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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4월, 꽃 이야기

4월이다. 10년 전 이맘때, 아내와 둘이서 도보 국토 종단을 했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2000리 길을 4월 한 달 동안 걸었다.   한국의 4월은 꽃철이었다. 노랫말처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만발하고 개나리 배꽃 산수유가 차례로 피어나며 튀밥 튀듯 여기저기서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산천이 온통 꽃 천지였다.     꽃은 날씨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천천히 피어 올라갔다. 우리가 꽃을 몰고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꽃과 함께, 꽃에 묻혀 걸었다. 새싹이나 꽃이 그냥 피어나는 것 같지만 제각각 순서가 있다. 이곳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은 팝콘이다. 톡톡 피어나는 팝콘 소리로 한동안 골목이 수런거리고 나면 단풍나무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비 온 뒤, 우리 집 뒤뜰 무화과나무와 푸르메리아가 잎을 달기 시작했다. 뒷마당 귀퉁이에 서 있는 석류나무가 참새 혓바닥 같은 싹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바람에 나부낄 만큼 자랐다. 햇빛을 받아 팔랑거리는 석류이파리를 보면 호수 위에 일렁이는 윤슬 같다. 감나무 이파리는 싹을 내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감 이파리에 참새가 앉아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면 못자리를 시작한다고 했다. 자연과 함께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순서를 지키며 피어나는 게 나무나 꽃뿐이겠는가. 일찍 피면 빨리 시들고 늦게 오는 꽃은 오래 머물기 마련이다. 세상의 이치다. 꽃철이 따로 있겠는가 꽃 피면 꽃철이지. 오뉴월 캘리포니아 거리에 휘날리는 자카란다 꽃 이파리며 찬 서리 받으며 방실방실 피어나는 들국화는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     생각해보면 사람도 꽃이다. 새싹으로 돋아나 세월 따라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워낸다. 어떤 싹은 백 년 거목으로 자라 수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고, 어떤 놈은 비바람에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고 둥치 째 넘어지거나 뿌리가 뽑히기도  한다.       봄이면 봄꽃이 피고 가을엔 가을꽃이 벙그러지듯 사람 꽃도 피어나는 계절이 제각기 다르다.   제철 꽃조차 장소와 기후에 따라 다르게 핀다. 어떤 어머니는 제 자식이 어떤 꽃인지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피어날 때를 알 턱이 없다. 옆집 꽃이 망울을 맺으면 내 새끼는 그보다 먼저 활짝 피기를 원한다. 가을꽃더러 봄에 피라고 닦달하니 아이가 견뎌낼 수가 없다. 가만두면 제대로 피어날 보리 모가지를 쑥 뽑아 놓았으니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제각기 모습으로 제각각 아름다움을 뽑낸다. 저렇듯 주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피고 또 진다. 자연의 섭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인 천색, 만인 만색이다. 서로의 색깔과 모습을 존중하며 어울려 살아가야하는 한 송이 꽃이다.         4월, 태평양 건너 꽃바람이 불어온다. 섬진강 매화 얘기도 영암 벚꽃 백리길 소식도 건너온다. 내 땅을 내 발로 걸어 올라가던 때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이야기 감나무 이파리 뒤뜰 무화과나무 참새 혓바닥

