 날린 일화였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 하는 그 성품이 한 사람을 시대적 회오리 속으로 치닫게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절로 되는 일화였다.
 
책은 내게, 우리 조국의 근대사가 단숨에 정리되는 기쁨을 주었지만, 남다른 남과 북에 대한 사랑으로 통일에 대한 갈망이 더없이 크셨을 한 사람이 이제 노쇠하여, 우리 세대 최대 과제인 통일의 문제에서 멀찍이 물러나 계심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건국 이래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극심한 인구감소를 겪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오롯이 통일을 통해서만 성장 동력을 받을 텐데 말이다.  
 
지난 1월, 큼직큼직한 창문으로 무심한 겨울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지 교수 댁을 방문할 기회가 되어, 평생 소상하게 그려온 그림 수십 점도 만나보게 되었다. 노구를 이끌고, 아직도 아현동 언덕길을 떠올리며 사랑을 이야기하시는 그 모습에서 나의 100세가 그려졌다. 그 나이까지 생존한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인류를 위해 내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할 텐데….

박영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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