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자본주의의 끝없는 진화, 경제의 목표는 휴머니즘 고양
옛날 일이다. 강연을 끝내고 학생들의 질문 시간이 되었다. 한 학생이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빈부의 격차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의 더 소중한 과제를 소홀히 하면 큰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 경제가 인간생활의 전부도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쉬운 예가 생각난다. 나는 교수이고 가난하다. 내가 바람이 불고 먼지가 휘날리는 거리를 걷고 있는데, 내 동창이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다가 옆에 와 서면서 ‘내 차를 타라’고 권했다. 옆자리에 앉았던 내가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내가 너보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는데 너는 자가용을 타고 나는 걸으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러면 내 자가용차와 너의 학문, 사상과 바꾸자. 나는 네가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내가 ‘야! 그런 철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네 재산을 다 준대도 내 학문과는 바꿀 수 없지.’” 누구의 판단이 옳았는가. 부유한 사업가와 가난한 교수 그렇다면 가장 소망스러운 사회는 어떤 편인가. 경제적으로 소외되지 않고 기본소득이 보장될 수 있으면, 그 후에는 모든 사람 각자가 원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찾아 행복한 생활을 즐기면 된다. 인생은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구현에서 조화롭고 보람 있는 삶을 완성하면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생각 못 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시스티나 교회 벽화를 보려고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얻는 수입이 해마다 5억 달러는 된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어떤 기업가도 그런 경제적 혜택을 남겨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의 기초는 의식주의 해결로 그칠 수 있으나 그 후에는 학문 예술 등 정신적 가치와 문화적 혜택이 목적이 된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있을 때 운동권 출신들이 문재인 정부에서 예전에 내게 질문한 학생의 경제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과제를 붙들고 권력으로 국민경제를 이끌려고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기초적인 인문학적 소양만 갖추고 있었어도 해결하였을 문제들이다. 그때와 비슷한 1961년 겨울이었다. 뉴욕에 갔다가 경제학을 전공하는 후배를 만났다. 내가 물었다. “처음 미국에 와서 한 학기를 보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여기 아메리카라는 큰 수박이 있는데 정치에서는 의회민주주의가 최선의 길임을 인정하겠는데, 경제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정책이 좋을 것 같다. 최근에는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자본주의는 곧 끝날 것이고 공산주의가 사회경제의 최상의 길이라고 주장할 정도가 되었는데”라고 했다. 그 교수의 대답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소련의 흐루쇼프 수상이 미국을 다녀갔다. 유엔에서 연설을 끝내고 뉴욕거리를 지나다가 록펠러센터 앞에서, ‘한두 개인이 이렇게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밑에서 희생당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의 기자가 반박했다. ‘흐루쇼프 수상은 록펠러센터 같은 시설이 개인의 소유라고 착각하는데 미국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법적인 대표는 개인이지만 소유주는 그 회사나 기관의 주주(株主)들이다. 예를 들면 체이스맨해튼은행도 록펠러가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록펠러는 주식 5%까지만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나머지 95%는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갖는다. 그 5% 수입에서도 세금이 있고, 록펠러가 갖는 것은 경영과 운영권이고 그 이윤으로 어떻게 사회에 도움을 주는가 하는 기여권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 학자는 학문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듯이 기업인은 기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메리카의 경제관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여 년 동안에 그 변천 과정이 불가피했다. 소유가 목적이라고 생각한 첫 단계가 자본주의였으나 그 단계는 끝난 지 오래다. 사회가 자본을 공유하는 단계로 바뀌었고, 지금은 기업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기여체제로 승화했다. 그런 경제체제의 변화 덕분에 미국 사람들은 흐루쇼프 수상의 공산주의 경제제도를 100년 이상 뒤떨어진 경제관으로 본다. 러시아 흐루쇼프 수상의 착각 무엇이 그 뒷받침을 했는가. 경제의 민주화 방법을 법제화시킨 것이다. 그 법치를 뒷받침한 정신은 기독교를 모체로 한 박애정신, 즉 휴머니즘이다. 인간애 정신이다. 그렇게 200년을 지난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열린 사회를 위한 다원주의,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아메리카 정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더 많은 생활가치를 창출해 사회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정신문화와 인간적 가치를 육성하는 데 이바지함이 오늘의 경제관이다. 자본주의가 끝난 것이 아니고, 그 인도주의적 정책이 세계적 경제정책으로 확장된 것이 지금의 시장경제의 원동력이면서 희망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도 1세기 동안은 그 역사적 지표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주장과 행태를 보면 역사적 후퇴일 뿐 아니라 지난 5년간의 경제파국을 연장하려 한다.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서민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법인세 감면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정책을 강요한다. 그 결과는 중국과 같아졌다가 북한경제로 퇴락할 가능성까지 예상케 한다. 경제는 역사적 고찰과 사유가 없으면 단편적 이념에 빠지게 된다. 세계사적 안목과 인류의 공동가치를 찾아야 한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휴머니즘 자본주의 세계적 경제정책 공산주의 경제제도 경제적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