2023-04-17

[이 아침에] 4월, 꽃 이야기

4월이다. 10년 전 이맘때, 아내와 둘이서 도보 국토 종단을 했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2000리 길을 4월 한 달 동안 걸었다.   한국의 4월은 꽃철이었다. 노랫말처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만발하고 개나리 배꽃 산수유가 차례로 피어나며 튀밥 튀듯 여기저기서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산천이 온통 꽃 천지였다.     꽃은 날씨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천천히 피어 올라갔다. 우리가 꽃을 몰고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꽃과 함께, 꽃에 묻혀 걸었다.      새싹이나 꽃이 그냥 피어나는 것 같지만 제각각 순서가 있다. 이곳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은 팝콘이다. 톡톡 피어나는 팝콘 소리로 한동안 골목이 수런거리고 나면 단풍나무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비 온 뒤, 우리 집 뒤뜰 무화과나무와 푸르메리아가 잎을 달기 시작했다. 뒷마당 귀퉁이에 서 있는 석류나무가 참새 혓바닥 같은 싹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바람에 나부낄 만큼 자랐다. 햇빛을 받아 팔랑거리는 석류이파리를 보면 호수 위에 일렁이는 윤슬 같다. 감나무 이파리는 싹을 내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감 이파리에 참새가 앉아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면 못자리를 시작한다고 했다. 자연과 함께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순서를 지키며 피어나는 게 나무나 꽃뿐이겠는가. 일찍 피면 빨리 시들고 늦게 오는 꽃은 오래 머물기 마련이다. 세상의 이치다. 꽃철이 따로 있겠는가 꽃 피면 꽃철이지. 오뉴월 캘리포니아 거리에 휘날리는 자카란다 꽃 이파리며 찬 서리 받으며 방실방실 피어나는 들국화는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     생각해보면 사람도 꽃이다. 새싹으로 돋아나 세월 따라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워낸다. 어떤 싹은 백 년 거목으로 자라 수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고, 어떤 놈은 비바람에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고 둥치 째 넘어지거나 뿌리가 뽑히기도  한다.     봄이면 봄꽃이 피고 가을엔 가을꽃이 벙그러지듯 사람 꽃도 피어나는 계절이 제각기 다르다.   제철 꽃조차 장소와 기후에 따라 다르게 핀다. 어떤 어머니는 제 자식이 어떤 꽃인지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피어날 때를 알 턱이 없다. 옆집 꽃이 망울을 맺으면 내 새끼는 그보다 먼저 활짝 피기를 원한다. 가을꽃더러 봄에 피라고 닦달하니 아이가 견뎌낼 수가 없다. 가만두면 제대로 피어날 보리 모가지를 쑥 뽑아 놓았으니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제각기 모습으로 제각각 아름다움을 뽑낸다. 저렇듯 주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피고 또 진다. 자연의 섭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인 천색, 만인 만색이다. 서로의 색깔과 모습을 존중하며 어울려 살아가야하는 한 송이 꽃이다.       4월, 태평양 건너 꽃바람이 불어온다. 섬진강 매화 얘기도 영암 벚꽃 백리길 소식도 건너온다. 내 땅을 내 발로 걸어 올라가던 때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이야기 감나무 이파리 뒤뜰 무화과나무 참새 혓바닥

2023-04-13

[이 아침에] 지극함이여, 불변함이여

뒤뜰 감나무 가지에 연초록 새순이 돋아나고 있어 머지않아 가지마다 녹색 잎들로 무성해지리라. 쑥들도 흙 속에서 제법 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무화과나무도 기지개를 켜고 이제 새 눈을 틔울 모양이다.     우리 집의 동물 가족으로는 닥스훈트 계통의 개 한 마리가 있다. 어릴 때 집을 나서면 그저 달리기만 하던 패기도 사라지고 이제 행동도 느긋하다. 가족 누가 안 들어오면 소파에 앉아서 문 쪽만 바라보는가 하면, 우체부가 가까이 오면 문 가까이 기를 쓰고 달려가 야성적으로 짓는 자세는 한결같다. 우리와 더불어 산 지 십이 년을 보내면서 이제는 ‘애별이고’라는 말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별의 괴로움은 어찌 사람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우리와 얼마나 함께 지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하루가 소중하게만 여겨진다.     작년 가을까지 우리 집 감나무 근처에는 토끼가 살고 있었는데 아침에 나가면 깡충깡충 달려왔다. 낮게 두른 철망에 매달려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쓰다듬어 주면 한동안 다소곳이 있었다.  그런데 사료만 먹이다가 토끼가 감나무 잎을 잘 먹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뭇가지에 무성하게 달린 잎들을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감나무 잎을 먹은 기간은 불과 한 해 반 정도 된다. 그런데 작년 가을 아침에 나가보니 토끼는 한쪽 눈이 약간 찌그러진 채 오래 바라보고 있어서 기운이 좀 없어보여도 눈병이 내일이면 좀 나아지겠거니 무심했었다.     그러나 토끼는 이별을 예고하고 있었을까? 토끼는 막지막 인사를 보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토끼는 옆으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토끼는 개나 고양이처럼 화장이 법으로 허락되지 않아서 그냥 감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토끼가 우리 집에 온 사연은  8년 전 남편이 공원에서 흰 토끼를 발견하고 전화를 하면서 오늘 밤 이대로 두면 코요테한테 잡혀먹힐 것이라기에 데려와 키우기로 했다. 토끼가  뒤뜰에서 있는 둥 없는 둥 하얀 몸체로 뛰어다니고 있는 동안 좀 더 자주 들여다보고 감나무 잎사귀도 일찍부터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애완동물들은 주인들을 웃게도 하지만 끝내는 울게도 한다. 몸집이 작은 짐승들은 주인 무릎에 주둥이를 얹고 가만히 있는가 하면  꼬리를 격하게 흔들 때도 있고 천천히 흔들 때도 있어서 호의를 강렬하게 또는 가볍게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로 인한 언어의 부작용으로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짐승들은 침묵으로 응하고 오로지 몸짓이나 눈빛으로 지극하고도 지순한 감정을 전할 뿐이다. 이러한 애완동물들과의 소통으로 사람들은 삶의 피곤을 잊기도 하고 평온을 되찾기도 한다.     그리고 작은 새들도 가끔 찾아오는 소박한 뒤뜰에는 봄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다. 작은 풀들과 나무들은 제 고유의 모습과 빛깔들로 나날이 새롭고 산뜻하게 단장하고 있다. 유동의 속성을 가진 불안정한 인간만사에서 봄은 자연의 순리로 한결같음의 이치를 보여주고, 눈 앞에 펼쳐지는 불변의 진리를 통해 안정감과 신뢰를 느끼며 가슴 저변은 연녹색으로 물드는 것 같다. 권정순 / 전직 교사이 아침에 뒤뜰 감나무 감나무 잎사귀도 감나무 근처

2023-03-21

[이 아침에] 지극함이여, 불변함이여

뒤뜰 감나무 가지에 연초록 새순이 돋아나고 있어 머지않아 가지마다 녹색 잎들로 무성해지리라. 쑥들도 흙 속에서 제법 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무화과나무도 기지개를 켜고 이제 새 눈을 틔울 모양이다.     우리 집의 동물 가족으로는 닥스훈트 계통의 개 한 마리가 있다. 어릴 때 집을 나서면 그저 달리기만 하던 패기도 사라지고 이제 행동도 느긋하다. 가족 누가 안 들어오면 소파에 앉아서 문 쪽만 바라보는가 하면, 우체부가 가까이 오면 문 가까이 기를 쓰고 달려가 야성적으로 짓는 자세는 한결같다. 우리와 더불어 산 지 십이 년을 보내면서 이제는 ‘애별이고’라는 말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별의 괴로움은 어찌 사람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우리와 얼마나 함께 지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하루가 소중하게만 여겨진다.     작년 가을까지 우리 집 감나무 근처에는 토끼가 살고 있었는데 아침에 나가면 깡충깡충 달려왔다. 낮게 두른 철망에 매달려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쓰다듬어 주면 한동안 다소곳이 있었다.  그런데 사료만 먹이다가 토끼가 감나무 잎을 잘 먹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뭇가지에 무성하게 달린 잎들을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감나무 잎을 먹은 기간은 불과 한 해 반 정도 된다. 그런데 작년 가을 아침에 나가보니 토끼는 한쪽 눈이 약간 찌그러진 채 오래 바라보고 있어서 기운이 좀 없어보여도 눈병이 내일이면 좀 나아지겠거니 무심했었다.     그러나 토끼는 이별을 예고하고 있었을까? 토끼는 막지막 인사를 보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토끼는 옆으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토끼는 개나 고양이처럼 화장이 법으로 허락되지 않아서 그냥 감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토끼가 우리 집에 온 사연은  8년 전 남편이 공원에서 흰 토끼를 발견하고 전화를 하면서 오늘 밤 이대로 두면 코요테한테 잡혀먹힐 것이라기에 데려와 키우기로 했다. 토끼가  뒤뜰에서 있는 둥 없는 둥 하얀 몸체로 뛰어다니고 있는 동안 좀 더 자주 들여다보고 감나무 잎사귀도 일찍부터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애완동물들은 주인들을 웃게도 하지만 끝내는 울게도 한다. 몸집이 작은 짐승들은 주인 무릎에 주둥이를 얹고 가만히 있는가 하면  꼬리를 격하게 흔들 때도 있고 천천히 흔들 때도 있어서 호의를 강렬하게 또는 가볍게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로 인한 언어의 부작용으로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짐승들은 침묵으로 응하고 오로지 몸짓이나 눈빛으로 지극하고도 지순한 감정을 전할 뿐이다. 이러한 애완동물들과의 소통으로 사람들은 삶의 피곤을 잊기도 하고 평온을 되찾기도 한다.     그리고 작은 새들도 가끔 찾아오는 소박한 뒤뜰에는 봄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다. 작은 풀들과 나무들은 제 고유의 모습과 빛깔들로 나날이 새롭고 산뜻하게 단장하고 있다. 유동의 속성을 가진 불안정한 인간만사에서 봄은 자연의 순리로 한결같음의 이치를 보여주고, 눈 앞에 펼쳐지는 불변의 진리를 통해 안정감과 신뢰를 느끼며 가슴 저변은 연녹색으로 물드는 것 같다.   권정순 / 전직 교사이 아침에 뒤뜰 감나무 감나무 잎사귀도 감나무 근처

2023-03-19

[열린 광장] 나이 든 사람들의 가을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며칠 전 날씨 예보를 보니 기온이 떨어진다고 해서 히터의 온도를 69도에 맞추어 놓고 잤다. 새벽에 두어 차례 히터가 돌았다. 어제는 아내가 침대의 이불을 바꾸고 그동안 쓰던 여름용 이부자리를 세탁했다.   얼마 전까지 하늘을 향해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있던 감나무 잎사귀도 모두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있다. 누렇게 가을색으로 물들어 간다. 성질 급한 놈들은 벌써 바닥을 뒹굴고 있다.   아침에 카이저 보험에서 부스터 샷을 예약하라는 이메일이 왔다. 내게만 오고 아내에게는 오지 않았다. 신문을 펼치니, 65세 이상의 고령자부터 먼저 접종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가 고령자라고?   나보다 몇 살 아래인 한국의 지인은 얼마 전에 ‘아버님’ 소리를 들었다며 의기소침해한다. 나는 당신 나이에 ‘어르신’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돌산을 깎아 절경을 만들고, 돌멩이를 갈아 모래를 만드는 것이 세월 아닌가. 세월에 맞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다. 외모는 자꾸 변하고 나를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과 기대치는 달라지는데 내 마음은 20년, 3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으니 이를 어쩐다. 7080 노래를 들으면 아직도 내가 20대라는 착각에 빠지고, 달달한 연애소설을 읽으면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첫사랑의 기억을 꺼내 본다.   아이들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면, 철이 없다고 한다. 철없이 하는 언행을 사람들은 너그러이 이해하고 쉽게 용서해 준다. 나이 든 사람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책이라고 흉을 본다. 억울한 일 아닌가.   나이가 들어 좋은 일도 있다. 뒤에서 흉은 볼지언정, 나를 나무라고 꾸짖는 어른은 없다.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대개는 참고 들어준다.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이 닥쳐도 한 두 번은 겪어 본 일들인지라 편하게 넘어간다.   세상사 지내고 보면 다 그렇고 그렇다.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그럭저럭 수습이 되고, 죽어야 없어질 것 같던 일도 계절이 지나면 잊힌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가져오고, 없어지면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있다. 말이 많아졌다. 팬데믹 덕에 집에만 있으니 이런저런 것들이 눈에 띈다. 도와준다고 하는 말이 아내에게는 잔소리로 들리는 모양이다. 조카 녀석들에게도 한마디하면 될 것을 장황하게 앞뒤 설명을 붙이다 보니 말이 길어진다. 이런 현상은 진화 유전자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생물은 종족보존 본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이 경험한 지식을 후대에 물려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욕심이다. 살아보니 인생은 말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할 수밖에 없다.   나이 든 내가 해야 할 말은 잔소리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아닌가 싶다. 다저스 팬이라면 ‘푸홀스’라는 베테랑 선수의 행동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홈런이나 안타를 치고 들어오는 동료를 안아준다. 실수를 하거나 상대팀 타자들에게 두들겨 맞고 강판되어 들어온 선수 곁에 가서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곤 한다.   고령자란 인생의 베테랑 아닌가. 곧 11월이고, 가족 모임이 늘어나는 계절이다. 나도 베테랑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 광장 나이 가을 당신 나이 베테랑 선수 감나무 잎사귀도

2021-10-28

[수필] 사슴 가족과 레몬 나무

얼마 전에 딸 집에 가서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데 옆 집에 사는 신디가 주먹보다도 더 큰 레몬 네 개를 따다 주었다. 종종 그렇게 친절을 베푼다. 싱싱하고 먹음직스럽다. 두 개는 딸 집에 두고 두 개는 우리가 가져와서 레몬 물을 만들어 먹었다. 딸 집 주위 모든 집에 오렌지와 레몬나무가 있다. 일년 열 두달 항상 싱싱한 열매를 볼 수 있어 온 동네가 싱그럽다. 집이 크고 작고는 별 관심이 안 가는데 오렌지와 레몬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을 보면 마냥 부럽다. 그런데 딸 집만 그런 나무가 없다. 이사 온 지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애들 키우며 살기에 바빠 나무를 심고 꽃을 심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팬데믹으로 온 식구가 집에 있게 되니 사위가 정원을 만들어 레몬나무, 귤나무들을 심었다. 그리고 예쁜 꽃들도 심었다. 꽃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고 나무들도 잎이 커지며 또 새 순도 여기저기서 나와 가지가 잎들로 우거져 튼실했다. 날마다 연둣빛 여린 잎이 나와 쑥쑥 크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 식구들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주먹만한 열매를 맺을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 보니 나무들의 잎은 다 없어지고 가녀린 줄기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슴 가족이 산에서 내려와 몽땅 따 먹었다고 했다. 심지어 장미꽃, 국화꽃, 제라늄꽃까지 다 먹어 치웠다. 딸 집이 산 중턱이라 가끔 사슴 가족이 동네를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정원까지 들어와 망쳐 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었더니 예전 만은 못해도 다시 잎이 나고 튼튼해졌다. 꽃들도 다시 피었다. 동물들이 싫어하는 냄새나는 약도 뿌려 놓았다.     아! 그런데 이번에도 몽땅 잎을 따먹고 꽃잎도 따먹었다. 잎이 없으니 나무들은 탄소동화작용을 못해 시들해 갔다. 우리 식구는 어린 나무들과 꽃들의 상태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었다. 여름 들어 날씨가 뜨거워 물을 주어도 금방 마르고 사슴 가족의 습격을 몇 번 당한 뒤론 그 예쁘던 정원도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우리 식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포기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왠지 정원을 내가 다시 살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 가서 사슴에 대해 알아 보았다. 사슴은 초식 동물이며 숲에 살며 겁이 많은 동물이란다. 다리가 길며 체형이 가느다랗고 여리여리하며 눈망울이 매우 맑아 연약하다는 느낌이 강한데 실제로는 기린과 같은 맹숫과이므로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한다. 무기를 안 든 성인 정도는 거뜬히 이긴다고 한다. 비디오를 보니 사슴은 싸울 때 뒷발로 서서 앞다리를 두 손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래서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며 정원에 들어 와 잎이며 꽃들을 따 먹어도 가만히 두어야 한다고 한다.     아는 분이 사는 집도 산자락인데 휴가간 사이에 사슴 가족이 정원에서 기거를 했다고 한다. 그 모습에 놀라 당국에 신고를 했더니 사람이 동물이 사는 구역을 침입해서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도움을 거절했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슴은 정원을 꾸미는 사람들에겐 골치라고 한다. 3미터 정도 담도 훌쩍 뛰어 넘는다고 한다. 사슴은 또 혼자 다니지 않는다. 어미가 새끼들을 달고 다닌다. 산 동네 차가 다니는 도로도 유유히 오르내린다. 운전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 동물 구역에서 사는 한 오렌지와 레몬나무도 아예 큰 나무를 심든지 장소를 바꾸어 심어야 할 것 같다.     어릴 때 우리 집 뒤로 감나무 밭이 아주 넓었다. 동생들과 같이 감나무, 밤나무들을 세고 놀았다. 우리 형제들은 자라면서 감, 밤을 물리도록 먹었다. 부모님 생전에는 결혼 후에도 손주들을 생각해서 부쳐주시곤 하셨다. 가을이면 그 많은 감나무에 동그란 감들이 온통 울긋불긋 서로 얼굴을 비벼대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방과 후에 책 보자기를 마루에 던져 놓고 긴 간짓대를 메고 가서 홍시를 따서 손으로 살살 문질러 닦아 먹으면 그 달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슨 복으로 지금 우리 집에도 이사 올 때부터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어 그때 생각들이 더 역력해진다. 사실 나도 몇년 전에 딸 집에 귤나무, 레몬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그때도 잘 자라다가 어느날 잎이 다 없어졌다. 사슴이 먹었다고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과일 나무 키우기가 힘드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 많은 감나무와 감나무 밭을 빙 둘러 울타리로 밤나무를 심어 우리에게 먹거리를 주셨다. 새삼 돌아가신 아버지께 감사하고 감을 따고 밤을 터는 날이 되면 우리 형제들이 싫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해서 아버지 맘을 상하게 해드렸던 일들도 후회가 된다. 내 힘으로 과일 나무 한 그루를 키워 열매까지 따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과일 나무 얘기를 하다보니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사과나무가 생각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 나무를 심겠다.” 이 말과 상관없이 나무를 심어 키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민 와서 지낸 10년이 아쉽다.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 과일 나무 한 그루라도 딸 집 정원에 심었다면 지금 얼마나 뿌듯할까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사슴이 여린 잎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으니 내년 봄에는 사슴이 올 수 없는 뒷마당에 튼튼한 레몬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사슴 가족 레몬나무 귤나무들 귤나무 레몬나무 감나무 밤나무들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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